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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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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7.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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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글자
18쪽

첫 눈

DUMMY

이 촛불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눌 사람이 벨루거라는 걸 깨달은 맥스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복면을 벗었다. 그리고 맨얼굴인 벨루거 앞에 그 또한 맨 얼굴을 드러내었다. 이를 본 나도 서둘러 복면을 벗었다.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맥스의 행동이 분노하는자들이라는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에 동화된 결과로 보였기 때문이다. 스물일곱? 여덟? 그와 나를 둘러싼 원은 거의 완성되었고, 우리는 초의 개수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들어왔다. 이제 나는 이 분노하는자들을 단순한 폭도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에겐 제각각 충분히 절실한 명분이 있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분노하는 자가 된 것이다.

기사단이 이들을 수사하는데 그토록 난항을 겪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이 에콰빌리타스라는 나라는 온 국민이 귀족들에게 더 이상 핍박받지 않겠다는, 매우 뚜렷한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다. 역사상 이렇게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로 뭉친 나라가 또 있었을까? 그래서 기사들이 운 좋게 사로잡았던 몇몇도 끝내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원래 바르테인 사람이 아니다. 저기 남동쪽 에네버 출신의 농부였지.”

드디어 마지막 방문자, 벨루거가 입을 열었다. 그는 우리가 복면을 스스로 벗은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서른 명이 능히 일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밀을 생산해냈다. 그렇지만 그 노동의 대가로 돌아오는 건 고작 아내와 나 둘도 배불리 먹지 못할 양이었지. 하지만 아무 불만도 없었어. 지주인 귀족에게 충성하는 게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러다.... 아내와 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벨루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 아주 잠깐의 침묵도 큰 의미로 느껴졌다.

“....아들이었어. 브루스. 책을 좋아하는 똑똑한 브루스. 그 애가 태어난 후 아내와 나는 먹는 양을 더 줄여야 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았어. 말을 하기 시작한 뒤 어느 날 그 애는 나에게 물었지. 그렇게 많은 밀을 기르는데 왜 정작 우리가 먹을 양은 부족하냐고. 나는 그 애에게 설명했지. 내가 기르는 밀이 전부 내 것이 아니라 딕슨 경에게도 줘야 한다고. 그러자 그 애는 왜 아무 것도 안하는 딕슨 경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가져가는지 물었어. 나는 그가 밀밭의 주인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그 애는 물었어. 왜 땅에 주인이 있냐고. 그건 언제 어떻게 정한 거냐고. 그 때 자기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다시 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당황했지. 그 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말했어. 그냥 우리 땅의 주인이 딕슨 경이라는 것만 기억하라고. 그 분께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한다고. 하지만 그 애는 그 말을 들은 뒤에도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만 짓고 있었지.

세월이 흘러 브루스가 10살이 되었어. 그 해 겨울 나는 일을 하다가 브루스가 딕슨의 아들놈과 말다툼하는 걸 보게 되었어. 나는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어. 뭔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브루스는 나를 발견하고 몹시 반가운 표정을 지었어. 내가 자기편을 들어줄 거라 기대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나는....”

벨루거는 또 한 번 말을 멈추었다. 이 때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브루스의 뺨을 힘껏 갈겼어. 아직도 그 애의 황망한 표정이 잊혀 지지 않아. 하지만 그 때 나는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시간이 없었지. 그 어린 딕슨 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하느라 바빴거든. 그날 브루스는 나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 한 건 다름 아닌 그 애를 위해서였다는 걸 언젠가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었거든.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브루스는 나와 통 말을 하지 않으려 했어. 어느 날 일이 끝날 때쯤 눈이 내리더군. 나는 그것이 아들과 화해할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 애는 어려서부터 눈을 참 좋아했거든.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을 한 움큼 쥐어가서 아이에게 보여주었지. 첫눈을 구경해보라고 말하면서. ‘아니에요, 아버지.’ 그 애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 그리고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어. 그 애는 쌓인 눈을 손으로 가른 후에 그 단면을 내게 보여주었어. ‘진짜 첫눈은 여기 있어요.’ 나는 그 애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 그 애가 가리킨 건 층층이 쌓인 눈이 아니라, 그 애가 눈을 파내 버리는 바람에 드러나 버린, 시커먼 땅이었거든. ‘봐요. 이거 봐요 아버지. 진짜 첫눈은 맨 위에 쌓인 게 아니에요. 그것들은 이미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아버지가 첫눈이라고 가져온 것들이 온전한 모양을 하고 있는 건 그 희생 위에 올라앉아있기 때문이라고요.’ 나는 그 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 다만 한 가지는 깨달았지. 더 이상 브루스는 눈을 좋아하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 후로 브루스는 나를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고 불렀어.“

그는 세 번째로 말을 끊고 침묵했다. 그는 촛불의식이 있을 때마다 브루스의 이야기를 해왔을까? 그 때마다 지금처럼 힘겹게 말을 이어갔을까?

“내가 에네버 출신이라는 건 얘기 했던가? 자네들은 에네버의 농부가 어떻게 바르테인에 오게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겠나?”

나는 바르테인과 에네버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한 가지 가설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대답해본다.

“전쟁....?”

“그래 맞아. 어느 날 영주가 나더러 바르테인에 가서 싸우라더군. 브루스는 어차피 전쟁에서 이겨도 덕을 보는 건 귀족들인데 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냐고 불평했지. 나는 그 애에게 오히려 화를 냈어. 나라를 위해 싸우는 건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했지. 전장에 나간 나는 나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어. 그러다 사로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어. 하지만....”

벨루거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끝내 울음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루스는 그러지 못했지....”

“아....!”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 같은 비명을 질렀다. 벨루거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브루스를 창으로 찌른 건 바르테인의 군인이었어. 나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내몰렸겠지. 그들도 우리도 전쟁을 바라지 않았어. 사실은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죽고 싶지 않았는데 우린 방패 뒤에 숨고 창을 내질러야 했지.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 귀족들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기름진 음식을 먹고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아리따운 여인을 품고 있었겠지. 그때서야 브루스가 말한 첫눈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사실 처음에 나는 바르테인 전체를 증오하고 있었어. 내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바르테인 군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었지. 그러다 소식을 들었지. 고향에 남은 아내가 브루스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더군. 내가 유일하게 바랐던 건 우리 세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뿐이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거야. 그 때 포로로 잡힌 내 앞에 바르테인의 귀족이 나타나 말하더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면 농사지을 땅을 주고 평생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야. 나는 그 때 깨달았어. 브루스가 옳고 내가 틀렸었다는 걸 말야.... 내가 정말로 미워해야 할 대상은 바르테인의 그 이름 모를 병사가 아니라, 브루스를 억지로 전장으로 끌고 나왔던 나의 몽매한 충성심이었어.”

벨루거는 이렇게 말을 맺은 후 한참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는 처음 보았던,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지극히 감정적인 면과 지극히 절제된 면을 동시에 본 기분이었다. 처음 노파의 호의 덕분에 이 분노하는자들의 이미지가 단숨에 바뀌었던 것처럼, 벨루거가 이제 폭력집단의 지도자만이 아닌, 아들을 잃어 상처 받은 한 아버지로 보인다.

“촛불의식의 마지막 순서다. 이제 그 열린 귀로 너희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 눈으로 너희들이 빼앗긴 권리를 돌아보라. 그리고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면....”

벨루거는 우리 앞으로 걸어와 불이 붙지 않은 양초 두 개를 우리 두 사람의 앞에 가만히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불을 붙여라. 너희들의 분노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은 이제 없다. 정말로 말이 안 되지만, 나는 지금 그 초에 불을 붙일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 불합리한 세상을 어떻게든 바꿔야....

“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맥스가 한발먼저 대답을 한 것이다. 벨루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왜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한 말을 잘 들었습니다. 다들 딱한 사정이 있고 좋은 분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시 도련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행여 그가 이들의 설득에 넘어갈까봐 걱정했던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맥스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태도는 옆에서 보는 나의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단호했다. 벨루거가 실망한 목소리로 그를 책망한다.

“정말 답답한 친구군. 자네 주인이 자네의 마음에 고마워할 것 같나?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할걸세.”

“.....어쩌면 그럴 겁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그에게 충성을 바치길 고집하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도련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더 할 말이 잔뜩 남은 것 같았던 벨루거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맥스의 그 한 마디에는 그 정도로 함축적인 의미가 실려 있었다.

“어쩌면 도련님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한테 화도 많이 내고 때리기도 많이 때립니다. 그러면서 고맙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도련님이 좋습니다. 도련님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한다 해도 말입니다. 지금도 무사히 성에 돌아가셨는지 궁금해 미치겠습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립니다. 제가 곁에서 돌봐드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맥스의 대답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 한편으로 또 다시 그가 미련한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백번을 생각해봐도 여기 남는 게 훨씬 더 이득이었다. 그런데도 벨루거에게 투항하기를 거부한 것은 그 답답한 성격이 또 다시 발동된 것 이외의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구구절절이 진심이 스미어 있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있어 최선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그 동안 발리언트가 맥스를 혼낼 때마다 말리지 않았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코끝이 찡해서 눈가를 훔쳐보니 이미 벨루거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맥스의 그 완고하기까지 한 태도를 보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벨루거가 이번에는 내쪽을 보며 물었다.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이 때는 나도 맥스 덕분에 꽤 평정심을 되찾은 뒤였다. 이곳 사람들의 명분에는 상당부분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지위는 정반대이지만 나 또한 귀족들과 적대하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여기 남는 건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하녀 메리가 아니라 여왕 휘렌델이기 때문이다.

“저도 여기 남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벨루거는 나에게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좋아. 알겠네....”

그는 양초를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우리 둘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이에 맥스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아까 먹은 고기 값을 내야 합니까?”

이들에게 합류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고 나니 아까 먹은 그 과분한 식사에 빚을 진 기분이 든 모양이다.

“아니. 상관없네. 그 부인은 순수하게 자네들을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네. 자네들이 거부할 가능성은 감수했을... 거야.”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그 말을 정정했다.

“생각해보니 감수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 지금까지 촛불의식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같이 우리의 일원이 되기를 택했거든. 애초에 우리가 그럴만한 낌새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접근한 덕분이겠지만.... 즉 자네들은 촛불의식을 거부한 첫 번째 경우라는 말일세.”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가씨가 솔직한 걸 원하는 것 같으니 내 숨기지 않고 대답하지.”

물어본 사람은 맥스였는데 벨루거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바닥에 놓인 촛불의 원, 우리가 불을 붙이지 않은 빈자리로 걸어갔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으로 여기 모였네. 촛불이 모여 만든 이 원처럼 한 명 한 명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있지. 허나 각각 느끼는 거리가 달라.”

벨루거는 중심으로부터 유난히 거리가 떨어진 초와, 반대로 가까운 초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군가는 좀 더 열정적으로 다가가려 하고 누군가는 좀 더 냉철하게 거리를 두고 있지. 마치 이 초들처럼. 결국 반듯한 동그라미는 있을 수 없어. 나는 이 에콰빌리타스를 만든 사람이고, 내가 맡은 역할은 이 동그라미를 유지시키는 것일세. 비록 삐뚤빼뚤한 채로라도 말일세. 가끔은 그것을 위해 편법을 동원해야할 때가 있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요?”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벨루거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자네들은 평민이야. 이곳 사람들 대다수는 자네들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자네들을 죽이자고 설득하려 하면 에콰빌리타스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이 동그라미는 무너지고 말 거야. 성 안의 평민들을 납치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꽤 위험했었거든. 하지만 자네들을 놔주면 우리에겐 위협이 될 걸세. 우린 아직 귀족사회에 정면으로 대항할 힘이 부족하거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을 생각이네.”

“당신은 우리를 죽일 생각인가요?”

맥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벨루거는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기다가 한참 후에 내 말에 대답했다.

“이건 나 혼자 정해둔 규칙이네. 자네들이 오기 한참 전에 결심했지. 누군가 이 촛불의식을 거부한다면 몰래 죽여야 한다고 말일세. 그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고 내 손만 더럽히기로 마음먹었네. 하지만 지금 고민 중이네.”

벨루거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촛불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네. 다른 사람의 사연을 묵묵히 듣는 사람.... 저 덩치 큰 친구처럼 말일세. 혹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겪은 일을 떠올리며 함께 격분하는 사람. 하지만 아가씨 같은 경우는 처음이네.”

“뭐가 처음인데요?”

“아가씨는 울었네. 그런 사람은 여태 없었지. 옆에서 지켜봤는데.... 아가씨는 누구의 말을 듣던 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 같았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맥스와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죽이겠다는 건지 아닌 건지 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벨루거도 마음을 정할 수 없는지 한참동안 팔짱을 낀 채 서서 고민하는 듯 했다. 이윽고 그는 불이 붙지 않은 초 두 개를, 그 원의 빠진 부분에 갖다 놓았다.

“이제 자네들은 합류하지 않았을 경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게 되었네. 그러니 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럴 경우 내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심이 알려질 위험도 있겠지만.... 감수하기로 했네. 자. 초가 다 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네. 그 때까지 잘 생각해보게.”

벨루거는 우리에게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대로 문을 열고 방을 나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쩐지 분위기가 점점 누그러지는 게 죽을 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되는가 싶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거짓으로 투항한 후에 그들의 신뢰를 얻고 윈더민으로 가는 임무를 맡은 뒤 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신뢰를 얻으려면 성의 구조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러면 내 목숨은 또 다시 위태로워질 텐데....

“끼이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맥스와 나는 놀라서 그쪽을 쳐다보았다. 몇 분 전에 방을 나갔던 벨루거가 서 있었다. 그는 왜 다시 돌아온 거지? 우리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게 아니었나?

“어쩌면 자네들이 생각을 바꿀 지도 모르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군.”

벨루거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촛불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서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또 한 명의 복면을 쓴 사람이 들어왔다.

“안 돼....”

나도 모르게 절망적인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떡 벌어진 어깨가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메리? 맥스? 무사했구나!”

복면 속에서 앳된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촛불을 들고 온 복면의 남자는 바로 메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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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발리언트 : 맥스가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휘렌델 : 사실 맥스 때문에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농담할 분위기라 아니라 참았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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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헛된 희망의 상징 +6 15.07.28 2,064 60 11쪽
» 첫 눈 +9 15.07.26 2,082 52 18쪽
82 두 개의 초 +8 15.07.24 2,166 52 15쪽
81 촛불 의식 +4 15.07.23 2,164 49 13쪽
80 동화를 싫어하는 자 +10 15.07.21 2,004 49 9쪽
79 에콰빌리타스 +4 15.07.20 2,134 52 9쪽
78 응급처치 +6 15.07.19 2,123 51 11쪽
77 미끼 작전 +12 15.07.17 2,015 57 18쪽
76 호박 머핀 +6 15.07.16 2,093 63 12쪽
75 첫 번째 대장 +12 15.07.14 2,236 54 11쪽
74 윈더민의 우상 +8 15.07.12 2,250 4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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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승자와 패자 +4 15.06.17 2,291 74 11쪽
62 정과 동 +4 15.06.16 1,891 60 12쪽
61 발리언트의 소원 +2 15.06.12 2,089 60 13쪽
60 청혼 +6 15.06.10 2,101 67 11쪽
59 무서운 꼬마 +8 15.06.09 2,163 63 9쪽
58 벨포트의 정령검 +4 15.06.06 2,758 6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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