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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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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05

작성
23.03.0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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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DUMMY

길은 돌과 바위로 울퉁했다. 숲은 몇 리만 걸어도 지나온 길들을 싹 덮어서 돌아보면 온통 낙엽에 새순, 들꽃인데 근방은 관목으로 어지럽다. 봄은 사방 꽃 없는 데가 없었다. 그들은 칼이나 낫으로 가지를 쳤다. 나막신 위에 장화를 덧신고 갔다. 작년에 떨어져 가루로 삭은 낙엽에 검은 퇴적토가 달라붙었다. 발이 축축해졌다.


짐꾼 사내에 지수아치(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여인과 예비 무당 쯤 되는 시동 꼬마 아이까지 묵직한 봇짐을 들었다. 족장 막사와 에카는 앞서 걸었다. 막사의 짐도 만만치 않았다.


"족장님 제가 들까요."

"됐다."


그녀의 짐이 비교적 가벼웠던 것이다. 뒤에서 사람들이 야속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남의 짐까지 들고 싶었다.


"그거 저 주세요."

"됐다고."

'나중에 딴말 하지 않기를!'



중간에 들른 계곡에서 옷을 벗고 몸에 물을 끼얹어 닦았다. 높은 산 중턱에 하얀 골짜기 얼음이 녹은 게 대륙의 강과 계곡 호수를 지나 예까지 달리며 봄볕으로 그나마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러니 요 물은 봄이었다. 부정한 건 모두 봄 물에 씻겨 날아가리라.

무당은 저 자를 뵈러 갈 때 한 번을 씻고, 뵌 다음 한 번을 더 씻었다. 그들의 신은 따로 있는 것이다. 날은 따뜻한데 물은 칼 같았다. 신어미가 홀로 몸을 씻을 때 에카는 언덕 아래 앉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에리우스가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녀의 몸은 여전히 멍했다. 머리가 꺼먹해서 생각을 해도 집중이 안 된다. 막사에게 물어도 별 신통한 대답은 없었다.


다시 걷는 에카는 자꾸만 뒤쳐졌다.


"잠깐만요."


등에 땀이 쏟아졌다. 햇빛이 뒤에서 재촉했다. 것들은 땅아래 움튼 싹에게 가야 했다. 나무 융융 사이로 와서 땀 나는 등을 밀었다. 들뜬 새소리가 거슬렸다.


멀러서 신어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짐꾼들이 그녀를 앞질렀다. 에카는 할딱이며 따라갔다. 신을 몸에 모신 채 한 달을 내리 걸으면 젊은 여인의 몸은 무던히 상했다. 클라르코에서 마월 령까지 먼 길이었다. 익숙해지고 싶어도 맘처럼 되는 일이 아니다.

서부의 봄땅은 기름져 피곤한 발을 푸근히 감았다. 말이라도 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잠깐만요...."


저 멀리서 또 기다리고 있었다. 에카는 지팡이를 꽉 쥐고 일어났다.

신어미는 저 나이에 초봄 숲속을 제 집마냥 다녔다. 말도 잘 탄다. 영주가 부르면 밤중에 가서 새벽에 돌아왔다. 그녀는 영주의 권양기를 타지 않고도 절벽 내려가는 법을 알았다. 튀어나온 가지를 손으로 치우다 얼굴에 맞아도 불평 하나 없었다.


매번 올 때마다 길이 다른 것 같은데도 신어미는 그걸 감으로 알았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할 때 박수무당 꼬마가 다가왔다.


"누나, 이제 곧 다 왔어요."

"나도 안다."


에카는 앓는 소리를 냈다.


"누나, 아까 아에리우스 어쩌고 말했죠?" 커서 박수무당이 될 아이는 기침을 조금 했다. "저 그 사람 알아요. 그 장군이요."

"그래?" 에카는 잠시 서서 숨을 돌렸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아이가 짐을 가져가려 해서 손을 강하게 뺐다. 고갯짓 하니 아이는 군말없이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곳은 엉컹이 숲이 사람을 삼키는 구멍이었다.


가시나무가 사람 키 높이로 우거진 이곳에 땅 아래 바르 촌락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내려가는 계단과 큰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뻗어나간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 뛰어다니는 개미굴이었다. 서늘하고 어두운 이곳저곳에 각자의 집과 방과 통로가 모두 있고, 지금쯤 골목마다 그림자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을 터였다.


입구에서부터 계단과 평지가 뜨문뜨문 이어졌다. 건너편 입구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곳곳에 돼지가 꿀꿀거리며 똥을 쌌다. 양 옆으로 집이며 작업장이 이어지고, 옛날에 버려진 통로나 달에 한 번은 멋 모르고 내려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축축한 지하로 가는 길이 조용히 숨 쉬며 바람을 데려왔다.


더운 날에는 다들 몸을 식히려고 저런 데 앉아 시간을 보내는데, 그럴 때 왁자지껄한 어른들을 거점으로 삼아 깊숙한 곳으로 탐험을 가는 게 어린 날의 묘미였다. 바르의 아이들은 어둠이 익숙해 깜깜한 굴속에서도 잘 뛰어다니며 뒤에선 떠드는 소리가 반사되어 울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날 하루는 부모님에게 호된 꾸중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물론,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도 종종 있고 말이다.


계속 내려가면 큰광장이 곧장 나오고 떼로 앉아 길쌈하는 여인 무리가 보였다. 그중 한 여인이 꼬리를 흔들며 질척거리는 돼지를 손으로 밀어냈다.


에카는 입구 옆의 작은 예배당부터 들어갔다.


사제가 건조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 이곳의 관리자는 한 명뿐이다. 쥘 뱅 사제는 이 토굴에서 태어나 로가슬에서 공부하고 대부분 여생을 거기서 살았다. 어느 날 주교의 눈 밖에 나 출장 겸 보직변경으로 돌아온 그에게 바르 촌락은 불편한 고향, 그가 있고 싶은 곳은 본인에게 할당된 이 작은 예배당뿐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별 접촉 없이 그냥 책 읽으며 살았다.


대부분의 성무는 아래 광장에서 다함께 치르니 보통은 올 일이 없으나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그녀는 무엇보다 예배당부터 찾았다. 쥘은 그녀가 편히 기도할 수 있도록 좁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숨바꼭질하던 동생이 우연히 이곳에 들어와 그녀를 보고 달려왔다. 쥘이 잠깐 문을 열었다가 달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들어갔다. 이곳은 놀러 오는 곳이 아니며 소란 피우면 안된다고 작게 꾸짖으니 누나한테 볼 일이 있다고 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에 계단을 함께 내려오며 물었는데 그닥 말이 없었다.


쉬이 짐작이 간다. 이 주 째 돌아오지 않는다던 큰형의 일이 분명했다. 순례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막 잠에 들려 할 때였다. 밖에서 동생이 찾아왔데서 보니 그 사람이 친구들과 낚시를 나간 후 일주일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도 에카는 그닥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 양반 한 이 주는 나갔다 집에 오면 디비 자는 날라리인데 사흘은 그냥 마실이지."


헌데 그 이주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니 아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망할 놈팽이가 초봄부터 싸돌아다녀서는 가족들 걱정 다 끼치고 다니냐.'



동생은 곧 다시 숨바꼭질 하러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오니 족장이 그녀를 불러 앉혔다. 적요한 굴에 짚을 깔고 평상에 촛불을 켰다. 늪주인이 무슨 말을 했냐 물어서 사실대로 다 답했더니 그게 전부냐고 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는 잔술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멀리 있는 제국을 알 리는 없고, 필시 누군가 말을 해준 거다."


에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경쓰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족장은 그녀의 속내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노파의 주름살로 뒤덮힌 좁은 눈가에 어딘가 먼 데로 가는 빛이 서렸다.



"그 사람이 말한 건 옛 레날이야. 그만큼 오래된 영물이니까. 인간이었던 시절이 그리운 게지. 수백년 굴 속에 살면서 언뜻 들었던 얘기를 지금 기억하고 꺼낸 거다. 그 아에리우스 란 건.... 이제야 기억이 나는데. 나 어릴 때 돌았던 옛날 전설 같은 거다. 그 사람이 레날의 장군이었는데 나라가 망하고도 투구 쓰고 사람 모아서 군대를 일으키고 싸웠다더라."

"누구하고요?"

"우리들."


그것만큼은 처음 듣은 얘기였으나,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제국이 락카리 연합에게 패해 사라졌다는 건 흔히 알려져 있으니.

천 년도 넘은 이야기, 찬란했던 고대 연합 시절의 이야기였다. 락카리인들은 레날의 용인들을 죽여 나라를 취했었다. 그 때 세상은 여럿으로 갈라지고 수많은 신상이 파괴되어 그 잔해 위로 락카리의 신들이 우뚝하니 황금 입힌 산제물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이런 굴 속에 박혀 먹이 받는 닭장에 닭마냥 사는 것이다. 레멕인들의 세상이다.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족장은 묵은 빨래 개키듯 말을 하면서도 눈은 술잔을 가만히 보았다.


"그런 게 다 한이고 원념인 게다. 사람이든 신이든 한이 맺히면 못 죽고 구천을 떠돈단다. 늪주인은 떠도는 자의 말을 들었던 거야. 너무 아쉽고 그리워서, 사랑해서 떠나지 못한 것들인데, 늪주인도 비슷하다. 그 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니 말도 잘 통하지. 그런 놈들이 아직 남아서 산 사람한테 허튼 말을 붙어넣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니 우리가 아직 필요한 것 아니겠니?"


에카는 고개를 끄덕여 답을 대신했다.


"그 굴 속에 필시 드나드는 원혼이 있구나. 터줏대감한테 말을 걸 정도면, 아주 오래되고 케케묵은 놈이야." 족장이 말했다. "조만간 다시 그곳에 가야겠다. 너는 당분간 순례에 가지 마라."


마지막 말은 귀에 좋게 들렸다. 에카는 자리를 파하려다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 잡귀들이 정말 있다는 말씀이세요?"

"많겠지."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요?"

"나도 본 적 없다. 분명 많을 거다. 늪주인마냥 구석구석 숨어 사는 터줏대감 잡귀들이 세상에 많이 남아있다. 그놈들을 성 아래 지하에 모셔놓고 이용하는 영주 놈들은, 언제든 있었으니까. 요즘이라고 없으란 법 있냐? 그러니 무당이 필요한 거다.

네가 네 갈 길을 잘 알고 간다면 주님의 가호가 함께하고, 악귀들은 네 육신에 손끝을 대지 못하리라. 너 만약 그런 자들을 본다면, 그 넋을 잘 풀어서 보내주는 것이야말로 네가 할 일이니 피하지 말고 부딪혀야 한다. 명심해라. 그게 네 역할이야. 사람이 죽으면 신도 죽지만 무당은 신과 함께 가야 한다."

"그렇게 가는 곳은 어딘데요?"

"나도 모른다. 어쨌든 주님 곁이겠지."


에카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늪주인도 그런 악귀가 될 수 있습니까?"

막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우리가 잘 달래줘야 해."


에카는 점심밥을 준비하며 시동 꼬마애한테 아까 해준다던 얘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막사가 해준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녁에 부모님 몰래 동생을 보러 버려진 통로 중 한 곳에 가서 기다렸다. 바깥은 어스름이 내리고 붉고 창연한 색깔이 흙벽을 기었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빛이 짧아질 떄마다 자리를 옮겼다. 어쩐지 밖이 소란스러워 지는 것 같은데 발소리가 들리더니 동생이 뛰어왔다.


"에카 누나! 이거 먹어!"


대뜸 손을 내밀기에 봤더니 단과자였다.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부모님한테는 말 안했지?"

"응!" 동생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느라 하려던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진정하고 내뱉은 말은 이랬다. "뭔 말을 하려 했더라?"


에카는 실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하느라 그리 뛰어왔어. 이건 누가 줬어?"

"엄마가." 동생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세 개 있었는데 내가 두 개 먹었어."


그녀는 씹던 입을 멈췄다가, 다시 씹어 삼키고 남은 건 주머니에 넣었다. 동생은 그늘 탓에 보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잘 계셔?"

"어, 누나 집에 언제 와? 엄마가 물어보래. 오면 맛있는 거 해준다고 올 때 미리 말하랬어. 닭 잡을 거래! 돼지 머리도 눌러놨어!"


에카는 피식 웃었다. 동생이 심통나서 졸라댔다.


"왜 대답이 없어? 누나 집에 올 거지? 응? 꼭 와. 같이 가자. 와 줄 거지?"

"그래, 그럼 언제 한 번 엄마 아빠 보러 가볼까, 일이 끝나면?"


거의 항상 그런 말로 달래곤 하였기에 이번에도 동생은 쉬이 납득하여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라 했다. 에카는 그런 건 함부로 걸면 안된다고 훈계했다. 그러다 갑자기 동생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손을 확 잡아 흔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와 의아하던 차였다.


"이럴 때가 아니야! 형님이 돌아왔어! 누나, 형님이 늑대를 잡아왔어! 되게 커! 사람들도 다 몰려갔는데, 지금 안 보면 후회할 걸?"

"돌아왔다고?"


에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주저했다.


"언제 왔대?"

"방금!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 사실 낚시를 간 게 아니라 사냥을 갔던 거야. 형님이 양치기 목동으로 일하는 마을에서 늑대가 돼지를 잡아먹었대! 그놈 잡으려고 다같이 추적해서 잡으러 간 거야. 그랬더니 글쎄, 진짜 굉장한 놈을 잡아왔어! 형들이 숲에서부터 떠들썩하게 행진하면서 들어왔는데, 지금쯤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거야. 누나도 빨리 봐야 돼!"


정신없이 이끌려 큰광장에 이르자 낮에 들어왔던 입구에 숲 너머 달이 잘 떠있었다. 웬일로 이렇게 많은 횃불이 켜지고 음습한 곳에 조용히 살던 사람들도 모두 나와 큰 소리를 냈다. 그 중앙에 떠들썩 청년 무리가, 이제 막 계단을 내려와 광장을 걷고 있었다. 사제는 잠시 이웃 교구에 가느라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이렇게 소란을 피워서는 안된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으리라.


에카가 누군가와 몸을 부딪혀 사과하는데 얼굴을 보니 어머니였다. 그녀는 색이 조금 바랜 파란색 튜닉을 입고 검고 굵은 벼머리 위에 머릿수건을 쓰고 있었다. 딸과 마주친 눈이 조금 커졌다. 그 옆에 아버지도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옆의 사람과 대화를 하느라 그녀를 보지 못했다. 뭐라 말을 나눌 새도 없이 동생에게 이끌려 군중이 더 빽빽한 안쪽으로 끌려갔다.


이제야 그녀를 본 사람들은 옆으로 슬슬 멀어져 닿지 않으려 했다. 덕분에 더 쉽게 파고들 수 있었다. 동생 앞이라 허리를 곧게 폈다. 나팔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오빠의 친구들을 먼저 알아보았다. 그들은 창과 뿔나팔, 예리한 단도를 들고 군대처럼 발 맞춰 행진했다. 사냥 복장을 입고 거뭇한 피부에 난 잔상처를 자랑스레 드러냈다. 곳곳에 덤불 관목이 긁은 생채기가 나있어 거친 몸싸움과 숲속의 고된 추적을 증명했으나, 그들은 더 증명하고 싶어했다.


피와 먼지와 땀으로 뒤덮힌 채 다들 제 몸의 피로도 몰랐다. 전사처럼 흥분하여 올가미 밧줄을 하나씩 잡고 자랑스러운 수확물을 모두에게 전시했다. 가장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내가 소리쳤다.


"이 상처가 보이세요? 잘 봐요! 이놈 칼 솜씨가 아주 귀신이라구요. 내 가슴을 이렇게 베었다고! 피해서 망정이지 한 치만 더 깊었으면 지금쯤 난 주님 곁에 있었을 겁니다. 못 믿겠어요? 자, 만져봐요! 어서!"


그리고 활짝 웃으며 하늘이 떠나가라 뿔나팔을 불어댔다.


"이놈 면상을 좀 봅시다. 잘생겼죠? 이 새낄 잡으려고 좆이 빠지는 줄 알았소! 내 걸 빼려면 고생 깨나 해야 할 걸! 하는 짓마다, 참 내, 이런 놈은 난생 처음 봤다고요. 우리가 뭐 사냥 갈 때 아무리 멀리 가도 일주일 이상 걸린 적이 있었나? 그래도 봐요, 우리가 어떤 놈을 잡아왔는지!"

"우리가 사냥꾼이다!" 또 한 명이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사냥꾼이라고!"


에카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놈이 그들의 전리품이었다. 멱을 따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취하고 애인의 뼈 빗을 깎아버릴 짐승이었다.


목에 걸린 밧줄을 팍 끌자 놈이 그르렁거렸다. 주둥이에 족쇄가 걸려 입을 열지 못했다. 조이는 목줄을 풀려 했으나 양쪽에서 팔줄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간신히 조금 풀고 이빨 사이로 숨을 쌕쌕거럈다.


청년단이 또 이동했다. 짐승은 걸을 때마다 피에 젖은 다리를 절뚝거렸다. 흐른 피는 검게 말라붙었다. 뽑지 못한 화살이 덜렁거리고 허리에 난 상처는 응급처치를 해두었다. 산 채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붕대가 약초즙에 피로 젖어 녹색과 붉은색이 석였다. 다들 눈에 깊은 혐오가 서렸다. 피는 조금씩 새로 흘러나왔다. 허리 아래쪽이 경련했다. 듣던 것과 다르게 꼬리가 없었다.


이제는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더 앞으로 나와서는 누린내나는 털복숭이를 향해 다가갔다. 동생이 누나를 한 번 불렀으나 겁 먹어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뒤에서 숨죽였다. 노란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는 팍 튀어올랐다. 손을 뻗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놀람 반 기대 반으로 웃었다. 족쇄 안으로 이빨이 드러났다. 사내들이 달려들어 바닥으로 처박아 눌렀다. 얼굴을 눌리면서도 숨은 씩씩거렸다.


"새끼야, 가만히 있어!"


누가 뒤에서 머리를 확 잡아채더니 굵은 팔로 감싸안았다. 고개를 드니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 오빠였다. 술 냄새가 났다.


"야, 동생아, 요 까까머리야! 여기서 너를 보니 얼마나 반갑냐."


오빠가 가발을 잡고 들추려 해서 에카가 이새끼 저새끼 욕을 뱉으며 빠져나왔다.


"순례에서 돌아온 거냐? 돈은 많이 벌었어? 야, 이놈 좀 봐라! 어?"


오빠가 뻔뻔하게 웃으며 달려가 놈의 머리를 붙잡고 자세히 보여주었다. 철부지 애 같았다. 갈색 털은 예민하게 삐쭉 솟아 사방을 찌르고 코 위 주름이 불거지며 붉은 잇몸이 사납게 드러났다. 거친 콧물이 튀어 바닥에 달라붙었다.


에카는 쪼그려 앉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뒤에서 동생이 불안하게 재촉했다.


"가지 마, 가지 마, 누나, 가지 마."


누나는 듣지 않았다. 저 눈을 보았다. 저 눈이 피로에, 공포에,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젖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홍채가 수시로 떨었다. 눈은 시선을 피해 이쪽 저쪽으로, 둘러싼 사람들을 노려보기도 하며 바삐 움직이다가 결국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어쩐지 겸허함이 느껴졌다. 눈은 그녀를 보더니 일순 긴장감을 푼 것 같았다.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떠버리 사내가 말했다.


"이놈 가죽을 어찌할까? 망토를 만들까, 머리째로 카펫을 만들어버릴까? 아님 팔아버릴까."


그건 질문이라기보다 선언 포고에 가까웟다.


"병신아, 개새끼 가죽을 누가 사."


"야 이 골통 빈 잡놈들아. 죽은 것보다 산 놈이 가치 있는 거 모르냐?"


오빠가 짐승의 귀를 팍 잡고 응수했다. 그 바람에 놈이 깨어나 버둥댔거렸다. 칸센은 양 손으로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도시 광장에 놀러 안 가봤어? 영주한테 팔면 돈 깨나 될 거다! 로가슬 지하에는 이런 놈들을 가둬놓은 지하 감옥이 있으니까. 야, 에카, 넌 이런 거 처음 보지?"


그랬다. 에카는 키 큰 오빠 친구들을 보아 기가 죽은 것도 있고 겁을 먹기도 하여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이날 늑대원숭이를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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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8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6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6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7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7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9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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