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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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 사건 후로 발리언트는 셀린을 피해 다니고 있다. 셀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일을 계속 하려 하는데 이 속 좁은 자식은 그녀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결국 녀석의 방을 담당하는 하녀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다.
수호기사로 선발된 이후 그의 위상은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달라졌다. 발리언트는 단순히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가, 나이에 비해 검술이 뛰어난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지닌 실력만으로도 기사단내에서 상위권의 서열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호기사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야간경비를 제대로 설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기사들을 가볍게 때려눕히는 이 무서운 꼬맹이가 의외로 겁이 많았던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방에 들어갈 때면 홀로 복도에 남게 된 발리언트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내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를 보다 못한 나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결코 경의 실력을 의심하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경은 나보다 키가 작아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는 힘들어요. 그런데 때마침 경의 종자가 상당히 위압적인 체구를 갖고 있더군요. 경호 임무 때마다 그를 동반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는 야간경비도 두 사람이 함께 라는 조건을 듣자마자 군말 없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행여 발리언트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조심스러웠는데 이야기가 잘 풀려서 다행이다.
“내색은 안하시지만 도련님은 여왕님께서 신중하게 말씀해 주셔서 은근히 기분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한 사람의 기사로 인정받았으니 말입니다!”
나중에 맥스는 메리에게 그 때의 대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
발리언트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같은 수호 기사인 벨포트에 대해서도 뭔가 말해야 할 텐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다. 어느 날 벨포트는 유달리 내게 말을 많이 걸어왔다. 그런데 그 날은 회의에서 내가 하려는 것마다 다 막혀서 몹시 짜증이 나있었고 그의 말에도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의 검이 어느 순간부터 검은색 몸체에 황금색 무늬가 새겨진 스미스가의 정령검으로 바뀌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며칠 후의 일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 검을 어떻게 그의 아버지에게 양도받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아 물어보지 않았다.
나한테도 정령검이 한 자루 있다. 윈더민 왕궁기사단장에게 대대로 전수된다는 푸른 정령검. 나는 이 녀석을 꿈안개라고 부르며 손바닥만한 단검으로 줄여서 허리에 차고 다닌다. 알아보니, 이 녀석의 크기가 자유자재로 변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역사서를 뒤져 보아도 그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왠지 역사상 처음으로 이 녀석과 말해보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우쭐해졌다. 원래 머리는 좋았던 녀석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말하는데도 점차 능숙해졌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의 환영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녀석의 마법으로 몸을 투명하게 만든 후에 여자 탈의실을 기웃거린 기사단장은 혹시 없었는지 농담 삼아 묻자 꿈안개가 진중하게 대답했다.
“너희 인간들도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종족.... 기본적으로 마법에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 정도는 천차만별이지만...”
“그러면 네 환영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다는 거야?”
“아니. 내 환영은 공격성이 없는 마법이다. 아무리 저항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저항력이 거의 발동되지 않는다. 나의 환영은 사람은 별로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은 많이 가린다.”
“어떤 상황인데?”
“크게 두 가지다.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 상대방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일 때, 그리고 보고 싶은 것일 때.”
재미있네. 서로 상반된 상황인데 똑같이 환영에 저항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건가?
“예를 들면 발리언트... 그는 귀신을 무서워한다. 몹시 보기 싫어하지. 그에게 귀신의 환영을 보여주면 그는 단번에 그것을 꿰뚫어 볼 것이다. 왜냐하면 보고 싶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볼까? 웰링턴.... 그는 엘프들의 영약 엘릭서를 애타게 찾았었다. 그 순수한 욕구가 환영이 만들어낸 거짓을 단번에 흩어버릴 것이다.
수호기사 선발전 때를 기억해보라. 내가 만들어낸 환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휘렌델 바르테인은 당연히 정해진 수순대로 그 자리에 앉아있어야 했다. 누가 휘렌델이 그곳에 있기를 간절히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것이 환영이었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의 마법을 이용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귀중한 정보였다.
나와 친분이 있는 또 다른 정령검, 아니 개인적으로 꿈안개보다 더 마음이 가는 쫑알이와는 그날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정령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섣불리 내게 말해주려 했기 때문일까? 꿈안개는 두 번 다시 그의 목소리를 내게 전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주인인 앤디가 요근래 크루거와 함께 계속 바빠 직접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립지 않았다. 녀석과 나는 어딘가 이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녀석이 무사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도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쫑알이와 내 사이에는 단 한 마디 인사말이면 충분하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사냥대회가 열리기 전에 며칠 동안 화살 쏘는 것을 연습했다. 처음치고 꽤 잘 쏜다고 칭찬 받았다. 바이우스의 말처럼 당대 최고의 기사들을 수없이 배출한 바르테인의 혈통 덕분인가? 그러나 정작 사냥대회 때는 단 한 마리의 동물도 잡지 못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녀석들을 도저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6월이 끝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나는 메담을 보좌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휘렌델의 생애 첫 친구. 나처럼 하루아침에 높은 자리에 올랐고, 그 때문인지 아직까지 자기 역할도 제대로 못해내는 푼수 같은 녀석. 하지만 누구보다도 의리 있고 마음 따뜻한 사람이 바로 메담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내 원래 정체를 숨기고 있는 까닭에 마음을 다 터놓는 사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현재 내게 심적으로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은 메담이었다. 그리고 메담처럼 나도 매일 저녁, 음식을 얻으러 오는 고아소년들을 만나는 것이 하루의 낙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아끼던 자루를 메담에게 서슴없이 주었다던 토마스라는 소년. 그는 유독 메담을 따랐다. 반면 나는 앞을 못 보는 소년 테드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해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보기 어렵다. 내가 의도적으로 말을 많이 걸었다.
“요 며칠 동안 비가 많이 왔는데... 혹시 감기 걸린 사람은 없었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메리. 다행히 모두들 건강해.”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서 고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상세히 알아내려 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비록 내가 좋은 왕은커녕 왕이 되는 것부터 반쯤 손을 놓은 상태이지만,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평민을 배려하는 왕이 되자.’
그 때 나는 굳건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좋은 왕이 되기 위한 첫 걸음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다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그날은 나에게 가장 빛나는 하루였다. 그래서 고아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좋은 왕으로서의 내가 끝내지 못한 일이며 가장 찬란한 순간에 피우지 못한 꽃처럼 여겨졌다. 즉 테드에게 고아들이 얼마나 힘든지 듣는 것은 내가 끝내지 못한 과제를 상기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테드와의 대화를 통해 얻는 것이 더 있었다. 테드는 눈은 보이지 않지만 함께 지내는 고아 소년들을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고아소년들의 일상을 말하다 보면 자연히 그가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기 마련이다. 이는 내게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들이었다.
“사실 애들이 나를 이만큼 대우해주는 것도 내게는 감지덕지야.”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장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평민들에게 배척받는 제 3 계층인 고아들.... 앞을 볼 수 없는 테드는 그 고아들 사이에서도 멸시당하기 가장 쉬운 입장이었다.
“내게는 이 녀석들이 생명의 은인이야. 지금도 이 녀석들 덕분에 하루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늘 고마운 마음뿐이지.”
“이 애들은 처음 널 볼 때부터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거야?”
테드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날 거두어준 사람은 첫 번째 대장이야.”
“첫 번째 대장? 메담을 말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6년 전 추첨제에 뽑혀 귀족이 되기 전까지, 메담이 이 패거리의 대장 노릇을 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아니. 첫 번째 대장은 바로 우리 패거리를 만든 사람이야.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메담과 나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잘해주는 어른인 그 사람을 굉장히 좋아했어. 지금까지도 그리워하고 있어. 토마스도 메담과 내 얘기만 듣고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중이야.”
“어른? 어른이었다고?”
나는 깜짝 놀라 이렇게 되물었다. 테드들과 어울리면서 알게 된 것인데 고아들 패거리는 대부분이 아이들이었고, 테드만 해도 제법 나이가 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대장이라는 사람이 어른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하는 사람이었어?”
“그건 잘 모르겠어.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거든. 항상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지. 그래서 우린 항상 그 사람을 복면 아저씨라고 불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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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원래는 분량이 더 길었습니다. 그것도 훨씬 더 많이...
테드가 자신이 겪은 여러 사례를 이야기 해주며
휘렌델에게 리더로서 겪는 고충을 일깨워 주는 내용이 상당히 길게 이어졌는데...
다 쓰고 보니 글의 전체적인 흐름과 상관없는 내용이었습니다.
‘Do not tell, show.’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철학적 주제라 해도 등장인물끼리의 대화로만 구현된다면 전혀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하느니만 못하죠.
작가로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등장 인물의 대사로 늘어놓는 것보다,
작품 내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통해 구현해 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테드가 속한 고아 소년들은 비록 경제적 조건은 열악하지만 서로 간의 신분의 차이가 없습니다. 즉 평등한 민주주의 집단을 대변하고 있다 볼 수 있죠. 테드가 리더로써 경험한 교훈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공감이 될지는 몰라도 휘렌델이 처한 상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그녀가 겪을 사건과도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는데....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 내용들을 전부 지워버렸습니다ㅠㅠ
단지 교훈을 위한 교훈은 바라지 않으니까요.
벨포트 : 내가 가문의 정령검을 아버지에게서 받을 수 있었던 건 다 나의 유창한 언변 덕분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이 정령검은 바로 옆에서 왕을 지키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무기라고 강변했고, 아버지는 나의 그 열정에 감동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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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포트 : 나한테는 ‘안물안궁’도 없는 건가....ㅠㅠ 그보다 아무도 내 말에는 대꾸를 해주지 않는 건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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