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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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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7.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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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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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글자
9쪽

동화를 싫어하는 자

DUMMY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방금 기사 두 명이 전부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메담은, 우리와 같이 있던 그 기사는 죽지 않은 건가요?”

“그러면 발리언트 도련님도 무사하신 겁니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맥스가 부상도 잊고 벌떡 일어날 것 같은 기세로 물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움직인 까닭에 고통스러운지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벨루거는 혀를 끌끌 차면서 딱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그들이 걱정스럽나? 참으로 딱한 아이들이구나.... 그러면 묻겠다. 반대의 상황에서 과연 그들은 너희를 걱정해줄 것 같은가?”

“물론이죠!”

나는 그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벨루거가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귀족들은 하녀나 종자가 없어졌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망쳤다 생각하고 화를 낼 가능성이 더 높다. 아마도 현상금 사냥꾼에게 주살할 것을 의뢰한 후에 새 사람을 구하겠지. 하지만 메담은 다르다. 그는 틀림없이 나를 걱정해줄 것이다. 아까의 상황만 해도 녀석은 우리를 살리려고 자기 목숨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던가.

“....모르겠습니다....”

맥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람켄에겐 따뜻한 면이 있다. 메담을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하지만 그것은 메담이 기사단에 처음 들어와 아무 것도 모르는 그에게 먼저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발리언트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녀석이었다. 메담만 예외적으로 대하는 건 명목상 그가 귀족인 까닭도 있다. 나를 포함한 다른 하녀와 하인들에겐 퉁명스럽고 쌀쌀맞게 대한다. 이러한 연유로 발리언트가 맥스를 걱정해 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맥스는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사람이었고, 그 때마다 발리언트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그를 처벌해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는 나의 확신에 약간 당황하던 벨루거는 맥스의 위축된 태도에 기세등등한 여유를 되찾았다.

“자, 이제 진실의 눈을 뜰 때가 된 것 같구나. 이제 촛불의식을 시작할 시간이다.”

말을 마친 후 그는 우리에게 검은 복면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복면을 받았지만, 왠지 이들에게 동조하는 것 같아 쓰는 건 꺼려졌다.

“이건 뭔가요? 얼굴을 가리라고요?”

“너희는 통상적인 경로로 유입된 자들이 아니다. 만약을 대비하여 함부로 우리 국민들의 얼굴을 보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에콰빌리타스는 평등한 곳이다. 너희가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그들도 너희 얼굴을 보아선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아까 우리의 안대를 벗겨주었던 사람들은 뭐죠?”

“그들은 각각 너희를 데려온 자들이다. 이미 너희의 얼굴을 알고 있는 상태였지. 다시 말하지만 너희는 특수한 경우다. 정상적인 형태였다면 그들은 너희를 설득한 사람들이었을 테고, 굳이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 말은 원래는 납치로 세력을 불린 게 아니라는 뜻인가? 벨루거는 말을 하는 동안 돌아다니면서 커튼을 차례차례 쳤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이 차단되면서 점점 방안이 어두워진다. 경계심이 든 나는 복면을 들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커튼을 치는 건 촛불의식이라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거겠죠? 대체 그게 뭔가요? 어떻게 하는 거죠?”

“지금부터 이 에콰빌리타스의 국민들이 한 사람씩 이 방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분노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촛불의식이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되나요?”

“아니.”

벨루거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대부분의 커튼이 닫혔고 그는 어둠과 빛의 경계가 되어버린 창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방안에서 유일한 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마치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건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라고요?”

“아이야. 어쩌면 아직까지 동화를 좋아할 나이로 보이는구나.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제니퍼 공주요.”

“그래. 제니퍼 공주. 아름다운 이야기지.”

벨루거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넌 엘프를 만난 적이 있나?”

뜻밖의 물음에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정곡을 찔린 느낌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산과 들로 그렇게 나갔던 이유도 제니퍼에 나오는 엘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유명한 제임스 코벳이 엘프를 만난 곳이 숲 속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 엘프를 만나는 행운 같은 건 찾아오지 않았다.

“너의 어머니는 아마 계모에게서 혹사당했던 제니퍼처럼 살아오셨을 거야. 어때? 참고 견디고 열심히 일하신 너희 어머니는 엘프를 만나신 적이 있나?”

물론 어머니는 귀부인으로서 평생을 우아하게 사셨지만 여기서 굳이 그 사실을 말해서 내 정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일단은 평범한 하녀라고 가정하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니요.”

“얘야, 나는 사실 동화를 무척 싫어한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야. 주인공은 항상 참기만 하지. 아무 것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아. 그런데도 꼭 행운이 찾아와.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행운이 말야.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제니퍼가 왕자와 결혼했다는, 행복한 결말만 기억하지.”

벨루거는 여기까지 말한 후 마지막 커튼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방 전체가 작은 빛 하나 없는 어둠에 잠겨 버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벨루거의 목소리가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동화를 믿지 말거라, 얘야. 동화야 말로 귀족들이 우리를 세뇌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우리를 세뇌시키다니요?”

“어린 나이일 때부터 막연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거야.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참고 노력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도록 말야.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거야. 무언가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화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생각해봐라, 얘야. 스스로 생각해 보거라. 현실은 동화와 같지 않아. 현실에선 우리가 제니퍼처럼 성실하면 귀족들만 편해지고 부자가 되지. 우리가 제니퍼처럼 착해질수록 그들이 우릴 다루기가 한결 더 쉬워져.”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증거가 바로 나니까. 내가 바로 귀족인데 평민들을 세뇌시킨다는 말 같은 건 들은 적이 없다. 나도 순수한 마음에서 제니퍼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그 동화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이상 귀족들의 발명품이 아니라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 벨루거가 동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 체제를 유지 존속하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강철거인의 후예들이 정복자가 된 건 성을 짓고 철을 다룰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백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직계인 귀족들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 이제 우리가 성을 짓고 모루에 망치를 내리치고 있지.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뒤떨어질 것이 대체 무엇일까?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들을 떠받들고 있는 이유는 대체 뭘까? 생각해 본 적 있니, 아이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이 질문에 대다수의 귀족들이 우리는 ‘고귀한 혈통’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귀족에게는 당연한 그 논리가, 벨루거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할크루 시대에 증명되었다. 우리 평민들이 변화할 의지를 가지면 능히 귀족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야. 이건 당연한 결과야. 왜냐면 우리의 수가 귀족들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한다. 아직 저 밖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이 무수히 많다.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노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벨루거의 논리는 무서울 정도로 설득적이었다. 나는 이 분노하는 자들이 장래에 바르테인을 무너뜨릴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들에게 내 목숨이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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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미리 공지드립니다.

내일은 일 떄문에 연재를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ㅠ

본문에서 언급된 제니퍼 공주라는 동화....

우리가 보통 동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와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걸 대강 눈치채셨을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콩과 팥과 관련된 매우 흡사한 이야기가 있지요.

그래서 비슷한 이야기가 여기에도 하나 정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레에 드디어 촛불의식이 나오겠네요.

아무래도 1부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중의 하나인만큼

신중해 지나 봅니다.

당연히 오늘 분량에 촛불의식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루이 : 동화를 싫어하신다고요? 저와 같군요. 저 또한 주인공들의 수동적인 태도가 마음에 안듭니다.  

벨루거 : 나는 음유시인도 싫어해. 동화를 퍼뜨리고 다니잖아.

루이 : 헉....!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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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헛된 희망의 상징 +6 15.07.28 2,063 60 11쪽
83 첫 눈 +9 15.07.26 2,081 52 18쪽
82 두 개의 초 +8 15.07.24 2,166 52 15쪽
81 촛불 의식 +4 15.07.23 2,163 49 13쪽
» 동화를 싫어하는 자 +10 15.07.21 2,004 49 9쪽
79 에콰빌리타스 +4 15.07.20 2,134 52 9쪽
78 응급처치 +6 15.07.19 2,123 51 11쪽
77 미끼 작전 +12 15.07.17 2,015 57 18쪽
76 호박 머핀 +6 15.07.16 2,092 63 12쪽
75 첫 번째 대장 +12 15.07.14 2,235 54 11쪽
74 윈더민의 우상 +8 15.07.12 2,249 48 11쪽
73 흘러가는 나날 +8 15.07.10 2,354 79 11쪽
72 시행착오 +6 15.07.09 2,337 66 16쪽
71 합동 훈련 +8 15.07.07 2,129 58 9쪽
70 선물 +14 15.07.06 2,307 55 12쪽
69 감당 +12 15.07.04 2,343 61 11쪽
68 최선의 선택 +6 15.07.03 2,248 68 12쪽
67 후회할 짓 +10 15.07.02 2,254 67 10쪽
66 순서 +10 15.06.22 2,618 78 14쪽
65 세 번째 계급 +10 15.06.20 2,247 56 16쪽
64 열세 살의 고백 +6 15.06.18 2,071 61 18쪽
63 승자와 패자 +4 15.06.17 2,291 74 11쪽
62 정과 동 +4 15.06.16 1,890 60 12쪽
61 발리언트의 소원 +2 15.06.12 2,088 60 13쪽
60 청혼 +6 15.06.10 2,100 67 11쪽
59 무서운 꼬마 +8 15.06.09 2,162 63 9쪽
58 벨포트의 정령검 +4 15.06.06 2,757 6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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