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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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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304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7.28 07:00
조회
2,062
추천
60
글자
11쪽

헛된 희망의 상징

DUMMY

초를 들고 온 남자가 고개를 숙인다. 벗겨진 복면 밑에 짙은 갈색머리가 드러난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메담이다. 녀석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살아있었구나! 다행이야!”

그러나 나는 메담처럼 감격한 얼굴로 녀석을 대할 수가 없었다. 가슴 속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어. 첫 번째 외출에서 썩은 이빨을 처음 만났을 때, 그토록 오랫동안 얻어맞았는데도 상처가 거의 없었잖아? 그러면 아까 전에 맥스와 나를 도주시키고 이들에게 달려간 것도 다 연극이었나?

“메담 경은.... 이들과 한편입니까?”

맥스가 놀란 얼굴로 메담에게 묻는다.

“맞아. 난 이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기로 했어.”

메담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스는 그 뻔뻔스러운 반응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기사단이 그 동안 단서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 건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이었군요?”

나는 메담이 그 말에 대답하기 전에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가 투항한 건 바로 방금 전일 거예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메담이 전부터 자들이었다고 보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나는 이를 맥스에게 설명해주었다.

“전부터 한 패였다면.... 이 사람들이 성 안의 구조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납치할 필요가 없잖아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죠.”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메담을 바라보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메담이 들고 있는 양초에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촛농이 녹아내린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방금 전에 불을 붙인 새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확신을 얻고 내 가설을 말했다.

“즉... 촛불의식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는 거죠.”

“영특하구나.”

벨루거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는 메담도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부터 나를 속여 온 건 아니었음을 깨닫고 이 시점에서 그를 향한 분노는 한 꺼풀 꺾인 상태였다. 그러나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사실 메담이 그들에게 합류하기로 결정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는 항상 다른 기사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해왔다. 이 때문에 귀족들에게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민과 귀족의 삶 양쪽을 경험해본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귀족과 평민이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여왕과 하녀 양쪽을 경험해본 나또한 에콰빌리타스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이념 그 자체에는 수긍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메담의 선택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서운하고 슬퍼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분노하는 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여왕 휘렌델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메담은 내가 휘렌델인 걸 모르고 선택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평소에 메담이 여왕을 탐탁찮게 생각하던 모습들이 새삼 아프게 기억났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조용히 벨루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들은 외부인에게는 철저히 정보를 차단하는 집단이었다. 아까 내가 메담에 대해 물었을 때 근처에서 촛불의식을 받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나를 설득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을 텐데 벨루거는 굳이 그 사실을 숨기는 쪽을 택했다. 따라서 그가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 해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메담에게 북받친 감정을 참지 못해 한 번 찔러보았다.

“대체 당신들은 왜 왕의 목숨을 노리는 거죠?”

예상대로 벨루거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 번 더 물었다.

“....만약에 왕이 좋은 사람이라면, 혹시 생각을 바꿔볼 수 있어요?”

말을 하는데 슬픔이 밀려와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울지 않고, 울먹이지도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배고픈 사람을 위해 무료급식도 하고 있잖아요. 어쩌면 왕은... 우리들 같은 평민을 위해주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당신들이 미워하는 나쁜 귀족과 다른 사람일수도 있다고요. 그러면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나요?”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지만 나는 이 때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고 거의 무아지경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들 같은 평민’이라 하지 않고 ‘우리들’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억울하지 않은 세상이라면, 평민들도 살만한 세상이라면, 그 때는.... 분노하는 걸 멈춰줄 수 있을까요? 다시 바르테인의 백성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왜 그것이 놀랍냐면, 나는 지금 메리의 옷을 입고 있지만 지극히 휘렌델이 되어 이야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지금 이 말은 휘렌델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메리가 저런 걸 원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분노하는 걸 멈추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벨루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몇 번이나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되풀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는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 아저씨.”

내가 말할 때는 쳐다보지도 않던 벨루거가 메담이 입을 열 때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경청할 뜻을 비친다.

“이 두 사람은 같이 촛불의식을 했잖아? 왜 나만 따로 떨어뜨려놓은 거야?”

“아주 간단한 이유다. 너는 이들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지.”

내 생각에도 우리와 메담을 격리시킨 기준은 그것밖에 없다. 기사의 갑옷을 입은 메담은 척 보기에도 우리와 신분이 다른 귀족으로 보였을 테니까. 메담의 성격을 모르는 벨루거는 맥스와 내가 그의 눈치를 보느라 결단을 내리지 못할까봐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귀족인 메담을 왜 굳이 여기까지 데려온 걸까? 분노하는 자들은 귀족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똘똘 뭉친 게 아니었던가? 이들은 그 두 명의 기사들에게는 협상의 여지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포위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그런데 왜 메담은 죽이지 않고 살려서 설득했단 말인가?

“6년 전 추첨의 경쟁률은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귀족이 된 자의 얼굴은 눈여겨 봐두었지.”

이 말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렸다. 벨루거는 메담이 원래 평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메담은 놀란 얼굴로 벨루거에게 물었다.

“내가 추첨제에 당첨된 걸 알고 있었어?”

“물론이다. 그래서 자네가 특별한 것이다. 자네가 분노하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추첨제가 단지 허황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수많은 사람들이 자네를 통해 깨닫게 되겠지.”

“그러니까... 내가 특별한 이유는 추첨제에 당첨되었기 때문인 거야?”

벨루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바로 추첨제다. 사람들은 그 헛된 희망에 빠져 분노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말지. 사실 정말 보잘 것 없는 확률 아닌가? 자네만 해도 몇 십만 분의 일의 확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바늘구멍보다도 미세한 기회가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착각에 빠지지. 그 작은 확률에 의지해야만 하는 이 구조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부당한 지는 생각하지 않고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안주하는 거야.”

바이우스는 추첨제를 만든 것을 후회한다고 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바이우스가 말한 것처럼 헛된 희망은 때로는 절망보다도 더 못할 수도 있었다.

벨루거는 이윽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치 미뤄둔 일거리를 처리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우리의 목적은 왕을 죽이는 게 우선이 아니다. 여왕의 행차 때 있었던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사단도 우리를 오해하고 있지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바로 되물어서 한 번 더 확인했다.

“왕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고요?”

“물론 기회가 된다면 죽이는 게 더 좋겠지. 하지만 아직까지 거기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상징적인 의미로 죽이자는 이상주의자들도 있고, 저번 여왕의 행차건 이후로 어느 정도 세력이 갖춰지기 전까지 굳이 기사단을 자극하지 말자는 현실주의자들도 있어.”

나는 다시 돌처럼 표정이 굳어버렸다.

“....왕을 죽이는 게 왜 좋은데요?”

벨루거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바로 자네가 지금 느끼는 그 감정 때문이지. 지금 자네도 왕을 죽인다는 충격적인 얘기에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왕은 지극히 상징적인 존재. 그래서 죽이는 게 의미가 있는 거야. 이 신분사회의 정점에 있는 게 바로 왕이니까.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상관없어. 왕을 죽이는데 성공하면 사람들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 백 마디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걸세. 그러면 보다 많은 사람을 계몽시키려는 우리의 목적도 보다 수월하게 달성되겠지.”

참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아무 것도 모를 때는 왕이 무엇이든 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막상 되어 보니 진짜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귀족 놈들이 내 말 다 무시하고 지들 맘대로 하는 것도 지금 짜증나 미치겠는데 이 자식들은 본보기로 날 죽인다는 소리나 하고 있고...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왕을 죽이는 건 우선적인 목표가 아니다. 수호기사가 항시 지키고 있고....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니까.”

글쎄.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 이 녀석은 지가 지금 왕의 명줄을 쥐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우리가 윈더민 성 내부를 습격하려는 건 차선책인 셈이다. 왕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리고 왕은 포기했지만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자가 있다.”

“그게 누군데요?”

“성장 바이우스 뤼프. 추첨제를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현혹시킨 장본인이지. 성 안에 잠입하면 반드시 그놈만은 잡아 죽일 것이다.”

벨루거는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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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현재 시각 4시 2분.... 생각해둔 진도가 있었는데 결국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분량을 어디서 끊어야 할 지 난감해졌네요 ㅠㅠ

오늘 내용 중에 나온 ‘당신들 같은 평민’은

사실 제가 아무 생각없이 타이핑 할 때 나왔던 표현입니다.

퇴고할 때 ‘아, 휘렌델이 지금 저렇게 말하면 안 되는 입장이지.’ 하고 고치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라 휘렌델의 현재 정체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지표로 활용해 봤습니다.


바이우스 : 저를 죽일 거라고요?

벨루거 : 물론.

바이우스 : 제가 미안하다고 해도 말입니까?

벨루거 : 어...? (당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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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외출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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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가설 +8 15.08.01 1,989 49 15쪽
86 외부 요인 +4 15.07.31 2,021 45 15쪽
85 투항의 증거 +8 15.07.29 2,025 49 12쪽
» 헛된 희망의 상징 +6 15.07.28 2,063 60 11쪽
83 첫 눈 +9 15.07.26 2,081 52 18쪽
82 두 개의 초 +8 15.07.24 2,166 52 15쪽
81 촛불 의식 +4 15.07.23 2,163 49 13쪽
80 동화를 싫어하는 자 +10 15.07.21 2,003 49 9쪽
79 에콰빌리타스 +4 15.07.20 2,134 52 9쪽
78 응급처치 +6 15.07.19 2,122 51 11쪽
77 미끼 작전 +12 15.07.17 2,015 57 18쪽
76 호박 머핀 +6 15.07.16 2,092 63 12쪽
75 첫 번째 대장 +12 15.07.14 2,235 54 11쪽
74 윈더민의 우상 +8 15.07.12 2,248 48 11쪽
73 흘러가는 나날 +8 15.07.10 2,353 79 11쪽
72 시행착오 +6 15.07.09 2,335 66 16쪽
71 합동 훈련 +8 15.07.07 2,128 58 9쪽
70 선물 +14 15.07.06 2,307 55 12쪽
69 감당 +12 15.07.04 2,342 61 11쪽
68 최선의 선택 +6 15.07.03 2,248 68 12쪽
67 후회할 짓 +10 15.07.02 2,252 67 10쪽
66 순서 +10 15.06.22 2,617 78 14쪽
65 세 번째 계급 +10 15.06.20 2,245 56 16쪽
64 열세 살의 고백 +6 15.06.18 2,071 61 18쪽
63 승자와 패자 +4 15.06.17 2,291 74 11쪽
62 정과 동 +4 15.06.16 1,889 60 12쪽
61 발리언트의 소원 +2 15.06.12 2,088 60 13쪽
60 청혼 +6 15.06.10 2,099 67 11쪽
59 무서운 꼬마 +8 15.06.09 2,162 63 9쪽
58 벨포트의 정령검 +4 15.06.06 2,757 6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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