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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 - 괴물이 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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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야
작품등록일 :
2020.05.11 22:38
최근연재일 :
2021.07.05 21:55
연재수 :
2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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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7
추천수 :
145
글자수 :
1,045,763

작성
20.05.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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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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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찢어진 종이' 이야기 -2-

DUMMY

[920년, 7월 2일, 00시 35분, 아르타니아 서쪽 평원, 앱솔, 전초기지 구석 울타리(셰일즈)]


“죽어? 누가. 내가?”


자리를 옮겼다. 전초기지 구석이다. 샤카 자루엔 여전히 왼손을 올려두고 있다. 까칠한 자루. 칼을 뽑을까? 이 개자식도 샤카에 눈을 두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는다. 내가 말하자, 이 자식은 한 차례 웃는다. 내가 거만하다고 생각했나? 아니. 난 자신 있다. 나름대로 2군에 속한다. 아리아와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겠지만, 이 자도 나와의 차이를 엎을 수 없다. 먼저 공격할까? 아니면...


“그래. 그래.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그가 말한다.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그도 웃는다. 서로 뭐가 웃기다고 웃는 걸까. 묘한 긴장감 사이, 그의 눈이 조금은 감기길 기다린다. 눈꺼풀 사이의 간격이 2mm. 그리고... 0.5mm. 지금이다. 샤카를 빼어 든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뽑혀 나오는 칼. 그리고 녀석의 목 언저리에 날을 댄다. 눈꺼풀 간격과 마찬가지로 0.5mm 옆에. 녀석의 움직임이 경직된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여유롭다. 포커페이스라기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미소가 보인다.


“똑바로 말해. 우리가 왜 죽는다는 거지? 너도 알 텐데. 우리 입지가 어떤지 정도는.”


목소리가 사뭇 진중해진다. 당신은? 아니, 능글맞은 그 목소리 그대로 말한다. 괜히 연극 배우 같은 목소리로.


“당신들 입지야 잘 알지. 아르타니아 최고의 칼잡이들이잖아. 그런데 말이야. 당신도 알 테지. 내가 카낙스와 연줄이 있는 건.”


그는 오른손 검지로 날을 치운다. 그러게 둔다. 어차피 대치 상태에서 유리한 건 나다. 여차하면 손가락마저 베어버리면 되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건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말한다.


“당신들이 전쟁 통에서 살아남아도 결국, 끝장이야. 그들이 와서 당신들 목을 가져갈 거거든. 워든. 아니, 성문수비군이 이곳에 배치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는 아랑곳 않고 칼 끝에서 이어, 내 목에 검지를 갖다 댄다.


“누구에게 가져간다는 거야.”


어떤 새끼한테 우리 목을 가져간다는 건가. 그가 뜸들이더니 말한다.


“왕에게. 말이야.”


... 뭐?


“왕에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왕이 우리 목을 왜.”


그가 낄낄거린다. 그리고 내 목을 손가락으로 한 번 긋는 제스처를 취한다.


“당신들에겐 빚이 있어서 말이야. 나름대로의 은혜 갚기라고 생각해.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당신이 더 예상가는 바가 있겠지.”


내가 예상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이게 무슨 소린가. 모르겠다. 아니, 잠깐. 설마...


“에이마가 늙어 죽었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한 번 자세히 알아봐.”


그는 뒤로 천천히 물러선다. 샤카는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당신들이 살아 있길 바라지. 북부에서의 빚은 갚았다.”


그가 처음으로 진중하게 얘기한다. 그의 뒤쪽은 어둠이 내린 들판. 그가 곧 사라진다. 서서히. 마차는? 말은? 저 자식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에이마가 늙어 죽지 않았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최고의 워든이자, 그 기틀을 닦은 에이마도 세월을 이기진 못했다. 결국, 노쇠해서 사망했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지만... 그녀가 노쇠해서 죽은 게 아니라면.


아리아와 고인의 접점은 없다. 동시대에 살았던 게 아니다. 너와 내가 이 세계에 존재했을 무렵엔 에이마가 죽은 지 벌써 29년이 되어가던 때다. 그런데 에이마가 죽은 이유와 우리들이 죽을 이유가 같다면. 그녀와 우리의 공통점은 뭘까. 무력? 정치? 아니, 어쩌면 그 모두.


로코시스가 거짓말을 했을까. 아니다. 구태여 기억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우리에게 빚이 있다. 그리고 워든이다. 비록 카낙스였지만, 최소한의 상도덕이 있었기에 그는 한 자리를 꿰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칼을 들이밀어도 웃던 미친 새끼가 정작 진중하게 내뱉은 한마디.


‘살아 있길 바란다.’


그게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가장 일리 있었던 말, 아르타니아 중부 밖을 나갈 일이 드문, 특히나 1군, 2군인 우리가 국경지역까지. 위험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리아가 위험하다. 내일은 총력전이 예정된 날. 출발은 오전 6시. 아리아와 내가 향할 위치도 마침 다르다. 아리아는 앱솔 자리안 서쪽으로. 나는 동쪽으로다. 설마 이 모든 게 계획된 거라고? 내가 생각이 많은 걸까.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내통자 역시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제길. 어떻게 해야하지. 아리아, 지금의 정신상태라면...






[기억하고 싶은 연월일시간분, 아마도 아르타니아 알리야, 넓은 호수(아리아)]


여기서부턴 배를 타고 건너야 할 걸세. 아저씨가 남긴 마지막 말씀이다. 아저씨께선 소를 끌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셨다. 나와 셰일즈만 남은 이곳. 이름은 모른다. 그러나 호수다. 수평선이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넓다. 돌아서 걸어가기엔 너무나도 넓은, 그런 거리.


“배 없나? 하다못해 버려진 나룻배 같은 거.”


네가 말한다. 사람도 없고, 아무도 없는 들판. 흰색 억새풀이 바람을 따라 파도치듯, 이곳 풍경은 그랬다. 그 들판 사이를, 너와 나는 걷는다. 슬슬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보며. 조금은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 너는 앞에서, 나는 뒤에서 걷는다.


“배가... 있긴 하네.”


낡은 나룻배가 보인다. 젖은 갈색이다. 앞에 서 있는 네 등이 호수를 모두 가린다. 너. 이렇게 컸구나. 셰일즈.


너의 오른손을 무심코 왼손으로 잡는다. 그냥. 잡고 싶었어. 그런데 너는 의외로 내 손을 꽉 쥔다. 돌아보진 않는다. 심장이 갑자기 뛴다. 얼굴이 뜨겁다. 얼굴도 붉어졌을까? 그랬을지도. 나도 더 꽉 잡는다. 네 손을.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너의 옆으로. 스치는 억새풀. 어쩌면 갈대. 셰일즈의 얼굴이 옆에서 비출 무렵. 너도 나를 본다.


고마워.


뭐가?


살아있게 해줘서.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말. 서로 안아주는 말. 풀끝이 다리를 간질인다. 네게 파묻힌다. 내복과 원피스. 찢어진 스타킹. 우스꽝스러운 모습. 허리춤에 칸 찰. 나시카와 샤카. 고개를 올려, 너의 얼굴을. 너도 나의 얼굴을.


미안해.


뭐가?


미안.


네게 입을 맞춘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셰일즈. 이거 어떻게 하는 걸까. 너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러난다. 한 발자국. 그럼 나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너를 똑바로 본다. 너의 칠흑 같은 눈을 바라본다. 지금은 산발인 머리카락도 본다. 네게 다가가서. 다시 입을 맞춘다.


“아리아. 잠깐만.”


너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민다. 그렇게 가장 덜 자란 수풀 사이로 엎어진다. 너의 몸은 바닥에. 나는 무릎 사이에 너를 두고 네 위에. 이제 너는 아무 말도 않는다. 네게 파묻힌다. 언니가 지겹게 말했던 그 행위. 키스. 그걸 네게 한다. 너의 뒷머리를 받히고, 입을 밀어 키스한다. 담배 냄새. 나 없는 곳에서 또 피웠구나. 내 옆은 꽃이 피었구나. 민들레 한 송이.


혀와, 혀가 교차하는. 그런 때. 담배 맛? 아니, 그렇진 않아. 맛 자체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니가 말한 것처럼 달콤한 맛이 나냐고 하면... 미각은 아니야. 하지만 온몸이 달콤함을 느껴. 지금은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아. 상처가 쓰린 것을 제외하면.


네 내복을 벗긴다. 윗옷만. 너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네 몸은 상처가 가득하다. 이리저리 베이고 뚫린, 그런 상처들을 모두 붕대로 감고. 붕대는 피가 가득 맺혔어. 아팠구나. 너도 아팠구나. 진짜. 아팠을 텐데. 왜 울지도 않고. 그러고 있었어? 너는 내 옷을 서서히 벗겨. 옷이 올라가면서 조금 가려지는 시선, 검은 시야에서 멀어졌을 때 찾아오는 빛. 그리고 너의 몸. 나는? 나는 그렇게 아프지 않은데. 그냥 근육통 같은 게 있었나봐. 그렇지. 그런데. 너는 내 몸을 밀어내면서 얘기해.


“너. 정말 괜찮겠어?”


나는 답해.


“네가 괜찮다면.”





[920년, 7월 2일, 00시 28분, 아르타니아 서쪽 평원, 앱솔, 아르타니아군 전초기지 1군 워든 천막 안(아리아)]


사람은 죽는다,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른다. 사후세계 따윈 없다. 나 역시 죽으면 흙이 되고, 몇 십 년 뒤면 수많은 알갱이가 될 거다. 그렇게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에게 섞여 갈 거다. 몇 십억 영혼으로 나뉘어서.


그러기 전에. 내 영혼이 온전히 ‘아리아’라는 존재로 남았을 때. 글이라는 매체에 내 흔적을 남기려 한다. 유언장이라고 하면 유언장. 일대기라면 일대기. 곧 버려질 찢어진 종이라면 그것이 될 거다. 직감한다. 나는 죽을 거다. 이미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매일 같이 발 밑을 옥죄는 망자들의 속삭임이 들려. 사람은 언제까지나 남을 취하면서 살 수 없어. 가끔은 패배할 것이고, 그 한순간의 패배로 내 인생도 종지부를 찍게 될 거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널 위해서야. 넌 어디에서도 잘 살 수 있잖아. 들쥐가 틈날 때마다 물어대는 풍차 안에서도. 벼룩이 가득한 짚단 위에서도.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죽여나가는 전쟁 속에서도. 너는 살 수 있어. 넌 강한 사람이니까.


앞서, 글이 아주아주 길어질 것 같다. 그래서 유언을 먼저 써보려 해. 내가 죽으면 묘비를 만들지 말아줘. 그리고 내 시신은... 어디 구석진 들판에 버려줘. 아무도 없는 곳에. 그게 내 속죄야. 땅에 묻힐 자격도, 바다에 뿌려질 자격도 내겐 없어. 대신 나시카는 언니와 살았던 우리 집에. 그리고 내 머리끈은 세라네 식구와 살았던 집터에 놓아줘. 마지막으로 내 목에 걸친 로켓은 네가 가져가줘. 너는 사진 싫다면서 안 가져갔잖아. 그런데. 네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렇게나마 네 곁에 남고 싶어. 모은 돈은 아르타니아 중앙 은행에 모아뒀어. 물론 가명으로. 아마 이름이 ‘레 시아 르블랑’으로 되어 있을 거야. 그 돈은 네가 써. 아마도 넌 돈을 조금씩 썼겠지만, 나는 한푼도 안 쓰고 모았거든. 영지를 사고, 좋은 저택을 짓고.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해. 나를 잊고. 다시는 다른 이를 취하지 말고. 웃으면서. 또 사죄하면서. 너 자신을 용서하면서.

이런 말을 남기게 돼서 미안해.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자. 유언이 주된 내용이길 바라지 않아.


내가 처음으로 배웠던 말. 별, 달, 바람. 그런 단순한 말들 말고. 어려운 단어들. 인플레이션이라던가 헌법이라던가 그에 준하는 어려운 의미의 단어. 다름아닌 ‘소아성애자’였다. 지금도 나의 시작이 왜 그곳이었는진 모른다. 누군가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모의 손으로. 그리고 부모의 가슴 아래에서 먹고 자며,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시작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의 시작은 조금 달랐다. 첫 기억. 그리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 지금 이곳에서 쓸 이야기는 너와 나의 시작이자, 우리의 이야기다. 함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 둘의 지루한 인생 이야기.




작가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openobser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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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귀' 이야기 -3- +2 20.06.02 54 3 14쪽
24 '마귀' 이야기 -2- 20.06.01 52 2 13쪽
23 '마귀' 이야기 -1- +2 20.05.30 61 3 14쪽
22 '고양이' 이야기 -에필로그- 20.05.29 52 2 10쪽
21 '고양이' 이야기 -10- 20.05.28 42 2 9쪽
20 '고양이' 이야기 -9- 20.05.27 36 2 13쪽
19 '고양이' 이야기 -8- 20.05.26 39 2 13쪽
18 '고양이' 이야기 -7- 20.05.25 38 2 12쪽
17 '고양이' 이야기 -6- 20.05.23 39 2 13쪽
16 '고양이' 이야기 -5- 20.05.22 49 2 16쪽
15 쉬어가는 이야기 -1- +1 20.05.21 67 3 10쪽
14 '고양이' 이야기 -4- 20.05.20 45 2 13쪽
13 '고양이' 이야기 -3- 20.05.19 41 1 10쪽
12 '고양이' 이야기 -2- 20.05.18 42 1 14쪽
11 '고양이' 이야기 -1- 20.05.16 57 2 15쪽
» '찢어진 종이' 이야기 -2- 20.05.15 51 2 12쪽
9 '찢어진 종이' 이야기 -1- 20.05.14 49 2 13쪽
8 '너와 나' 이야기 -에필로그- 20.05.14 47 2 7쪽
7 '너와 나' 이야기 -6- 20.05.13 51 2 19쪽
6 '너와 나' 이야기 -5- 20.05.13 55 3 13쪽
5 '너와 나' 이야기 -4- 20.05.12 57 2 13쪽
4 '너와 나' 이야기 -3- 20.05.12 66 3 10쪽
3 '너와 나' 이야기 -2- 20.05.12 84 7 11쪽
2 '너와 나' 이야기 -1- 20.05.11 157 7 12쪽
1 시작하기 전 이야기 +2 20.05.11 541 1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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