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호이베 님의 서재입니다.

스카치에라의 투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최근연재일 :
2018.02.10 20:35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4,568
추천수 :
3
글자수 :
520,254

작성
17.12.22 17:43
조회
87
추천
0
글자
23쪽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DUMMY

슈아악! 콰앙!


"으, 아"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비명을 삼켜낼 새도 없이 덮쳐오는 충격파와 흙더미에 온 몸을 수도없이 얻어맏으며 구르듯 뒤로 물러난다.


"아가씨!"


그나마 테미가 앞에서 막아주었으니 망정이지, 가감없이 이 모든걸 그대로 뒤집어 썼다면 뼈 한두군데정도는 가볍게 부러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충격.


품 안에 니르가 안겨있는 탓에 펴지 못한 허리와 등에서 삐걱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온다.

순간 눈 앞이 탁해질만큼의 고통은 덤으로.


"크, 으아앗.."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평소 감정의 표시가 옅던 얼굴 전체에 다급한 기색을 역력히 띈 테미가 다가와 내 앞에 몸을 숙이곤 괜찮냐며 시선을 맞춰온다.


그러는 테미는,


"나는..크으...그렇다치고, 테미 너야말로..괜찮은, 거야?"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무렇지 않다기엔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

옷이 죄다 찢어진 탓에 드러난 속살엔 무수한 찰과상과 군데군데 깊게 파인 상처에서 피가 맺혀 흐르고 있었고 이마도 찢어진 듯 얼굴 전체를 피로 적셔내고 있었다.


누가봐도 중상인데, 괜찮다고?


"날, 보호하려다가..?"


"..꽤 가까이 있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강한 충격이 전해져온 듯 싶습니다"


"너, 너무 많이..다쳤, 잖아.."


"아가씨를 지키는 건 제 의무입니다.

그러니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테미의 얼굴을 격한 고통에 잠시 끊어져버린 생각 때문인지 멍하니 바라만본다.


그리곤 시선을 내려 품 안으로.


니르는 여전히 초점잃은 눈동자의 멍한 얼굴로 조용히 품 안에 안겨있었다.


그리곤 시선을 구른 궤적을 따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딘가로.


"..루, 루시안님?!"


몸이 밀려날 정도의 거칠고 강한 충격파에도 꿈쩍없이 그자리에서 맴돌고있는 검은 안개.


멀지 않은 곳에 다시금 손톱을 치켜드는 커다란 괴물이 있는데,

지척에는 새까만 동물들이 끝을 모르고 다시 모여가고 있는데..!


"저기, 저기에 루시안님이 아직..!"


"..안됩니다 아가씨"


"뭐?!"


분명 테미도 나와 같은 걸 보고있을텐데..?!

저 안에, 저 검은 안개 안에 루시안님이 있단말야!


"설령 정말 루시안님께서 저곳에 계신다고 하더라도...아가씨를 보내드릴 순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또한, 아가씨의 옆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


내가 무슨 말을 할런지 끝까지 듣지도 않고, 테미는 일언반구도 없이 단칼에 말을 잘라내버린다.


하지만 나도 안다. 테미가 이런 반응을 보일거라는 건 알고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테미는 절대 내 옆을 떨어질 수 없겠지.

그게 테미 자신이 말한대로 자기 자신의 의무라면 더더욱.


..하지만,


"죽는걸, 구할 수도 있는 사람이 죽는 걸 그저 방관하고만 있을 생각이야?!"


"제 역할은 죽을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는게 아닙니다.

저는 오직 아가씨의 안전을 지킬 뿐.


그리고..."


꿇고있던 무릎을 순간적으로 펴내며 땅을 밀어낸 테미는 그대로 몸을 휘돌려 긴 다리로 공중을 베어낸다.


빠각!


[크뤠엑!]


"..산 사람을 지키는 게, 더 효율적인 겁니다"


"...그, 말...무슨, 의미야?"


멀리 날아가 뒹구는 새까만 동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저 어딘가를 한참이나 주시하던 테미는 다시금 고개를 돌리며,


"루시안님의 생사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허나, 제 눈 앞의 아가씨는 살아계십니다.

물론 지금 저곳까지 달려가 루시안님을 데려올 수 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그에 따른 위험부담이 제게는 너무나도 큽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만큼"


그건 테미의 확고한 신념.

그녀 자신이 인생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대상에 대한 집중, 그리고 집착.

때때론 그녀의 그런 모습에 답답함도 느껴왔지만, 그녀의 그런 성격 덕택에 구사일생의 순간을 맞이했던것도 결코 적지 않았던터라 지금까진 나 자신도 그런 테미를 자연스레 받아들여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야...이 개새끼들아아아!!"


"?!!"


어디선가 들려온 누군가의 날카로운 한이 맺힌 외침소리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니,


"...니르의..어머님?"


아름다운, 아니 아름다웠던 한 여인이 한 손에 세검을 든 채 말 그대로 '악귀'가 되어 중앙 광장의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달려가는 그 끝에는 이윽고 손톱을 하늘 높이 치켜든 채 멈춰선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아...안돼..!"


"...."


끔찍한 얼마 후의 상상만이 그려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무의식중에 올려다본 테미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누군가 니르의 어머님을 도울 사람은..?!


"...! 저, 저기..!"


다급히 시선을 옮기다 눈에 들어온 끔찍한 참극.

한켠에서 새까만 동물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있는 하얀 갑옷의 기사들이 처절한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부러진 검은 내던지고 육탄전에 돌입하며 팔을 물리는 기사,

다리와 몸에 이빨을 박아넣은 맹수들을 그대로 달곤 다른 상대를 향해 몸을 날리는 기사,

부상이 깊은 듯 몸 하나 제대로 지탱할 수 없어보이지만 그 상태 그대로 맹수들의 앞을 막아서는 기사..


그 아래에선 피가 마치 개천처럼 흐르고 있었다.


"...안, 됩니다"


그 모습을 보아도, 테미는 완고히 고개를 젓는다.


"어째서야?!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저에겐 세상 모든 생명들보다 아가씨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겠..!"


도저히 말을 들어먹을 것 같질 않은 테미는 포기하고 분기탱천하며 일어서는 나를 그녀는 거칠게 어깨를 찍어누르며 일어서지 못하도록 제지한다.


"그 몸으로 어딜 가시려하십니까!"


"이거 놔! 너는 몰라도 난 저 모습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단말야!"


안돼. 아냐 이런말은 하면 안돼...

테미는 날 지켜주려고 하는 건데..

이런 말은 너무 심하잖아. 이건 아닌거잖아 에밀리...!


허나, 내심과는 다른 말들이 입밖으로 계속 쏟아져나온다.

막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위험한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단말야?!

산 사람을 지키는게 더 효율적이라며!

테미 네 말마따나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루시안님은 아니더라도 저 분들은 지킬 수 있는거잖아!


나와는 달리 너한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잖아!!"


"..제 힘은, 그런것을 위해 노력해서 얻은게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그 힘은 따로 쓰일데가 있는 것.

테미의 말은 그런것.


"지금까지의 뼈를 깎아온 제 노력은 모두가 아가씨를 위한 것.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아가씨의 곁을 떠나 다른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키워온게..."


"제발...테미...!"


안다 나도.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내 옆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테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살아왔는지 그 모습을 계속 옆에서 지켜봐온 내가 그걸 모를리가 없잖아.


"네가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겠어...하지만 테미..!

제발, 제발 저 사람들을 구해줘..!"


"..그건, 명령이십니까?"


뒤돌아 나를 내려다보는 테미의 눈동자엔 그 어떤 감정의 빛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간단한 손짓으로도 가볍고 충실히 움직이는 끈 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아냐"


아니다.

그녀는 결코, 인형따위가 아니다.


명령?

할수야 있다. 이미 했으니까.

하지만 그 '명령'이라는 단어를 입밖으로 꺼내며 가슴이 아파오는걸 두번다시 겪고싶지는 않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금 그리 명령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시는.


"이건..."


그녀는 인형이 아닌 인간이고, 내 오랜 친구이며, 나의 소중한...


"...부탁이야 언니. 제발 저 분들을 구해줘..."


가족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나의 믿음직한 가족.


..안다. 나도 이런게 얼마나 제멋대로인건지, 치사한건지는 잘 안다.

하지만...선택을 해야하는 지금 그런걸 신경쓰며 고민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기에 뒤죽박죽 얽혀 나조차도 풀 수 없는 실타래를 그대로 꺼내어 테미에게 내민다.


테미 역시, 고민조차 않고 그 실타래를 내게서 받아든다.

그것이 본인의 역할이라는 것 마냥 자연스레.


"..아가씨께서 저를 언니라 부르시는건 처음이군요.

어렸을 땐 그리도 싫어하시더니.."


"....미안해"


"별말씀을. 공작 각하께 수양딸로 거둬진 뒤 아가씨를 처음 뵌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는 오직 아가씨만의 시녀로서 살아왔을 뿐 아가씨를 '동생'으로서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니까요.

아가씨는 아가씨. 제가 목숨을 다해 지켜야할 대상이자 제가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저의...소중한 주군이시기에.


..하지만.."


그저 어색했을 뿐이다.

갑자기 가족이라며 내 앞에 나타난 그녀가 너무나도 어색했으며 그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웠을 뿐.

어렸던 나는 치기어린 질투와 갑자기 생겨난 가족에 대한 어색함에 테미를 냉랭히 대하기도 했지만...


그녀와 함께 자라오면서 테미는 내 마음속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와서 그걸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나 또한 그녀를 저런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건 정말 싫었다.


"..그걸 듣고도 끝까지 제 고집만 붙잡고 있을 순 없군요"


그러면서도, 난 테미를 굴복시켰다.

아주 치사한 방법으로.

아주 못된 방법으로.

테미로선 절대로...거절하지 못할 마법의 단어로.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일어난다.


"미안해...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힘이 있었더..."


"자책마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모든걸 다 해낼 수 있다면 제가 있을 이유가 사라질테니, 이런 거친 일들은 모두 저에게 맏겨주시길"


내가 힘이 없어서.

인간을 초월한 시토피엔스? 그건 나중의 일. 지금은 그저 연약한 한 여자아이일 뿐.

그저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만 커다란 욕심쟁이이자 그 책임과 실행은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 할 수 밖에 없는 난 이렇게 이번에도 테미에게 의지하고 만다.

이래선, 그냥 억지부리는 아기와 다를바 없잖아..


테미는 마음쓰지 말라곤 하지만..

미안하다. 너무나도 미안하다.


하지만 이것밖엔 없었다.


난, 그녀를 믿기에.

그녀라면 저들을 구해낼 수 있기에.

힘없는 나보단, 그녀가 저 자리에 더욱 필요할 것임을 잘 알기에.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일어난다.


"..내가, 니르는 내가 지키고 있을테니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가씨의 '구해달라'는 그 명...부탁, 꼭 지켜보일게요"


그저 그 믿음을 변명삼아 테미를 위험한 곳으로 등떠밀어 보내고만다.


중앙 광장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니르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어 더욱 꼬옥 껴안았다.

한없이 밀려오는 이 자괴감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고자 반응없는 니르에게 그렇게 기대듯이.


"...흐윽.."


뜨거워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테미 또한 적지않은 상처를 입은 상태인데...내가 너무 억지를 부린건 아닐까?

내 바램을 위해 테미를 '희생'시키는 건 아닐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걸까?

내가...그래도 되는 걸까?


이기적인 선택과 나약한 고민, 그리고 아직은 찾아오지 않은 그 결과가 너무나도 괴로워서, 도저히 직시할수만은 없어서.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를 꾸욱 감았다 떠본다.


"...."


내려쳐 휘둘러지는 손톱의 영향권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위험스레 비켜나는 니르의 어머님,

어느샌가 나타나 주변의 새까만 동물들을 도륙하며 쓰러진 기사들이나 자경단원들을 커다란 괴물의 주변에서 밀어내는 첸드릭 경과 로번 영지관리관,

여전히 격렬한 싸움을 이어가는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기사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곤 땅을 박차며 달려나가는 테미의 뒷모습.


갑작스레 마을을 덮친 이 재앙의 한가운데에서 그들은 살아보려 자신들의 모든것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대체 무얼하고 있는걸까?


나 자신은 약하다는 그 변명 뒤에 숨어 그저 바라만 보고있는 지금의 내가 과연 옳은걸까?


애초에 나는...정말 저 괴물에게 달려들 각오가 되있었나?


"흑...흐윽..."


눈물이 쉴새없이 쏟아져나온다.


목구멍을 밀고 나오는건 오열일까.

그것마저 뱉어버린다면 나 자신의 나약함을 그 밑바닥까지 드러내보이는 것만 같아서, 가까스로 삼켜본다.


부조리하지만, 이해할 수 없지만, 대체 어째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단 하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결국, 나는 루시안님의 앞에서 그리도 당당히 약속했던 것을 지키지 못했다.


나 자신마저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지금 난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


아니, 아직..아직 내가 지킬 수 있는, 나만이 지킬 수 있는 '누군가'가 남아있다.


"..니르야...제발..제발 정신차려 니르야...!"


품 안에서 조용히 얕은 숨만 들이마시고 내뱉는 니르.

거듭되어온 정신적인 충격으로 그 껍데기만 남긴 채 자신의 안쪽 깊은곳으로 도망친 니르는 제대로 일어설 수도,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테니까.


그러니까, 니르만큼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내가 지켜내야해..!


슈아악! 콰앙!


"!!"


다시금 몰려오는 강한 바람과 충격파, 그리고 날아오는 흙먼지들 사이에 섞인 나무조각들과 정체모를 무언가들.


그 인위적이고 거친 폭풍으로부터 니르를 지키려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등지고 웅크리는 나에게,


파박, 퍽! 등을 수없이 두드리는 것들로 인해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다.


"윽! 크으..! 큭! 아, 아악!"


그 비명은 도저히 삼켜낼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피부에 상처를 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몸 속까지 울려오는 그 고통은 인내와 의지를 아득히 뛰어넘어 나라는 연약한 인간의 모든것을 뿌리까지 뒤흔들어버린다.


소모되는 건 육체 뿐만이 아닌, 인내하는 정신이 한참이나 더 심각할 정도로.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품안의 니르를 더욱 꼬옥, 단 하나의 흙먼지마저도 니르에게 닿지 않도록 품 속에 끌어안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거야.

니르만큼은...내 손이 닿는 니르만큼은,

내가 지금 당장 지켜낼 수 있는 니르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꼭 지켜낼테니까!


"..끝, 났나...?"


고통에 익숙해진건지, 아니면 그 폭풍이 가신건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에 힘주어 감고있던 눈을 살며시 떠본다.


먼저 품안의 니르는..


"괜, 찮구나..."


여전히 멍한 얼굴로 품 안에 안겨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상할정도로 전혀, 아무런 소리도.


고개를 돌려 중앙 광장을 바라보기조차 무서운 그 정적.


길고 길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에 내 어딘가가 부서져버린걸까?

그래서, 들리지 않는걸까?

아니면...다들....?


상상하기조차 싫은, 하지만 제멋대로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 광경을 애써 밀어내며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어떻게 해서든 돌려보기위해 낑낑대던 내 눈 앞으로,


[..크르륵...]


"..흐아...아.."


붉은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새빨간 눈동자가.

그 크기만 해도, 내 몸 하나만한 그 커다랗고 새빨간 눈동자가.


바로...눈 앞에..!


"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


본능적으로 물러나려던 내 다리가, 내 팔이 그대로 멈춰버린다.

아니, 멈춰져버린다.


나를 감싸듯 그러쥔 그 무언가 때문에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게되어버리는 그 압박감.


할 수 있는거라곤 비명을 지르는것, 그리고 품 안의 니르를 최대한 깊게 끌어안으며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뿐.


"꺄아아악!!"


눈 앞의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왜 주변이 이리도 빨리 멀어지는거지?


그렇게 몸이 쏠리는 느낌이 온 몸을 지배하는 그 짧은 사이.


멀어지던 풍경은 이내 곧 '작아졌다.'


"...."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포감.

의지할곳 없는 아득히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원초적인 두려움에 속박되어있던 몸은 뻣뻣히 굳어져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에.


"...체..첸드릭 경...?"


그는 땅에 뻗어 누운채 미동조차 없었다.


"니, 니르의 어머님은...?"


그녀는 로번 영지관리관에게 힘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로번 영지관리관 또한, 거의 기어가듯 제 한몸도 제대로 건사할 수 없어보였다.


"..아, 아아...기사님들이..."


혈투를 거듭하던 기사들은 산처럼 쌓인 괴물들의 시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 테미..테미는...?"


테미가, 보이질 않는다.


"테..미?"


시선을 여기저기 옮겨보아도, 그 어디에도 테미의 모습은 없다.


"테미...? 테미..테미..! 테미이!!!"


어디에 있는거야.


"안돼..! 테미 안돼...!"


어딘가로 피한걸까?


아니면, 저 어딘가 잔해 속에 묻혀있는 걸까?


살아...있는 걸까?


"아냐! 아냐..!! 아니라구!!"


살아있을거야.

테미는 살아있을거라고..!


"테미..!! 대답해 테미이이이!!!"


그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 있어도,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어도, 나와 다른곳에 있어도..

부르면 달려와주었던, 나의 소중한 가족인 테미가..


이대로...이렇게...나, 때문에...!


[크르르...]


목놓아 테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던 그 때.

다시금 눈 앞을 가득 매워오는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들여다본다.


"크..으윽...!"


강해져오는 속박.

살면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순수할 정도의 새빨간 그 눈동자에게서 전해져오는 입이 덜덜 떨릴 정도의 공포.


말 그대로 '궁지'에 몰린 이 순간에, 역설적으로 테미의 안위를 찾으며 조금씩 잃어가던 내 자신에 대한 통제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품 안에 있는 니르가, 이대로라면 위험해질테니까!


"으으...으아아...!!"


온 몸에 힘을 주어 속박을 밀어내본다.

이대로 강해지는 속박에 니르를 힘주어 껴안은채로 있다간 나도 물론이거니와 니르마저 으스러져버릴것 같았기에.


그건 니르를 지키고자 했던 이 순간 최선의 선택.


허나,


[..크륵]


새빨간 그 눈동자는, 마치 비웃듯.


"..아?"


순식간에 온 몸의 속박이 풀려버린다.


그리고, 낙하.


"..아아...아아아!!!"


떨어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무심결에 니르를 끌어안았던 두 팔이 풀려져버린다.

어쩔 수 없었다. 방금전까지 온 몸을 펼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니.


그리고 불쑥 나타난 두줄기의 검은 무언가가 뱀처럼 품 안에서 살짝, 아주 살짝 떨어진 니르를 낚아채가려는 듯 몸을 휘감아온다.


"?!!"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몸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니르와, 그런 니르의 몸을 휘감는 검은 줄기들.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는 나와 니르의 사이.


'...안돼'


지키겠다고 했다.

어떤일이 있더라도, 꼭 지키겠다고.

내 손에 닿아있는 니르만큼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테미에게 한 약속뿐만이 아닌, 이 아이 또한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 중 하나였기에.


이미 테미를 잃은 나는 그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어디에도 의지할것없는 이 공중엔 나와 니르 둘만이 있을 뿐.


아직은, 아직은 니르에게 손이 닿는다.


'이대론...!'


허나 내가 니르에게서부터 멀어져가는 것과 동시에 니르 또한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고, 나는 그 찰나에 무언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을만큼의 힘은 가지고있지 않았다.


무력했다. 그 찰나의 시간에 날 지배한건 무력감밖에 없었다.


절망이 깃들어가는 세상에 니르가 조금씩 멀어지고,

검은 줄기에 몸이 휘감긴 채 힘없이 늘어져있는 연약한 소녀의 뒤로 새빨간 눈동자는 나와 니르를 동시에 비춘다.


[..--]


비웃음.

여전히 그 눈동자에 떠올라있는건 비웃음.


이번 사냥은 무척이나 간단했다고, 무자비한 포식자가 의기양양하게 짓는 비웃음.


뱃속에서 뜨거운것이 치밀어오른다.


"안, 돼에에에!!!!"


그건 단순하지만 맹렬한 분노이자 무력감에 떠밀렸던 의지.

지금 이 순간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한줄기의 뜨거운것은 곧바로 내 두 팔을 향해 치달리고,


아직은 손이 가까스로 닿는곳에 있던 니르의 몸을 휘감은 검은 줄기를 꽉 붙들어 잡는다.


동시에 비웃음이 가시며 커지는 새빨간 눈동자.


"이, 야아아아아!!!!"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몸이 알고있었다.

그게 가능할런지 가늠하는 것보다 먼저 비틀어낸 검은 줄기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뒤틀리며 뚜둑, 한가닥의 줄기가 끊어져나간다.


나도...나름 단련해왔다고!!


[!]


마치 발 아래 깔아놓은 사냥감에게 발을 물린것마냥.

예기치못한 반격에 괴물도 방심하고 있었던건지 니르를 감싸고있던 나머지 검은 줄기들에게서 약간의 틈이 생겨난다.


그렇게 생겨난 찰나의 기회.


니르를 한차례 빼앗긴 그 약간의, 찰나의 틈 안에서 나는 그대로 검은 줄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시 공중에 몸을 맡겼다.


니르의 두 다리를 붙잡으며.


"?! 됐어!!"


검은 줄기의 안에서 빠져나온 니르를 품 안으로 다시 끌어안은 나는 더없는 안도감과 기쁨에 젖어들었다.


떨어지는 것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

이대로 내가 밑에 깔린 채 떨어지면 니르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저 괴물의 손에 쥐어져있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니르를...구해냈어!


"됐다구! 이 빌어먹을 괴물자식아아!!

네 뜻대로 될것 같...."


넘쳐흐르는 기쁨과 괴물의 비웃음에 한방 먹여주었다는 통쾌함으로 오랜만에 육두문자를 시원하게 내뱉으며 올려다본 괴물의 눈동자엔,


다시금 비웃음이 떠올라있었다.


그리고 그 새빨간 눈동자 한가운데에서 반짝이는 무언가.


"...?!"


눈에 익은 그것은 분명 저 괴물이 나타나기 전 습격자들이 가슴에 박아넣은 막대.

금색의 반짝이는...니르가 보여주었던, 그리고 집이 무너지기 전 품안에 넣은 막대.


저게 목적이었던거야?!


그렇게 조금씩 멀어지는 새빨간 눈동자는 마치 꿈처럼.

뒤이어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괴물의 손톱은 마치 환상처럼.

현실이 아닌듯.

현실이 아니길 바라듯.


어리석은 '방해물'을 비웃는 새빨간 눈동자가 진정한 '사냥감'을 손에 넣곤 나를 향해 손톱을 내리치는 그 와중에도 나는 니르를 품안에 안은 채 하염없이 떨어져내려간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꺄아아아!!!"


새된 비명이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타고 저 하늘 높이.


절망만이 남고 죽음만이 가까워져오며 품안에 꼭 끌어안은 니르와 함께 어디서 찾아올지 모를 끝을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던 그 순간.








그 모든것이 끝을 맞는 어두운 세상에, 은색 빛줄기가 그어진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스카치에라의 투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관련 공지 18.02.10 76 0 -
46 Chapter [만남] : Epilogue. 밤이 밝은 뒤 찾아온 시간은. 18.02.10 112 0 13쪽
45 Chapter [만남] : @. 밤이 밝아오는 사이에. 18.02.10 75 0 34쪽
44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5) 18.02.10 90 0 27쪽
43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4) 18.02.10 80 0 27쪽
»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17.12.22 88 0 23쪽
41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2) 17.12.18 114 0 27쪽
40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1) 17.12.16 100 0 19쪽
39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8) 17.12.15 105 0 22쪽
38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7) 17.12.14 110 0 26쪽
37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6) 17.12.13 86 0 34쪽
36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17.12.12 85 0 34쪽
35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4) 17.12.10 92 0 23쪽
34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3) 17.12.09 85 0 32쪽
33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2) 17.12.08 105 0 22쪽
32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17.12.07 134 0 23쪽
31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6) 17.12.06 102 0 27쪽
30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5) 17.12.05 89 0 23쪽
29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17.12.04 103 0 25쪽
28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17.12.03 78 0 22쪽
27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2) 17.12.02 105 0 23쪽
26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17.12.01 98 0 24쪽
25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9) 17.11.30 122 0 22쪽
24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8) 17.11.29 98 0 24쪽
23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7) 17.11.28 85 0 23쪽
22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6) 17.11.27 90 0 29쪽
21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5) 17.11.26 98 0 32쪽
20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4) 17.11.25 108 0 27쪽
19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3) 17.11.24 150 0 26쪽
18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2) 17.11.23 102 0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