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호이베 님의 서재입니다.

스카치에라의 투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최근연재일 :
2018.02.10 20:35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4,563
추천수 :
3
글자수 :
520,254

작성
17.12.03 19:06
조회
77
추천
0
글자
22쪽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DUMMY

조합장님을 찾는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조합장님?"


"음? 아 루시안"


첸드릭과 헤어지곤 광산조합에 가기 위해선 필히 통과해야할 중앙광장에 접어들자마자 내 키높이까지 세워진 나무탑 아래에서 수명의 남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계신 조합장님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온건,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


광산조합에서 마주칠 수 있기를 바랬지만...어제는 없던 이만한 나무탑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기위해 조합장님 본인이 직접 나서시리란건 조합장님을 그다지 뵌 적이 없는 나도 알만한 일이었다.


저 연세에도 온몸에 퍼져있는 근육들과 그 책임감을 보면.


"축제를 즐기러 왔느냐? 공작영애는?"


목에 걸친 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손에 들고있던 나무를 내려놓은 조합장님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지금은 같이 안계세요. 어제 마을에서 묵으셨거든요"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럼 마중하러 온게냐?"


"아뇨. 저는 조합장님을 뵈러 왔어요"


"나를?"


의문스러움이 얼굴에 퍼져나가는 조합장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뒷편을 살짝 훔쳐본다.

나무탑은 거의 다 쌓아진것 같으니...조합장님과 자리를 옮겨 얘기하는게 낫겠지?


"말씀드릴게 있어서요.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자리를 옮겨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흠...작업도 거의 끝나가니 문제는 없다만..."


갑작스레 찾아와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내 의도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가지고 계신듯한 조합장님은 잠시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시간이 걸리는 이야기냐?

이 작업이 끝나고 나도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아서말이다"


"..정작 축제에 조합장님은 즐기시지 못하고 계신것 같아 안타깝네요"


"남말은. 그건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느냐"


나야 애초에 축제엔 크게 관심도 없고, 지금은 그런것에 신경쓸때가 아니니까..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거에요. 아마도.."


"아마도, 인게냐"


남아있는 일이 많은걸까? 주저하는 듯한 조합장님은 연신 어깨너머로 나무탑을 둘러싼 수명의 남자들을 돌아보고있었다.

지금은 타이밍이 안좋은걸까...그래도 지금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될텐데.


"최대한 짧게 말씀드릴게요"


"...네가 그정도로 빨리 내게 말해주고 싶어하는게 무엇일지 감도 오질 않는구나.

하지만 적어도 그게 시급한 일이라는건 알겠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다급해지기 시작한 내심이 드러나버렸는지 간곡해진 내 부탁에 조합장님은 잠시 날 내려다보곤 몸을 돌려 나무탑을 둘러싼 남자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남자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던 조합장님은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내가 있는곳으로 돌아왔다.


"가자. 지금은 광산조합에 안사람이 사람들을 초대한터라 보는 눈이 많을테니 다른 인적이 적은곳으로 가야겠구나"


자리를 옮기잔 이야기에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조합장님은 그 말만을 남긴채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축제때문에 사람들 대다수가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이런날엔 오히려 마을 외곽쪽 외진곳에는 사람이 없기마련이다.

조합장님도 그런곳 중 하나를 떠올렸는지 마을 외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간략한건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그래. 말해보려무나"


다른 사람들이 들어도 흘려보낼 이야기는 지금 미리 해두는게 좋을테지.

인적이 드문곳에선 중요한것만을 집어 이야기한다면 조합장님의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을거다.


"공터 주변 숲 속에서 가끔 아침이 되면 저희 집 위로 새들이 날아오는 건 알고계시죠?"


"알다마다. 나도 처음에 그걸보고 꽤나 놀랐으니말이다"


"몇일전, 그러니까 공작영애가 오고난 다음날 아침에도 그 새들이 나타났어요"


"...."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으며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조합장님은 계속하라는 듯 시선을 보낸다.


"전보다 비교도 안될 규모로, 숲 속을 가득 채울 만큼요"


"...숲 속을 가득 채울만큼?"


"네. 공터를 둘러 싼 숲속을 가득.

게다가, 전부 검게 물들어있었어요"


"....뭐?"


멈칫, 조합장님의 발이 멈춰서며 살짝 뒤를 걷고있던 내 위치와 나란해진다.

그렇기에 눈에 들어온 조합장님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검게 물들어 있었다라는게...전부 까마귀들 같이 애초에 검은 새들은 아니었느냐?"


"공터에서 혼자 9년동안, 그 이상도 살아온 저에요.

숲 속에 사는 새들의 생김새와 색을 모르겠어요?"


그날 보았던 새들은 분명 최소 세네종 이상의 새들이 섞여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하얀색이라던지 갈색 같은 다양한 색을 띄고있었을 새들.

그 새들이 그날만큼은 모두 같은 검은색으로 몸을 물들이곤 눈을 빨갛게 빛내며 공터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건,


"...직접 보지 않고서야 쉬이 믿기 힘든 이야기구나"


멈춰있던 발을 다시금 땅에서 떼내는 조합장님은 그럴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낸다.

하지만 그건 분명 있던 일이다.

나 혼자만 보았으면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 전부가 보았으니까.


"허나 루시안 네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게다가 그 자리엔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기사들도 있었을테니..

헌데 그걸 왜 이제와서 이야기하는게냐?"


의문이 섞인 조합장님의 질책에 멋쩍게 볼을 긁적인다.


"새들이 찾아오던건 가끔 있었던 일이라 익숙해지기도 했고 요새 하도 많은 일이 있었어서 경황이 없었거든요.

말씀 드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그땐"


"하긴 공작영애가 찾아오고 그녀를 안내해야할 일이 그리 가벼운 일은 아니었을테니.

내가 너에게 지워낸 부담이다. 내 실책이구나"


"...그런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닌데요"


어차피 누군가는 했어야할 일이고, 다소 과정에 강제성이나 과격함은 있었더라도 내가 하겠노라 마음먹은 일이다.

이제와서 그런걸로 조합장님을 원망한다거나하는 건 없어.


"뭐 어찌되었든 내 부탁으로 인해 네가 피해를 본거니 말이다.

그럼 그 이후론 그런일이 또 없었느냐?"


"그 이후엔...음?"


그러고보니 그 이후로 새들이 찾아오는 일이 없었네?

키니가 알아서 숲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을...리는 없겠고. 그 녀석, 하라고 하지 않는이상 안하니까.


"없었네요...

근데 애초에 그다지 자주 일어나던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 간격으로 있던 일이니..."


"하지만 지금까지완 확연히 다른 식으로 나타났지"


"..그건 그렇네요"


연관이 없을거라 생각하는게 이상할정도로 이례적이던, 기묘했던 그날의 모습.

시간을 좀 더 두고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의심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보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날의 그 현상과 어제 보았던 것의 연관성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이 쯤이면 괜찮을 듯 하구나"


숲 속에서 새들이 검은 가루를 흩뿌리며 터져나가는 기억을 곱씹고 있던 내 머리가 무언가 단단한것에 부딪힌다.

생각에 잠겨듦과 동시에 느려진 발걸음 덕택인지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내 눈에는 조합장님의 넓은 등 너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의 한 부분이 들어왔다.


언제 여기까지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을에서도 울타리 안쪽으로 민가가 꽤나 떨어져 텃밭으로 쓰이는 곳이다.


"다들 축제에 나갔으니 지금 굳이 이곳에 찾아올 사람은 없을게다"


게다가 텃밭 중간즈음에 서있는 이곳은 민가, 또는 주변 어느곳에서든지 사람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자리.

마을 사람들에겐 절대로 들리게하고싶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이만큼 최적의 장소는 없을지도.


"슬슬 본론을 이야기해주지 않겠느냐?"


나이보단 젊어보이는 외모완 달리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한 깊은 눈동자로 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조합장님의 시선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긴장된다. 이 이야기를 조합장님에게 꺼냈을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다. 혹여나 이 이야기가 이로인해 마을에 퍼지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내가 보았던 것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을지.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감정을 손아귀에 쥔 악마가 귓가로 찰싹 달라붙어 지금이라도 뒤돌아가는게 어떠냐며 속삭이는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돌아가서 나와 첸드릭, 그리고 공작영애만 아는 사실로 남겨두는게 어떠냐며.

어차피 스카치에라라는 곳에서 범인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달려와 금방 처리해줄텐데, 뭣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며.


"...어제 저녁, 첸드릭 경과 숲에 들어가서.."


하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그래선 안된다.

눈앞에 닥친 위험은 그 날카로운 이빨을 마을 사람들에게 들이밀고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몰라서야 되겠는가.

물론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이를 알릴수는 없겠지만, 유사시에 마을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에겐 알려주어야하는게 맞는거다.

마을을 위해서.

부모님께서 목숨을 바쳐 지키신 이곳, 이 사람들을 위해서.

마을을 여지껏 일궈온 마을 사람들이 그 위협을 마주하고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도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가 점점 어제의 기억을 짚어나갈수록 조합장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간다.





"...뭐라구요?"


눈 앞에 부동자세로 선 첸드릭 경에게 재차 묻는다.

그가 지금 꺼낸 이야기를 도저히 믿고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마을 주변 숲에서 크니쿨의 잔재가 확인되었습니다.

어제 저녁 확인 후 자세한 조사를 위해 아침일찍 숲 안으로 기사들을 보내고 저는 아가씨께 보고를 드리러 온겁니다"


역시나.


"크니쿨의 잔재라면...스카치에라에서 파견 온 사절이 이야기한게 맞나요?"


"맞습니다"


"....."


나는 크니쿨에 잔재에 대해선 모르지만 눈 앞의 이 노기사는 그걸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공작가를 나서기 전 아버지께서 내 호위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임명해주신거고.


그런 첸드릭이, 단지 의심으로 끝났으면 했던 것을 맞다고 긍정한다.


"공격성이 극히 낮은 쿠르가에게 습격을 당한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크니쿨의 잔재에 영향을 받은듯한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확실히 크니쿨의 잔재가 퍼져나가는 지역에만 나타나는 증거를 확인, 파괴하여 땅에 묻는걸로 응급처치를 하였습니다만...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숲 속에 얼마나 그 영향이 퍼져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작은 범위는 아니리라 사료됩니다"


"..당시 같이 현장을 확인한 사람은?"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아짐 일등기사, 지나스 일등기사, 오긱스 평기사.

그리고...루시안 님이십니다"


"루시안 님이..."


평정심을 찾으려던 마음이 다시금 거칠게 일렁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첸드릭 경이 분명 어제 루시안 님께 숲 속 안내를 부탁한다며 데려갔었으니까.

게다가 이럴거라는 건 나도 이미 각오한 바.


아무런 일도 없기를 바랬지만...만약 마을에 정말 크니쿨의 잔재가 나타났다면 그 사실은 적어도 루시안 님에겐 꼭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마을을 누구보다 위하는 의지를 지닌 그에게 만큼은..


하지만 동시에, 각오를 했다곤 해도 크니쿨의 잔재가 정말 있었고 그걸 루시안 님이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이 꽤나 아프게 다가왔다.


"지금 루시안 님께서는?"


"마을에 계십니다.

로번 리가튼 영지관리관에게 어제의 일을 보고한다고 하였습니다"


"괜찮은건가요? 루시안 님 이외의 마을에 관련된 분이 그 사실을 알게된다는게..."


"로번 영지관리관까지는 괜찮을거라 판단됩니다.

무엇보다 루시안 님이 제 아무리 마을에서 어느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로번 영지관리관 만큼은 아닐테니까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첸드릭 경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로번 영지관리관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로번 영지관리관 님께서 그 사실을 알게되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걱정되는군요"


"테미 군이 잘 알고있을거라 봅니다만, 루시안 님은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있을겁니다.

저는 그가 자신의 행동이 일으킬 결과와 그 영향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신중히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조력을 구했고,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조심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로번 영지관리관에게도 최대한 신중한 자세로 이 일을 전하리라 봅니다"


옆에 서선 조용히 첸드릭 경과 나의 대화를 듣고있던 테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루시안 님이 로번 영지관리관 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그저 그를 믿는 수 밖에 없을것같다.


그도 그 나름대로 마을을 위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을테니까.

그에 대해 이 이상은 더 이상 내가 끼어들만한 문제가 아냐.


"그렇다면 이 일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은 첸드릭 경과 아짐 상등기사, 지나스 상등기사, 오긱스 평기사, 그리고 저와 테미에 루시안 님과 로번 영지관리관 님...여덞명인가요"


"필요최대의 인원수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상 많은 사람들이 알게된다면 마을에 소문이 퍼질 가능성도 비례해서 늘어날테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신이나선 내 손을 잡아 이끌던 니르가 어떻게든 따라오려던 걸 떼놓고 불쑥 나타난 첸드릭 경과 함께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기사들이 사용중인 마을 외곽의 임시숙소로 온게.

니르가 이 대화를 듣게된다면 어찌되었든 그녀의 부모님 또한 이 사실을 알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느정도의 소란이 일어날 지 예상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마을 사람들 전부에게 알려도 좋다.

하지만, 그 소란의 정도를 예상 할 수 없는 일이라면...오히려 모두에게 알리는 게 더욱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을테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요.

일단 그에 대한 대비는 진행되고 있는건가요?"


"출발 전에 공작각하께서 언질을 주셨듯, 수도에 체류중인 스카치에라의 관계자를 통해 이미 지원은 약속된 상태입니다.

크니쿨의 잔재가 나타났다는 의심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준비를 마쳤을테고, 보고가 전해진 그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을테니 그들이 도착할 때 까진 긴시간이 필요친 않을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들의 파견이 정식으로 확인될 때까진..글렌로우드 기사단 만으로 마을의 방비를 굳히는 수 밖에 없겠네요.

크니쿨의 잔해가 불러올 영향과 이를 알게된 마을 분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지 예측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라면 오히려 미리 대처를 준비한 저희들이 크니쿨의 잔재가 끼쳐올 영향에 대해 대비하고 이 사실이 퍼져나가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소요가 일어날 상황을 되도록 만들지 않는 편이 효율적일테니까요.."


내 입으로 떠들고는 있지만..나는 이런게 싫다.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는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내 자신이.


물론 마을 사람들이 크니쿨의 잔재에 대해 얼마만큼 효과적인 대비를 할 수 있을지는 냉정히 봐야할 문제다.

다른것도 아닌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라 불리는 '크니쿨'이 남긴 영향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 누가 '대비'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을까?

제아무리 광산지대라는 이 험지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이더라도 그건 절대 쉬운일이 아닐거다.

쉬운일이 아닌것 뿐만이 아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거다.

그 사실이 퍼져나가는 것 만으로도 마을은 순식간에 패닉에 잠겨들고 말테니까.


허나, 그건 '나는 너희들보다 더 뛰어나다'라는 사고방식이 깔려있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생각.


너희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테니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겠다는, 일견 멋들어진듯하지만 그 속내는 상대방을 그저 피보호자 또는 나약한 존재로서 규정하는 계급과 힘의 원리.


과거 귀족들과 기사들의 횡포를 그 뿌리에서부터 떠받치고있던 선민사상과 우월주의가 아직도 내 안에 심어져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온다.


"..아가씨"


"으, 응? 왜 테미"


갑작스레 날 부르는 테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오랜시간 날 바라봐왔던 짙은 갈색 피부의 개인시녀는 내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올 듯한 눈동자로 지긋이 내 두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눈동자 너머 내 안쪽까지 찾아와 혐오감에 질려 웅크린 속내를, 그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니르 님의 빵을 참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응 좋아해. 근데 갑자기.."


"아가씨께서는 니르 님의 빵을 먹기 위해 그저 그 댓가를 치르고 계신 겁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그저 그게 돈과 같은 현물이 아닌...아가씨가 가지고 계신 다른 것일 뿐"


숨이 막혀오는 듯 헐떡이던 나의 속내에게 테미는 그 말만을 속삭이곤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고개를 돌려 첸드릭 경을 바라보는 테미의 옆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보다 한숨을 푸욱.


숨 이외에 무언가 섞인건지 모르겠지만, 괜시리 무겁게 느껴지는 한숨을 큼지막하게 뱉어내자 마음이 조금 편해져오는 기분이 들었다.

궤변이란건 알고, 참 알기 어렵게 빙 에둘러서 날 위로하려는 그녀의 이런 모습은 자주 봐온터라 익숙하다.

가끔은 직접적으로 '힘내세요'란 말을 해줬음할때가 있지만.


"후우...그럼 첸드릭 경, 공작가에 연락을 취할 방법은요?"


"현재 마을에 체류중인 상회중에 수도에서 온 상회가 있지 않습니까?"


"있을테죠?"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예정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협조를....아"


그러고보니, 수도를 출발하기전 테미가 상회에서 보았다던 시험 중인 장거리 연락수단이 있었다고 했지.

수도와 카이옌이라는, 수도에서 북서쪽 끝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와 금새 연락이 가능할 정도라고 했으니 그보단 가까울 탄트라 마을에서 공작가까지도 그걸로 연락이 가능할 터였다.

수도의 상회로 연락이 된다면, 그 이후론 공작가에 전언을 부탁하는 것 뿐이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상회에서 보았을 때 바로 구해둘걸 그랬군요"


테미가 아쉬워하는 것도 알만하지만 이런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을 못했으니까.

게다가 그거...


"비싸다며? 이제 시험 운용중인 물건을 '쓸모있어보인다'라는 이유만으로 비싼 돈을 들여 가져올필요는 없으니까"


"공작가의 영애라기엔 굉장히 인색한 생각이시군요"


"인색한게 아니라 절약하는거거든?"


그건 손바닥 만한 물건 두개가 가질 액수가 아니었단말야.

그 돈이면 수도의 모든 빵들을 삼사년은 독점할 수 있을정도였으니까.


"만에하나 현재 마을에 체류중인 수도에서 온 상회 사람들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내 정수리 끝에 걸쳐있는 테미의 두 눈동자가 날 내려다본다.


...그런?!


"그,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만 될 뿐이잖아!"


"부정적으로 사고할 때도 있어야 다른 방법을 발견해낼 수 있는겁니다"


"다른 방법이 있어?"


"없지만요"


"?!!?!"


주먹을 쥐고 테미를 투닥투닥 때려보지만 가만히 못박힌듯 선 채 미동조차 않는다.

짜, 짜증나아...!!


"아가씨 그만 놀리게 테미 군.

그런 연락수단이 있다는 것과 수도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수도 상회의 모든 사람들은 그걸 다들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가 내게 알려주었지 않나"


"테미, 테미! 나 진짜 세게 한대만 때려도 돼?!"


"안됩니다 아가씨. 숙녀로서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어머니 지금 한순간만 어머니 말씀을 어길게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입에 올리는 테미에게 한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몸을 빠르게 돌린다.

탄트라 마을에 도착한 당일과 환영식 이외의 날엔 항상 입고다녔던 타이트한 가죽바지가 신축성있게 늘어나며 쏘아진 다리 끝이 갈색의 호를 그리며 테미의 옆 얼굴에 뒤꿈치를 작렬시켰...


"요즘 단련을 많이 쉬신건 아니십니까 아가씨?"


작렬시킨건 테미의 옆 얼굴이 아닌 어느샌가 들어올린 테미의 손바닥이었다.

그래 이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핫!"


이건 몰랐을거야!


"....."


비록 최근 단련을 게을리 했지만, 오랜시간 단련을 계속 해오며 기본적으로 갖춰진 신체능력은 어디로 도망가지 않았나보다.

땅을 디디고있던 다리를 차올리는 것과 동시에 테미의 손에 잡혀있던 발을 빠르게 당기자 지지할 곳이 땅에서 테미의 손으로 옮겨진 내 몸이 그대로 테미의 얼굴을 향해 무릎을 세우며 덮쳐들어갔다.


"...흣"


"?! 꺄..?!"


먹혔다!라고 생각한것도 잠시.

눈 앞에 육박해오던 테미의 얼굴이 어디갔는지 사라져버린다.

그리곤 무언가에 잡혀 순식간에 모든 속도를 잃어버린 몸.


당황한 눈빛이 향한 곳에 여유롭다는 듯 날 내려다보는 테미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온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부터 저와 단련을 시작하셔야 되겠네요 아가씨"


"...저기 테미? 이건 내가 약한게 아니라 네가 터무니 없이 강한거라고 생각해"


"변명은 패자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걸 듣지 않을 권리는 승자만이 가지고 있는겁니다"


"나 지금 진거야?! 넌 나한테 졌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는거야!?"


"역시 아가씨는 명석하십니다"


"그런걸로 칭찬하지마! 기분 나쁘다고!"


테미의 두 팔안에 폭 들린 채 발버둥 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나는 최대한 그 반항을 시도해보지만 테미는 전혀 힘들단 기색도 없이 나를 안아 든 손에서 힘이 풀리지도 않은 채 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럼 아가씨, 저는 먼저 가서 수도 상회의 사람들에게 공작가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고 오겠습니다"


"어디가요 첸드릭 경! 저 좀 내려주고 가요!"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테미 군"


"당연한 말씀을"


"아 참, 공작가와 연락을 취하고 난 뒤 다시 찾아뵐테니 움직이는 곳을 항상 마을 내의 기사들에게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날 무시하고 있는거에요 둘 다?!!!"


목놓아 소리지르는 내 목소리는 그렇게 오갈데없이 하늘로 피어올라가 버렸다.

그 누구의 귓가에도 멈춰서지 못한 채.


위로해 줄거면 다른 방법으로 해달란말야 테미!


작가의말

위로는 그냥 토닥x2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스카치에라의 투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관련 공지 18.02.10 76 0 -
46 Chapter [만남] : Epilogue. 밤이 밝은 뒤 찾아온 시간은. 18.02.10 112 0 13쪽
45 Chapter [만남] : @. 밤이 밝아오는 사이에. 18.02.10 75 0 34쪽
44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5) 18.02.10 89 0 27쪽
43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4) 18.02.10 80 0 27쪽
42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17.12.22 87 0 23쪽
41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2) 17.12.18 114 0 27쪽
40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1) 17.12.16 100 0 19쪽
39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8) 17.12.15 105 0 22쪽
38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7) 17.12.14 109 0 26쪽
37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6) 17.12.13 86 0 34쪽
36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17.12.12 85 0 34쪽
35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4) 17.12.10 92 0 23쪽
34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3) 17.12.09 85 0 32쪽
33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2) 17.12.08 105 0 22쪽
32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17.12.07 134 0 23쪽
31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6) 17.12.06 101 0 27쪽
30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5) 17.12.05 89 0 23쪽
29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17.12.04 103 0 25쪽
»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17.12.03 78 0 22쪽
27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2) 17.12.02 105 0 23쪽
26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17.12.01 98 0 24쪽
25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9) 17.11.30 122 0 22쪽
24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8) 17.11.29 98 0 24쪽
23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7) 17.11.28 85 0 23쪽
22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6) 17.11.27 90 0 29쪽
21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5) 17.11.26 97 0 32쪽
20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4) 17.11.25 108 0 27쪽
19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3) 17.11.24 150 0 26쪽
18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2) 17.11.23 102 0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