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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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이 날이 특별한 건 이 때문이다.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전에 단검 던지는 남자와 조우했을 때에도 목숨을 잃을 뻔 하긴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인데다, 쫑알이와 처음으로 공명을 경험하기도 해서 죽을 뻔했다는 사실 자체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흐려졌었다. 더구나 그 위기상황도 매우 빨리 끝나서 죽음을 실감할 틈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압도적인 공포와 절망을 맛보았고, 거기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숨 가쁘게 달리는 동안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몸서리치도록 실감했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그래서 벨포트가 화살을 쏠 때 이미 난 죽음을 인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기분은.... 참으로 더러웠다.
“챙!”
이쯤이면 화살이 박히고 내가 죽겠구나 싶은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굳어버린 상태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벨포트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또 한 번 활을 쏜다. 그 직전 누군가의 거친 손길이 내 등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외부에서 작용한 힘에 의해 내 몸이 균형을 잃고 왼쪽으로 넘어졌다. 그러는 순간에도 나는 벨포트에게서 부릅뜬 눈을 떼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가 화살을 활줄에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포트는 나를 노린 세 번째 화살을 쏘지 못했다. 쏘려는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온, 빙글빙글 도는 물체를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벨포트가 더 이상 위협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우선 몸 상태부터 점검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에게로 정확히 날아왔던 화살은 보이지 않았다. 통증이 느껴지는 곳도 없고 나는 숨을 쉬고 있다. 나는 무사했다.
“잡았다!”
“놈들이 오기 전에 퇴각하라!”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할 틈도 없이 뒤쫓아 온 괴한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뭔가 수상해 보이는 손수건이 코와 입을 덮는다. 잔인한 자식들.... 어차피 넘어져 있어서 저항할 수도 없는데.... 나는 몽롱한 기분 속에 점점 빠져들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에 닿는 거친 천의 느낌. 안대로 눈을 가렸구나. 이를 벗으려 해보지만 내 손이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힘을 줘서 확인해본 후에야 팔이 뒤로 돌려진 채 손목이 묶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바탕 크게 흔들린 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밀폐된 상자 같은 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수레인 것 같다. 바퀴가 굴러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길이 별로 좋지 않은지 흔들림이 끊이지 않는다. 아마 숲속이나 산인 것 같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청아하고 예쁜 새 소리도 간간히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시나브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안 좋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최대한 냉정하게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려 애썼다. 일단 나는 살아있다. 우선 여기에 감사부터 하고 보자. 그리고 놈들은 나를 살린데 그치지 않고 일부러 수레에 실어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분간 날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문득 메담과 맥스가 걱정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도망쳤을까? 특히 맥스는 가슴에 화살까지 맞았는데.... 나는 묶여있는 채로 최대한 몸을 움직여 사방을 더듬으며 나 외에 누가 이 수레에 실려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이 수레가 꽤 작다는 것과 이 안에는 나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득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꿈안개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원래 정령검으로부터 마법을 끌어내려면 손잡이를 쥐어야 하지만, 정령검이 자발적으로 주인을 돕고자 할 마음이 있으면 신체적 접촉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천만다행으로 역사상 최초로 정령검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인간이었다. 놈들 몰래 꿈안개를 이용해 기사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말한다면 무사히 탈출할 수도 있겠다.
“혹시 내 목소리를 전달해줄 수 있어?”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언제나와 같이 메리가 될 때마다 옷 안 허리춤에 감춰둔, 단검크기로 줄인 꿈안개에게.... 으응? 이럴 수가! 없다! 허리춤에 매어둔 그 검이 없어졌다! 왕궁기사단장이 정해지면 그의 손에 전해주어야 할 푸른 정령검이 사라졌다!
혹시 달리는 중에 떨어졌나? 그런 것 같진 않다. 아니면 벨포트가 화살을 쏠 때 넘어지면서 흘렸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위기에서 벗어날 묘안을 찾기는커녕 더 큰 걱정거리가 생겨버렸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둠 속에서 침울해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걸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고생하네.... 이번 녀석은 쓸만해 보여?”
그러자 내가 실린 수레를 끌고 가는 남자가 대답했다.
“놀라지 마. 여자야, 여자.”
“뭐? 여자라고?”
먼저 말을 걸었던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수레를 끄는 남자가 신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게다가 젊고 예뻐.”
“정말이야? 한 번 봐도 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런 불한당 놈들이 내 외모에 대해 품평하는 건가?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끔찍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레를 끄는 남자가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안 돼. 아직 촛불의식도 하지 않았잖아.”
“아... 그렇지? 제발 문신을 했으면 좋겠네.”
“문신을 하는 건 남자들만이야. 잊었나? 여자는 귀고리야, 귀고리.”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나를 실은 수레는 계속 움직였고, 그에 따라 말을 걸어온 남자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이제는 상당히 거리가 벌어졌는지 남자들은 서로에게 수고하라는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수레는 이후 두 명의 남자를 더 지나쳤다. 이는 곧 3중의 감시망이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참으로 용의주도한 녀석들이었다. 바르테인 최고의 기사들이 단서 하나 얻지 못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수레가 멈췄다. 정신이 든 후로 대략 1시간 정도를 수레에 타고 온 것 같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걸음으로는 40분쯤 걸렸으려나? 나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일부러 정신을 잃은 척을 했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어깨에 들쳐 메어 어딘가로 데려가는 동안 장소를 특정할만한 단서 같은 건 전혀 얻어내지 못했다.
“끄으응.... 끙...”
희미한 신음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반가움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맥스? 맥스...! 거기 있어요?”
“....아, 아가씨?”
그가 말을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감격스러울 줄은 몰랐다. 나는 벅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맥스? 살아있었군요!”
“살아있습니다. 아가씨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이상해. 맥스가 이렇게 작은 목소리를 낼 때도 있다니. 그래도 정신은 온전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어서 그의 상태를 직접 보고 싶었는데 때마침 누군가 안대를 벗겨주었다. 시야가 확보되자 한 순간에 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일단 우리는 벽돌로 지어진, 꽤 그럴싸한 건물 안에 있었다. 하녀나 하인의 방처럼 작은 장식품 하나 없는 그런 방 안 말이다. 그 방안에는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아직까지 가슴팍에 화살이 꽂혀 있는 맥스가 누워있었다.
그리고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아니 사실 둘은 남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체형으로 봐서는 확실히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남자라고 확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맥스와 나의 눈을 가린 안대를 동시에 벗겨 준 뒤 즉시 방을 나갔다.
유일하게 남은 세 번째 남자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희끗희끗 흰머리가 섞인 밤색 머리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나와 맥스를 번갈아 보며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벨루거....”
“수건을 갖다 줘요. 빨리!”
나는 부리나케 맥스에게 달려가 화살이 꽂혀 있는 부위를 살폈다. 세상에 이걸 치료라고 한 건가? 그냥 짓이긴 약초를 갖다 붙였을 뿐이잖아? 사실 내가 의술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셀린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한 시간 동안이나 사람 몸속에 쇠붙이가 들어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빨리요!”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황급히 아까 그 복면 쓴 머저리들을 불러냈다. 그제야 수건을 받은 나는 또 다른 것을 요구했다.
“이것을 빨리 풀어줘요.”
중년의 남자는 내 손목을 묶은 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풀어주었다. 나는 자유로워지자마자 수건을 똘똘 뭉쳐 혹시 모를 출혈의 압력에 대비했다.
“맥스. 조금 아플 거예요. 하지만 참으세요. 알았죠?”
맥스는 찡그린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중년의 남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화살을 뽑을 거예요. 그러면 빨리 그 수건으로 상처를 틀어막아 주세요. 할 수 있겠죠?”
중년의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믿음이 안가는 꼰대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상처 부위의 근육이 수축하면서 화살을 꽉 물고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을 뽑는 과정이 훨씬 더 어렵고도 중요한 작업이니 이건 내가 직접 해야 한다. 사실 나도 처음이지만.... 아무튼 여차하면 화살을 뽑은 후에 내가 직접 지혈해야지.
“하나, 둘, 셋!”
나는 구호에 맞추어 힘껏 화살을 뽑았다. 피가 흘러나오는데 꼰대가 제법 민첩하게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맥스?”
“윽... 괜찮습...”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걸 봐선 다행히 큰 위기는 없는 것 같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피도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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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셀린 : 그런데 맥스는 왜 휘렌델에게 존댓말하는 거죠? 나한테는 반말 하잖아요? 극중에선 똑같은 하녀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내가 휘렌델보다 나이도 많은데.
맥스 : 윽, 그건....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뭔가 꿀리는 기분이 들어서....
휘렌델 : 쳇.... 괜히 살려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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