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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노래 님의 서재입니다.

사슬의 학살자와 오두막의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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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천공의노래
작품등록일 :
2021.04.09 16:55
최근연재일 :
2021.08.02 07:50
연재수 :
118 회
조회수 :
8,024
추천수 :
231
글자수 :
613,867

작성
21.06.12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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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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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66화

+와 +사이의 글은 외국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DUMMY

“이미 돌아가셨어. 우리가 끌려올 즈음에.”


위즈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읊는다.


“아르다에서 엘렌으로 건너는 나루터 근처에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살고 계셨더라고. 여쭤보니까 자객이 부모님을 해치고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한테 돈을 받는 걸 봤대.”


- 보라색 눈동자에 쥐처럼 삐쭉빼쭉한 콧수염.

- 그래. 너와 똑같은 색 눈동자였다.


아직도 그 말을,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억양까지 그대로 기억한다.

아무리 목소리가 평온하다고 해도 담은 내용이 평온하지가 않다.

그래서 정말 위즈가 괜찮을까 싶어 몸을 살짝 돌리는데

이미 눈치챘는지 위즈가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다가오지 말아 달라고 한다.


“그때부터 복수를 다짐했어. 남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남의 어린 시절을 박살냈는데, 가만히 둘 수가 없더라고.”


거기에 만약 위즈가 가주를 멈추지 않으면 라스는 더한 꼴을 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지막에는 일가족이 사라지는 결말이 날 수도.


“그래서 3년을, 가주가 방심할 때까지 3년을 참고 미친 척했어.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듣고.”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복수를 다짐하고,

작은 외할아버지가 말한 그 원로를 찾으려고 눈을 굴리고,

가문 내의 모든 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쓸어 담았다.

그런 와중에도 라스에게 털어낼 수는 없었다.


“마지막에는 라스를 가주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이왕 걱정시킬 거 내 걱정만 시키려고 미친 척한 거야.”


당연히 본 에레체인 가문에는 모든 걸 알리면서

라스에게는 아무 말 말아 달라고, 관련 자료는 모두 폐기해달라고 했다.


“······위즈 동생은 힘들었겠네.”

“그렇지. 부모님을 찾으러 떠난 지 형이 정신을 놓은 채 돌아왔으니.”


어쩌면, 아니 당연히 그때부터 라스도 모든 진실을 눈치챘으리라.


“그래도 그 덕에 복수할 준비는 더 쉬워졌어. 모든 눈이 라스한테 쏠렸거든.”

“위즈 동생도 그, 천재였어? 칼을 배운다고 했지?”

“글쎄, 천재라. 무예는 잘 모르니까 확답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본 에레체인 가문에 직접 들어가서 배운다는 게 문제였지. 본 에레체인도 명색이 대귀족인데다가 아무나 받는 것도 아니니까.”

“혹시 크레센타 말도 그때 배웠어? 복수한 뒤에 크레센타로 도망치려고 했던 거 맞지?”

“응. 정답이야.”


역시 대단하다면서 살짝 웃는다.


그렇게 3년.

위즈가 정신을 놓은 체하고 라스가 위즈를 돌보던 시간.

그 끝에 가주 시험이 다가왔다.



******



가문을 바꿔 달라는 무르니수스 본 에레체인의 부탁은 라스에게 꽤 컸던 모양이다.

이전 같으면 사양할 가주시험 응시를

위즈를 위해서라도 먼저 응시하겠다고 했을 정도니.


그동안 위즈는 몇 번이나 계획을 세우고 몇 번이나 수정하며

몇 번이나 계획을 폐기하곤 했다.


주크도 나름대로 성장했다.

여전히 혼은 많이 나고 있지만,

그건 과외 선생이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았기 때문이다.


‘걔 원래 실력을 알면 절대 기준을 그렇게 잡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나날이 성장하는 라스 때문에 조급해하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이따금 귀를 기울일 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어떻게든 주크를 차기 가주로 만들려고 법까지 어기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황제 폐하의 칙서다! 테 살베니움 가주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라!”


황제의 명령을 받은 승상이 직접 찾아와

시험으로 장난치면 가만 안 둔다고 경고했다.


그 덕에 필기는 무사히 치러졌고, 라스는 당당히 통과했으며, 주크는 턱걸이였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실기인데, 가주마저 라스의 승리를 예상하는 상황.


‘이러면 굳이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겠네.’


라스가 가주가 되자마자 맨정신으로 가서 라스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가주의 권한으로 부모님의 원수를 찾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만일에 대비해 카누악을 떠난 뒤 있었던 이들을 글로 적으며 지내는데,


“이리 오너라!”


그 원로들이 전혀 하지 않을 것 같던 선택을 했다.


이리 오라고 하고는 위즈가 정신을 놨다는 걸 기억해냈는지

직접 와서 문을 여는 원로.


“안에 있나?”


급히 펜과 종이를 숨긴 뒤 몸을 돌리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인 걸 보면 다른 지역에 있었던 모양이다.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온 원로는

위즈가 듣든 말든 일단 자기 할 얘기만 쏟아낸다.


“그래. 솔직히 인정하지. 가주님, 그리고 우리 원로들이 너와 네 동생에게 했던 짓은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짓이었다.”


창문을 열어 햇빛이 들어오게 하고 마루에 앉은 채로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그 세월을, 네가 고통받던 그 세월을 모두 보상받을만한, 그런 걸 제공하겠다.”


위즈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연극을 하듯 손을 펼치는 게 그림자로 비친다.


“벼슬? 내 가주님께 말씀드려 한자리 주도록 하겠다. 새 출발? 네가 어떤 지역에 가든 돈은 얼마든지 지원하지.”


대충 이런 얘기를 하는데 가만히 듣자니 너무 어이가 없고 웃음이 나온다.

어디까지 가나 싶어 조금 얘기해보기로 한다.


“······주는?”


갑자기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원로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데

여전히 위즈는 벽만 바라보고 있다.

잘못 들은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가주는, 당신이 방금 한 말, 알고 있나?”


위즈가 고개를 살짝만 돌리고 말한다.

꾀죄죄한 얼굴,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

어둠 속에서 살짝 비친 햇빛을 받아 보라색 눈이 반짝인다.


“가, 가주님?”

“어. 가주가 허락했냐고.”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위즈의 몸이 살짝 떨린다.


“무, 물론이지. 이미 내가 몰래 가주님과 얘기하고 왔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래. 가주님께 그 정도 힘은 있으니까. 안 된다고 해도 내가 설득하면 되고.”


잘됐다고 생각한 건지 원로가 제대로 자리 잡고 말한다.


“그나저나 3년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했다고 들었······.”

“내 부모님의 원수를 찾는 거.”


무시하고 말한다.


“뭐?”

“내 부모님을 해친 원수, 그리고 그 책임자 모두 처벌하는 것.”


원로의 눈썹이 살짝 움직인다.


“그······, 그거야 어렵지 않지.”

“목을 베는 것도?”

“물론이다. 네 부모를 살해한 사람과 책임자 모두.”


위즈가 피식, 하고 비웃는다.


“고통에서 해방해준다는 말, 그건 기본으로 깔고.”

“그래.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는 만큼 들어주겠어.”


한숨을 쉬고 완전히 몸을 돌려 원로를 본다.


“조건은?”


무슨 얘기가 나올지 예상은 한다.

라스에게 출전하지 말라고 말하든가, 라스가 나가지 못하게 방해한다든가,

차라리 라스와 같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라든가.


“대진표가 나왔다. 황궁에서 보낸 감독관이 직접 짰지. 여기, 첫 시합이 바로 우리 도련님과 라스의 대련이야.”


그런데 원로가 내뱉은 말은 너무나 끔찍했다.


“네가 우리 도련님 대신 나가서 라스를 죽여라.”

“······뭐?”


너무나 터무니없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물론 우리는 도련님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연히 당당하게 네 동생을 이기고 가주 자리까지 갈 거야.”


위즈의 표정을 못 봤는지 자기 할 말만 계속한다.


“하지만 요즘 라스가 성안에서 인기가 많다며? 놈은 아마 도련님이 가주가 되어도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겠지. 그러니까······.”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

그대로 달려들어 멱살을 잡는다.


“자, 잠깐······.”

“그 입 다물어.”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이 올까 봐 소리치지는 않는다.


“끔찍했다며. 너희가 한 짓,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며. 그런데, 뭐?”

“지, 진정하고······.”

“나보고 내 동생을 죽이라고?”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하얘진다.

얼굴을 계속 쳐다보자니 속이 안 좋아서 손을 놓고 물러난다.


“역겨워서, 진짜.”

“지, 진정해봐! 끝까지 말을 들어!”


무시하고 쫓아내려 하는데

원로가 방어막을 만들고 소리가 새지 않게 안으로 들어온다.


“너, 지금까지 힘들었잖아. 응? 그래서 이제 안 힘들게 해준다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솔직히 생각해봐. 네 동생 목숨이 어떻게 되든, 결국 너만 편하면 되는 거 아니야? 너라도 구원받아야지!”


그 말에 위즈가 일부러 멈추니, 원로는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며 계속 말한다.


“딱 하나야. 어차피 대련 중 사람이 죽는 일은 꽤 있었어. 너도 알잖아?”

“그래서, 사고인 척하고 라스를 죽이라고?”

“그래. 뒤처리는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


물론 그럴 생각 없다.


“감독관은? 선수 바꾸는 걸 감독관이 가만둘 리 없잖아.”

“걱정하지 마라. 그 계획도 다 세워뒀어.”


위즈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려다보다 말한다.


“권력이 그렇게 좋아? 사람 목숨이 그리 가벼워 보일 정도로?”

“뭐?”


당장에라도 찌를 것 같이 노려보는 위즈.

그러다 이내 한숨을 쉬고 말한다.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저, 정말이냐?”

“그래. 대회 당일, 그렇게 친애해 마지않는 도련님을 위해 내가 대신 라스와 싸우고, 마지막에 라스를 죽인다.”

“맞아. 그거야.”


기분 나쁘다는 듯 침을 뱉는다.


“아, 혹시 당신도 대회 보러 오나?”

“나? 아, 그렇지.”

“그래? 그러면 됐어. 그리고,”


위협하듯 손가락으로 원로를 가리킨다.


“절대 내가 맨정신이라는 걸 말하지 마. 가주에게도, 원로에게도.”

“뭐? 왜?”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라스도 모르고 있어. 이 정도 부탁 들어주는 건 당신한테도 딱히 손해는 아닐 텐데?”


조금 생각해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여기 더럽히지 말고 빨리 가.”

“그래. 계약 어기면 안 된다?”


원로는 일어나 흙을 털고 중문을 나선다.

담 너머로 원로가 사라지는 모습이 보이자

위즈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우욱!”


그리고 가슴을 부여잡고 입을 막으며 바닥에 쓰러진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에 토한다.


“허억, 허억,”


얼굴이 움직이려 하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역겨움을 참느라 고생했다.


“우욱!”


달려들어 죽이고 싶은 걸 참느라 힘들었다.


- 보라색 눈동자에 쥐처럼 삐죽빼죽한 콧수염.


“찾았다······.”


작은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반복한다.

바닥이 토사물로 엉망이 되어가는 데도 씩 웃는다.


“드디어 찾았어.”


복수하지 않고 그냥 도망치겠다고 했다.

누군지 찾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사냥감이 이렇게 쉽게 나타나 줬다.


‘날 보고 죄책감도 안 들었나?’


자기가 사주해 죽인 사람들, 그리고 그 아들.

원로는 모른다는 표정을 했지만,

위즈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부모님이 살해당했다고 얘기했다.

공식적으로 위즈의 부모는 실종 상태인데도.


입을 닦고 흐느끼듯 웃는다.

너무 행복하고 흥분돼서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팔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린다.


‘죽일까? 지금 쫓아가서 뒤에서 죽여?’


안 된다.

참아야 한다.

마지막 장면은 정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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