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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 - 괴물이 된 아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알리야
작품등록일 :
2020.05.11 22:38
최근연재일 :
2021.07.0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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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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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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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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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너와 나' 이야기 -6-

DUMMY

[???년, ??월 ??일, ??시 ??분, 아르타니아 서쪽 평원, 앱솔 광장(아리아)]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간다. 손을 들어 올린다. 손등은 피투성이. 뒤집어본다. 손바닥도 마찬가지다. 하늘색 머리카락, 검붉은 굳은 피, 선혈이 한대 뭉쳐 살점 같은 것을 자아낸다. 내 피도 섞여 있는...


“정신이... 들었나 봐.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지.”


여자. 파파샤의 목소리다. 지쳐 있고, 힘이 없다. 숨을 헐떡인다. 고개를 45도 왼쪽으로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무너진 벽돌에 주저 앉아 있는 그녀.


“이게 무슨...”


그녀가 한 차례 쿨럭이자 피가 뿜어져 나온다. 다시 보니 왼팔이 없고 복부는 내장이 쏟아질 듯 말 듯 애매하게 갈라져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마 또?


“당신이 그런 거야. 브래들리. 프라이드. 이즈. 구스타프. 그리고 이젠 내 순서겠지. 아니다. 첫 순서는 내 동생 자르카샤. 당신이 전쟁터에서 마지막으로 죽인 녀석이지.”


지금 보니 그녀의 후드가 빗겨져 있다. 금빛 장발. 정말이지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왜. 사람 죽기 직전에 정신 차리고 자숙하는 게 취미야? 미친 살인마 새꺄.”


부질 없다는 웃음. 그녀의 것이다. 나시카는 어디에 있지? 바닥, 내 오른쪽 발치에 있다. 주워 든다. 역시나 흠집은 없다. 피와 살만 묻어 있을 뿐이다. 나는 팔을 접어, 팔꿈치 안쪽으로 나시카에 묻은 피와 살을 닦는다. 핏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으나, 전보단 덜하다. 팔에 남겨진 주인 잃은 이물질은 대충 털어낸다.


칼을 고쳐 잡는다.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칼. 하지만 담긴 영혼의 무게는 무겁다.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에게로. 터벅터벅. 잠시 뒤를 돌아본다. 오체가 잘려나간 시체들이 보인다. 내가 만든 결과겠지.


그녀에게 칼을 들이민다. 벨트에 단검집과 매어 두었던 셰일즈의 휘장.


“그 녀석. 코트 입고 왔지? 멍청이가 입지 말래도 굳이...”


그녀는 품 속에서 궐련을 꺼낸다. 한 대 꺼내 물더니 종이 성냥으로 조용히 불을 붙인다. 연기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갈라진 복부 사이로 매연이 피어 오른다. 폐에 구멍이 생겼으리라. 그럼에도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녀.


“안 아프신가요?”


그녀는 내 질문이 질문도 아니라는 듯 답한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존나 아파서 뒤지겠구만.”


그런데 어떻게 신음소리조차 숨기냐고 물었다. 그녀의 답은 이랬다.


“우리야 칼 맞는 게 일상이었거든. 한 서른 번 찔릴 때까진 좆도 적응이 안 돼. 복부에 칼첨 맞고 주저앉고 기절하고 그랬지. 당신은 아픈 게 익숙하진 않은 것 같더라. 하기사 소문으론 당신 주변에 접근하기도 전에 몸이 서른 토막 난다더라고.”


익숙해진 거지 뭐. 그녀가 속으로 담아둔 말이리라.


“그래서? 나도 죽여야지. 안 그래? 어차피 셰일즈 그 양반. 이미 시체가 됐을 거거든. 방금 전서구 날아간 거 봤지? 그 새끼 죽었단 거야. 잘됐네. 나는 여기서 죽고. 내 유일한 혈육은 하루 전 쯤에 뒤졌고. 참 고맙다. 우리 가족을 몰살시켜줘서.”


이 사람은 몇 번이고 나를 놀라게 한다. 처음에도. 두 번째도. 지금도. 셰일즈를 운운하면서 명을 깎는다. 나시카를 바로 잡아, 파파샤, 당신의 목에 날을 세운다.


“봐봐. 이럴 줄 알았지. 피눈물도 없는 새끼. 아리아. 당신,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당신은 나라보다 한 사람이 우선이지? 우리 카낙스는 말이야. 방법은 달랐어도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했어. 그것이 설령 살육과 학살이라도 말이야.”


“그게 마지막 유언입니까.”


칼을 치운다. 여자의 복부를 발로 찬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여자를 집어 삼킨 것일까. 발끝에 내장이 덜덜 떨린다. 발에 채인다. 무릎을 굽혀 앉는다. 나시카의 칼등을 오른손으로 잡는다. 그리고 여자의 목에 댄다. 천천히 민다. 피가 조금씩 쏟아져 나온다. 그녀가 쿨럭일 때마다 한껏, 검날은 목 살갗부터 근육까지 깊이 파고든다. 칼을 조금 땐다. 유예 시간이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거 더럽게 고맙네.”


목선을 따라 피가 흘러내린다. 여자는 고개를 떨군다. 숨은 쉰다.


“참 웃겨. 당신 말이야. 인자하고. 착하고. 자상하고. 다들 그러던데. 혹시 기레기들이 구라라도 친 거야? 이건 씨발. 우리보다 열 배는 더하잖아.”


한탄하듯 말하는 그녀에게 나도 얘기한다.


“당신들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죽였어. 당신 하나만이 아니야. 카낙스. 아르타니아. 전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앗아갔어.”


“그래서? 내가 죽어도 싸다고? 존나 이기적이네 이 새끼. 꼬마야. 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잖아. 당장 네 뒤를 봐. 아니면 24시간 전 기억으로 돌아가봐. 내 친동생. 내 동료. 다 네가 죽였다고. 이 미친 년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어디서 나온 힘인지 모르게 왼손으로 내 멱살을 잡는다. 쥐어 뜯을 것만 같은 힘으로. 그리고 표정으로. 나를 자신의 얼굴 앞, 3cm까지 당긴다.


“너도 다를 거 없어. 아니, 너야말로 우리에게 어울려.”


“나는... 당신들과 달라.”


“그럼. 우리보다 더하지. 적어도 너처럼 남자 하나 때문에 사람을 도륙내진 않으니까.”


손에 힘이 풀린다. 물이라도 끼얹은 듯, 정신이 맑아진다. 그러다가 물이 안개로 피어오르듯, 다시금 흐려진다. 그것이 수어차례 반복 된다.


정의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선의도 없다. 내가 움직이는 기반은 너.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 그게 기반이었고 지금까지 온 거다. 그 기반이 사라진다면 나는 뭘 위해서 움직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살인 같은 걸 했으면 안됐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거다. 모두... 안 죽었을 거야. 그렇지? 셰일즈. 하지만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그래도 꿈을 꾼 채로.


딸깍 소리가 들린다. 파파샤. 당신의 뒤에 숨은 오른팔을 보지 못했다. 맞아. 이 사람. 오른손잡이였다. 그리고 지금, 내 심장 앞에 차가운 금속이 놓여 있다. 와이셔츠 면이 중간에서 가로막았지만 이 느낌. 확실히 알 수 있어. 총이야.


“병신.”


이제 모두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거야.


너도.


“넌 너무 말이 많고.”


그리고 의외의 남자 목소리. 다 죽였는데...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내 귀를 울리는 것은 갈라진 비명이다. 총성이 아니다.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냐고 묻고 싶을 정도의 비명. 눈은 감은 채다.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서 그림을 그린다. 내 앞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 어떻게...”


“그건 알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리고 한 차례 더 울리는, 고기 해체하는 소리.


“입 좀.”


마치 작두로 고기를 도륙할 때나 날 법한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만든다.


“다물어.”


그 사이에서 들려온 어떤 남자의 목소리는 그렇게 높지도, 그렇기 낮은 음도 아닌 목소리다. 마치 노래를 부르면 고음도 저음도 할 수 없을 듯한. 항상 반 옥타브를 높이거나 낮출 것만 같은 목소리.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아리아.”


“셰일즈?”


아무리 생각해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셰일즈 뿐이다. 하지만 너는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네가 언제부터 이런 말들에 휘둘렸다고 그래. 머스탱이란 놈한테 물어보니까 네가 죽었을 거라고 하더라고. 이 여자가 말빨로 유명하다길래.”


눈의 초점이 제대로 맞춰진다. 셰일즈가 눈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배경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너와 나를 제외하고는.


“진짜니?”


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묻는다.


“뭐가 ‘진짜’인데.”






나시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서. 한 손으로 닦아내기엔 영 시원찮아서. 그런데 갑자기 양 손이 움직임을 멈춘다. 네가 내 양팔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놓는다. 너는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은 채 내 눈가를 닦아준다.


“됐고, 추워 죽는 줄 알았어. 그 뭐냐. 코트 덮어준 건 고맙다.”


너의 손이 점점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시야가 나아지긴 커녕, 점점 흐려지기만 한다. 너 밖에 안 보였는데. 이젠 너 역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만 울어. 얼굴에 묻은 피, 다 번지고 있으니까.”


너의 손가락은 따뜻하다. 아침의 종루, 그때 만졌을 때보다 훨씬 따뜻하다. 마치 오늘 새벽,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를 다시 겪는 것 같다.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더 상하네.”


아까 총에 맞아서 내가 죽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울면서 웃으니까 더 못생겨 보인다. 야.”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네가 나를 안아주었을 때, 모두 부서진다. 너의 가슴 속에서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 소리는 머릿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너를 있는 힘껏 내 쪽으로 당겨올 수 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좀 더 확실히 전달될 수 있도록.

네가 옅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거야 원. 셔츠 하나 새로 사야겠네.”


네가 셔츠를 쓸어내린다. 내 심장도 같이 쓸어내려주었으면. 그랬으면 좋겠어. 아니, 그럴 거야. 넌 진짜잖아. 진짜라고. 진짜. 진짜 셰일즈야. 셰일즈.


“셰일즈.”


너는 나를 보지 않는다. 더 먼 곳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종루에 가려진 태양? 밝아지는 하늘? 그곳에도 내가 있니? 나를 봐. 나를.


“셰일즈!”


크게 소리지른다. 마을 구석구석이 나의 소리로 가득 찬다. 그제야 네가 나를 본다.


“왜.”


네가 말한다. 나는 답한다.


“그대로 있어줘.”


내가 말한다. 너는 답한다.


“그러려던 참이었어. 날씨 한 번 더럽게 춥거든.”


“몸 말고. 눈 말이야.”


“눈?”


네가 내 눈을 가렸다. 별로 장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데. 너는 왜.


“그만 봐도 돼. 충분히 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 좀 그만 봐.”


“뭘. 너를? 내가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너를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보지 마.”


“어째서?”


“정적을 즐겨. 마음을 차분히 하고. 그리고 울지 말고.”


“싫어. 왜 그러는 거야. 왜.”


“조용히.”


너의 말대로 정적을 위해 잠시 입을 봉인한다. 눈도, 입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숨을 쉬는 코 뿐이다. 정적 속에서, 불쾌한 피 냄새는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고요함에 묻히고 나니 차라리 오감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대로, 네게 안긴 채로. 조용히 누울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고. 아침의 종루에서처럼.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감도 잡히지 않는다. 고요함 속에서 정신조차 놓아버린 것 같다. 나는 시간 개념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몇 분이 지났는지 정도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5분이라든지 10분이라든지... 그 정도 단위이지만.


“5분 지났어.”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


“이제 됐어. 눈 떠도 돼.”


너의 품 속에서 나는 눈을 뜬다. 너의 옷 때문일까. 시야는 까맣다. 우리 둘은 여전히 5분 전의 그 자세다. 너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여전히 내 몸을 감싸 안고 있다. 내 팔도, 손도. 너의 온몸을 휘감고 있다.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키가 큰 것처럼 느껴졌을까. 나랑 몇 cm 차이 안 나면서.


“눈은 왜 감으라고 한 거야?”


내가 물을 때. 너의 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시 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다. 이유가 있기에 그런 걸 테니까. 그렇기에 나도 손을 놓는다.


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는 듯.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더욱이 그렇게 만들어 준다.


마침내 네가 입을 연다.


“진정하려고.”


나?


“그럴 때는 ‘진정하라고’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말하자 너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말한다.


“내가 그래야 했다고. 너도 마찬가지지만. 그리고 아리아.”


‘왜?’라는 대답 대신, 나는 고개를 기울아다. 너와 세상이 기울어져 보인다. 너도 제스처를 알아 들은 듯, 기울어진 입이 열린다.


“나 밖에 안 보이지?”


어떻게 알았어? 입모양만 뻥끗거린다. 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기 때문에.


“넌 아직도 정확히 보지 못 하고 있어.”


“무슨 뜻이야?”


문득 네가,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 까봐 두렵다. 하지만 너의 눈빛은 확고하다. 태양을 그대로 집어다 넣은 것 같다.


“이제 차분해진 마음으로. 앞을 봐. 내 등 뒤로 보이는 세상을. 앞으로 네가 뭘 해야 할지 알려줄 거야.”


네가 이리도 감성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현실감이 없다. 너의 뒤로?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차분함을 유지해. 널 믿고, 날 믿어.”


네가 말한다. 그와 동시에 네가 자리를 비킨다. 오른쪽으로 한 발자국.


“이건... 뭐야.”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사고가 불가능하게 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보는 것은 현실이 아닐 것이라. 눈을 비빈다. 아직 그대로다. 다시 비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내가 있다. 내 눈앞에 내가 있다. 아니, 아니. 내가 나인데. 너는. 아니. 아니야.


뭔가 잘못 됐다. 내 눈 앞에 내가 있다. 아니, 이건 카낙스. 하얀 부리 가면의 주인이다. 하얀 까마귀다. 내가 아니다. 나와 닮은 사람일 뿐. 눈 코 입 머리카락까지. 모두 엇비슷해 보였지만 내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아니거나, 나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의 복부에 박힌 주인 모를 칼. 그녀의 목부터 아래로 깊숙이 박힌 칼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소리로도, 촉감으로도. 내가 했던 일이고, 셰일즈가 했던 일이다. 그런데.


“네가 그런 거야?”


셰일즈에게 묻는다. 하지만 너는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아니.”


“그럼 누가 그런 건데.”


너는 답하지 않는다.


내 앞의 그녀. 나와 닮은 그녀는 양 팔도. 다리도 없다. 무릎 아래로는 깔끔한 절단면이 보인다. 잘린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피가 흘러 센다. 가운데 선홍색 뼈도 보였다. 팔도 마찬가지였다. 팔꿈치 아래로의 존재가 없다. 그것들은 전부 그녀의 주변에 나뒹굴고 있다.


내가 그랬다고?


다른 넷을 그랬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왜 그녀마저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어째서.


“도망 가야해. 멀리.”


네가 말한다.


“하지만 이런 도망은 원치 않아. 현실도피와 진짜 살기 위해 도망친다는 건 차원이 다른 거야.”


네가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샤카를 뽑는다. 주인 모를 칼도, 너의 칼도 모두. 그녀는 무너져 내린다. 아니, 내가 무너져 내린다.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뭣하러 우물가에 갔었지. 내 무릎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녀 역시도.


“현실을 받아 들여.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야. 아리아. 자기만족에 불과해.”


“너도... 너도 그랬잖아. 항상 도망쳤잖아. 나는 언제나... 한번도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어.”


너의 눈이 풀린다.


“적어도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친 적은 없어.”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든다. 아니,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도망친 다는 것 쯤은. 하지만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더욱이 도망치려 했던 것일까. 그녀의 사연이 떠오른다.


내가 그녀의 동생을 죽였다. 죽여달라고 해서 죽였다. 어쩌면 그것도 내 머리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그녀는 죽기 직전 내 멱살을 부여잡았지만 그녀에겐 애초에 팔이 없었다. 환상이었다. 기시감이 만들어낸 환상. 모든 것은 가짜. 사실은 내가 두 사람을 죽였다는 것. 아마도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이었을 동생. 그리고 그녀. 즉 그녀의 가족 전체를 몰살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사실로부터 도피하고,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


셰일즈를 동경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기에. 그렇기에 너처럼 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항상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도록. 어쩌면 노력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너의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도 망설임 없이 누군가를 취할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내가 보기 좋은 기억에 사실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망상이었고, 도피였다. 도망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사체와 마주한 지금도. 나는 착각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녀가 평범한 여자였지만. 그저 내 머릿속에서 왜곡시킨 시야에 나처럼 보일 뿐. 사실은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여자일지도 모른다.


웃음이 나온다. 허망함에 가득 찬 웃음이다. 내가 여기서 건진 건 뭐가 있을까. 전쟁이 나에게 무언가 가져다 주리라는 환상 따윈 없었다. 가진 적도 없다. 남는 게 없어서 ‘전쟁’이라고 쓰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전쟁이라도 나에게 주는 것이 있다면 깨달음이다. 나는 위선자고,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 병신이라고.


“그래도. 네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아리아.”


뭐가?


“잘 봐.”


네가 가리킨다. 다섯 손가락으로 최대한 정중하게. 바라본다. 집. 벽. 아이. 아이... 아니, 죽은 아이.


“네가 이곳에 무엇을 하러 온 건지 잘 생각해 봐. 아리아. 그땐 나도 널 도와줄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


‘아이. 저 멀리 길가에 부모 잃은 아이 하나가 있었어. 얼른 데려올게.’


데려오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무의식 중에 나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실을.


뇌는 내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조작한다. 하지만 조작을 했다는 것은 그 이전의 것. 즉,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


종루는 너무나도 추웠기에. 전쟁터는 너무나도 쓸쓸했기에. 주인 모를 팔이 그 아이의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셰일즈에게 묻혀 있던 것이다.


나는 아이를 향해 움직인다. 바닥을 보며, 돌을 한 개 한 개씩 주워 가며 천천히 움직인다.


그리고 부러진 내 파편을 천천히 쌓는다. 그 어느 것 하나 다치지 않도록.


등 뒤에서 손길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셰일즈다. 태양이 만든 역광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다. 그가 진심 어린 미소를 띠고 있다. 그리고 역광 사이로 빗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나는 마지막으로 피해 보기로 한다. 이것이 기억에 남는다면, 너도. 나도. 실망할지 모르기에.




작가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openobserver


작가의말

엔터 누르니까 그냥 올라가버리네요. 23:13분 기준으로 수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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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고양이' 이야기 -7- 20.05.25 37 2 12쪽
17 '고양이' 이야기 -6- 20.05.23 38 2 13쪽
16 '고양이' 이야기 -5- 20.05.22 49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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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고양이' 이야기 -2- 20.05.18 41 1 14쪽
11 '고양이' 이야기 -1- 20.05.16 57 2 15쪽
10 '찢어진 종이' 이야기 -2- 20.05.15 50 2 12쪽
9 '찢어진 종이' 이야기 -1- 20.05.14 48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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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나' 이야기 -6- 20.05.13 51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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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너와 나' 이야기 -4- 20.05.12 56 2 13쪽
4 '너와 나' 이야기 -3- 20.05.12 65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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