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천공의노래 님의 서재입니다.

사슬의 학살자와 오두막의 손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천공의노래
작품등록일 :
2021.04.09 16:55
최근연재일 :
2021.08.02 07:50
연재수 :
118 회
조회수 :
8,021
추천수 :
231
글자수 :
613,867

작성
21.06.16 07:50
조회
36
추천
1
글자
11쪽

70화

+와 +사이의 글은 외국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DUMMY

“여기까지가 내 관점에서 본 학살 사건의 전말이야.”


죽을 날을 기다리며 반인륜적 행위까지 강요받았던 청년이

거꾸로 사주한 원로들을 죽인 사건.


“물론 내가 죽인 상대는 다 원로와 그 패거리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안······.”


그렇게 자기변명을 하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사람 죽여놓고 이런 말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위즈는······.”


‘위즈는 나쁘지 않아’ 같은 말을 원할 리 없어 질문을 바꾼다.


“가문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어?”

“가짜 명령으로 서울에 가던 감독관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었는지 승상에게 새를 날려서 진짜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는지 확인했대. 그런데 승상이 그런 명령 없었다고 하니 곧바로 돌아와 조사를 시작했지.”


이미 처벌할 대상은 죽었으나 그렇다고 안식을 줄 수는 없었다.


가주가 다른 성의 관리들과 주고받은 서신,

평소 반역에 가까운 말을 했다는 주변인의 증언,

그리고 위즈가 주크를 죽이고 빼앗은 나무판.


가주를 따르던 원로들과 엘렌 성 보좌관은

전부 반역자가 되어 여러 갈래로 찢겼다.


“그럼 위즈는 반역자를 처단한 사람이 되는 거 아니야?”

“나야 반역자를 처단할 생각으로 그런 짓 한 게 아니니까. 나도 범죄자인 건 변하지 않아.”

“그래서 여기에 숨어있는 거구나. 계속 나가려 하지도 않고.”

“물론 그것도 있지만,”


죽은 아비의 주검을 끌어안고 울던 아이.

그리고 싸움에 취해 동생을 죽일 뻔했던 사실까지.


“밖에 나갔다가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무서워서 못 나가. 특히 동생을 죽일 뻔했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다음에는 멈추지 못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말에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위즈 동생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 않을까.”

“응?”

“위즈가 죽일 뻔했다는 건 신경 안 쓰고 그저 위즈가 돌아오기를 바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리나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한다.


“글쎄. 그랬으면 좋겠는데.”


다시 본가에 고개를 들고 돌아갈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러면 황군이 계속 쫓았어? 위즈 정말로 범죄자 취급받는 거야?”

“응. 이 숲으로 도망친 직후에 계속 병사들이 숲을 뒤지긴 했어. 나중에 가서 갑자기 안 찾긴 했지만.”

“죽은 줄 알았을까.”


분명 위즈는 황제가 미래를 보고 위즈를 살렸다는 걸 끝까지 모르리라.



******



계획을 짤 때도 무작정 숲으로 오면 되리라 생각했다.

숲에서 조금 지내다 잠잠해질 즈음에 크레센타로 가려고 했는데

이 정도 일을 벌였으면 항구로 가기도 전에 숲을 나서자마자 잡히리라.


‘차라리 시조가 살았다는, 숨겨진 오두막이 나타나길 바라야 할까.’


아무리 살 곳을 지어도 추격꾼이 위즈를 쫓을 단서가 될 뿐.

거기에 날씨도 추워지고 저 멀리 천둥소리도 계속 들리며,

주변이 조용해지자 현실이 보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학대받던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여러 명을 학살한,

심지어 아이 앞에서 아비를 죽일 정도로 간악한 살인범이라니.


특히,


‘라스를 죽일 뻔했어. 그것도 내 손으로.’


그 사실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

피에 취해 달려드는 동생마저 죽일 뻔했다는 게 너무 무섭다.


- 해를 가린다고 밤이 오지는 않는다.


갑자기 엘렌으로 돌아오기 직전, 작은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 말대로 진실에서 눈을 돌려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 그 진실이 견디기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울음이 터지려고 하지만,

여기서 죽으려고 그 일을 저지른 건 아니니 이를 악물고 억지로 걸어간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자 이래저래 서럽다.


그렇게 한참을 비틀거리며 숲을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바닥을 발견한다.


마치 누가 일부러 만든 것처럼 박힌, 평평한 돌.

표지석 같은 거라고 하기에는 별다른 규칙이 안 보이는데 뭔가에 홀린 듯 다가간다.


‘숨겨진 지하 통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눈에 띄는 돌 몇 개를 밟는데 그저 딱딱하고, 울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이럴 시간에 그냥 동굴이나 찾아볼걸.’


여러모로 힘든지 헉헉거리면서 다시 앞으로 가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있는지도 몰랐던 돌부리에 발이 걸린다.


‘어? 어?’


상황파악도 못 하고 그대로 넘어진다.

아프지만 신음도 나오지 않고, 이대로 누워서 눈을 감고 싶다.


‘그래도 풀은 푹신하네.’


나무뿌리만 가득한 길을 지나오다가

이렇게 잔디가 가득한 곳에 누우니 마음은 편해진다.


‘잠깐만. 잔디?’


어째서 이런 잔디밭이 숲 한복판에 있지?


“왜긴. 숲 한복판이기는 한데 숲은 아니니까.”


고개를 들자 뻥 뚫린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오두막,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있다.

아니, 사람이 맞나?


“오랜만이야. 약속 지키러 왔어.”


자신처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여성.


“전에 속성 정하지 말라고 했던······.”

“응. 기억하네, 위즈?”


여자가 환하게 웃는다.


‘그런데 나이가 더 많지 않았나?’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날 너희 눈으로 보려고 하니까 그렇지.”


속마음을 읽은 건지 대답한다.

아니, 대답이기는 해도 내용이 이상하다.


“자연을 너희 사람의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

“자연?”

“응. 아니, 이렇게 말해야 알려나? 나는,”


헤즈라.


“토루마, 토오루마에, 퇴르무흐, 뭐 그 외에도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난 어둠이야. 위즈 네게 마법을 가르치러 왔어.”


그런데 왜 의심하지 않을까.


“네가 원하는 거, 전부 알고 있어. 그러니 이 힘을 줄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이 숲에서 나가지 않으리라.


어둠이 빗속에서 벌벌 떠는 위즈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대로 위즈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잃는다.

그렇게 위즈는 하루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수없이 후회했으며,


“어둠과, 토루마와 만났어.”


이제 모두 털어놨다.

위즈의 눈으로 본 그날의 학살사건을 다 얘기했다.

그러자 리나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을 정도로 속이 시원하다.


“그렇게 토루마를 만나 마법을 배우고, 전설 속에 나오던 폭포를 찾아 매 부리는 법도 배우고. 그렇게 2년이 지나서 리나 널 만났어.”

“매를 부린다는 말이······.”

“리나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여러 이야기에서 시조님이 매를 이용해 편지를 보내곤 했지.”

“그렇다면 그렇게 본가에서 지원받은 거구나, 지금까지.”


가문에서 학살자를 지원하는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간다.

라스에게 위즈는 모든 걸 떠안고 사라진 형이니까.

리나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데 위즈가 얼굴을 살짝 돌리고 말한다.


“그러면 소감은?”


분위기를 조금 환기해보고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소감?”

“응. 내 얘기 듣고 느낀 점이나 그런 거.”


안타깝다.

위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그런 대답을 원할 리 없고, 조금 생각하다가 거꾸로 묻는다.


“위즈는 어때?”

“뭐가? 일단 난 말하고 나니 시원하긴 한데······.”

“말고. 위즈는 오두막으로 도망치고 나서 어땠어?”

“글쎄.”


도망친 직후에는 너무 힘들었다.


아비를 끌어안고 우는 아이가,

라스를 죽일 뻔했다는 그 사실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럴수록 더 힘들었으나

점차 책에서 읽은 것처럼 감정이 묻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아니지?”

“······응.”


감정이 묻혔다면 싸우면서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을 테고,

지금 이렇게 주저앉지도 않았으리라.


“그래도 괜찮아. 힘든 일을 계속 겪었지만, 여기서 리나 널 만났잖아. 그 정도면 만족해."


이미 제 손으로 가족을 버렸으나 그 이상으로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트라우마까지 짊어지고도 싸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리나가 나무 뒤에서 무릎으로 걸어 나오더니 위즈를 마주 본다.


“왜, 리나?”


정말로 울지는 않지만, 정말로 속이 후련해 보이지만,

그래도 다가가서, 아까 위즈가 그랬듯 위즈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위즈도 뭐라고 말하려다 그냥 리나가 하는 대로 가만히 둔다.


“위즈. 위즈는 전부 저버리고 여기에 있는 거잖아?”

“응. 그렇지.”

“후회하지 않아? 만약 그때 참았다면 다른······.”

“후회하지 않아. 놈들을 위해 죽는 것보다 내가 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다.


“전부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도?”

“원래 내 것이 아니었겠지. 그리고 말했잖아. 나한테 더 소중한 게 생겼다고.

“정말 나랑 만난 거로 충분해?”

“물론이지요, 아가씨. 언제 묻든 제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전에 그랬듯 아가씨라 부르지 말라고 하진 않는다.


“대단하다, 위즈.”

“대단해? 내가? 왜?”

“위즈는 위즈 동생을, 라스를 지키려고 계속 참아왔던 거지? 위즈가 아버지랑 한 약속을 지키려고.”


만약 리나가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물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기는 했지. 하지만 약속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도 했어.”

“무슨 생각인데?”


어쩌면 위즈는 부모님을 잃었다는 걸 진작 마음 한편에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문이 방해한다고 해도 10년 넘게 연락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약속을 지키면 언젠간 부모님이 칭찬해줄 거라고 믿었어.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말이야.”


그래서 작은할아버지가 사실을 얘기했을 때 이미 예상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나도 당연히 라스를 버리고 혼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 하지만 약속을 지키면서 부모님이 살아있다고 믿을 수 있었어. 아니, 맹목적으로 믿었어.”


언젠가 약속을 잘 지켰다고 칭찬을 받고 싶다.

몸은 계속 자라도 그 어린 마음은 버릴 수 없었고, 그 마음이 위즈를 버티게 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셔야 칭찬받을 수 있으니까?”

“응. 조금 우습지?”


위즈가 머쓱하게 웃는데 리나가 고개를 젓는다.


“우습지 않아.”

“어?”

“우습지 않아. 슬픈 이야기잖아.”


코를 훌쩍인다.


“그리고, 그, 대단한 이야기고.”

“왜 리나 네가 우는 거야.”


위즈가 살짝 웃자 리나가 눈가를 닦으며 머리를 놓는다.

그런데 위즈가 떨어지지 말라는 듯 리나의 옷을 붙잡는다.


“위즈?”

“그, 잠시만.”


고개를 들지 않는다.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더 있어 줘, 리나.”


어깨가 떨리고 팔에 소름이 돋는다.

이어 고개숙인 위즈의 바지에 물 자국이 하나씩 생긴다.

의연하게 눈물을 다 닦고 다시 말없이 위즈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붙잡은 옷자락이 곧 찢어질 듯 팽팽하다.


“후회해도 괜찮아.”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던 리나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희생해야 했던 위즈.


“난 위즈를 탓하지 않을 테니까.”


그 모습이 묘하게 비슷해서 서로 그렇게나 쉽게 정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땀 냄새와 피 냄새가 가득한 머리를 한참 쓰다듬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슬의 학살자와 오두막의 손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8 87화 21.07.03 37 2 11쪽
87 86화 21.07.02 32 2 12쪽
86 85화 21.07.01 36 2 11쪽
85 84화 21.06.30 39 2 12쪽
84 83화 21.06.29 37 2 11쪽
83 82화 21.06.28 42 2 12쪽
82 81화 21.06.27 34 2 12쪽
81 80화 21.06.26 38 2 11쪽
80 79화 21.06.25 41 2 12쪽
79 78화 21.06.24 37 2 12쪽
78 77화 21.06.23 34 2 12쪽
77 76화 21.06.22 35 2 12쪽
76 75화 21.06.21 34 2 11쪽
75 74화 21.06.20 36 2 11쪽
74 73화 21.06.19 33 2 11쪽
73 72화 21.06.18 32 2 12쪽
72 71화 21.06.17 33 2 11쪽
» 70화 21.06.16 37 1 11쪽
70 69화 21.06.15 37 1 11쪽
69 68화 21.06.14 36 2 11쪽
68 67화 21.06.13 36 2 11쪽
67 66화 21.06.12 37 2 11쪽
66 65화 21.06.11 38 2 11쪽
65 64화 21.06.10 37 2 11쪽
64 63화 21.06.09 41 2 12쪽
63 62화 21.06.08 53 2 11쪽
62 61화 21.06.07 37 1 11쪽
61 60화 21.06.06 53 1 11쪽
60 59화 21.06.05 40 1 11쪽
59 58화 21.06.04 37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