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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베 님의 서재입니다.

스카치에라의 투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최근연재일 :
2018.02.10 20:35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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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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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DUMMY

오늘은 날이 어두워지면 마을에서 축제 중 제일 큰 행사를 연다고 했었다.

가까이서 볼 수는 없겠지만...여기서는 보이지 않으려나?


"....."


"....왜 자꾸 절 보고계신겁니까"


"그쪽이 아니라 마을쪽 보는건데요"


"그렇습니까.

뭔가 부담스러운 눈빛을 느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제가 당신을 볼거란 생각을 하신 이유는?"


"고도로 발달된 감?"


"..고도와 발달이라는 단어의 의미완 전혀 부합하지 않는군요"


마을과 이어진 숲 길을 바라보는 자리에 놓인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있던 나는 앞에서 횃불을 든 채 경계를 서고있던 오긱스 평기사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사람 왜 여기있는거야 근데?


"근데 왜 여기 계십니까 루시안 님은?"


내가 먼저 물어보려그랬는데!


"...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안됩니까?"


"오늘은 마을에서 묵으실 줄 알았습니다.

마을에 있는 동료에게서 들었는데, 오늘 저녁 마을에서 축제 중 가장 큰 행사를 한다고.."


"별로 관심 없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정도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이미 첸드릭과 약속 했으니까.


"근데 왜 오긱스 평기사님은 여기계신겁니까?"


그가 물었던 것을 그대로 되묻는다.


"저는 경계를 서고있을 뿐입니다만..."


"그러니까 왜 하필 이 시간에 제 눈 앞에서 경계를 서고있냐구요"


우연이라고 치기엔 매우 귀찮...아니, 지금 나에겐 귀찮은 사람이니까.

이런, 결국 귀찮은 사람이라고 해버렸다.


"...눈치 채셨습니까"


"? 뭘요?"


"제가 경계를 서다 하도 심심하던 차에 루시안 님이 눈에 들어와 저기서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사실을!"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그의 손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꽤 떨어져있는 곳에서 횃불을 든 채 이쪽을 힐끔거리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기사의 얼굴이 보인다.

..어디서 좀 본듯한 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오긱스 평기사의 동기라는 사람이다.


"원래 있던자리에서 같이 경계를 서던 사람은 저렇게 혼자 내버려두고 심심해서 여기로 온거다?"


"맞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시다니 역시 루시안 님은..."


"닥치고 있던 자리로 돌아가 첸드릭 경한테 다 말해버리기 전에"


"....."


할 일을 내팽겨둔 채 시덥잖은 말만 계속 주워삼키던 그에게 도저히 못참고 쏘아 붙이며 얘기하자 그는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리며 멀어져간다.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기사가 된거야?

첸드릭에게 물어볼까? 진짜 궁금한데.


"...으휴 이제 좀 조용하네"


어찌되었던, 눈 앞을 어지럽히던 그는 멀리 사라졌다.

조합장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먼저 공터로 돌아온 시간이 좀 일렀던 탓에 생긴 여유이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첸드릭을 기다리며 생각을 마저 정리하기엔 딱 좋은 조용함이 달빛을 따라 얌전히 내려앉는다.


일단, 조합장님은 내 말이 끝나고 나서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계시는 건지, 혹여나 내가 말을 잘못 전달해 이해를 못하신건지...조합장님의 그 반응에 조금씩 불안감이 커져갈때 쯤 조용히 입을 연 조합장님은 지금 생각해봐도 깜짝 놀랄 말을 꺼내었다.


'너는 그를 믿는것같으니 나도 그를 믿어보마'


내 이야기 어디에서 첸드릭을 믿는다는 걸 느끼신걸까, 정작 이야기를 풀어놓던 내가 더 놀랐지만 조합장님은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는 듯 잔잔한 눈동자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는다라...아직 그정도는 아니다. 아닐거다.


단지 나는 그가 꺼낸 자신이, 자신들이 마을을 지키겠단 말에 동의했을 뿐.

그건 나와 마을 사람들에겐 버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조합장님은 그를 믿을 수 있는걸까? 내가 첸드릭을 믿고있다는 그런 사소하고 불확실한 이유로?


'뭘 걱정하는지 안다.

그와 나에게 얽힌 사적인 고리는 그와 내 사이에서 끊어야할것, 이 사슬 위에 마을을 올려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거라.

그렇다곤 해도..이건 아마 평생동안 끊어지지 않을게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 나도 이젠 과거에 지쳐버렸어.

그에게 분노를 향하더라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허나 당신의 표정은, 씹어 뱉듯 흘러나온 당신의 말은 그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쓰디쓴 풀을 씹는 듯 한껏 찌푸려진 얼굴에 한가득 파인 주름들 사이사이 자리잡은 그 회한과 원망, 그리고 분노는 처음 조합장님이 마을 입구에서 첸드릭과 대면했을 때보다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진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조합장님은 애써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그 찌푸린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조합장님 자신이 말했듯, 자신과 첸드릭 사이에 얽혀있는 사슬 위에 마을을 올려두지 않게끔.

조합장님은 금방이라도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나버릴 듯한 그 연약한 것을 그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보고만 계실 분은 아니니까.


'그가 공작가에, 스카치에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들이 마을에 도착할 때 까지 글렌로우드 기사단이 마을의 방비를 맡겠다는 의견엔 나도 전적으로 동의, 협조하마.

내 판단으로서도 정말 크니쿨의 잔재라는 알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마을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선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힘과 가늠할 수도 없는 스카치에라의 힘마저 보태진다면 더할나위없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니.

그리고 네가 말한대로 스카치에라에서의 지원을 확실히 알 수 있게될 때 까진 마을 사람들에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마.

마을 안에 주민들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상회의 사람들까지 있는 상황에선 매우 위험한 행동이니까'


그러면서도 조합장 님은 첸드릭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내심 가장 기대했던 답변이지만 왜 이리 가슴이 아파오는걸까.

결국 난 조합장 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의견을 묻는게 아닌 그저 통보를 했을 뿐이었다.

첸드릭의 말을 빌려,

조합장 님의 원수라는 그의 손을 빌리겠다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조합장님의 심경은 어땠을까.


괜시리 울적해진다.


".....?"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내 시야의 한부분이 어렴풋이 밝아져온다.

마을에서 불을 피운걸까?

마을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있는터라 확연히 보이는건 아니지만, 살풋이 밝아져오는 마을방향의 나무와 하늘이 맞닿은 곳은 마치 곧 태양이 뜨려는 것 마냥 일렁이는 불빛을 품고있었다.


그 광경에 감탄의 숨을 몰아쉰 그 때, 빛 아래에 무거이 들어차있는 숲의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음? 설마 날 기다리고 있던것이오?"


달빛 아래에서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실루엣의 잿빛 머리를 거칠게 넘긴 노기사는 곧 나를 눈치챘는지 눈동자를 살짝 동그랗게 뜨며 날 내려다본다.


"그런셈이죠. 할것도 없고..."


키니는 어젯밤 첸드릭과 이야기했던 대로 마을 주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도록 보내두었기에 집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덩그러니 집에 앉아있어봤자 어차피 첸드릭이 언제나 올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테니까.


덕택에 생각을 조금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내 입장에선 좋은 일이지만.


"이거 미안하게 됬구려.

아가씨와 이야기가 길어져서말이오"


"아니 괜찮아요.

공작영애는...마을에 두고 오셨나보군요"


"어제도 말했듯, 이곳에 이제 아가씨를 묵고 계시게 할 순 없소.

마침 아가씨도 마을에 할 일이 있으시다고 하시니"


어젯밤 그런 일이 일어났던 곳 한가운데에 공작영애를 더이상 묵게할 순 없겠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기에 그건 더 묻지 않겠지만...


"그럼 여기 계신 기사분들도 마을에 가시는 편이..."


"아가씨 한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마을 임시숙소에 이만한 인원이 들어갈 여유가 충분하질 않소.

최대한 마을에 뺄 수 있는 인원들은 마을로 옮길테지만 그래봤자 네다섯명쯤.

나머지는 이곳에서 그대를 호위하고 있으라는 아가씨의 명령이오"


"공작영애가?"


"되도록이면 그대 또한 마을에 거취를 옮기는 게 어떠냐는 아가씨의 첨언이오만..."


"...."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건 아니다.

나 또한 숲 속에서 일어난 그 일에 대해서 꽤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고 나름 두려움도 가지고 있으니까.


"저는..괜찮아요"


"그럴거라고 아가씨와 테미 군도 예상하더군.

그렇기에 남은 인원들은 이곳에서 그대를 호위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내가 태어난 이후 계속 살아온 곳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턴 내가 지켜온, 부모님과의 소중한 기억이 어려있는 곳.

만에하나 잔재의 영향으로 흉폭해진 숲 속의 동물들이 이곳을 훼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난 공터를 떠나지 않을거다.

그리고 정말 숲 속의 동물들이 마을을 덮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조짐을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는곳은 숲 속이니까.

남아있어야지.


..그나저나 내가 이런 선택을 할거란 걸 어떻게 예상했는진 몰라도, 뭔가 미안하네.

난 공작영애를 마을에서 쫒아낼 생각까지 했었는데.

왠지 머쓱한 기분에 무심코 볼을 긁었다.


"부담스러워 할 건 없소. 그대에게 약조한대로 스카치에라에서 지원이 올 때까진 우리 글렌로우드 기사단이 마을을 지킬테니.

그대도 이 마을의 주민이 아니오? 아가씨께서 내리신 명령은 보호 대상을 호위하는 것일 뿐이라오"


그런 내 낌새를 오해한건지 날 내려다보던 첸드릭이 다독이듯 그녀의 입장을 대변한다.

딱히 부담스럽다거나 그게 싫은건 아니다. 그저 그 정도로 마음을 써주는 그녀에게 내 자신이 어떤 생각을 품고있었는지 그게 좀 미안했을 뿐이지.


지금부터, 아니 내일부터라도 좀 잘 대해줘야겠다.


"그래서..낮에 그대가 했던 얘기 말이외만, 지금부터 그대의 집으로 가면되오?"


"...바깥의 경치가 좋은데 여기서 할까요?"


굳이 누구에게 비밀로 할 이야기는 아니다.

글렌로우드 기사단의 기사들은 이미 마을에서 첸드릭이 어땠는지 다 알고있을테고 다들 경계서는 데에 바빠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첸드릭과 나누는 이야기를 그들이 엿들을 가능성도 적으니...


마을에서 일렁이는 저 불빛을 멀리서나마 보고싶기도 하니까.


"흠, 그래도 되는 이야기라면"


털썩, 내 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주저앉는 거구의 기사는 내 시선과 같은곳으로 눈길을 향한다.


"불빛이 보이는구려.

계속 저걸 보고있었소?"


저만한 행사가 있는 마을은 엄청 시끄러울테니 조용히 대화를 나누진 못하겠다 싶기도 했고 조합장 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마을에서 하는것도 부담스러웠기에 그와 공터에서 대화를 나누자 했지만...못내 아쉬운 마음은 남아있었다.


마을 축제에 그동안 별 관심이 없던 나도 마을에서 저 불을 피우는 행사를 하는건 그간 이곳에서 몇번이고 봐왔으니까.


어두운 밤하늘을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불빛의 그림자는 보는것 만으로도 신비한 느낌이 드는 광경이었다.

이제 마을에 내려가는 것도 마음을 달리해 가볍게 내려갈 수 있게 되었는데..그 기념으로 가까이서 꼭 한번은 보고싶던 광경이었다.

아쉽지만 다음기회에.


첸드릭도 나와 같은 감상인걸까.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마을방향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가씨께서 보고싶다고 하셨던게 저것이었나보군"


"마을에 축제가 좀 크게 열린다 싶으면 항상 해왔던 의식과도 같은거에요.

이번엔 예전보다 더 큰것같네요"


"마을 축제엔 관심 없는것 아니었소?"


"...여기 있다보면 저건 안볼래야 안볼수도 없는걸요"


"그렇겠군"


"뭐...마을 축제 자체엔 관심없지만, 저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보고있기 딱 좋더라구요"


그 때마다 매번 지정석은 이곳의 나무 그루터기.

지금 앉은 자리에 어린 나도 앉아있었고, 그 이전엔 부모님이 날 품에 안아들고 앉아 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셨으리라.

항상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다른 시간의 같은 하루들.


대화를 나누기 전 잠시동안 둘이서 한명은 바닥에, 한명은 항상 앉던곳에 앉아 희미하게 번져가는 어두운 하늘 속 불빛을 바라본다.


"....과거 참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참 많은 것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큰 불을 피우는 축제는 처음이군"


서로간의 대화는 없었을지언정 어색하진 않던 시간에 그가 꺼낸 '과거'라는 이야기.

무심코 바라본 그의 옆얼굴엔 '그리움'이외엔 그 어느 감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첸드릭 경은 과거에 참 많은곳을 다니셨나보군요"


"그대도 알지 않소? 내 과거에 대해"


"알다마다요"


학교에서 들었으니까.


"학교에서 배웠겠지.

허나 나는 그보다 더 많은 곳을,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오"


"...그 발언엔 몸서리가 쳐지네요.

대단하다고 해야할까요. 학교에서 들었던 첸드릭 경의 일대기가 적은것이었다니.."


"그럴 줄 알고 내 자신이 내 소문을 꽤나 많이 부정해 알려질 것 들을 축소시켜왔지"


"어째서죠?"


"날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자들을 떼어내기엔, 난 '별 거 없는'기사가 되어야했다오.

굳이 타국에 대륙회의를 거쳐 간섭하는 것보다 나만한 기사들을 직접 키워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줄 수 있다면 그쪽을 택할테니까.

자신의 손에서 멀어진 명검을 탐내느니, 차라리 다시 만드는게 낫다는 의식이 생기면 집착도 줄어드는 법이라오"


그 자신을 명검에 비유한다는 점이 참으로도 기사다웠고, 첸드릭 다웠다.

그리고 그런 집착속에서 반역죄를 뒤집어 쓴 채 도주행을 거듭하던 그는 어떤 심정이었고, 어떤걸 보아왔을까.

첸드릭 본인이 아닌이상 그건 그 아무도 모를거다.

그가 무엇을 보아왔는지, 그가 자신이 보아온 모든것에 어떤 마음으로 대해왔는지...


그가, 조합장 님과 같은 사람들을 과거에 단 한번이라도 만난적이 있는지.


"...첸드릭 경은 왕국에 오셔서 처음에 어디 계셨었죠?"


"모비든 백작가.

20년도 전 이야기로군.."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꽃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불씨가 붙인걸까.

바짝 말라있던 과거의 기억이란 장작에 내려앉은 그 불씨는 순식간에 불타올라 그의 눈동자 안에서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첸드릭을 바라보며 난 터져나올 비명을 지르지 않기위해 온 힘을 다해야했다.


모비든 백작가.

조합장 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주 들었던...익숙한 단어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닌가요"


꿀꺽, 혹여나 그에게 들릴까 걱정될만큼 커다란 목울림소리에 내 자신이 놀라 움찔하며 바짝 말라오는 목구멍에 침을 넘겨내곤 최대한 평정심을 두른 채 그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한다.


"물론.

모비든 백작...그자는 내가 살아온 세월동안 보았던 귀족이란 자들 중 가장 최악의 인간이었다오.

그를 귀족, 나아가 나와 같은 '인간'이란 사실까지 거부하고 싶었을 정도로"


"그정도로요?"


"단적인 예를 하나 들지.

내가 이트비아 왕국에 처음 왔을 때 왕국은 아직 개척과 정리가 덜되어 제대로된 통치의 구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살길을 도모하던, 그 울타리는 있으나 울타리 안의 양들이 여기저기 퍼져버려 원활히 모을수도 없고 양이 몇마리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라고 한다면 이해가 빠르겠소?"


각기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뛰쳐나온 귀족들, 그리고 나라를 잃고 떠도는 피향민들과 본래 이 자리에 있던 헤놋 왕국이 멸망함으로 인해 점처럼 퍼져살아가던 헤놋 왕국의 백성 출신인 화전민들을 모아 세운 이트비아 왕국.

비록 왕국이라 내세우며 나라를 세웠지만, 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트비아 왕국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었다.

제각기 다른곳에서 와 뒤섞인 백성들의 문제가 아닌, 갑자기 나타나 '지배'하고 든 귀족이란 자들 때문에.


"왕국의 모든곳이 같은 비명소리에 잠겨들었었지만...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곳이 당대 모비든 백작이 영주로 있던 곳이었다오.

비 대신 사람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내려 땅을 적시던, 그 눈물로 농사를 지어 한줌의 먹을 양식만을 남긴 채 모든 것을 귀족에게 빼앗긴 걸어다니던 시체들이 살고있던 땅.


'그가 걷는 길엔 사람들이 흙 대신 깔려있었고,

그가 앉는 자리엔 마르다못해 한가닥의 나뭇가지 같은 사람들이 웅크린 채 의자처럼 쓰이고 있었고,

그가 먹는 음식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곳곳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살로 만들어졌으며,

그가 마시는 붉디붉은 포도주는 흙바닥을 긁으며 손에 잡힌것들을 무엇이든 입에 넣는 사람들의 피눈물을 모아 만들었고,

그가 향락에 지쳐 쓰러져 잠드는 침대 속에는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들이 해골과 같은 모습으로 그저 숨만 붙은 채 그 커다랗고 무거운 몸을 버티고 있더라'


이 이야기가 그저 당시 영지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닌, 실제로 내가 보아온 모습이었다면 믿겠소?"


그의 낮은 목소리를 물감삼아 머리속에 그림을 그려본다.

그려보려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 처참함을 그림으로 그려낸다는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언뜻 그려진 그 모습이 직시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끔찍한 것이었기에.

게다가 이 이야기는 아버지께 들어본적 없는 조합장 님이 살았던 곳에 대해 새로이 알게된 사실이다.

그만큼 끔찍한 곳에 내가 알고있는 조합장 님이 첸드릭이 말한 대로 살아가고 있었단 상상을....

난 차마 할 수 없었다.


"인간이 겪어온 최대 최악의 재앙을 크니쿨이 대륙에 나타났던 시절이라고들 하며 끔찍했던 시절이라 말하지만...

내게 있어서 제일 끔찍했던 모습은 그 때 당시 모비든 백작이 다스리던 영지의 광경이었다오.

물론 나는 크니쿨이 대륙을 침공했던 시절을 직접 보아온건 아니오. 그건, 현재 대륙에서 발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난 단언할 수 있소. 크니쿨이 벌여왔다고 여겨지는 모든 일보다 내가 직접 접했던 그 모습들이 더욱 처참했다는 것을.

그건 도저히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악행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그럼 어째서 그곳에..."


"이트비아 왕국에 망명하면서 날 향한 타국의 시선을 멀리두기위해 숨어 살아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오.

그러기에 모비든 백작령은 이트비아 왕국에서도 외진곳에 위치해 숨어있기 좋았지.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벌인 일들은 그만큼 여기저기에서 많은 시선을 받아왔던 것들.

제 아무리 대륙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국에 도망쳐왔다손 치더라도 날 향한 그들의 경계심이 사그라드려면 내 존재 자체를 지워야할테니까 말이오"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되는것인가요"


"간단하지.

애초에 내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운 자들의 목적이 날 세상에서 지워 없애는 것이었으니.

그들로서도 내가 이런 변방에서 자취를 감춘다면 더 이상 날 쫒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 아니겠소.

그러기 위해 이트비아 왕국까지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것이기도 하고"


"사라지기위해?"


"죽기는 싫으니 죽은 척 할 수 있는 곳을 찾기위해 참으로도 먼 길을 돌아왔다오.

결과적으로 다른 자들은 몰라도 내게 누명을 씌운 자들은 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정도까진 된것같소이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있으니 말이오"


그리고 첸드릭은 이렇게 눈 앞에 멀쩡히 살아있다.

그가 겪어온 것들을 가늠할 순 없지만, 이렇듯 농담처럼 그 때의 기억을 회고하는 그에겐 그것들은 이미 지난날의 기억이리라.


"힘들었겠군요"


"굳이 그런 생각을 이제와서 품고있는것도 과거에 대한 미련아니겠소.

기억은 가지고 있되, 그 때의 감정은 잊은 지 오래라오"


여전히 칠흙같은 밤하늘의 한 구석을 밝히는 노란 불빛은 그 자리에서 계속 일렁이며 나와 첸드릭의 눈동자를 비추고있었다.

가까이서 이 불을 쬐는 뜨거움을 느끼는 것과 지금 이렇게 떨어진곳에서 눈에만 그 모습을 담는것.

몸을 태우는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 빠져 몸부림치던 젊은 기사는, 이젠 그 때의 불구덩이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며 얼굴의 그 주름속 하나하나에 세월을 덧씌워간다.


"허나 몸을 숨기기 위해 숨어지내던 모비든 백작령에서 겪었던 것들은 그 감정마저 아직 모두 지워내기엔 힘든가보군...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것 만으로도 목이 바짝 말라오는 듯 하니 말이오"


마른 웃음을 내뱉는 첸드릭은 그 갈증을 조금이라도 적셔보려는 듯 허리춤에 묶어두었던 가죽주머니를 끌러 입에 대고 한껏 들이킨다.

그 속에 담긴 물이 첸드릭의 입가를 따라 땅에 한두방울 뚝, 뚝 떨어져내린다.


"...그곳에서 첸드릭 경은 그저 숨어지내기만 하셨던건가요?"


"음? 그렇소이다.

기사로서 차마 직시할 수 없는 모습들에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는 나날이었다오"


"그곳에서도 기사단에 계셨잖아요? 그럼 단순히 보고 계신것..."


"난 그곳에서 기사단에 있지 않았소만?"


"....네?"


잠깐, 뭐라고?


"모비든 백작가는 기사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유이지. 기사단에 들어갈 돈을 자신의 뱃속에 투자할 자였으니"


기사단이...없었다고?


'..조합장님의 가족을 잡아간 기사단의 단장이 누구였는지 아느냐? 바로 그 유명한 첸드릭 아기오스란다..'


"그가 데리고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족속들인 무법자들을 모아 영지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자들...

강도나 다름 없던 무리였다오.

그들을 기사단이라 칭하는 자체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만큼"


"그, 그럼 첸드릭 경은 그들을 이끄시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들과 함께 탈향민들을 쫓아다녔다던지?"


"그들을 이끈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군.


게다가 모비든 백작령에 있던 시간동안 난 검을 잡은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오.

수련마저, 하지 않았지. 행여나 내가 검을 쥔 모습이 누군가에게 눈에 띄어 날 쫒던 자들에게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그렇다면 내가 아버지께 들어왔던 이야기는 대체 뭐지?

조합장 님이 모비든 백작가의 첸드릭 아기오스가 이끄는 기사단에게 눈 앞에서 가족을 잃으셨다는 이야기는...


"탈향민이라...그러고보니 모비든 백작령에서 떠나오기 얼마 전 영지민들이 무리지어 다른 영지로 도망가기 위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

당시엔 직접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없었기에 나서진 못했지만...내 인생에서 제일 비참했던 기억이라오.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그저 영지 한켠에 지어진 자그마한 거처에서 몸을 숨기고만 있었지.

기사로서 해선 안될, 수치로 가득한 날들이었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첸드릭.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조합장 님은 대체...


"그나저나, 나와 하고싶던 이야기가 무엇이오?

계속 내 얘기만 하고 있는것 같은데"


"......"


물어볼까? 직접적으로, 조합장 님이 겪었던 일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지.


"...혹시, 혹시라도..조합장 님을 과거에 뵌적이 없으신가요?"


"전혀. 사람 얼굴은 왠만해선 잊지 않기에 단언할 수 있소"


"탈향민들을 본적도?"


"내가 당시 거처를 떠나 움직였던 건 거처 뒤에 있던 산 속 뿐.

그곳에서 화전민들은 몇번 보았지만...탈향민들과 마주쳤던 기억은 없소이다.

헌데 그건 왜.."


"...조합장 님께서 첸드릭 경에게 경계심을 품고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알고있소. 그가 나에게 보이는 모습을 보면 그가 '인내'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지.

그게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정말 '기사'라면, 내가 학교에서 들었던 대로 그가 기사로서의 명예를 제일로 여기는 기사중의 기사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란 기대가 있을 뿐.


"조합장 님은 과거 모비든 백작령에 살고계셨던 분이세요"


".....음?"


"그리고 탈향민 무리에 끼어 영지를 탈출하는 도중 '기사단'들에게 가족들을 눈 앞에서 잃으셨죠.

'첸드릭 아기오스'가 이끄는 기사단에 의해..."


"......"


그의 눈동자에 어려있던 것이 일렁이는 불빛에서 그 불빛에 물든 누군가의 얼굴로 바뀐다.

익숙한, 내 얼굴로.


"그게, 정말이오?"


"생전에 조합장 님과 막역하시던 아버님께 들었던 이야기에요"


"...허어.."


주름이 더욱 깊어져간다.

언제나 그 기백을 담고있는 듯 당당했던 그의 얼굴에 번지기 시작하는 것을 눈앞에 둔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자가 내 명예마저 게걸스레 먹어치웠구나...

내 이름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를 더는 남기지 않겠다 맹세하고 찾아온 땅에서...나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이 생겨나다니.."


비통함, 좌절,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한없는 미안함.

이 순간 그의 거대한 몸집은 한없이 작아보였고, 그의 거칠고 커다란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눈 앞에 앉은 사람은 그저...회한과 슬픔에 잠긴 한 노인에 불과했다.


"...독주를 들이키고 싶은 밤이구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더이상, 노란 불빛이 어려있지 않았다.


작가의말

독주 좋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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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Chapter [만남] : Epilogue. 밤이 밝은 뒤 찾아온 시간은. 18.02.10 112 0 13쪽
45 Chapter [만남] : @. 밤이 밝아오는 사이에. 18.02.10 74 0 34쪽
44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5) 18.02.10 89 0 27쪽
43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4) 18.02.10 80 0 27쪽
42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17.12.22 87 0 23쪽
41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2) 17.12.18 114 0 27쪽
40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1) 17.12.16 100 0 19쪽
39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8) 17.12.15 104 0 22쪽
38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7) 17.12.14 109 0 26쪽
37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6) 17.12.13 86 0 34쪽
36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17.12.12 85 0 34쪽
35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4) 17.12.10 92 0 23쪽
34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3) 17.12.09 85 0 32쪽
33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2) 17.12.08 105 0 22쪽
32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17.12.07 134 0 23쪽
31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6) 17.12.06 101 0 27쪽
30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5) 17.12.05 88 0 23쪽
»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17.12.04 102 0 25쪽
28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17.12.03 77 0 22쪽
27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2) 17.12.02 105 0 23쪽
26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17.12.01 97 0 24쪽
25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9) 17.11.30 122 0 22쪽
24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8) 17.11.29 98 0 24쪽
23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7) 17.11.28 85 0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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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5) 17.11.26 97 0 32쪽
20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4) 17.11.25 107 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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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2) 17.11.23 102 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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