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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429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6.18 07:00
조회
2,071
추천
61
글자
18쪽

열세 살의 고백

DUMMY

나는 꿈안개에게 부탁해 환영을 없애고 원래의 모습으로 보이게 한 뒤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크루거와 조우했다. 함께 경기장 관람석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수호 기사는 꼭 네 명이여야만 하는 건가요?”

발리언트의 아쉽고 분한 얼굴이 아직까지 눈앞에 아른거린다. 저렇게 작고 어린 꼬마가 어른들을 압도한 끝에 벨포트를 상대로 끝까지 맞서던 모습은 내게 적잖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어떻게든 이 기특한 소년을 돕고 싶었다. 다행히 나는 왕이었고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수호 기사의 정원을 늘려 발리언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꼭 그런 규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네 명을 선출하여왔습니다.”

“나는 오늘 다섯 명을 선출할까 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의 말에 크루거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공하오나 그 이유를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벨포트 경과 발리언트 경의 결투에 나는 몹시 감명 받았어요. 두 사람 모두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죠.”

크루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기사단에 정식으로 합류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된 소년 기사가 이 정도로 선전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 결투가 끝났을 때 문득 어느 한 쪽을 떨어뜨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사람의 실력은 거의 종이 한 장 차이였어요. 양쪽 모두 수호 기사가 될 자격이 있어요.”

크루거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항상 나를 깍듯하게 모시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을 때는 간언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는 내 말에 서슴없이 이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수호 기사 선발전입니다. 승자는 선택되고 패자는 떨어지는 토너먼트. 여기에 참전한 기사들 모두 동의한 방식입니다. 발리언트에게만 특혜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크루거의 말에 나는 신중해졌다. 또 다시 내 개인적인 감정을 우선한 게 아닌지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는 지금 사적인 감정 때문에 발리언트에게 특혜를 베풀려 하고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발리언트에게 특혜를 베푸는 것이 완전히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크루거 경. 수호 기사 선발전을 여는 이유가 뭔가요? 가장 실력이 좋은 기사를 가려내는 것이 그 목적 아닌가요?”

“맞습니다.”

“네 번의 8강전이 끝나면 네 명의 우승자가 나올 거예요. 하지만 그들이 과연 지원자 중에서 가장 강한 네 명일까요? 그 네 사람이 모두 발리언트 경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발리언트 경이 8강에서 벨포트 경이 아닌 다른 세 사람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크루거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토너먼트 방식에는 바로 이러한 맹점이 있어요. 실력이 아니라 운에 의해 승리를 얻는 경우도 생기죠. 나는 이 점을 보완하려는 거예요. 하지만 크루거 경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어요. 아무 명분 없이 발리언트 경을 다섯 번째 수호 기사로 임명하면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겠죠. 저는 그렇게 임의로 결정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8강의 문턱에서 아깝게 좌절한 네 명의 기사들끼리 또 경합을 벌여서 그 우승자를 다섯 번째 수호 기사로 임명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뒤 나는 내 논리를 점검해 보았다. 수호기사를 반드시 네 명으로 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섯 번째 수호기사를 선발하는 방법도 토너먼트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하는 형태였으니 크루거가 염려하는 반발이 생길 가능성도 없다. 발리언트는 충분히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고 그의 탈락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다섯 번째 수호 기사를 선발하자고 제안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내 생각에는 크게 무리가 없는 것 같은데 크루거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하는 남자였다.

“여왕님께서는 전례를 깨고 역사상 최초로 왕이 된 여성이십니다. 수호 기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전례를 따르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연관 지어 생각할 것입니다. 여왕님께서 연약한 여성이시기 때문에 더 많은 수호 기사를 선발하시려 한다고 사람들이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이 천하의 휘렌델 바르테인이 연약해 보일까 걱정할 날이 오다니..... 어머니. 보고 계세요?

“괜찮아요. 그런 소문에 개의치 않을 테니 다섯 번째 수호 기사를 선발해 주세요.”

나는 크루거의 반론을 듣고 한결 마음을 놓았다. 왜냐하면 그가 다섯 번째 수호기사를 선발하려는 명분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내 주장이 나름 합리적이며, 크루거 또한 이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여왕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크루거의 간언은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면을 일깨워주려는 것일 뿐, 나를 설득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앤디를 불러내어 상의한 후에 8강에서 탈락한 네 명만이 참여하는 토너먼트를 통해 다섯 번째 수호 기사를 선발한다는 사실을 공지했다. 새로운 구경거리가 생긴 관람객들은 몹시 기뻐하며 소리 높여 함성을 질렀다. 기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네 명의 탈락자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가 된 기사는 야무진 꼬맹이 발리언트였다.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다섯 번째 수호기사가 된 그의 투구에 수호 기사를 상징하는 하늘타리 꽃을 달아주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발리언트 역시 여왕인 나와 마주하면서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얼떨떨해서 그런가? 평상시에는 고양이처럼 뚱한 얼굴인 녀석이 지금은 열 세 살짜리 어린애처럼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편으로 이 녀석은 지금 셀린에게 어떻게 고백해야할 지 고민 중인 것 같다. 지금 완벽히 무방비 상태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눈에 보인다.

꿈안개가 자기 환영에 저항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벨포트는 이번에도 역시 내가 메리와 동일인물 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발리언트의 검과 부딪쳐 찌그러진 투구에 얼른 꽃을 꽂아주고 의식을 마쳤다.

내가 직접 하늘타리 꽃을 투구에 꽂아준 벨포트, 이안, 노만, 브루노, 그리고 발리언트. 다섯 명의 기사는 검을 높이 들고 그들의 목숨을 바쳐 나를 지키기로 맹세한 뒤 수호기사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수호기사 선발 과정은 모두 끝이 났다.

“벌써 이름을 모두 외우셨나 보군요. 아까도 벨포트와 발리언트의 이름을 알고 계시더니....”

크루거는 임명식이 진행되는 내내 수호기사들의 이름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것에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의 말에 제법 놀랐다. 그가 이렇게 사적인 말을 먼저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들의 이름을 한 번에 외운 것이 크루거에게 제법 깊은 감명을 주었나 보다.


앤디와 크루거는 이제 나를 경호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분노하는 자들에 대한 수사를 공동지휘하기로 했다. 여기서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왕궁기사단장의 검과 망토를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두 기사단장 후보가 나를 경호하면서 교대로 착용했었는데 이제는 그 역할을 수호기사들이 맡게 되었으니 어느 한 쪽이 맡기가 애매해진 까닭이다.

수호기사 임명식을 끝내고 경기장을 나올 때는 대략 오후 다섯 시 경이었다. 나는 곧바로 방에 돌아왔다. 다섯 명의 수호 기사 중에 가장 먼저 나를 경호하게 된 사람은 벨포트였다. 그는 여전히 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고 이것이 부담스러워 나는 매우 빨리 걸어야 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메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밀통로로 들어가 하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벨포트는 환영에 저항했고, 메담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었다.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꿈안개의 마법에만 의존하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게다가 내 눈에는 내가 여전히 휘렌델로 보이는데, 메리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건 내가 불편하고 어색했다. 역시 하녀의 옷으로 갈아입으니 나는 완전히 메리가 되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느낌이 자연스럽다. 메담은 이 미묘한 차이를 간파했던 걸까?


비밀통로를 통과하고, 여느 때와 같이 더럽고 냄새나는 음식 쓰레기 창고에 들어선 나는 한 번 안을 살폈다. 여차하면 이 안에서 멀쩡한 음식만 골라 자루에 넣을 수도 있겠다 싶어 확인해 본건데, 오늘따라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틀림없이 바이우스가 무상급식을 추진한 결과일 것이다. 나는 그의 빠른 조치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탄했다.

하녀의 복장을 하고 있는 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받아오는 건 어렵지 않다. 적당한 귀족의 이름을 대면서, 가져다 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면 조리사들이 안 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말을 따로 맞출 필요가 없는 여왕 휘렌델의 이름을 댈 작정이니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음식을 챙길 때 꿈안개의 도움을 받았다. 하녀 메리인 상태에서는 가급적 최소한의 사람들만 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령검이 환영을 펼치는 동안 나는 맛있는 것으로만 자루가 미어터지도록 꾹꾹 눌러 담았다.

“정말 고마워, 메리!”

음식이 가득 담긴 자루를 받은 메담은 몹시 기뻐했다. 이번에는 그의 부탁을 완벽히 수행한 나도 왠지 보람차고 마음이 뿌듯했다.

“아직도 내가 낯설게 느껴져?”

나는 넌지시 그에게 물어 확인했다. 그러자 메담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 이제는 내가 아는 메리 같아. 그런데 왜 아까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까?”

나는 그의 예리한 감각에 또 한 번 감탄했지만 그에게 그의 느낌이 정확하다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이제 친구들을 만나러 갈 거야?”

“아니. 오늘은 좀 늦게 나갈 것 같아. 할 일이 있거든.”

“할 일?”

나의 물음에 메담은 조심스레 좌우를 살핀 후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발리언트가 고백하려는 것 같아. 어쨌든 수호 기사가 되는데 성공했으니까.... 방금 전 맥스가 그 셀린이라는 하녀를 부르러 갔어.”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발리언트는 정말로 셀린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만약에 발리언트가 고백한다면 셀린은 어떻게 대답할까? 어쩌면 나는 이를 확인하고 싶어서 발리언트를 다섯 번째 수호 기사로 임명한 건지도 모른다.

메담과 나는 이럴 땐 참 죽이 잘 맞았다. 이 녀석도 배고픈 친구들보다 발리언트의 고백을 구경하는 게 먼저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히 방에서 나온 후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발리언트의 방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장식장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곧 맥스가 셀린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방문이 닫히자 우리는 그 앞을 서성거리는 척을 하면서 안에서 들리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메담에겐 미안하지만 내 주머니 안에는 단검으로 줄어든 꿈안개가 있었다.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정상적인 음량으로 들을 수 있다.

“....”

그러나 정령검의 도움을 받아 내가 들은 것이라고는 안에 있는 세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과감하게 어른들에게 몸을 날리던 발리언트가 지금은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테라스 쪽으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맥스의 목소리는 굳이 꿈안개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우렁찼다. 메담과 나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장식장 뒤로 돌아와 숨었다. 곧 문이 열리고 발리언트와 셀린, 맥스가 복도로 나왔다. 그들은 기사단 숙소 복도 끝에 있는 테라스 쪽으로 움직였다.


설마 했는데 발리언트 이 녀석 진심이다. 진심으로 고백할 생각이다. 조금이라도 더 분위기 있는 장소로 옮기고 있잖아! 메담과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얼굴로 살금살금 그들 뒤를 따라갔다. 마침내 그들은 테라스에 도달했다. 발리언트는 맥스를 복도에 남겨두고 셀린을 흐드러지게 핀 금낭화 쪽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람켄 경?”

발리언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셀린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언제나와 같이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발리언트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가 웃을 때마다 녀석이 부끄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는 게 눈에 보인다.

“발리언트가 정말로 저 하녀를 좋아하는구나. 왜 이제까지 몰랐지?”

메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발리언트는 긴장되었는지 또 우유병을 꺼내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한 병을 거의 비운 후에야 마음의 준비가 끝났는지 드디어 발리언트가 입을 열었다.

“나와 사귀자.... 결혼하자....”

세상에.... 지금 열 세 살짜리가 결혼하자고 한 건가.... 메담은 저 말을 듣자마자 안타까운 목소리로 탄식했다.

“처음부터 저렇게 말하면 안 되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맥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로 오늘 같은 방법으로 내게 고백했던, 발리언트에게 저 몹쓸 방법을 알려주었을 것이 분명한 아저씨가 대견스러운 눈으로 발리언트를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셀린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죄송합니다. 람켄 경. 제대로 못 들었네요.”

그럴 리가 없다. 발리언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린 건 사실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메담도 들은 말을 셀린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 증거로 셀린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와 사귀자. 결혼하자.”

발리언트가 셀린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좀 더 분명하게 말했다. 셀린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미소 짓는 얼굴로,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람켄 경.”

발리언트는 꽤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저 야무진 꼬마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한다. 셀린은 마치 엄마가 아이를 타이르듯 상냥한 목소리로 발리언트에게 설명했다.

“아직 람켄 경은 어리십니다. 그래서 잘 모르십니다. 세상에는 저 같은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아가씨들이 많습니다.”

“아냐. 다른 여자는 필요없어. 난 셀린이 제일 좋아.”

“람켄 경 정도 나이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봄의 향기에 한 순간 취하신 거죠.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일지라도 저 같은 것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봄은 끝나고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냐.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게 아니야.”

발리언트가 저렇게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건 처음 보았다. 상대가 셀린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셀린은 그의 어리광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람켄 경은 저를 겨우 한 달 전에 처음 보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충동적이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셀린의 날카로운 지적에 발리언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수세에 몰린 기회를 셀린은 놓치지 않았다.

“실례지만 제게 시키실 일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셀린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쩐지 그게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발리언트를 남겨두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발리언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셀린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나와 결혼하면 너도 귀족이 될 수 있는데.... 그렇게 내가 싫은 거야?”

셀린은 천천히 다시 발리언트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천만에요. 저는 람켄 경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의 착각 때문에 저 같은 것과 엮이지 않게 람켄 경을 지켜드리려는 겁니다.”

말을 마친 후 셀린은 다시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발리언트는 그 단호한 태도에 질렸는지 돌처럼 굳은 채 셀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맥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리언트를 향해 쿵쿵 뛰어갔다. 그러자 발리언트는 어느새 평상시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치지 마, 바보야. 여긴 복도 잖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듣는단 말야.”

충격이 꽤 컸는지 맥스를 꾸짖는 발리언트의 목소리에는 평상시의 독기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에 맥스는 더욱 안쓰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울지 마십시오, 도련님!”

거리가 있어서 몰랐는데... 발리언트 지금 울고 있었나?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복도의 문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발리언트가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은 발리언트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광경을 구경한 후에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갔다.

“도련님이 우시니 제 마음이 아픕니다!”

맥스는 발리언트가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못 보고 구슬피 외쳤다. 이제 이 눈치 없는 아저씨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프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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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맥스 : 어서 와. 네가 차인 남자 제 2호인가?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맥스. 너의 선배격 되는 사람이지.

발리언트 : .... -_-+

맥스 : 억! 도련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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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26 [탈퇴계정]
    작성일
    15.06.19 04:10
    No. 1

    흠...루시엘을 볼때는 휘렌델을 역사속의 한 인물로만 생각했는데 보다보니 묘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6.20 02:31
    No. 2

    나중에 왕녀의 외출을 먼저 보신 분들이 루시엘을 보시게 되면
    휘렌델이 언급될 때마다 어떤 기분이실까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바다해미
    작성일
    15.06.19 17:51
    No. 3

    셀린에게 차일건 알고있었는데.. ㅋㅋㅋ 맥스 너 무슨 짓이냨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6.20 02:32
    No. 4

    안목이 날카로우시네요.
    셀린은 거의 나오지 않았던 캐릭이라
    그 성격을 파악하시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ㅎㅎ
    맥스는 개그캐릭터로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중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소러미
    작성일
    17.01.05 19:54
    No. 5

    ㅠㅠ
    루시엘 때...죽인 인물들을 다 살려서...어떻게 해도 죽지않는다 =긴장감이 뚝 떨어진다...댓 달았는데요. 휘렌델에게 정령검을 주면서 긴장감이 뚝 떨어지면서 몰입도가 확 떨어져요. 휘렌델 먼치킨 만들지 마시지...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7.01.06 18:30
    No. 6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휘렌델이 먼치킨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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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두 개의 초 +8 15.07.24 2,166 5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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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세 살의 고백 +6 15.06.18 2,072 61 18쪽
63 승자와 패자 +4 15.06.17 2,291 74 11쪽
62 정과 동 +4 15.06.16 1,891 60 12쪽
61 발리언트의 소원 +2 15.06.12 2,089 60 13쪽
60 청혼 +6 15.06.10 2,101 67 11쪽
59 무서운 꼬마 +8 15.06.09 2,163 63 9쪽
58 벨포트의 정령검 +4 15.06.06 2,758 6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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