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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시계 님의 서재입니다.

도망치지 못한 왕은 주나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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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시계
작품등록일 :
2022.10.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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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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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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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18쪽

227화 복록의 약조

DUMMY

227화 복록의 약조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서 내려다본다.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 색다름에 어울리는 즐거움은 없었으니, 복왕 주상순은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내 결국 이렇게 귀하신 주씨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군.”


한때, 아니 어제만 하더라도 오로지 그만을 위한 자리에 이자성이 앉아서 말을 던지니 주상순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무, 무엇을 바라느냐? 돈이냐? 아니면 벼슬이냐? 원한다면 내 무엇이든 주마. 그러니 날, 날 풀어다오. 황상께는 내 잘 말씀을-.”

“하하하!”


주상순이 겁에 질려서 횡설수설하여 말을 내니 이자성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 위축되었는지 주상순은 목을 움츠리며 한껏 몸을 줄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그 비대한 몸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 모습이 더 볼품없게 하는 효과는 있었으니,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 출신을 불문하고 복왕이라는 작위에 숨겨진 주상순이라는 인간이 잘 드러내고 있었다.


“장군, 바로 처리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린 이암이 넌지시 말을 건네니 이자성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주상순을 살려둘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포로로 잡아서 협상한다?


이자성이나 그를 따라 일어난 이들은 이미 명나라라는 구조를 싫어하고 심하게는 증오하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뒤엎으려고 일어난 그들에게 주상순과 같은 이는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죽이기도 영 성에 차지 않는다고 느낀 이자성은 물끄러미 주상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중 이자성은 문득 그 옆에 있는 낙양 수비대 대장을 보았다.


“무언가 걸리기라도 하십니까?


그 바라봄이 조금 길어지니 이암이 다시 물었다.


그 물음에 이자성은 고개를 흔들더니 의외라는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저란 돼지 같은 작자라도 이렇게 충실히 모시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라 여겼을 뿐이오.”


이자성이 하는 말에 이암 역시 낙양 수비대 대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 몸에 난 자상이며 겁에 잔뜩 질린 주상순에 비하자면 의연하다 할 그 모습을 본 이암은 기꺼워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장군이십니다. 잘 보셨습니다.”

“잘 보았다?”


뜬금없는 말에 이자성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으니 이암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이었다.


“저것이 장군께서 이기셔야 할 적입니다.”

“적이라니, 이미 이긴 자를 그렇게 말해도 말이오.”


낙양이 항복하여 이자성의 손에 떨어지니 이미 승패를 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겨야 할 적이라고 하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가 들은 낙양은 번화하고 풍족한 곳이나, 그 사는 사람들은 그 풍족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복왕이 한 일들을 들으면 적선하듯 던지는 일은 하나 민생 돌보는 일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경멸을 숨기지 않고 주상순을 한차례 쏘아본 이암은 뒤룩뒤룩한 몸이 바들거리든 말든 마저 말을 냈다.


“그 사욕 챙기는 일이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 베푸는 일에는 인색하다, 실로 이 썩어가는 명나라에 어울리는 친왕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시죠.”


보라고 말한 이암이 손가락을 들어서 낙양 수비대 대장을 가리키니, 이자성은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저런 복왕에게도 저렇게 충성을 바쳐서 모시고자 하는 이가 하나는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연원한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음을 알아두셔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분한 일이지.”


복왕에게 과분하다 말한 이자성에게 이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고자하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이것이 약 270년, 300년 가까이 천하를 지배한 명나라의 저력입니다.”

“천하를 지배한 저력.”

“하물며 장군께서 이후 북경으로 향하시면 더욱 이런 이들을 많이 보게 되실 겁니다.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이암이 하는 말을 곰곰히 곱씹은 이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내 천하가 혼란하다고 하나 북경 황제가 그 뜻만은 고매하다고 들은 바가 있소이다.”


이자성이 이렇게 말하며 눈빛을 바꾸니 이암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조금 더 뛰어났다면, 아니 저 복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이가 몇 명만 더 황제와 같았다면 저도 장군도 이렇게 일어설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에 이자성은 씨익 웃었다.


“못 했다라, 정녕 그러하겠지. 만족하여서든, 그렇지 아니하든 말이오.”

“장군님!”


말을 마치고 이제 주상순을 치우겠다 생각한 순간 그를 막듯 멀리서 한 병졸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가 싶어서 바라보니 전에 한번 스러졌을 때 함께하여 형제로 대우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달려온 그는 곧장 예를 취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귀엣말을 건넸다.


“흐업, 흐으. 그, 우금성 선생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우 선생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귀를 더 기울이니 이내에 우금성이 병졸에게 맡겨서 전하게 한 말이 이자성의 귀에 들어왔다.


가만히 그 말들을 듣던 이자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혀를 찼다.


“쯧, 버러지 같은 놈을 무에 쓰려고 그런단 말인가. 알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무언가 이유가 있겠거니 한 이자성은 하려던 말을 바꾸어 외쳤다.


“주씨와 그 수하들을 끌어내 가둬라! 사람들이 모으고 그 처분을 다시 정하겠다!”



***



“허어, 그거참.”


잠시 자리를 물리고 우금성이 찾아오길 기다린 이자성은 그 기다림이 오래지 않아 그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우금성은 곧장 알아낸 것들을 고하니 이자성은 혀를 내둘렀다.


“그만하면 낙양 전체를 홀로 먹여 살릴 재산이 아닙니까? 진정 그렇게 많은 재산이 복왕부에 있덥니까?”

“실로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양곡은 수만, 아니 먹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포함하면 그 배는 되며 그에 비견될 양의 재보가 있다고 하니 듣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내 낙양 병사들이 들고일어난 이유가 먹을 것이 부족하고 포상이 적어서라고 들었는데, 이게 무슨?”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니 우금성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해와 별개로 하고 싶은 말이 아직 있었기에 우금성은 굳이 도중에 사람을 보내어 처형을 미룬 이유를 꺼냈다.


“분명 황당하며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나, 이는 동시에 기회입니다.”

“기회? 무슨 기회 말입니까?”

“낙양을 온전히 우리에게 가담하여 묶을 기회 말입니다.”

“흐음.”


낙양 병사들이 들고일어나 항복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상 한때의 울분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가슴에 피어올랐던 불이 식고 나면 낙양 병사들은 물론이고 낙양 사람들은 난리와 관계되는 걸 꺼려할 게 불보듯 뻔했다.


물론 깊게 관여하여 발을 빼기 어렵거나 이대로 이자성과 함께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런 사람이 낙양 전체인가 하면 그건 단연코 아니었다.


그런데 우금성은 그뤟게 할 수 있다고 말하니 이자성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면서도 꺼림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정녕 가능하겠습니까?”

“제물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마침 아주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돼지가 있으니 적당합니다.”

“······복왕을 제물로 삼는다?”


인신 공양이니 뭐니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방법이 궁금하니 이자성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우 선생께서 무엇을 품고 계신지 이 사람에게 부디 들려주시겠소?”

“물론이지요.”



***



수많은 도적떼, 아니 반란군에게 둘러쌓여 도로 낙양으로 끌려왔다.


호의적인 시선 하나 없이 거리를 지나 복왕부에 돌아왔다.


살기 위해 구걸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끌려가 가두라고 명만 했지 실제로 한번 발걸음하지 않은 옥에 갇혔다.


무언가 뚜렷한 방책 없이 옥에서 덜덜 떨다가 다시 나오니 주상순은 오늘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 이게 무슨······.”

“······.”


당황을 금치 못하여 중얼거리는 주상순과 별개로 수비대 대장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잠시 고민하던 수비대 대장은 각오를 품고 입을 열었다.


“전하, 아무래도 이제 우리를 끝낼 생각인 거 같습니다.”

“끄, 끝낸다고? 아니, 나, 나는, 나는 끝나고 싶지 않아!”


비명처럼 말한 주상순은 수비대 대장을 향해 애걸복걸하며 몸을 비비적거렸다.


그 비대한 몸으로 그러니 수비대 대장은 건장한 몸임에도 버티기 어려웠으나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 이런 자리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 연회가 말이냐? 나는 연회를 누구 죽이려고 연 적이 한 번도 없다! 거짓말하지 마라!”


연회.


그 말처럼 사방에는 고기와 술이 가득하며 그 참석자인듯 여러 사람이 자리하여 가벼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보통은 주상순의 말이 옳으나, 싸움 후에 열리는 연회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특별한 일이 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또한 때로는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는 자리이기도 했으니, 수비대 대장은 어느 쪽이든 여기가 잠시나마 이어진 목숨줄이 끝날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쪽에 앉으시오.”


그들을 이끌어낸 사람 가운데 하나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하니 거기에는 고기 요리와 술이 함께 놓여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그저 그런가 보다 하였을 것이나 옆에 놓인 대도, 그리고 사람 두엇은 가볍게 들어갈 거대한 솥이 있는 게 보이니 주상순은 뒤늦게 수비대 대장의 말을 실감하고 발버둥 쳤다.


“시, 싫다!”

“앉으라고 했소. 아니면 지금 죽겠소?”

“으, 으으, 으으으······.”


서슬 퍼런 말에 주상순은 떠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반강제로 자리에 앉았다.


이미 모든 길이 막혔음을 안 수비대 대장 역시 그 옆에 앉았다.


그는 술과 고기를 번갈아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돼지도 아니고 소도 아니며 꿩이나 닭도 아닙니다.”

“······사슴이다.”


수비대 대장이 하는 말에 온갖 산해진미를 먹어본 주상순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대답했다.


먹어본 가락이 있고 눈썰미가 있으니 알아보기는 했으나 주상순은 이것이 제 마지막 음식이라 생각하니 도무지 고기고 술이고 입에 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비대 대장 역시 딱히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자연스레 두 사람 앞에 있는 상에서 음식과 술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줄지 않았다.


허나 그런다고 다가올 결말을 피할 수 없다고 하듯 이자성이 그들에게 크게 묻는 말이 들렸다.


“어찌 복왕은 그 음식과 술을 드시지 않는가? 그간 먹던 것에 비하면 덜하나 별미라 자부하거늘.”


이자성이 묻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그치며 시선이 주상순에게 모였다.


그 주목에 주상순은 주저하다가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내 그대의 목숨은 구하는 것이 마땅한가 하여 낙양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소. 그대를 살리고 싶냐고 말이오.”


멀리서 떠드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하듯 이자성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여기에 낙양 사람들도 초대하였지. 보이시오? 저기에 있는 건 모두 낙양 사람들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낙양 병사들이오.”


낙양 사람들에 낙양 병사들이라고 하니 주상순은 대답은 하지 않되 시선은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확실히 알아보긴 어려우나 그들 가운데 몇몇이 그를 노려보고 몇몇은 얼굴을 피하는 것을 보니 이자성이 아주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허니 여기서 다시 물을까 하오.”

“······무엇을 말이냐?”


주상순이 못내 불안한 얼굴로 전전긍긍하니 대신하듯 수비대 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에 이자성은 물끄러미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와 같은 이가 얼마나 더 있을까 고민했지. 혹시라도 베푼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당신을 구하려고 할 것이고, 불쌍하게 여기겠지. 그러면 당연히 당신을 죽인 나는 원한을 살 터이니 그는 바라는 바가 아니오.”


원한을 사고 싶지 않다는 말에 주상순은 한순간 얼굴색이 밝아졌으나 곧바로 이어서 들린 말에 그 얼굴색은 금세 잿빛이 되었다.


“주씨나 그 밑에 빌붙어 고혈 짜 먹는 것들이라면 모를까, 낙양 사람들처럼 일반 백성에게 그럴 수야 없지. 그러니 묻겠소.”


이자성은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려서 낙양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해 외쳤다.


“나 이자성은 사람이 응당 빚이 있다면 갚아야 하며, 은이 있다면 돌려주어야 한다고 믿소! 그러니 그대들이 만약 여기 복왕에게 정이 있어서,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갚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이 사람이 목숨은 구하길 바란다면 말하시오!”


크게 외친 이자성은 곧장 주상순의 옆에 있는 대도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 칼을 뽑지 않고 그저 높이 들더니 이어서 말을 외쳤다.


“누구라도 한 사람이 나서서 이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정녕 그렇다면 나는 복왕의 목숨은 고이 아껴서 북경으로 보내줄 것이오!”


이 말에 주상순은 희망을 품었는지 낙양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을 받은 낙양 사람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도로 마주 보며 못마땅한 얼굴을 보일 따름이니, 누구 하나 주상순이 살아나길 바란다고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나서는 위험은 물론이거니와, 사실 낙양 사람들이 주상순에게 품은 것 가운데 가장 나은 감정이 ‘제 사람은 좀 아끼지’였다.


그리고 낙양 사람 대다수는 그 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고 말이다.


또한 그 적은 수는 주상순을 따라가거나 그 도망친 길을 위장하다가 잡히고 옥에 갇혔으니 나설 수가 없다.


이미 정해진 일을 그저 확실하게 보이는 것뿐이니, 이는 사실상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상순은 이를 알지 못하는지 기대하는 얼굴로 간절히 시선을 계속 보냈다.


“향초를 가져와라!”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이자성은 곧장 향초를 가져오라 하니 한 사람이 빠르게 기다란 향초와 향로를 하나씩 가져왔다.


“이 향초가 다 타기 전에 나서는 이가 없다면 이 이야기는 끝이오!”

“누, 누구든 좋다! 날 도와다오! 그러면 뭐든 해주겠다!”


향초가 빠르게 타기 시작하니 주상순은 다급히 나서서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돌아보는 자는 없으니, 주상순은 다급함에 조금이라도 그 타들어 가는 걸 늦추고자 향에 바람을 불었다.


“후-, 후-, 후우-.”


그러나 향초는 그런다고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르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향초가 그 형상을 잃고 재가 되니 주상순은 창백한 얼굴로 이자성을 보았다.


“복왕, 참으로 인덕이 없군그래.”


스르릉


대도를 천천히 꺼내 드니 주상순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내려고 했다.


“자, 잠까-.”


서걱


허나 그 꺼내는 것과 달리 목에 날아드는 속도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빨랐으니 주상순은 말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하고 목이 달아났다.


제가 죽은 것도 잘 모르는지 그 목에서 떨어진 얼굴에는 간절함과 다급함이 가득했다.


모시던 이가 결국 비명을 달리한 것을 본 수비대 대장은 눈을 감고 목을 내밀었다.


“죽이시오.”

“훌륭하군. 혹시 날 따를 생각은 없나?”

“내 가족은 북경에 있소.”

“그런가.”


이자성은 그 말로 모두 알았다는 얼굴로 다시 대도를 휘둘렀다.


틈왕이라 자칭한 것이 허장성세가 아니라고 하듯 주상순에 이어서 수비대 대장 역시 그대로 목이 깔끔하게 베이니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대로 상을 적시고 위에 놓인 음식과 술을 적셨다.


“······이름을 물을 것을.”


잠시 안타까움을 비친 이자성은 곧 표정을 바꾸고 명령했다.


“준비한 것을 시작하라!”


이자성이 외치는 말에 사람들이 달려와 수비대 대장의 시신은 옆으로 치우고 주상순의 시신은 거꾸로 매어 그 피를 따로 항아리에 담았다.


이윽고 피를 최대한 모은 그들은 근처에 준비한 거대한 술 항아리에 피를 넣고 섞으며 피가 묻은 사슴 고기도 챙겨서 그리하였다.


“복과 록이 함께 하니 이것을 마시는 자들은 부귀영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귀한 것을 내 형제와 동지들은 물론이고 낙양 사람들과 함께 나누길 바란다!”


이자성이 외치니 곧 사람들에게 술이 한 잔씩 주어졌다.


고기와 피가 담겨진 것이었으나 그 술이 좋은 것이어서인가, 그도 아니면 나누어서 그런 것인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빤히 본 것이 있기에 사람들은 마시기를 주저했는데, 이자성은 그들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야만적인가? 그렇다! 미신인가? 그렇다! 허나 이것은 약속이다! 그대들이 나와 같이 함께 할 것이며, 저 명나라 주씨들이 독점한 것을 그대들과 나눌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자성이 외치는 말에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술이 피가 담기고 그 피 묻은 고기가 담겼던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시면 그걸로 이제 그대들은 형제며 동지다! 오늘 보았지 않나! 복왕은 낙양 사람 전부가 나누어도 풍족하게 쓸 재보가 있었다! 허면 남경에는, 저 황제가 있다는 북경은 어떨 것인가!”


이어서 욕심을 자극하니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하물며 그것들은 본래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낙양 사람들의 것을, 천하 모든 사람의 것이었다! 되찾으러 가자! 그것은 우리의 것이니!”



이자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듯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이어서 이자성의 부하들이 술잔을 비우니, 낙양 사람들 역시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에 술잔을 높이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며, 약조가 맺어졌다! 우리는 천하를 나눌 것이다!”


이날, 낙양은 온전히 이자성의 손에 떨어졌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자성에게 가담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은 사방으로 퍼지니, 그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작가의말

[첨언 - 주상순의 최후]

주상순은 낙양이 함락된 후에 이자성 군에게 잡혀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때 낙양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 모은 재산을 보고 분노하여 살려달라고 청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하니 그 민심을 잃음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이 죽음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상순을 말 그대로 죽인 후 회 뜨고 그 고기를 사슴 고기와 함께 안주 삼아 먹었다는 설, 다른 하나는 아예 죽기 전에 산 채로 삶은 후 사슴 고기와 함께 먹었다는 설입니다.

양쪽 설 모두 주상순이 너무 비대하여 낙양 사람들이 한 조각씩 입에 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면 먹지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주상순을 연회에 초대, 사슴고기를 대접한 후에 죽였다는 설입니다.

이 경우 주상순은 따르던 환관들의 간청으로 간소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첨언 - 복록]

복록(福祿)이라고 하는 단어는  ‘하늘이 내린 복(타고난 복)과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부귀영화를 뜻합니다.

위에서 보았듯 주상순은 사슴 고기와 함께 엮인 설이 많은데, 이는 주상순이 복왕이었던 것에 기원합니다.

즉 복왕(福王)의 고기를 사슴, 록(鹿)과 함께 먹음으로 복록과 같은 발음으로 하여 얻는다는 일종의 주술적 형태인 셈입니다.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후원하신 기대에 응해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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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5 ageha19
    작성일
    23.05.20 22:11
    No. 1

    '복록'의 어원이 그런 건줄 처음 알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7 금빛시계
    작성일
    23.05.20 22:45
    No. 2

    죄송합니다.

    첨언 내용 가운데 일부 오타가 있어 수정하였습니다.

     ‘하늘이 내린 돈과 나라에서 주는 돈’
    ->
     ‘하늘이 내린 복(타고난 복)과 나라에서 주는 돈’

    좋은 주말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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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240화 이가 없는 입술 +2 23.06.02 374 22 13쪽
240 239화 정할 수 없는 괴로움 +2 23.06.01 370 23 15쪽
239 238화 거기서 거기다 +1 23.05.31 362 2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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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236화 한 해로 한 해를 감당치 못하면 그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 23.05.29 371 24 13쪽
236 235화 원숭이와 너구리 +4 23.05.28 389 24 16쪽
235 234화 동향 사람 +2 23.05.27 364 21 14쪽
234 233화 조선에 정년은 없다 +3 23.05.26 379 22 13쪽
233 232화 표명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 +1 23.05.25 351 25 15쪽
232 231화 남는 자의 고민 +2 23.05.24 353 21 13쪽
231 230화 머무는 객, 떠나는 객 23.05.23 376 19 12쪽
230 229화 어렵다고 하여 멈출 수는 없다 +1 23.05.22 379 18 14쪽
229 228화 소문은 자극적이다 23.05.21 381 20 15쪽
» 227화 복록의 약조 +2 23.05.20 365 21 18쪽
227 226화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서야 잦아든다 +2 23.05.19 366 19 13쪽
226 225화 불씨는 작다 +4 23.05.18 374 20 16쪽
225 224화 장작을 모으는 법 +1 23.05.17 387 16 15쪽
224 223화 천하가 여기에 있다 +2 23.05.16 396 19 11쪽
223 222화 바라는 것은 23.05.15 396 23 12쪽
222 221화 배부른 사람은 모른다 +1 23.05.14 405 21 13쪽
221 220화 선택이 가능하다면 사람은 고른다 +2 23.05.13 407 20 13쪽
220 219화 전쟁은 도박이다 +1 23.05.12 446 21 12쪽
219 218화 타협과 양보는 때때로 일방적이다 +2 23.05.11 432 22 13쪽
218 217화 청개구리 +1 23.05.10 419 17 13쪽
217 216화 의심은 아래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1 23.05.09 431 18 13쪽
216 215화 일을 미루면 이자가 붙는다 +1 23.05.08 423 23 15쪽
215 214화 전쟁과 정치는 한 몸이다 +2 23.05.07 464 18 12쪽
214 213화 양동 +3 23.05.06 455 20 13쪽
213 212화 천명으로 가는 길 +1 23.05.05 445 22 12쪽
212 211화 도박은 없다 +2 23.05.04 434 1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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