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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 - 괴물이 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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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야
작품등록일 :
2020.05.11 22:38
최근연재일 :
2021.07.0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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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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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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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시작하기 전 이야기

DUMMY

[931년, 12월 23일, 9시 23분, 헤인느 세인트 중앙광장, 닐론 펍 (셰일즈)]


“어머, 정의의 수호자님께서 여긴 무슨 일이래?”


시온 스타시아, 녀석이 머리카락을 배배꼬며 말한다. 마치 내가 널 불렀다는 듯이.


“그 오글거리는 명칭은 뭐야. 그리고. 애초에 네가 불렀잖아. 외지인 씨. 이 동네 이름이 ‘헤인느 세인트’로 바뀐 건 알고 있으려나?”


‘닐론 펍’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우리는 미리 준비된 술잔을 기울인다. 너는 잔 밑바닥을 가릴 정도로 탁한 아세오산 탁주를, 나는 제리아스 커피 와인을. 이 동네의 이름이 변해도 닐론 펍의 이름은 그대로다. 나름 반가울 얼굴이 와도 무심한 사장님의 태도도 그렇다. 의자, 탁상을 오크나무로 통일한 가게 분위기도.

‘아르타니아 중부’는 몇 년 전, ‘헤인느 세인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유는 여전히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이름 참 예쁘다며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떠나던 날, 나라에서 승전보를 울리며 바꿔버린 이름이니까.


“헤인느 세인트라. 무슨 뜻인진 몰라도 이름에서 구린내가 나는데? 나만 그런가 싶어.”


너는 혼잣말하며 코트 소매에 붙은 단추를 매만진다. 구린내가 난다라. 외지인이라서 할 수 있는 소리겠지. 시국이 시국인데.


“요즘엔 그런 말 잘못하면 잡혀가더라. 아무튼 오랜만이야.”


내가 말하자, 네가 피식 웃는다. 그 소리가 조금 컸는지 사장님이 흘깃 본다. 다시 네게 시야를 돌리자, 너는 검지로 내 이마를 가볍게 밀쳐낸다.


“그래서 네가 있는 거잖아. 변호사 나리. 가서 억울한 사람들 좀 구해봐. 돈에 환장한 놈들처럼 굴지 말고.”


잔이 흔들린다. 억울한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을 구하려고 변호사가 된 걸까.


“그 애가 사라지고 나서 타카모리 씨께 네 행보를 들었거든. 눈도, 팔도 잃은 채, 복수에 미친 악마가 되었다고 말이야. 네가 변호사가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왼쪽 눈이 있던 빈자리가 움찔 거린다. 잃어버린 왼팔이 있던 자리도. 이 녀석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아니, 타카모리 그 양반이야말로 도대체 어디까지...


“그래서. 죗값은 언제 치르시게? 고작 변호사 일로 죄를 씻어낸다고 할 생각은 아니지?”


네가 또 비아냥거린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성격. 시온 스타시아. 네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사람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세월이 참 빠르다. 스물일곱에 이런 얘길 하는 나도 웃기지만.


“그 애를 찾을 때까진 안 돼.”


그 애를 찾기 위해서. 맞다. 그 애를 찾기 위해서 이 짓거릴 하는 중이다. 아니, 조금 다르다. 그 애를 찾을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서 변호사가 된 건 아니다. 단지. 언젠가 네가 내 앞에 나타나면 당당하게 서 있을 구색이 필요해서다. 사람을 죽일 줄만 알던 내가 사람을 구하고 있다. 그런 말이라도 해보려고 이 짓을 하는 중이라고.


“여전히 제멋대로야. 모순적이고. 어떻게 보면 찌질하고. 또 어떻게 보면...”


말을 끊으려 네 머리통에 노크한다. 너는 말을 멈추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잔을 들이킨다. 네 얼굴이 조금 상기된 것 같다. 하도 하얘서 색이 조금만 변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어쨌든. 너도 알 거 아니야. 아르타니아에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겠어. 애초에 애국심도 없었잖아.”


그리고 너는 초롱초롱하면서도 사뭇 진지한 눈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말한다.


“아세오로 와. 타카모리 씨껜 얘기했어. 최상층 언저리에 빈집도 구해놨고. 아세오에 오면 어머니께서도 네 뒤를 봐주실 거야. 그 애는...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됐잖아.”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18살의 나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도 분노에 못 이겨 잔을 깨뜨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6년이나 된 변호사 경력 때문일까. 아니면 나야말로 정말 그 애를 잊고 싶은 걸까. 하지만 그 애의 웃는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울면서 내게 안겼던 모습도. 화를 내던 모습도. 유독 길었던 왼쪽 옆머리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모습도.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온의 용건은 대충 이해했다. 하지만 그 용건에 삶의 목표를 바꿀만한 가치는 없다.


“타카모리... 그 아줌마한텐 고맙다고 전해줘. 그리고 미안하지만 난 그곳에 갈 수 없어.”


너는 일어나지 않는다. 날 보지도 않는다. 천천히 잔만 바라볼 뿐이다. 그 술이 만일 맑은 술이었다면 네 얼굴이 비춰졌을까. 너는 무슨 표정일까.


“유감이네. 셰일즈. 아니, 지금은 마틴 변호사님이 맞는 표현이지?”


오래전 이름을 들으니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셰일즈. 이 이름을 몇 년 전에 얘기하고 다녔다면 아마 네 옆에 기자들이 300명은 달라붙었을 거다. ‘전범자 셰일즈와 무슨 관계시죠?’, ‘흉악한 살인마 셰일즈에 대해 아는 정보가 있나요?’ 그런데 지금은 뭐. 제대로 듣는 사람도 없겠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네. 다시 개명해야하나. 그보다 네 말투. 뭔가 아쉬움이 느껴진다. 내가 아세오로 향하지 않아서? 그런 거로 네가 아쉬워할 이유가 있을까. 시온, 너와 나는 비즈니스적인 일이 많았다. 개인적인 일보다도 훨씬 더. 설마 아세오에서 변호사 짓을 시키려던 건 아니겠지. 그 동네도 난리가 났던데.


“담배 피냐?”


네가 뒤를 돌아본다. 잠시 동안 너와 눈이 마주친다. 회색 눈. 그리고 닐론 펍 사장님도 의심했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얼굴. 너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키는 여전하다. 거의 내 명치에 닿을 정도로 작은 키.


“뭐. 내려다보지 마. 짜증나니까.”


나를 스쳐지나가듯, 너는 문밖으로 향한다. 문을 조금 열어 재끼고는 나를 보며 말한다.


“안 나와?”


술집을 이렇게 빨리 나온 적이 몇 번이나 될까. 가죽 코트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잔을 남겼는데...






[같은 날, 10시 01분, 헤인느 세인트 중앙광장, 에이마 분수대 앞 (셰일즈)]



“많이 변한 것 같아. 이 동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네가 무슨 감상에 젖은 것처럼 말한다. 분수대 주변은 언제부터인가 빛으로 가득하다. 비유나 은유적인 그런 표현은 아니다. 무슨 제사장 마냥 촛불을 세워놓는 문화가 생기더니 요즘은 가스등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 주변도. 몇 년 전엔 그래도 밤이 되면 어두웠는데, 지금은 눈부실 만큼 밝다. 밤이 낮처럼 변해버린 거다. 그래도 배경이 어두워서일까. 아름답다. 누나도, 그 애도 이 광경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담배를 문다. 판상엽으로 대충 말아 만든 담배. 너한테도 한 개비 나눠준다. 네가 담배를 핀다는 건 몰랐는데.


“한 3년 됐어. 뭣 같은 일들이 좀 많았거든.”


고개만 끄덕인다. 품속에서 성냥을 꺼내고, 허리를 숙여 네 것에 먼저 불붙인다. 내 것에 마저 붙이고, 조용히 둘 다 하늘을 바라본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밝아지고 나서 생긴 일이다.


“마틴. 있잖아.”


“그냥 셰일즈라고 해. 괜히 귀찮게”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이젠 누군지도 모를 걸.”


“하? 그러셔.”


네가 퉁명스럽게 군다.


“그렇다면 괜찮겠지. 셰일즈. 너. 이렇게 혼자 지내도 괜찮은 거 맞아?”


이 녀석, 아직 모르는 게 많구나. 하기야 애초에 알 리가 없다. 외지인이니까.


“유감이네. 시온, 너처럼 허구헌날 혼자는 아니야. 나름대로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아. 오랫동안 잊으려 했던 사람들도 몇 번 봤고.”


고개를 내린다. 하늘을 보던 네 얼굴은 어느새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굉장히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똑같네. 예나 지금이나 싸가지 없는 건. 그래봤자 술친구들뿐이면서.”


네가 담배를 떨군다. 벌써 십 몇 년은 핀 나보다도 속도가 빠르다. 아니, 뭐야. 반쯤 남겼네. 그러다 벌 받는다. 시온.


“그게 용건은 아니었어.”


담배를 짓밟으며 네가 내뱉은 말. 용건. 나보고 아세오로 오라고 한 게 용건은 아니었다는 뜻일까. 하기야 네가 주로 한 얘기는 그 뿐이니까.


“그럼 뭔데.”


내가 묻는다. 담배연기를 내뱉으면서.


“10년 전,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게 아니더라도, 네 얘기를 들은 적이 많지 않아.”


묵직하게 다가오는 연무. 그리고 악독한 향. 썩어가는 게 몸소 느껴지는 폐까지. 시온과는 한 때 동거를 한 적도 있다. 단순히 비즈니스였다. 나는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고, 시온 너는 네 은신처를 제공했을 뿐. 대신에 내가 요리를 하는 정도. 생각해보면 그러면서도 네게 내 얘기를 한 적은 없다. 그리고 네가 물은 적도 없다.

다시 곱씹어보면 너는 내 일에 관심이 없던 게 아니었다. 단지 그때는 내가 많이 불안정했었고, 너는 그걸 걱정해서 물어보지 않은 거겠지.


“긴 얘기가 될 텐데. 다 들으려면 며칠 묵어야할걸.”


그러자 네가 생긋 웃는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 마치 누구처럼.


“그럼 며칠 묵고 가지 뭐. 어차피 일주일 정도는 이곳에 머물러야 하거든.”


“의뢰라도 있어?”


“아니, 그냥. 가끔은 외국 구경도 해야 하니까.”


네 마지막 말 뒤로, 하늘에선 첫눈이 내린다. 너는 눈이 신기한지 놀란 표정으로 허공에 손을 내민다. 눈꽃은 네 손바닥에 닿자마자 녹는다. 다 의미 없는 건데, 그럼에도 네게는 처음 보는 광경일 거다. 네가 사는 동네에선 눈이 내리지 않으니까.

12월 23일. 주머니에서 이젠 다 녹슨 회중시계를 꺼내 본다. 시침이 10, 분침이 숫자 2을 향했다. 10시 10분 언저리. 내일은 대륙이 만들어졌다는 12월 24일 ‘기원의 날’이다. 가장 큰 명절, 몇 년 전부터 이날은 카페 주인 놈들과 같이 보내곤 했는데, 올해는 같이 보낼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 같다. 그 녀석들에게도 소개시켜줘야겠다. 그 녀석들도 시온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잘됐지 뭐. 아, 10분만 밖에 있어봐. 집 정리 좀 해야 해.”


“뭐야. 뭐 숨겨놓은 거라도 있는 거야?”


네가 은근슬쩍 놀려댄다. 이럴 때 한 마디 해줘야지.


“지랄.”


해줄 얘기가 아주 많다. 아니, 내가 해야 할 얘기가 아주 많다.




작가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openobser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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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들어가는 이야기 -7- 21.04.30 29 0 12쪽
191 들어가는 이야기 -6- 21.04.28 33 0 12쪽
190 들어가는 이야기 -5- 21.04.26 41 0 10쪽
189 들어가는 이야기 -4- 21.04.09 35 0 10쪽
188 들어가는 이야기 -3- 21.04.07 33 0 10쪽
187 들어가는 이야기 -2- 21.04.06 38 0 8쪽
186 들어가는 이야기 -1- 21.03.31 40 1 9쪽
185 불씨 이야기 -5- 21.03.29 59 0 9쪽
184 불씨 이야기 -4- 21.03.24 52 0 10쪽
183 불씨 이야기 -3- 21.03.22 46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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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빛깔' 이야기 -13- 21.03.15 37 0 12쪽
180 '빛깔' 이야기 -12- 21.03.11 45 0 12쪽
179 '빛깔' 이야기 -11- 21.03.08 35 0 12쪽
178 '빛깔' 이야기 -10- 21.03.03 33 1 10쪽
177 '빛깔' 이야기 -9- 21.02.26 4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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