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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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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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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7.04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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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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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글자
11쪽

감당

DUMMY

많은 고민거리와 과제를 남긴 채 바이우스는 내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생각할수록 그를 때린 게 미안해서 계속 사과했다. 그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괜찮다고 할 때까지 말이다. 어쩌면 그가 떠난 후 적막한 방 안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이 싫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바이우스가 지금까지 떠받치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떠나자마자 감당해야 할 현실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작은 도시 페나에 있던 내게 찾아온 거짓말 같은 행운. 그것은 정말로 거짓말이었다. 나 같은 것이 왕이 되어도 되나 걱정했는데 나는 왕이 아니었다.... 주변국들에게 국력을 뜯어 먹히지 않기 위해 껍데기만 유지하고 있을 뿐, 나의 선조가 세운 바르테인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이미 끝이 났다. 새로운 왕조를 시작할, 진짜 왕의 후보는 두 셋으로 추려졌고, 나는 그 승리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남겨진 포상이었다.

생각할수록 내가 처한 상황이 암담하기만 하다. 화도 나지 않는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기운 내라. 휘렌델. 바르테인.”

품에 있던 파란 단검이 웅웅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꿈안개의 존재를 깨닫자 우울함과 슬픔이 잠시 희미해진다. 왕이 된 이후 나는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저절로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성격이 된다.

“너희는 다 알고 있었지? 내가 허수아비 왕이었다는 걸?”

초감각을 지닌 정령검들은 온 사방에 눈과 귀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실시간으로 듣고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한테 유달리 관심이 많았으니 내게 벌어진 일들은 모두 독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과연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다. 하지만 말해줄 수 없어. 우리의 초감각. 인간들이 악용하게 할 수 없다. 휘렌델이 이해해줘.”

“알아. 이해해. 알고도 모른 척 했다고 책망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너희들이라도 내 처지를 알아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정말 그랬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왕은 외로운 존재다. 한 나라의 수장은 단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이 처한 입장은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왕이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내가 처한 상황은 일반적인 왕들에게도 생소한 경험이니 더욱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령검들은 내가 겪은 일을 빠뜨리는 부분 없이 모조리 알고 있을 테고, 이는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꿈안개는 처음에 기운 내라고 한 뒤로 한참동안 머뭇거리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난 따뜻한 말 모른다. 도움이 될 수 없어. 대신 그의 말을 전해주지.”

그리고 푸른 정령검은 마법으로 내 귀에 익숙한, 또 다른 정령검의 목소리를 내게 전해줬다.

“휘렌델...”

이 순간 나는 쫑알이와 내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실감한다. 다른 정령검도 내게 벌어진 일들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다르다. 공명을 통해 서로의 속내까지 엿볼 수 있는 쫑알이는 그 이상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를 부르는 저 한 마디에도 사무치는 애틋함이 느껴졌다.

녀석은 내가 지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알고 있다. 나도 녀석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내게 일어난 일 때문에 녀석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지를 알아 차렸다. 그래서 녀석과 나 사이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힘낼게.”

단지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 말만을 해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쫑알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충고 한 마디 하지, 휘렌델. 아무도 믿지....”

그리고 그 불안한 목소리는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푸른 정령검이 소리의 전달을 끊어버린 것이다.

“칸딘이 너무 감정적으로 군 것 같다. 더 이야기하다 보면 인간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할지도 몰라. 미안하다, 휘렌델.”

이 말을 끝으로 꿈안개도 침묵을 지켰다. 정적이 흐르자 나는 다시 우울하고 불안해졌다. 너무 버겁다. 동요하는 마음을 혼자서는 진정시킨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가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기사단 숙소로 통하는 복도를 걷고 있는데 재수 없게 제시와 마주쳤다. 이 부근에서 자주 만나는 걸 보면 그녀가 맡은 구역이 바로 이 기사단 숙소 쪽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상을 팍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야! 거기 너!”

나는 그저 마른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정체를 굳이 숨길 기운조차 없다. 또 다시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따귀를 때리려 한다면, 그냥 왕인 걸 밝히지 뭐. 그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성난 걸음으로 제시가 오는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내가 조금도 겁먹지 않은 것에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너 어디 가?”

“전 메담 경의 전속 하녀에요. 그 분 심부름을 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내 가슴에 달린 명찰을 확인한 제시의 얼굴에서 가득차 있던 독기가 한 순간에 빠져 나갔다. 다행히 메담이 미리 얘기를 해둔 모양이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지 제시는 심드렁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그 때 저쪽에서 젊은 하녀 하나가 급히 뛰어왔다.

“하녀장님! 성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제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놀란 얼굴로 나를 내버려 둔 채 그 하녀를 따라 뛰어갔다. 우연의 일치이긴 하지만 바이우스는 이럴 때조차 도움이 되는구나. 나는 위기를 넘긴 것에 안도하며 조용히 한숨을 쉰 후에 메담의 방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노크를 하자 메담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메리? 이 시각에 무슨 일이야?”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잘 이해되지 않는다. 온 세상이 흐릿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잠깐 들어가도 돼?”

그는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 채고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얇은 이불을 끌어와 상체를 가린 메담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안. 날씨가 더운 탓에 좀 방 안에서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어.”

전에는 허물없이 상반신을 보여주었던 녀석이 지금은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그런가? 나는 쓰러지듯 메담의 방에 있는 허름한 의자에 앉았다. 그 동안 메담은 황급히 옷을 걸친 후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였다.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그가 정확히 무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마도 지저분한 방 안을 정리하고 있다고 언뜻 생각했을 뿐이다.

“무슨 일이야, 메리?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메담의 물음에 나는 나의 암담한 처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한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의지하고 싶은 친구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내 얼굴이 더 어두워지자 메담은 얼른 덧붙였다.

“내키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굳이 옷을 갈아입으면서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메담은 그저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옆에 있어주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게 가장 필요한 배려였다.


“자, 이것 먹어봐.”

메담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나는 곧 그게 무언지 알아보았다. 바로 아까 전에 메담과 내가 성 밖에 나가 사온 꿀꽃이었다. 우리가 살 때는 분명 하얀 꽃이었는데, 메담이 내게 준 꽃은 모양은 똑같지만 꽃잎이 투명한 색이었다.

“발리언트에게 주고 남은 게 있었거든. 먹어봤는데 달고 맛있더라. 너도 한 번 먹어봐.”

나는 꽃잎을 하나 떼어 입안에 넣었다.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파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감미가 입안에 확 퍼졌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좋은 것만 먹어온 나는 이내 옥의 티를 찾아냈다. 뒷맛이 좀 씁쓸했던 것이다.

“좀 탄내가 나네?”

“맥스에게 배운 대로 했는데.... 너무 오래 구웠나 보다.”

나를 앉혀놓고 부산을 떨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 꽃을 불에 굽느라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메담의 성의가 고마워서 꿀꽃을 모두 먹어치웠다. 단 것을 먹어서인지 기운이 솟고 기분이 좀 나아진다.

“이건 무슨 노래야?”

메담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도 모르게 ‘왕녀의 외출’을 콧노래로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얼른 둘러댔다.

“제목은 붙이지 않았어.”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메리 네가 만든 노래야?”

“으응. 내가 만들었어.”

“우와! 정말이야?”

이 녀석에게 이번만큼은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게 반갑다. 메담은 나에게 음악을 직접 작곡할 재주가 있었단 사실에 한 동안 신기해하며 왕녀의 외출을 끝까지 들었다.

“노래가 귀에 착착 감기네. 그런데 어쩐지 좀 슬프게 들린다.”

굳이 분류한다면 동요에 속할 경쾌한 노래가 메담의 귀에 슬프게 들린 까닭은 아마도 지금 내가 슬픔에 잠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 거대한 어깨에 의지하고 싶다. 마냥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몇 번이나 아버지와 함께 만든 노래를 반복해서 흥얼거렸다. 메담은 맞은편에 앉아 내가 하는 양을 계속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도록 메담과 나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기사답지 않은 기사, 메담과 왕답지 않은 가짜 왕. 알고 보니 우리는 굉장히 닮은꼴이었구나. 그래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걸까?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 나 이만 갈게.”

“그래. 조심히 가.”

작별인사를 전한 후 메담의 방을 나올 때 내 마음에는 이미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슬픔과 불안을 모두 비워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날 허수아비 취급한 귀족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내 머릿속에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꿀꽃.jpg

꿀꽃 투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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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오늘 분량은 짧습니다.

왜냐하면 불금이기 때문이죠 ㅠㅠ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썼습니다.


이번에는 예약 연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림을 어떻게 삽입해야 할 지 몰라서...

실제로 저 꽃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구워서 먹으면 단 맛이 나는 꽃이 아닙니다.

이름도 꿀꽃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지만 빌려왔을 뿐입니다.

실제로 저 꽃은 물에 젖으면 저렇게 투명해진다고 합니다.


쫑알이 : 대체 언제쯤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거야?

휘렌델 :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에서도 너는 여전히 쫑알로 나오잖아. 이쯤되면 그냥 포기해야 하는 거 아닐까? 받아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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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두 개의 초 +8 15.07.24 2,166 5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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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에콰빌리타스 +4 15.07.20 2,134 52 9쪽
78 응급처치 +6 15.07.19 2,122 5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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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흘러가는 나날 +8 15.07.10 2,354 79 11쪽
72 시행착오 +6 15.07.09 2,335 66 16쪽
71 합동 훈련 +8 15.07.07 2,128 58 9쪽
70 선물 +14 15.07.06 2,307 5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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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최선의 선택 +6 15.07.03 2,248 6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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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순서 +10 15.06.22 2,617 78 14쪽
65 세 번째 계급 +10 15.06.20 2,246 56 16쪽
64 열세 살의 고백 +6 15.06.18 2,071 61 18쪽
63 승자와 패자 +4 15.06.17 2,291 74 11쪽
62 정과 동 +4 15.06.16 1,890 60 12쪽
61 발리언트의 소원 +2 15.06.12 2,088 60 13쪽
60 청혼 +6 15.06.10 2,099 67 11쪽
59 무서운 꼬마 +8 15.06.09 2,162 63 9쪽
58 벨포트의 정령검 +4 15.06.06 2,757 6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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