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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베 님의 서재입니다.

스카치에라의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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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최근연재일 :
2018.02.10 20:35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4,574
추천수 :
3
글자수 :
52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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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07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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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DUMMY

"후아아아~...암"


백 여든 일곱, 백 여든 여덞, 백 여든 아홉...


"..지겨워"


"사주경계 똑바로 안서냐? 그러다 오벤 상등기사님한테 걸리면 어쩌려그래"


"점검하러 오셨다 가신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아아~! 다음 교대는 언제 오는거야 대체?"


마을로 동료들이 대거 이동하고 나선 경계근무 사이의 텀이 너무 길어져버렸다.

차라리 이 공터를 비우고 모두 마을로 이동하면 좋으련만, 그리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저 쪽에 자리가 없다는데 어떡해.

게다가 여기에도 호위대상이 남아있으니 갈래야 갈수도 없다.


"한시간 쯤 남았네. 다음 교대는 폴먼인가?"


"폴먼? 하...그 자식 또 늦게오겠네"


"알만하지 뭐. 듀이가 빨리 깨워야 할텐데..."


"기대도 안해 롭.

깨운다고 일어나는 녀석도 아니잖아"


"그렇긴하지.."


횃불이 비추는 롭의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바라보다 망루 난간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근데 언제부터 이렇게 안개가 낀거야?"


"그러게. 갑자기 자욱해졌네"


더군다나 공기도 서늘하니 차가워졌다.

낮엔 꽤나 화창한 날씨였던데다가 해가 지고도 어느정도는 포근한 정도의 기온이였기에 아무런 준비없이 경갑옷과 검만 챙겨든 채 망루로 올라왔는데...

담요 챙겨올 걸...음?


"맞다 롭, 너 내려갔다올래?"


"뭐? 야 너 내가 아까도 말했잖..."


"아니 그러니까 오벤 상등기사님은 아까 왔다 가셨잖아.

게다가 여긴 공터에서도 가장 언저리에 있는곳이라고.

잠깐 내려오는 정도야 주변에서도 안보일텐데 뭐 어때"


"...누가 '배짱이 델피'아니랄까봐 그렇게 농땡이 피울 틈새만 노리고있냐.."


"그런 내 덕분에 너도 적잖이 덕 좀 보잖냐.

지금껏 그래왔는데 뭘 새삼스레"


뻔뻔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델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롭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오래전부터 글렌로우드 기사단 내의 단 둘뿐인 동기였던 델피는 언제나 이런식이었다.

항상 농땡이를 부릴 생각만하고, 실제로도 농땡이를 부리면서 들키지도 않는다.

새로들어온 신입 중에 오긱스라는 녀석이 이 녀석이랑 비슷하다는데...그 놈은 명성이 자자한걸보니 들키기도 엄청 들키나보다.


"네가 다녀올때까지 사주경계는 내가 확실히 서고 있을테니까!"


"..알았다 알았어.

담요만 가져오면 되지?"


"...그거면 될거라 생각해?"


음흉스레 웃는 델피의 얼굴을 보던 롭의 얼굴도 비슷한 미소를 띄어간다.

역시 동기는, 친구는 닮는 법이다.


"육포 가지고있냐?"


"그럼 임마 내가 누군데"


"하여간 준비성은 철저한 놈이야 넌.

수통 줘"


신나선 얼른 허리춤의 수통을 끌러 내놓는 델피에게서 수통을 받아든 롭은 횃불도 들지 않은 채 어두운 망루의 계단을 마치 훤히 보이는 것 마냥 빠르게 뛰어내려간다.


타닥, 술 생각에 어지간히 급했는지 바닥에 뛰어내린 듯 둔탁한 소리를 들으며 델피는 난간에 몸을 기댄다.


"으드드...술도 술이지만 빨리 담요가 필요해..."


얇은 천옷 너머 가죽으로 이루어진 경갑옷이 차가운 공기에 싸늘히 식어 천옷 안으로 그 냉기를 보내오는 느낌에 손으로 몸을 수없이 문질러보지만 중과부적.

따뜻해지긴 커녕 손에서 나는 가죽 특유의 비린내에 코만 찡긋거린다.


"...후우"


입가를 타고 하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아니, 이건 겨울에나 나오는거 아닌가?

지금은 분명 늦봄. 밤에 입김이 나올정도로 추워지는건 대체 무슨 이유인거지?


"분명 어제는 안이랬는데..."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싸늘함에 온몸을 부여안으며 망루 아래쪽 옅은 안개로 뒤덮힌 공터와 숲을 둘러본다.

곳곳에서 일렁이는 횃불과 실루엣이 언뜻 보이는 망루들을 흘러나오는 입김 너머 멍하니 둘러보던 델피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점이 들어온건 왜 이리도 롭이 오지 않는지 불평을 내뱉기 일보직전이었다.


"...저게 뭐지?"


숲 안쪽, 공터로부터 꽤나 깊이 떨어져있을만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연기...일까?

달빛이 안개를 비추는 주변보다도 더욱 어두운 것이 피어오르는 그것을 연기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라고 해야할 지 델피의 머리속에선 형용할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한건, 그것은 명백히 이상한 것이라는 것.


"불은 아닐테고..."


등을 기대고있던 반대편 난간에서 일어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 난간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결코 넓지않은 망루이기에 이정도 가까이 간다고 무언가 더 자세히 보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먼데서 응시하고 있는 것보단 이상상황이 생겼을 때 더욱 빠른 판단이 가능하리라.


망루 천장의 종과 이어진 줄을 손에 그러쥔 델피는 눈살을 찌푸리며 희뿌연 안개너머로 보이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난간을 짚으며 살며시 몸을 내민다.


그리고 그 순간.


쉬아악!


"흐익?!"


눈 앞을 지나가는 검은 무언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머리에 그대로 쳐박힐 뻔 했던 그것을 당황한 눈길로 따라가보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있어야 할 것도, 없었다.


"...어, 어?"


망루의 한쪽 난간이 있어야 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무...무슨일이.."


롭은, 롭은 대체 언제 오는거지?


내려간지 한참이나 된 동료가 어째서 아직도 올라오지 않는건지, 왜 하필 롭이 없을 때 이런 이상한 상황이 일어난 건지 머리속이 뒤죽박죽이지만 그 와중에도 확실한건.


'..울려야해!'


자그마한 이상상황에도 종을 울리라 당부하셨던 오벤 상등기사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키익?]


"으, 으아아아!!"


망루의 난간 너머 이쪽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무언가를 두 눈에 담은 그 순간, 델피는 손에 그러쥔것을 온 힘을 다해 잡아 당기며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본것은 거대한 무엇인가가 '손톱'처럼 보이는 것을 자신을 향해 내려찍는 모습이었다.





땡땡땡땡!!!


콰아아앙!!!


종소리와 함께 뒤섞인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귓가를 따갑게 울린 그 때.

다급히 시선을 돌린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이는 어느 한 곳, 망루가 서있어야 할 그 곳에 보이는 것은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망루였던 나무의 잔해와 그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그림자'의 붉은 두 눈동자였다.


"저, 저게 무슨...?!"


"!! 누구 없는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얼빠진 채 서있는 나와는 달리 순간 날카로운 예기를 온몸으로 뿜어낸 첸드릭은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던 기사를 불러낸다.


"코웬 일등기사! 명하십시오!"


"지금 당장 모든 경계병력들을 집결시켜라!

주변에 쌓아둔 나무상자를 기준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기존 계획대로 병력들을 배치해!"


"알겠습니다!"


"오벤 상등기사에게 속히 이곳으로 오도록 전하고!"


"확인!"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적습에도 당황한 기색없이 명령을 내린 첸드릭은 등에 걸터메고 있던 거대한 검을 앞으로 끌러 손에 쥔다.

그의 뒤에서 그저 멍한 시선을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를 향해 보내고만 있던 나는 그런 첸드릭의 등으로 시야가 가려진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숨으시오!"


"수, 숨으라뇨?!"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조금이라도 엄폐할 수 있는 곳에 숨어있는 편이 그대에게 더 안전할것이오!

바깥의 방어는 우리가 맡을테니,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게!"


넒찍한 그 등에서 나오는 기세에 떠밀리듯 뒤로 두어걸음 물러난 나는 황망히 눈앞에 굳게 선 첸드릭과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다 집을 향해 몸을 돌려 달려간다.


여기 있어봤자 나는 방해만 될 뿐이다.

야생동물이나 강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높은 망루보다도 한참이나 큰데다 무얼 어떻게 한지는 모르겠지만 망루를 한번에 날려버린 저 그림자를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을테니까.


덜컥!


"미양?! 미야아아아!"


"키니!"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에는 제 역할을 끝내고 돌아왔는지 키니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울부짖고 있었다.

녀석도 바깥의 굉음을 듣고는 꽤나 패닉에 잠긴 모습이었다.


"진정해 키니!"


"미야아!...먀, 먀아아~"


곧 날 발견하곤 달려드는 키니를 품안에 감싸 안으며 문을 닫고 방 안 깊숙한 곳에 있는 침대 옆으로 구르듯 달라붙는다.


'저게...저게 대체 뭐야?!'


알 수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기괴한 형상의 그림자는 지금껏 내가 듣고보고겪어온 모든 기억을 뒤져보아도 일치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비슷한 것 마저도.

도저히 상식의 안에선 이해할 수 없는 크기와, 이해할 수 없는 형상과,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흉포한 그것을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들어보자면,


'설마...크니쿨?'


언뜻 보았던 그림자의 형상은 자장가처럼 내려져오던 크니쿨의 형상과는 달랐지만, 그 재앙과도 같은 거대한 크기와 힘은 그것을 크니쿨이라고 칭해도 납득이 될만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지금껏 들어왔던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정도로...

그나마 저것과 비슷하다고 할만한 것은 크니쿨 밖에 없었다.


어두운 집 안에서 그런 생각이 든것 때문인지, 갑작스레 목을 죄여오는 두려움이 어두운 방 안을 더욱 새까만 암흑으로 채워버린다.


쿵! 쿵!


무언가가 대지를 울리는 진동이 전해져오며 통나무로 만들어진 집의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려앉은듯한 감촉이 몸 위로 느껴진다.

보이진 않는다. 알 수 있는건 마치 가랑비처럼 몸에 내려앉는 나무 부스러기일지도 모르는 것의 감촉과 품 안에 안겨있는 키니의 온기 뿐.


"미야야, 먀아, 먀아아아...!"


"괜찮아..괜찮아 키니"


품 안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있는 키니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꼭 껴안으며 머리속에 떠오른 상상을 고개를 세차게 저어 털어낸다.


크니쿨일리가 없다. 갑자기 그런게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대체 어디있단 말야?


"...."


이유가, 없는 건 분명 아니었다.

숲 속에서 나타났다는 크니쿨의 잔재.

이틀전, 아니면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이 숲 속에는 크니쿨의 잔재란 모든 맹수들을 압도할만큼 위험한 것이 있었다는 거니까.


게다가 수많은 맹수들을 앞에 두고서도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을정도로 겁이 없는 키니가 이렇듯 떨고있을 정도라면...적어도 바깥에 나타난 저것이 지금껏 보아왔던 수많은 위협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것이리란 상상은 충분히 가능했다.


[어서-!...--!, 여기-..대기해!]


[망루가----! 두개...! --습니다! ....피해---!...--!!]


[롭과 델피가---습니다!!]


[위치를 사수해!!]


"...후우"


띄엄띄엄 들려오는 바깥의 소란 가운데에서도 확실히 귓속으로 파고드는 첸드릭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점점 '두려움'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어만가던 의식이 간신히 그 속에서 기어나온다.


일초, 그리고 또 일초가 흐르며 조금씩 더.


그래, 저게 정말 크니쿨이라면...이야기로만 전해져오던 바로 그 흉포한 악마라면 이미 나를 포함한 이 공터에 있는 모두는 죽은 목숨인거잖아.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 우리는 살아있다.


저 그림자로만 보이는 절대적인 포식자가 먹이를 눈 앞에두고 이 순간을 탐닉하고 있는걸까?

아니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무언가의 이유가 있나?

먼저 망루를 부숴버린 이유는?

방금 전 울린 지진으로 보아...아직 달려들진 않은거겠지?


어렸을적부터 여러 위기 상황을 겪어오며 저절로 다듬어져 온 상황판단이 두려움과 당황이 가시기 시작하자 제 역할을 해내기 시작한다.


"...숨으래서 숨었지만, 정작 이 안도 안전하진 않은거잖아?"


"미야앙..?"


망루를 부쉈다. 어떻게 한건지는 보질 못했지만 아마 일격에.

그렇다면 이런 통나무 집 따윈 간단히 으깨버릴테니까. 저 망루처럼.


그럼 여기서 이러고만 있을 이유도 없다.

아니, 오히려 집 안에 이렇듯 바들바들 떨며 틀어박혀 있으면 안되는 거잖아.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내 집을, 우리 집을 부숴버릴지도 모르는데!


"먕? 미야아! 미야앙?! 먀아!"


침대 밑으로 키니를 안고있던 반대쪽 손을 넣는 나를 순간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올려다보던 키니가 이내 내 손에 쥐어져 나온것을 보곤 안겨있던 품 안에서 발버둥치며 내 옷깃을 연신 잡아당긴다.


하지말라고, 그만하라고 말리는 듯.


"괜찮아 키니. 이건 혹시 몰라서 들고있으려는 것 뿐이니까"


투박한 외견에 끝으로 가면 갈수록 손바닥 하나를 살짝 넘을만큼 두꺼워지는 폭을 가진 양날의 정글도.

거칠게 다듬어진 나무 손잡이에 메어놓은 천이 손에 감기는 익숙한 느낌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거친 심장박동이 천천히 사그라들어간다.


내 변명섞인 말에도 여전히 옷깃을 헝클어 놓던 키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다가가는 내 발치로 뛰어 내려가 바짓가랑이를 물고 연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키니"


"먀아! 먀아아! 미야앙!"


뭐가 괜찮냐고, 바깥에 나타난 저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거냐고 질책하는 듯한 키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곤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바짓가랑이에서 억지로 떼어내 품에 안아든 나는 정글도를 쥔 손의 손가락으로 살짝 창문의 걸쇠를 벗겨낸다.


탁, 헐거워진 걸쇠에서 손을 떼고 창문을 연 나는 바깥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마, 망루 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현재 울타리를 따라 나타난 정체불명의 적영은 총 열!

전체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아, 아아...."


"저게...저게 대체 뭐란말인가..."


"위, 위치를 사수해! 모두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모두가, 손에 검은 들었을지언정 검에 불어넣을 의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현재의 피해상황과 계속 불어나는 그림자의 수를 보고하는 기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개 속에서도 확연히 떠올라있었고, 나무상자를 방폐물삼아 적의 습격에 대비하려던 태세의 기사들은 그저 망연자실하게 눈 앞에 나타난 그림자를 바라만보며 달빛에 날카롭게 빛나야 할 검 끝을 땅에 쳐박아두고 있었다.


열, 그리고 열하나. 또다시 열둘.


그러는 와중에도 그 거대한 그림자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 수를 불려나갔다.

커져가는 기사들의 절망과 함께.


"마...말도 안돼..."


냉철한 상황판단? 그런건 순식간에 다시 바닥으로 내던져버렸다.


옅게 깔린 희뿌연 안개 속에서 그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내고있는 거대한 그림자들이 내뿜는 위압감, 그리고 그것들이 실제로 만들어낸 수많은 망루였던 것들의 잔해와 그 속에 섞여있는 붉은 자국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오직 공포와 두려움만을 남긴 채 다른 모든 감정들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냉철히 판단한단 말인가.


그저 눈 앞에 있는 이 모든것이 현실이고,

사정없이 울타리를 부숴가며 이미 스물이라는 수를 넘어서 나타난 그림자들의 모습은 재앙 그 자체일진데.


저것들이 망루의 잔해를 너머 이쪽으로 다가온다면...


공터 안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얼굴을 보면, 힘이 빠진 채 떨리기 시작한 검을 쥔 손을 보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공터를 둘러싼 그림자들의 앞에서 용맹한 글렌로우드 기사들과 한명의 소년, 그리고 한마리의 동물은 그렇게 숨조차 제대로 내 쉴수없는 공포와 위압감에 억눌려있었다.


"...스읍"


그리고 그 사이를 미약하게, 하지만 날카로이 파고드는 한자락의 소리.


"정신차려!!!"


모든 소리가 사라져 정적에 감싸여있던 공터를 울리는 커다란 일갈이 눈을 뜬채 현실로부터 멀어져가던 모두의 의식을 뒤흔들어간다.


모두가, 같은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눈 앞에 적이있다! 검을 나눠보지도 않은 적에게 기세로 억눌리는 건 이미 진것이나 다름 없는것!

기사라면! 포기하지 말고 검을 끝까지 겨눠라!!"


검게 빛나는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안개를 베어낸 단 한명의 기사.

모두가 아득해지는 정신으로부터 그대로 손을 놓아 떼어놓는 와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 누구보다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명예로서 여기는 그의 일갈에 공터에 깔려있던 안개가 짜르르 울려온다.


눈 앞에 늘어서있는 그림자의 기세에도 전혀 눌리지 않는 거대한 기세가, 기사들의 등을 강하게 후려쳐간다.


"검을 들어!

눈을 비비고 정면을 똑바로 봐라!

손에 힘을 주고 다시 검을 그러쥐어라! 부츠의 끝을 땅에 박아넣어 언제고 달려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옆에 선 동료와 뒤에 놓인 지켜야 할 것을 포기하지마라!


검을, 눈 앞에 두어라! 글렌로우드의 하얀사자들이여!"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향하는 곳에,

기사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서있는 그 한복판에 세워진 장대 끝에서 늘어져있던 깃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그 위용을 드러낸다.


이마에 잎사귀가 달린 두 줄기의 나뭇가지를 뿔처럼 매단 표효하는 하얀 맹수.

그것은 그 어떤 위협에도 지켜야 할 것의 앞에선 절대 물러서지 않는 백수의 왕, 사자의 모습이었다.


"표효하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터져나간 첸드릭의 구호와 함께,


"""우와아아아아!!!"""


몸을 휘감던 공포의 족쇄를 떨쳐내려는 듯,

마음을 좀먹던 두려움을 찍어 누르는 듯,

떨리는 손 끝에 다시금 힘을 불어넣으려는 듯,

힘이 빠져 절망에 잠식되어만 가던 몸에 다시금 채찍질하듯,


'글렌로우드의 하얀사자'라 불리는 기사들은, 다시금 되찾은 기세를 그 커다란 표효로 눈 앞의 적들에게 쏘아보내며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키익, 킥]


[키기긱, 키킥]


[킥, 킥]


그리고 그 한데뭉친 기세를 마주한 그림자들은 기괴한 소리를 울려내며 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망루가 있던 자리에 멈춰선 채 눈동자만 움직이는 그림자들에게 확연한 변화가 나타났다면, 불어만가던 그 수가 스물 다섯쯤 되는 순간부터 더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


"..꿀꺽"


용맹함을 되찾은 기사들과 그림자들이 대치하는 공터.

더이상 공포와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긴장감만이 무겁게 감돌기 시작하는 공터는 아까완 다른 적막이 안개를 따라 흐르고 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까운 기사의 이마를 따라 쉴새없이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안개 사이로 새어들어온 달빛이 이곳저곳에서 반짝이며 같은 곳을 향해 번뜩이고,

공터를 감싼 그림자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일렁이고만 있었다.


그렇게 몇초인지 몇분인지 몇시간인지도 모를정도로 희미하지만 확실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누군가가 침을 삼킨 그 소리가 크게 울릴정도로 조용해진 공터에선 모두가 예민하게 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 사소한 변화에도 기사들은 민감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 오른쪽 끝의 그림자가 분해되기 시작합니다!"


그 외침이 울려오기도 전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선 거대'했던' 그림자가 마치 무언가를 떼어내듯 그 크기가 작아지며 주변에 무언가를 흩뿌리고 있었다.


크고작은 덩어리로 떨어진 그것들은 안개에 가려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는 없었지만,


"..새?"


눈에 익은 그것들은 꽤 오랜시간동안 한 주에 몇번은 아침마다 보아왔던 새들의 형체.

그리고 찡그린 눈동자를 더욱 집중하자 시야에 조금씩 뚜렷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다른 덩어리들은 다리가 달린 짐승의 형체로 보였다.


그 모두가 안개 너머로도 알 수 있을만큼 새까맣게 물들어있다.


마치 며칠 전 아침 숲에서 보았던 새들처럼, 그리고 눈 앞에 이젠 모든 개체가 분해되어가는 그림자처럼.


"역시 연관이 있었어...!"


이게 크니쿨의 잔재와 상관이 있는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젯밤 보았던 쿠르가나 동물들의 사체는 저렇게 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 이외엔 지금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도 없고, 눈 앞에 나타난 것들이 그 때 보았던 것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이해해도 무관하지 않을까?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소?"


"첸드릭 경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다면요"


어느샌가 창문가까이 다가온 첸드릭이 시선은 점점 크기가 줄어드는 그림자에 고정시켜둔 채 넌지시 동조를 건네온다.


"주변 동물들을 물들이곤 공격성을 띄게하는 것과 커다란 괴물을 만들어내는 크니쿨의 잔재라...

지금껏 보아온 것들 중엔 가장 지독하고 가장 난해하군"


눈 앞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 수많은 동물 형체의 새까만 무언가를 질린 듯 바라보던 첸드릭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한 수의 동물들이 공격성을 띄고 사람을 덮치는 것 만으로도 두려운 일인데 망루를 단번에 부숴버리는 거대한 그림자, 괴물까지 나타났다.


이건 이젠 정말 재앙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을것같아.


"그나마 저것들이 이곳에만 나타난게 천만다행이랄까"


"...이곳에만,요?"


"..실언을 했군. 이곳에만 나타나있길 간절히 빌고 있소이다"


만약 방금 전의 그 그림자나 저런 동물들이 마을에 나타났다면...

지금쯤 마을은 아수라장의 소란에 휩싸여있으리라.


소란 정도가 아니다.

누구나가 잠들어있는 상황에 저 그림자들이 나타나 망루를 부순것처럼 마을의 민가에도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등줄기에 싸늘한 소름이 돋아난다.


..헌데, 정말 마을에는 저게 나타나지 않았으려나?


"마을 쪽이 걱정..."


"첸드릭 부단장님!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다급한 기사의 목소리에 창문에서 문으로 돌아나와 첸드릭 옆에 서있던 나는 뛰어온 기사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곳에선 분해가 끝난 짐승의 모습을 띈 그림자들의 잔해가 하나 둘 씩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하나 둘씩, 천천히.

그리고 이내 마치 썰물이 빠지듯, 빠르게.


"..휴우..."


기사들 중 누군가의 한숨소리가 귓가에 걸쳐온다.

그들도 엄청난 긴장에 휩싸여 있었으리라.

언제 저 수많은 적들이 덮쳐들어올지 몰랐을테니까.

어째서 물러나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적이 다가오지 않고 물러난다는 것 자체가 기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안도할만한 일일테니.


"...응?"


잠깐, 근데 저 방향은...?


"!! 전체 집결! 속히 이동한다!"


그림자의 잔해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나와 함께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첸드릭 또한 그 모종의 사실에 닿았는지 다급히 주변의 기사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차마 그들을 기다릴 수 없었기에 손에 그러쥔 정글도를 굳게 쥐며 먼저 자리를 박차고 괴물들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제길, 제기랄...!!


"미양! 먀아아?!"


"어쩔 수 없어 키니! 저것들, 지금 마을로 가는 중이란 말야!"


어떻게든 그 꽁무니에라도 닿을 수 있도록, 땅을 딛는 발에 온 힘을 실어 달려나간다.


작가의말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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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에라의 투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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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Chapter [만남] : Epilogue. 밤이 밝은 뒤 찾아온 시간은. 18.02.10 112 0 13쪽
45 Chapter [만남] : @. 밤이 밝아오는 사이에. 18.02.10 75 0 34쪽
44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5) 18.02.10 90 0 27쪽
43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4) 18.02.10 80 0 27쪽
42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17.12.22 88 0 23쪽
41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2) 17.12.18 114 0 27쪽
40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1) 17.12.16 100 0 19쪽
39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8) 17.12.15 105 0 22쪽
38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7) 17.12.14 110 0 26쪽
37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6) 17.12.13 87 0 34쪽
36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17.12.12 85 0 34쪽
35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4) 17.12.10 93 0 23쪽
34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3) 17.12.09 85 0 32쪽
33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2) 17.12.08 106 0 22쪽
»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17.12.07 135 0 23쪽
31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6) 17.12.06 102 0 27쪽
30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5) 17.12.05 89 0 23쪽
29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17.12.04 103 0 25쪽
28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17.12.03 78 0 22쪽
27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2) 17.12.02 106 0 23쪽
26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17.12.01 98 0 24쪽
25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9) 17.11.30 122 0 22쪽
24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8) 17.11.29 99 0 24쪽
23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7) 17.11.28 85 0 23쪽
22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6) 17.11.27 90 0 29쪽
21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5) 17.11.26 98 0 32쪽
20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4) 17.11.25 108 0 27쪽
19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3) 17.11.24 150 0 26쪽
18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2) 17.11.23 102 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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