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할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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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짜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몹시 화가 나 있었고 그 주먹에는 그 분노가 오롯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극도로 흥분한 상태인데도 나는 주먹을 뻗는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왔다.
나는 주먹을 멈추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주먹은 이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바이우스의 콧잔등을 정통으로 갈겨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힘을 뺀다고 뺐지만 그의 고개로 크게 젖혀질 정도로 세게 때리고 말았다. 동시에 나는 다급히 외쳤다.
“괜찮아요?”
이 노신사는 왕에게... 아니 나 같은 계집애에게 한 대 얻어맞는 순간에도 한결 같은 표정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빨갛게 부어오른 코에서 쌍코피가 흘러나오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심한 짓을 했어요..."
나는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피를 닦는 바이우스에게 계속 재잘거리면서 사과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내 딴에는 많이 봐준 거예요. 사실 내 주력은 발차기거든요."
그러고보니 내가 기적적으로 참는데 성공했나보다. 발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었는데...
"예로부터 바르테인 가문은 최강의 기사를 무수히 배출한 명문가였습니다. 그 재능을 확실히 이어받으신 것 같습니다. 꽤 아프군요...."
바이우스는 대강 지혈이 끝나자 내게 물었다.
“저는 방금 당신에게 몹시 불쾌한 사실을 말했습니다. 주먹질을 하신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그 조용한 목소리에 왠지 흥분이 가라앉는다. 한결 침착해진 나는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정리한 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성장은 내가 페나에 있을 시절의 그 무책임한 영주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이우스는 내가 얼마나 의욕적이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즉위식 전에 내가 제대로 된 왕이 될 수 없을까 두려워 흘렸던 눈물을 보았다. 그 때 내게 삼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은근히 용기도 주었다. 나의 노력에 방향성이 없는 점을 따끔히 지적하기도 했다. 그 후에 나는 평민을 배려하는 왕이 된다는 목적을 갖게 되었고, 그 신념 또한 성장에게만 털어놓았다.
“하지만 성장은 내가 허수아비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어요. 그건 왜죠?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게 아니었나요?”
이제야 진실이 보인다. 지금까지 나는 귀족들과 두 차례의 회의를 겼었고, 그 회의들이야 말로 바로 진짜 왕을 가려내기 위한 자리였었다. 내가 본 것은 바로 진짜 왕이 되려는 자들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휘렌델 바르테인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적당히 듣는 척만 해야 했다.
바이우스의 말대로라면 귀족들은 예상 밖의 상황을 싫어한다. 귀족들은 나를 무책임했던 페나의 영주 휘렌델로 생각했기에 전혀 경계하지 않고 그들끼리의 세력다툼에 전념했다. 그런데 나는 제대로 된 왕이 되기로 결심했고 회의 때마다 판을 주도하려 했다. 허수아비 역할로 데려온 계집애가 왕 노릇을 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들은 왕좌를 놓고 다툴 새로운 경쟁자를 반기지 않았을 거예요. 이유야 어쨌든 나는 명분상 왕좌에 가장 가까운 사람.... 때문에 모든 귀족들이 힘을 합쳐 내게 대항했겠죠. 그러면 나를 왕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나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바이우스는 내가 회의에서 돌발발언을 할 때마다 수습을 해주었던 거죠?”
바이우스는 내가 얼마나 의욕적인지를 다른 귀족들에게 숨겨왔다. 즉 그는 줄곧 내 편이었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때리기도 전부터 후회한 건 이 사실을 뒤늦게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듣기에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나는 이야기지만 내가 허수아비 왕이라는 건 엄연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바이우스는 이를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에게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가 갑자기 내게 진실을 알려준 이유도 이제 분명해졌다. 내가 적극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귀족들에게 나의 진면목을 숨기기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고아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귀족들을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가 내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를 때린 것이 미안해진다. 아직까지 코피는 멈추지 않았고 이에 더 죄책감이 느껴진다.
“공통의 적이 생기면 사람들은 힘을 합치게 되는 법입니다. 당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좋은 예죠. 헤니건 가에 맞서 귀족들이 단합한 결과 그 어린 로크 헤니건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왕이 되는데 작위의회와 왕성의회가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하지 않았나요?”
“만장일치가 나온 건 사실입니다. 마지막에 헤니건가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마음을 돌렸죠. 그 이유는 헤니건 가에게 로크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에 버금가는 혜택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베레드 원정의 총사령관 지위였습니다.”
“총사령관의 지위가 왕위만큼이나 매력적이었나요?”
“저희들이 판단하기로 바르테인이라는 나라는 하워드 선왕이 돌아가신 시점에 이미 수명이 다했습니다. 망국기에 접어든 나라에서는 군사적 지위가 곧 권력이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헤니건 가는 왕성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동시에 왕성의회는 헤니건이라는 작위의회를 대표하는 강자를 외지에 보냄으로써 왕좌에 도전할 힘을 모을 시간을 벌었죠.”
바르테인이 망국기라는 말에 또 다시 슬프고도 화가 나며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에 치우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진실을 좀 더 상세히 알고 싶어졌다.
“헤니건 가가 하워드로 개명할 만큼 약해진 건 아닌가 봐요?”
“하워드 선왕이 살아계실 때보다 약해진 건 사실입니다. 아마도 예전의 위상이었다면 로크를 왕좌에 앉히고도 남았겠죠.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왕위에 가장 가까운 이는 바로 갈라반트 헤니건입니다. 다만 가문의 이름을 하워드로 바꾸려 하는 데는 그 때 말씀드린 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이우스는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헤니건은 노골적으로 왕의 지위를 욕심낼 겁니다. 이 때 하워드라는 이름은 그들에게 유리한 명분을 제공합니다. 바로 당신과 하워드 선왕의 약혼 때문이죠. 로크가 되었든 갈라반트 본인이 되었든 당신과 결혼식을 올리려 할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왕좌의 주인이 될 테니까요.”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워드와 나의 약혼은 적자가 아니었던 숙부가 혈통상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했던 것이다. 이 휘렌델 바르테인이 바로 왕좌를 차지한 사람에게 돌아갈 포상이라는 바이우스의 말은 결코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암담한 기분이 되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작위 의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헤니건 경이라면.... 왕성의회를 대표하는 사람은 오티즈 경과 웨버 경이겠군요.”
오티즈는 첫 번째 회의에서 헤니건을 상대로 맞선 사람이었고 웨버는 두 번째 회의에서 저 오티즈에게 맞선 사람이었다.
“잘 아시는군요. 회의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죠.”
“또 다른 특징이 있어요. 저 사람들은 모두 나를 ‘왕녀님’이라고 불렀어요. 여왕이 아니라.... 다들 왕이 되고 싶었던 자들이군요.”
여기서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는데, 바이우스는 아직 나를 왕녀든 여왕이든 어떠한 호칭으로도 부른 적이 없다. 바로 조금 전부터 ‘당신’이라고 부른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왠지 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보니 쉬이 묻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잠시간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이어졌다.
“푸흡!”
난데없이 바이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도 웃긴 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웃은 게 아니라 웃음소리를 낸 것이었다.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마도 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였겠지.
헌데 지금은 달랐다. 바이우스는 저 가면같은 표정을 유지하는데 순간 실패한 것이다. 나는 아주 약간이지만 그 표정이 잠깐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 언젠가 내가 먹고 떨어지라는 말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왜 웃어요?”
바이우스는 이번에도 자신의 실수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물론 거의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는 얼른 대답했다.
“하워드 선왕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하워드요?”
“저는 그분에게 알트론 선왕이 적자가 아닌데다, 에네버 원정에 실패하는 바람에 왕의 권위가 전과 같지 않다고 진언한 바 있습니다.”
바이우스라면 충분히 그랬을 것 같다. 이 사람은 피치 못할 상황이 되면 아무리 듣기 싫은 말이어도 서슴없이 전하는 성격이다.
“하워드 선왕은 제가 그 분의 아버지를 모독했다 여기시고 몹시 진노하였습니다. 밖에 있던 수호기사를 불러 그 자리에서 저를 베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수호기사는 신성한 왕의 방을 차마 피로 더럽힐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감옥에 갇혔고 야심 많은 귀족들은 이를 왕권을 견제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힐난하자 결국 하워드 선왕은 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성장의 말이 맞았다는 게 증명된 거네요. 그게 재미있었나요?”
바이우스는 에메랄드빛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은 기사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저를 직접 때리셨습니다. 이 점이 하워드 선왕과 당신의 차이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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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메르스 때문에 일정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네요 ㅠ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분량이 좀 짧습니다;;
휘렌델 : 그러게 직접 좀 하지. 넌 손이 없니 발이 없니?
(고) 하워드 : 왕이 직접 칼들고 설치라고? 체통을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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