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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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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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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6.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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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
13쪽

발리언트의 소원

DUMMY

그 뒤로 이 불청객 둘 때문에 나는 더더욱 대기실 안에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발리언트는 수시로 나를 매섭게 쏘아보며 셀린에게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맥스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거리며 서럽게 울다가 이따금씩 충혈된 눈을 들어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심부름꾼이 방에 와 대진이 정해졌다고 알려주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나였다.

우리 넷은 대기실에서 나와 대진표가 붙어 있다는 대합실로 이동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쪽 벽 앞에 수많은 기사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2차전, 3차전의 상황을 예측하기 위해 종자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고 직접 보러 나온 것이다.

여기서 나는 메담과 발리언트가 다른 기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기사들은 대진 결과에 대해 열을 올리며 무리지어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둘에게 인사치레의 말조차 걸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아까 와보지 못했던 몇몇만 메담의 갑옷을 유심히 관찰할 뿐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대진표에서 메담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이 녀석의 첫 번째 상대는 ‘앨런 데이비스’라는 이름이었다. 혹시 나보다 늦으면 알려주려 메담의 얼굴을 돌아보았는데, 먼저 찾았는지 시선이 이미 그쪽에 가 있었다. 나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몰래 속삭였다.

“앨런 경.... 이길 수 있겠어?”

나의 물음에 메담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왜 선발전에 참전했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고 했잖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야. 어차피 참전해봐야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걸....”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기사들을 겨우 6년 동안 훈련을 받은 메담이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실력이 형편없어도 괜찮다. 이 녀석은 내 친구니까. 이 녀석과 이 녀석의 친구들 덕분에 나는 평민을 배려하는 왕이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찾았다. 게다가 우연히도 이 녀석은 왕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을 몇 번 내게 일깨워주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선발전이 벌어지는 동안 기꺼이 녀석의 손발이 되어줄 것이다.


옆에 있는 발리언트의 대진운은 어떤가 싶어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이 녀석은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발리언트는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메담도 발리언트의 표정이 의외였는지 놀라며 물었다.

“왜 그래, 발리언트? 네 실력이면 스콧은 쉽게 이길 수 있잖아.”

메담의 물음에 발리언트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회전이 문제가 아니야.... 이 대진표대로라면....”

나는 얼른 대진표에서 발리언트의 이름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와 맞붙을 가능성이 있는 상대를 추적해보았다. 잠시 후 나는 불쾌해졌다. 메담도 내가 겪은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 뒤에 그 이름을 발견한 모양이다.

“나중에 벨포트와 만나게 되잖아?!”

발리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벨포트 그 재수 없는 자식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다. 디에고라는 기사를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발리언트가 겨루기도 전부터 지레 포기하는 걸 보면 말이다. 맥스가 의아한 얼굴로 발리언트에게 물었다.

“도련님. 평소에 늘 스미스 경과 꼭 한 번 겨뤄보고 싶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보야! 지금은 지면 수호기사가 될 수 없잖아!”

그러고보니 발리언트에겐 수호기사가 되는 것이 셀린에게 고백하느냐 마느냐가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허세 부리는 것도 잊고 초조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8강에서 벨포트와 만나냐....”

발리언트가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호기사는 밤낮없이 왕의 신변을 보호한다. 지금까지 크루거와 앤디가 격일로 나를 경호해왔지만 이는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었다. 그들처럼 숙련되고 유능한 기사들도 격일로 하루를 꼬박 새우는 경호를 반복하면 막상 적이 나타났을 때 싸울 체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수호기사는 전통적으로 홀수일과 짝수일의 밤낮을 상징하는 의미로 4명을 뽑았다. (하지만 네 명의 기사가 4일에 한 번씩 종일 경호를 한 사례도 많다. 그야말로 상징적인 의미에서 4명인 것이다.) 즉 발리언트가 벨포트에게 진다면 코앞에서 수호기사가 될 기회를 놓치는 셈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대기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침울한 표정이었다.


대진표 확인이 끝나고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전투준비를 하나 보다. 종자들이 복도를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이 보인다. 막상 메담을 돕기 위해 왔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도움을 청했다.

“맥스.”

그는 분명 내가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일부러 돌리며 날 피하는 걸 보면 틀림없다.

“사실 전 맥스가 꽤 마음에 들어요. 우리 친구가 되는 건 어떨까요?”

나는 한 기사의 종자에게 먼저 친구가 되자고 제안하는 내 자신에게 새삼 놀란다. 이제 메리라는 인물이 단지 잠시 연기하는 역할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한편으로는 좀 아쉽다. 내가 처음으로 먼저 친구가 되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셀린이었는데.... 하지만 당장 맥스와의 껄끄러운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서 어쩔 수 없지. 다행히 맥스는 내 말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저와 친구부터 시작하고 싶었던 겁니까? 저는 그것도 모르고 차인 줄 알았습니다!”

난 지금까지 발리언트가 나이로 삼촌뻘 되는 맥스를 걸핏하면 때리는 게 너무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발리언트의 심정이 십분 이해된다. 나도 때리고 싶다. 순간적으로 주먹이 날아갈 뻔했다.

“아니, 남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마음에 든다는 말이었어요. 우리 어색하지 않게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요?”

“으윽....!”

내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맥스는 매우 심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외쳤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이라면....’이라는 중얼거림이 너무나도 우렁찼지만 나는 그냥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메담과 발리언트를 대기실로 먼저 보내고 우리는 결투를 앞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휘렌델 여왕’의 특명에 의해 참가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지급된 무기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가는 길에 나는 대기실에서 우물쭈물 있는 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발리언트 경은 왜 메담....경이 이 선발전에 참전하기를 바란 거예요?”

나도 모르게 메담의 이름에는 존칭을 생략할 뻔했다. 이제 정말 그 녀석이 편해지긴 편해졌나 보다.

“도련님이 정식으로 기사로 임명되신 건 바로 어제입니다. 알고 계십니까?”

“네.”

기사가 된 기념으로 셀린에게 고백하려 했는데 아저씨가 준 술을 먹고 뻗어버렸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도련님은 견습생이셨습니다. 기사가 아니라서 왕성 안에 배정받은 방도 없었습니다. 도련님의 아버지이신 람켄 남작님께서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라울 백작님께 기사수업을 위해 윈더민에 오신 도련님을 부탁하셨습니다. 아가씨도 알다시피 라울 경은 왕성의회 일원이시지만 윈더민 성 안에 살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어 공무를 마치시면 시내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도련님은 한 달 전까지 이 라울 백작님의 저택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시간이 맞은 백작님과 도련님이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얼마 전에 라울 경과 기사 견습생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분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앤디가 내게 설명해 줄 때였다.

“웬 그지 깽깽이 같은 놈들이 도련님과 백작님 앞에 나타난 겁니다. 백작님을 노리고 온 놈들 같았습니다만 난폭한 도련님에게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건진 백작님께서는 도련님에게 몹시 고마워하며 답례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련님은 언제나 기사견습생 훈련에 만족하지 못하셨습니다. 늘 진짜 기사들과 경쟁하고 싶어 하셨죠. 그래서 라울 백작님께 아무나 좋으니 왕궁기사단에 속한 기사와 결투를 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백작님은 곧바로 결투를 추진하셨고, 기사단에서도 백작님을 구한 도련님의 공을 기려 이를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기사단 최하위인 메담 경을 내보낸 건 발리어트 경이 견습생이기 때문이었나요? 실력의 균형을 맞추려고?”

“아닙니다.”

맥스는 고개를 굳게 내저었다.


“기사단에서는 도련님께 싸울 상대를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메담 경은 도련님이 기사단 훈련장을 방문하신 후에 직접 고른 상대였습니다. 도련님은 원래 더 어려운 도전을 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때 메담 경을 선택하신 건 그 분이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보는 눈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도련님은 그렇게 믿으셨습니다.”

아까 여왕으로서 훈련장에 들어설 때를 생각하니 발리언트가 메담을 선택한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내가 겪은 바로도 메담은 수백 명이 넘는 기사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그의 동작은 넋을 잃고 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건 검술이라기보다 춤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른 기사들보다 투자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메담이 눈에 보이는 모양새부터 재현하려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막상 싸워보니 결과는 도련님의 승리였습니다. 기사단이 발칵 뒤집힌 대사건이었습니다. 견습생이 정식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요.”

맥스의 말이 내 귀에는 ‘정식 기사가 견습생에게 졌으니까요.’로 들렸다. 이 결투 후로 메담은 얼마나 더 동료들에게 무시당했을까. 그래서 기사단이 발칵 뒤집힌 대사건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파졌다. 녀석의 성격상 따돌림 당해도 그냥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친구인 내 입장에서는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기사단에서는 결국 백작님을 구한 공적과 메담 경에게 거둔 승리를 기리기 위해 도련님을 정식 기사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상 최연소로 왕궁기사단의 일원이 되신 겁니다. 하지만 그건 대외적인 명분일 뿐.... 대부분의 기사들은 도련님을 기사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약한 상대를 고른 것이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비겁한 수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람켄 입장에서는 꽤 억울한 일이었겠다. 하필이면 동료들에게 무시 당하고 있는 메담을 선택하는 바람에 덩달아 기사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도련님께서는 지금도 메담 경이 엄청난 실력자라고 믿고 계십니다. 자신의 눈이 틀릴 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수호기사 선발전에 참여하라고 메담 경을 설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전을 많이 경험할수록 메담경의 본래 실력이 발휘될 거라 믿으신 겁니다.”

과연 발리언트의 생각대로 될까? 하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대진표를 확인하면서도 남의 일 보듯이 태평스럽고, 뜨겁게 달궈진 갑옷을 입고 스스로 물을 떠먹으면서도 그저 웃기만 하는 메담이다. 이 서글서글한 녀석이 발리언트처럼 누군가에게 이기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다! 자루를 내가 태워버렸다고 했을 때만큼은 메담도 맹수 같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나중에 그 공포가 서운함이 되고 원망으로 변할 정도로 말이다. 혹시라도 그 때의 난폭한 태도로 실전에 임한다면 메담도 꽤 잘할 수 있지 않을까?


“.....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이군.”

메담의 경기를 지켜보던 발리언트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직후 앨런은 부채처럼 화려하게 펼쳐내는 메담의 검을 가볍게 피하며 그의 심장 쪽에 검을 겨누었다. 심판이 우렁찬 목소리로 앨런의 승리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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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벨포트 : ‘잠시 후 나는 불쾌해졌다’ .... ‘잠시 후 나는 불쾌해졌다!!’ ㅠㅠ 내 이름을 본 것만으로도....ㅠㅠ

맥스 : 그리고 저는 오늘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것도 먼저 제안해와서 말입니다. 음하하! 

벨포트 : 하지만 그 전에 맞을 뻔 했지.

맥스 : 헉....! (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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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두 개의 초 +8 15.07.24 2,166 52 15쪽
81 촛불 의식 +4 15.07.23 2,163 49 13쪽
80 동화를 싫어하는 자 +10 15.07.21 2,004 49 9쪽
79 에콰빌리타스 +4 15.07.20 2,134 52 9쪽
78 응급처치 +6 15.07.19 2,123 51 11쪽
77 미끼 작전 +12 15.07.17 2,015 57 18쪽
76 호박 머핀 +6 15.07.16 2,092 63 12쪽
75 첫 번째 대장 +12 15.07.14 2,236 54 11쪽
74 윈더민의 우상 +8 15.07.12 2,249 48 11쪽
73 흘러가는 나날 +8 15.07.10 2,355 79 11쪽
72 시행착오 +6 15.07.09 2,337 66 16쪽
71 합동 훈련 +8 15.07.07 2,130 58 9쪽
70 선물 +14 15.07.06 2,307 55 12쪽
69 감당 +12 15.07.04 2,343 61 11쪽
68 최선의 선택 +6 15.07.03 2,248 68 12쪽
67 후회할 짓 +10 15.07.02 2,254 67 10쪽
66 순서 +10 15.06.22 2,618 78 14쪽
65 세 번째 계급 +10 15.06.20 2,247 56 16쪽
64 열세 살의 고백 +6 15.06.18 2,071 61 18쪽
63 승자와 패자 +4 15.06.17 2,291 74 11쪽
62 정과 동 +4 15.06.16 1,890 60 12쪽
» 발리언트의 소원 +2 15.06.12 2,089 60 13쪽
60 청혼 +6 15.06.10 2,100 67 11쪽
59 무서운 꼬마 +8 15.06.09 2,162 63 9쪽
58 벨포트의 정령검 +4 15.06.06 2,757 6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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