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호이베 님의 서재입니다.

스카치에라의 투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최근연재일 :
2018.02.10 20:35
연재수 :
46 회
조회수 :
4,561
추천수 :
3
글자수 :
520,254

작성
17.12.01 19:08
조회
97
추천
0
글자
24쪽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DUMMY

"...으응.."


바스락, 천이 스치며 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여온다.

온 몸을 감싸안고있던 포근한 잠의 세계는 그 하늘에 낀 구름을 조금씩 걷혀내고, 하나 둘 깨어나는 몸의 감각들이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차근차근 그러모으기 시작하며 흐릿하게나마 세상에 빛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한다.


우선, 흐릿한 나무 천장.


"...."


여기가 어디지?

요 며칠동안 묵었던 간이숙소의 새것같은 천장은 온데간데 없고 세월이 진하게 묻어나는 천장을 아직 구름이 덜 걷힌 시야너머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니 텅 비어있던 머리속에 당장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새근거리는 숨소리.


"..우음.."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딱 달라붙어있는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가 무의식적으로 옮긴 눈동자 속에 뛰어들어온다.

누구지? 두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잠시, 어제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잔잔했던 기억속의 수면 밑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신나선 나와 테미의 손을 두손으로 잡아끌며 자신의 집, 데릭 톨로즈라는 험악하게 생긴 빵집 주인의 집으로 달려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자신의 딸을 보곤 그 거대한 체구와 험상궃은 인상과는 달리 녹아들어가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가 아이의 손에 잡힌 우리들의 손을 보고 그 표정 그대로 얼어붙어버리던 모습.

숨을 쉬는지도 의심스럽던 그를 그대로 지나쳐 나와 테미를 데려간 화덕 앞에서 빵을 만들기 시작하는 아이.

곧이어 완성된 빵을 건네받곤 머뭇머리던 테미를 잠시 바라보다 입에 넣었던 빵이 너무나도 맛있었던, 역시 갓구운 빵은 최고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알게된 뜻 깊은 시간...


"...이게 아닌데"


잠이 덜깼나보다.

아무튼, 그 이후로 빵을 먹은 테미가 다시 쓰러져 방에 뉘여지곤 밤도 깊어졌겠다 그대로 묵고가리라 결정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눈 앞의 이 아이는, 니르는 한시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않았다.


'..고맙긴 하지만'


솔직히, 대하기 어려운 점은 분명히 있다.


그동안 내 주변에 있던 또래의 아이들은 적지 않았지만 모두가 처음 내 소개를 듣고 난 뒤엔 거리를 두거나 반감을 가지는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나마 사이가 좀 진전되더라도 아이들은 같은 선에서가 아닌 분명히 날 자신들보다 위에 두곤 했었다.


학교에서 절친한 친구라는 아이들도 그정도이니, 나와 별 접점이 없던 어린 아이들은 더욱 더.

그렇기에 난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다루는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접해 본 적도 적거니와 지금까지 내 주변의 어린 아이들은 애초에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었으니까.


간혹 공작가로 새로이 들어오는 하녀들 중엔 니르보다 어린 아이들도 있었지만...애초부터 주인과 사용인 관계에선 사적으로 친해질 접점이 없기도 했었고.


그런 나에게 니르는 내가 익숙하지 못한 나이대의 아이이면서 그간 보아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날 대해줬다.

초면에 바로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말을 건것도 그렇고, 거리낌없이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이곳저곳 끌고다니는 것도 그렇고...


마치, 자그마한 동네에서 서로 오랫동안 알고 살아온 사이처럼, 친근함이 가득 묻어나는 한없이 미소띈 얼굴로.

당혹스럽다고 해야할까, 어색하다고 해야할까.

왜 이 아이는 처음 본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걸까?하는 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살면서 처음 겪는 니르와 같은 아이와 마주하는 것도 생각보단 부담이 되지만..


두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던건.

니르가 탄트라 마을에서 아마도 제일 먼저 날 받아들여주었다는 점과,

탄트라 마을행에 걱정을 한아름 안고있던,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내 마음이 니르 덕분에 조금은 편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고마웠기에.


마을 사람들이 니르의 손을 잡고 길을 뛰어가던 날 보고는 경계심을 누그러트려주었던 것도 너무나 기뻤으니까.

앗, 세가지네.


"....후훗"


마을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뛰어가는 꼬마 여자아이의 뒷모습에서 쉴새없이 춤추던 양갈래로 묶은 뒷머리를 떠올린다.

귀여운 아이. 착하고 활발하며 솔직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


'..'그 힘'을 당신은 탄트라 마을을, 왕국을 지키기위해 쓸 각오가 되어있나요?..'


"....."


불현듯, 칠흑같은 앞머리 아래로 두 눈동자에 차분함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담아 쏘아보내는 소년의 얼굴이 통통 튀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덮어씌워버린다.

그가 건넨 그 말, 무엇보다도 무거운 그 말의 무게가 이제와 가슴을 짓누르는 듯 답답한 기분이 천천히 내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각오..솔직한 심정으론, 아직 그 각오라는 걸 완벽히 하고있다곤 말하지 못할것 같다.

아직도 난 이트비아 왕국을 떠나 돌아올 기약이 없는 스카치에라 파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까.

가야한다. 그게 내 의무이니까.

가기싫다. 그게 내가 하고싶은거니까.

어느쪽의 손을 들더라도, '나'는 실망할거다. 후회할거다.

그걸 뻔히 알기에 그 둘의 손을 꼭 잡곤 어느쪽의 손도 들지 못한 채로 고개만 숙이고있는거다.

시토피엔스라는 체질과 상관없이 난 '귀족'이니까, 왕국을 위해 쓰여야한다는 그 책임으로부터 고개를 돌릴수가 없다.

그리고 그 이전에, 난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행복한 한명의 소녀이기도 하다.


내가 볼 수 있는 곳, 내 시야를 가득채우는 곳은 결국 그렇게 땅바닥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없던 땅바닥에, 그는 거울을 가져다놓았다.

그 거울안에서 나는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울상을 짓고만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도록, 보이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한껏 모아 얼굴을 가리면서.


"우우...더워..."


칭얼거리며 뒤척이는 니르를 덮고있던 이불을 조금 거둬내준다.

어제밤에 잘곳을 안내해준다며 상기된 얼굴로 앞서던 니르는 그대로 안내한 방에 눌러앉아 오랜시간을 종달새처럼 지저귀었다.


다채로운 표정과 풍부한 몸짓을 곁들인 니르와의 대화는 시간을 가는 줄 모를정도로 즐거웠었지.

덕택에 늦게잤으니 니르는 앞으로도 조금 더 잠들어있으려나.


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방 안을 고요히 뛰어다니는 평화로운 아침의 광경.

삭막해져있던 마음이 입가에 침을 흘리며 잠든 니르의 모습에 사르르 풀어져 녹아내려간다.


오늘도, 힘내자.

먼곳을 바라보기 전에 한발자국 앞부터 봐야하니까.





"아, 좋은아침입니다 공작영애"


곤히 잠든 니르가 깨지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 어제 미리 안내받았던 욕실을 찾아 간단한 세안과 몸단장을 마친 나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 냄새가 워낙 기가막혔거든.

본능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어.


"..진짜 빵집을 운영하고 계셨군요"


"가짜 빵집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회심의 농담이었다는 듯 민머리를 반짝이며 한껏 기가오른 표정의 데릭 톨로즈를 올려다보는 뒷목이 뻐근해져온다.

높아서 그래 높아서. 어이없어서 그런게 결코 아냐.


"..아침 일찍부터 빵을 굽고 계시네요?"


..머리속에서 수없이 되새겨봤는데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

죄송해요 아저씨. 대화 좀 돌릴게요.


"아, 이것 말입니까?

아침으로 낼 빵을 굽고 있었습니다"


"아침?"


촘촘히 쌓인 벽돌 사이로 본 화덕 안에는 셀수도 없이 많은 빵들이 구워지고있었다.

화덕 앞 작업대에도 반죽은 산더미.

...저게 아침이라고?


"다들..식사를 굉장히 많이 하시나보네요.."


"아, 아하하. 그런게 아닙니다.

이건 마을 숙소에 묵고계신 기사단 분들께 나누어드릴 빵이거든요"


"..? 기사단? 글렌로우드 기사단?"


"저희 마을에 지금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이 그 분들 빼고 또 있나요"


너털웃음을 흘려내는 데릭의 그 말엔 한점 거짓과 악의도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분명한 선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는 건 이 마을의 사람인 데릭 톨로즈가 기사단에게 빵을 대접한다는게 이해가 되질 않아서.


"...마을에선 저희 기사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계신건 아니셨나요"


"흠...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만"


고개를 돌려 화덕 안을 확인한 데릭은 벽돌을 치우곤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화덕 안의 빵을 하나씩 꺼내 작업대 위에 쌓기 시작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귀족'과 '기사'라는 이름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들이 대다수이긴 합니다 이 탄트라 마을은"


"...그런데 왜.."


그런 선의를 베푸시는거죠?라는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데릭의 얼굴이 이쪽을 향한다.

그의 험상궃은 얼굴에 지어진 표정을 눈앞에 둔 나는 순간 두 눈을 비비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혀버렸다.


"글렌로우드 공작님은, 적어도 다른 귀족들과는 다른 분이시라는 걸 다들 알고있으니까요"


호의,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들어있는 반가움.

수도에서 학교를 다니며 왕국 이곳저곳의 지리와 분포해있는 도시, 마을들에 대해 배울때 탄트라 마을은 분명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 심한 '피향민'들의 마을이라고 배웠었다.


현 국왕폐하이신 길리엄 2세가 즉위하시기 전, 왕국 전역에 썩은 악취를 퍼트리고있던 부패한 귀족들의 탄압과 괴롭힘에 못이겨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을 중 하나인 탄트라 마을은 글렌로우드 공작가의 영지가 되고 나서부터 거주민들의 이전권까지 박탈되어 귀족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더욱 커졌다고.


허나 눈 앞의 이 남자는, 전혀 그런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고있었다.

귀족들의 정점에 선 공작가의 영애를 눈 앞에 두고도.


"이해를 못하시는 표정이시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글렌로우드 공작님'은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시다는 걸 저희들은 다 압니다.

그 분 덕택에 저희가 이곳에서 마을을 이뤄 살 수 있게 된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화덕의 열기 때문에 머리에 맺혀가는 수많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연신 닦아내며 데릭은 다시 화덕으로 시선을 옮긴다.


"..저희 공작가의 영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못하시던게 아니셨나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이미 고향에 두고온것도 없고, 고향이라는 곳도 좋은 기억 하나 없는 곳인데.

그리고 저만 하더라도...고향이라는 곳이 딱히 있는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의 말이 정말일지는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 전부가 그처럼 생각하는 것도 아닐테니까.


"실제로 아직 귀족에 대한 반감이 큰 사람들은 공작영애의 환영식 때 비난을 보낸다던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을에 주둔하고있는 글렌로우드 기사단을 달갑지 않게 보고있긴 하지만...

그들도 충분히 이해는 하고있습니다.

공작가에서 우리들에게 '울타리'를 쳐주었다는 사실을.

입구도, 출구도 없는 울타리이긴 하지만...적어도 그 울타리가 있었기에 마음 편히 이곳에서 살아온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배웠던, 들었던 탄트라 마을의 사정.

그리고 실제로 와서 두 눈에 담고있는 탄트라 마을의 모습.


환영식이 이뤄지던 무대 위에서 본 마을 사람들과의 첫 대면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것만은 아니었다.

데릭의 말대로, 분명 군중들 사이에서 무대 위를 향해 야유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까.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은 내가 '글렌로우드 공작가의 영애'라는 자기소개를 한 이후 그 경계심이 상당부분 누그러들었더랬다.


"걱정하시는 것도 잘 압니다. 수도에선, 왕국의 다른 지역에선 우리 마을을 그리 보고있다는 걸 아주 잘 아니까요.

그것마저도 공작님께서 만들어주신 울타리의 일부였으니"


"..탄트라 마을에 대한 인식이?"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화덕 안에서 노릇노릇 잘 구워진 빵을 전부 꺼낸 데릭은 갈퀴모양의 도구를 들어 화덕 안에서 숯들을 빼내기 시작한다.

제 한몸을 불태워 이젠 더 이상 타오를 곳이 없어진 새까만 숯들이 화덕 입구 아래에 놓인 바구니 안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려가며 이 널찍한 공간 안에 열기를 가득 채워간다.


화끈거리는 그 열기가, 피부를 매섭게 쏘아오는 그 느낌에 무심코 양 팔을 문질렀다.


"휴우...이제 조금 식혀두기만 하면 됩니다.

하던 말을 계속 해서...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피향민들의 마을은 탄트라 마을만이 아닌데 어째서 탄트라 마을이 귀족들에게 반감을 가진 곳으로 대표되는지?"


"..그러고보니"


생각해본적 없었어.

다른 피향민들의 마을도 응당 그러겠거니 싶었지, 왜 굳이 탄트라 마을을 꼭 집어 귀족을 가장 혐오하는 곳으로 꼽는지는 깊게 고민해본 적 없었거든.


"저희가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이루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시작한것이 저희들을 보호해줄 울타리를 짓는것이었습니다.

지금 마을에 쳐져있는 울타리 이외에도 숲 속에서 수시로 내려오는 야생동물의 퇴치라던지, 주변에 성행하는 강도들과 산적들을 몰아내는 것이라던지...


그리고 그 중 가장 중요했던 건, 바로 저희들을 비호해 줄 수 있는 '권력자'를 찾는 것이었죠.

저희들의 대다수는 다들 어느 영지에 속해있다가 도망친 사람들. 만에 하나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다면 저희들은 속수무책으로 다시 뿔뿔히 흩어져 끌려갈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창문이 뚫려있는 벽으로 다가가 나무 창문을 연 데릭의 옆으로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몰아쳐 들어온다.

순식간에, 방 안에 차있던 답답하고 무거운 열기를 띈 공기가 쓸려나가 숨쉬기가 한결 편해진다.


"'권력자'의 횡포를 피해 도망쳐 와 마을을 이루기로 했으면서 다시 '권력자'에게 보호를 청한다는 것 자체가 저희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넌센스였습니다.

초반엔 반대하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죠.

그리고 그 중엔 로번 조합장님도 계셨습니다"


"로번 영지관리관님이?"


나와 대화를 나누던 동안 그런 내색을 보였었나?

아니었는데..


"저희 마을에서 귀족들, 기사들에게 가장 험한 일을 겪으신 분이니까요.

설득하느라 엄청 애를 먹었었죠"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데릭의 표정엔 그에 대해 전혀 괴로웠다던지 하는 감정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만에하나 정말 로번 영지관리관이 매섭게 반대했다면 그를 설득하는게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대충 예상이 됬다.


그를 마주하면서 참 대하기 힘든사람이다란 생각을 계속 해왔으니까.


"조합장님을 겨우 설득해내고 저를 포함한 다섯명이서 수도에 갔을 때, 도착하자마자 귀족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던 저희들을 구해주신게 바로 전대 글렌로우드 공작님이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학교에선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애초에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시던 분도 아니셨긴 했지만...


"그리고 그 분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당시 왕세자님, 현 국왕폐하이신 길리엄 2세 폐하를 통해 탄트라 마을은 글렌로우드 공작령으로 편입, 지금에 이르게 된것이죠.

이처럼 왕국 내에서 탄트라 광산마을이 귀족들을 제일 혐오하는 지역이란 인식을 만들고 확산시킨 덕에 바뀌어가는 왕국 내부의 사정과 맞물려 저희들이 살아온 지역의 영주들은 이곳을 의식적으로 기피해왔습니다.

그들은 더이상의 피해를 보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이자 소심한 권력자들이었으니까요.

이 방법을 생각해낸건 현대 공작각하이십니다.

저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주신, 그러면서도 각하 본인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벽을 세워주신 셈이죠.


뭐...그 댓가는 결코 작은것이 아니었습니다만"


갑작스레 어두워지며 침통한 표정을 짓는 데릭은 잠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뒤 이내 곧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그렇기에 저희들은 글렌로우드 공작가 만큼은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공작영애께서 환영식 때 해주신 말씀도 있기에 현재 마을에선 공작영애와 글렌로우드 기사단을 꽤나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죠"


"..다행이에요"


천만다행.

탄트라 마을에 오기 전, 그리고 탄트라 마을에 와서도 마음 속 한구석을 어지러이 헤집어놓던 커다란 걱정 하나가 그 무게를 잃고 스러져간다.

그 때문에 루시안 님에게도 못할짓을 했는....아.


"저, 그렇다면 어째서 로번 영지관리관님은 첸드릭 경과 그렇게 사이가 안좋은거죠?"


"....그게.."


어제 저녁 루시안님과 테미가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라 무심코 그 이야기를 꺼낸다.

설득했다고 했다. 그리고 수도에서 전대 글렌로우드 공작각하를 뵙곤 마을에서 원하던 것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럼 글렌로우드 공작가 산하 사병대인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부단장인 첸드릭 경과 사이가 좋지 않을 이유가...


"...아"


허나 바로 표정과 말을 흐리는 그의 태도에 건드리면 안될곳을 건드려버린듯한 느낌이 등줄기를 따라 솟구쳐 올라온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부단장이지만 첸드릭 경은 그 당시 분명 글렌로우드 기사단에 있지 않았을터다.


맞아, 첸드릭 경이 글렌로우드 기사단으로 오기 전 적을 두고있던 영지가 여타 다른 귀족들 가운데서도 영지민들에게 가장 혹독히 대하기로 유명한 곳이었었지..?


"조합장님의 과거 일은 제가 어찌 말씀드릴 수 있는일이 아닙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죄송합니다 괜한걸 여쭤봐서"


"아닙니다. 보아하니 공작영애도 모르고 계셨던것 같은데..충분히 의문스러워 하실 수 있는 문제이지요.

저도 처음 첸드릭 아기오스 경이 공작영애와 함께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제일 먼저 조합장님을 떠올렸으니까요"


역시, 과거에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구나.

이걸로 충분하다. '어떤 일'이 확실히 있었다는 것만 안걸로.

이 이상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서 좋을 이야기도 아니거니와 그 때문에 생길 문제는 이미 루시안 님께 협조를 부탁드린 상황이니까.


내가 이 마을에 있을 날도 이제 오일 남짓이다.

괜히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겠지.

걱정은 되지만.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글렌로우드 기사단을 위해 이런것까지 해주시다니"


"별말씀을. 이 정도야 별것도 아닌걸요"


미소지은 얼굴로 고개를 젓곤 적당히 식은 빵들을 커다란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하는 데릭의 옆으로 바깥과 이어진 문이 열리며 키가 큰 여성이 걸어들어온다.


"응? 테미?"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아까 방 문을 열어보니 니르 양과 곤히 잠들어계셔서 일부러 깨워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방금 공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첸드릭 경과 루시안 님께서 이곳으로 향하신다고 하시더군요"


"그랬어?"


잠들어있던 사이에 들어와봤던걸까?


"그건그렇고, 몸은 좀 어때 테미?"


"괜찮습니다. 두번 겪어보니 이제 조금 익숙해지는 느낌이군요"


"...그거 정말이야? 아직 안색이 안좋은데"


"...괜찮,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배에 손을 가져가던 테미는 움찔하며 다시 손을 내린다.

..오늘은 쉬라고 할까.


"오늘 일정은 언제 시작하시겠습니까?"


"그거 말인데 테미..오늘은 그냥 쉬는게 어때?"


"무슨말씀을.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안그래보이니까 그러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않는 테미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오지만, 나도 양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안돼. 오늘은 쉬도록 해 테미"


"싫습니다"


"..저기, 나 그래도 네가 모시는 사람인데.."


"맞습니다. 아가씨는 제가 모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전 아가씨의 곁을 한시도 떠날 수 없습니다"


"...어제 먼저 쓰러져선 드러누운 사람이 누구였더라"


"...안됩니다"


이젠 억지를 부리려는 듯 완강히 고개를 젓는 테미.

이걸 어찌해야하나...정 안되면 니르의 빵을 다시..


"내가! 내가 언니 옆에 붙어있을게!"


휙, 테미의 고개가 그 목이 걱정될정도로 빠르게 향한 곳을 바라보니, 내가 나왔던 곳에 서있는 니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막 일어나 바로 온건지 머리는 아직 부스스한데다 눈은 잠이 덜깬듯 게슴츠레하다.


"키큰 언니는 걱정하지 말구 쉬어! 에밀리 언니 옆에는 내가 붙어있으면 되니까!"


"...그럴수는.."


"니르의 말대로 하시는게 어떻습니까?

솔직히 어제 니르의 그 빵은...제가 지금껏 보았던 니르의 빵 중에서 제일 극악...크흠, 제일 '뛰어난' 빵이었으니까요"


"오오?! 아빠가 니르를 인정해줬어!"


역시 아직 잠이 덜깼구나.

'극악'하다는 말은 못들어서 다행이야 니르.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지금 떨리고 있는 손 끝은 왜 그런거죠?"


"!!"


그의 지적에 손을 뒤로 숨기는 테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지만 그 다급한 행동에서는 꽤나 놀란 기색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계속 테미를 보고있던 나도 몰랐는데...


"..테미?"


"..알겠습니다. 그럼 첸드릭 경과 루시안 님께서 오실때 까지만이라도..."


"안돼"


"..아가씨"


"안되는 건 안돼"


나도 고집이 있다구.

항상 말하는 건 다 들어줬지만 이번엔 안돼.

자기 몸도 생각해야지..그러다 쓰러지기라도하면 싫단말야.


"...."


묵묵히 그 날카로운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만 있는 테미를 마주 바라본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아서.


"오늘 오전엔 마을 축제를 참관하는 것 뿐이야. 오후에 로번 영지관리관 님과 광산에 대해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합류하면 되는거잖아.

제발 좀 무리하지말고. 내 말을 들어줘 테미"


그것만으론 부족할까 싶어 진심을 담아 부탁아닌 부탁을 건네는 추가공격에 드디어 함락되는 듯 테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언니 걱정마! 이제부터 마을에 대한 안내는 니르한테 맡겨두면 된다구!

어차피 마을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했잖아! 그치?"


"응? 아, 그건 루시안 님께서 이미 해주시고 계시단다"


"에이 그래두 루시안 오빠가 항상 옆에 있을 수는..."


"숙소도 같은곳에 있는걸?"


"...뭐라구 언니?"


착시인걸까.

니르의 부스스한 머리가 갑자기 쭈뼛 서는듯 보인건.

게다가 니르의 주변을 감도는 이 분위기는...


"루시안 오빠랑...'같은 숙소'를 쓰고있다구...?"


"으, 응? 으응...'숙소가 같은 곳'에 있지..?"


"...."


"...."


"...하아"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내쉰 데릭 톨로즈는 고개를 젓고는 니르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리고 그가 니르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언니...! 언니가 적이었다니?!"


"저, 적?!"


"지지않아! 아무리 예쁜 에밀리 언니라도 루시안 오빠만큼은 못 줘!

아니면 이미 늦은거야?! 응?! 그런거야?!"


"아, 아니..그게 무슨 말..."


큰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며 도통 의미모를 선전포고를 던져온 니르가 이해가 되질 않아 당황스러움에 머리속이 새하얘진다.


루시안 님을 못 준다구..? 늦어?

그게 대체 무슨 말이...


아? 아?!


"....으응?! 아, 아니 내 말은 그런게..!"


"으아앙 아빠아! 루시안 오빠가 너무 멀리 떠나버렸어어!!"


"이런이런 니르야. 사랑을 그렇게 빨리 포기하면 안되는 거란다.

...옛날부터 가망은 없어보이긴 했다만"


"아빠가 더 미워!!"


양 손으로 데릭의 반짝이는 민머리를 부여잡으며 달려드는 니르의 날카로운 이가 그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방금 전 상상해버린 것을 최대한 빨리 지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있었다.


"..이런데 제가 어떻게 마음놓고 쉽니까.."


그런 와중에 한숨섞인 테미의 푸념이 귀에 와서 닿을리는 만무했다.


작가의말

그러니까. 나도 마음놓고 못쉬겠어 정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스카치에라의 투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관련 공지 18.02.10 76 0 -
46 Chapter [만남] : Epilogue. 밤이 밝은 뒤 찾아온 시간은. 18.02.10 112 0 13쪽
45 Chapter [만남] : @. 밤이 밝아오는 사이에. 18.02.10 75 0 34쪽
44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5) 18.02.10 89 0 27쪽
43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4) 18.02.10 80 0 27쪽
42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17.12.22 87 0 23쪽
41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2) 17.12.18 114 0 27쪽
40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1) 17.12.16 100 0 19쪽
39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8) 17.12.15 105 0 22쪽
38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7) 17.12.14 109 0 26쪽
37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6) 17.12.13 86 0 34쪽
36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17.12.12 85 0 34쪽
35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4) 17.12.10 92 0 23쪽
34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3) 17.12.09 85 0 32쪽
33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2) 17.12.08 105 0 22쪽
32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17.12.07 134 0 23쪽
31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6) 17.12.06 101 0 27쪽
30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5) 17.12.05 89 0 23쪽
29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17.12.04 103 0 25쪽
28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17.12.03 77 0 22쪽
27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2) 17.12.02 105 0 23쪽
»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17.12.01 98 0 24쪽
25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9) 17.11.30 122 0 22쪽
24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8) 17.11.29 98 0 24쪽
23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7) 17.11.28 85 0 23쪽
22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6) 17.11.27 90 0 29쪽
21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5) 17.11.26 97 0 32쪽
20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4) 17.11.25 107 0 27쪽
19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3) 17.11.24 150 0 26쪽
18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2) 17.11.23 102 0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