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농장

말할 수 없는 것 (2)

무심한 표정으로 난간에 기댄 채 길버트는 성벽 밖을 내다보았다.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좁은 해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싹 말라있는 그 해자에는 본디 담겨 있어야 할 물이나 오물은 없었다. 대신 그 해자에는 꿈틀거리는 베르미와, 그 틈에 간간이 섞여 있는 스퀼라들이 바글대고 있었다.

길버트는 해자가 너무 얕다는 사실에 다소 아쉬움을 느꼈다. 만일 해자가 훨씬 더 깊었다면 상대해야 할 베르미들의 수는 더 적었을 테고, 어쩌면 해자 맨 밑에 있는 녀석들은 윗녀석들의 무게로 압사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치르르-

쓰잘데없는 상념에 빠져 있던 길버트의 바로 옆에서 날개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베르미 두 마리가 다가와 있었다. 속날개를 빼낸 그 놈들은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부득이하게 익숙해져버린 몸놀림으로 길버트는 그것들을 가볍게 베어 넘겼다.

베르미들을 처리한 후 길버트는 성벽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 해자를 보며 느꼈던 아쉬움을 충분히 메꿀 만큼의 만족감을 느꼈다.

성벽의 전황은 길버트가 쓸데없는 상념에 잠길 수 있을 만큼 썩 널널했다.

길버트는 희열을 느꼈다.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방패병을 전부 치워버린 뒤 맞이하는 고작 두 번째 정오 만에, 베르미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심지어 성벽 위로 올라온 놈들 중 대부분은 완전히 자라지 못한 비성체들이었다.

전체적인 수도 적어졌으며, 그것들 대부분이 덜 자란 베르미라는 점은 전투를 몇 배나 수월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길버트는 어젯밤 영결식에서 수 많은 청년들의 넋을 위로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제 길버트는 그들에게 어떤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영지의 내일은 언제나 불확실했고, 그래서 가장 최후에는 그들의 죽음에 과연 어떤 의미가 부여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전이 성공한 지금, 길버트는 이제 그 청년들의 죽음에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고작 하루에 불과하겠지만, 주관적으로 보자면 그 청년들은 더없이 귀중한 하루의 시간을 벌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청년들의 죽음은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길버트는 순수하게 청년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

잔잔한 전투 속에서 길버트는 어제와 오늘의 전투를 복기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어제 한나절 동안 치러진 전투는 영지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영지보다 베르미들 쪽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목측해 봤을 때 현재 성벽 위의 베르미들의 수는, 어제와 비교해서 거의 오분지 일이 될까말까한 수준이었다. 베르미들이 너무 적은 탓에 십인장들은 오히려 약간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병사들 역시 여유로웠다. 그들은 고작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새로운 체제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 같았다. 병사들은 결코 흩어지는 일 없이, 네 다섯 명이 단단하게 뭉쳐 착실히 베르미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전장을 대강 파악한 후 길버트는 하늘을 확인했다. 해는 이미 꽤 기울어 있었다. 시간을 대강 어림잡은 길버트는 길어도 두 시간 정도면 오늘 치 공세가 끝날 거라 짐작했다.

총체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날은, 듀라트 영지에서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여유로운 정오였다.

전황을 살피던 도중 길버트는 우연히 밀러와 눈이 마주쳤다. 밀러는 자신의 주변을 한번 슥 훑어 본 후에 차분한 걸음걸이로 길버트에게 다가왔다. 밀러는 적잖이 들뜬 모습이었다.

"놀라운 일이야. 길 자네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 맞았네! 방패병을 치운 지 고작 이틀 만에 베르미들의 수가 이렇게까지 줄어들 줄은... 게다가 오늘 큰 부상을 입은 병사가 단 한 명도 없어. 아마 베르미들이 성체가 아니라 그런 것이겠지?"

확실히 상황은 여유로웠다. 평소라면 잡담을 나누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베르미들이 달려든다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보다는 전투 중에 지휘관들이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길버트는 부담 없이 밀러와 얘기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전투가 지나치게 널널한 나머지 조금 귀찮아 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전까지의 전투 양상이 소모전이었다면, 오늘 성벽 위의 모습은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울릴만한 모습이었다.

밀러는 병사들의 전투를 바라보다가 다시 길버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서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병사들에게 다른 일을 시킬 수도 있겠군."

길버트는 희망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는 밀러가 말한 다른 일이 무엇인지 따로 묻지는 않았다.

전투를 벌이는 병사들은, 아침 나절 성벽을 올라오기 전까지는 평범한 시민이다. 물론 여기서 평범한 시민이란, 세금을 내며 영지에 종속된 인간을 말한다. 그리고 평범한 시민이란, 동시에 모두 훌륭한 농부거나 혹은 기술자다.

현재 전장의 모습으로 미루어 봤을 때, 영지의 모든 청년들이 수비에 가담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 말은 청년들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체력을 전부 베르미들에게 쏟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청년들은 남는 체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부대를 따로 편성해 오후에 스퀼라들을 피해 사냥을 하거나, 춘경지에서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

길버트는 성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활한 대지의 한 부분이 짙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무 익어버려 떨어지기 직전의 소맥들이었다. 길버트는 그 장엄한 풍경에 약간 아득한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충분히 가능해 보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베르미들이 전부 물러갈 시간이군요. 제가 체력이 남은 병사들을 데리고 춘경지로 가겠습니다. 비록 수확 시기는 놓쳐버렸지만 파종 시기는 지켰으니 아슬아슬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이 상황에 고작 맛 없는 빵을 먹게 되었다고 불평하는 놈들은 없을 걸세. 있다면 내가 엄한 군법으로 다스리겠네. 그래, 작업에 필요한 병사들은 내가 차출하지. 한스 놈의 조는 오늘 베르미들을 거의 상대하지 않았으니 마침 적당하겠구만."

"그리고 만약 며칠 지켜본 후에도 전황이 지금과 같이 여유로우면 저는 폴 영지에 다녀올까 합니다."

"폴 영지에?"

"예. 그곳은 비옥한 영지입니다. 겨울까지 버틸 식량을 조달할 수 있을 테고, 또 어쩌면 해결사나 용병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식량이야 있겠지만 그런 시골 영지에 도움 될만한 용병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만. 게다가 만약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에게 지급할 보수가 없지 않은가."

"빚을 지면 됩니다. 영지의 재정 상태는 최악이지만, 백작 부인은 엄연히 백작의 계승자입니다. 명예만 포기한다면 얼마간의 돈을 차용할 수 있을 겁니다."

길버트의 말에 밀러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나. 길 자네는 모든 것을 잃은 부인에게, 겨우 남은 마지막 하나까지 버리라고 말할 셈인가?"

"글쎄요. 저는 귀족이 돈을 꾸러 다니는 것이, 요괴들의 밥이 되는 것보다는 더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밀러는 말없이 전장을 주시했다. 그러다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길 자네가 직접 갈 텐가?"

"예. 하멜 집사를 대동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보다는 집사님 쪽이 더 손익계산에 능하시겠지요."

하멜의 이름이 나오자 밀러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밀러는 다시 병사들의 사이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길버트는 이전처럼 성벽 난간에 기대 밖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상황은 호전되고 있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불안함의 정체를 확인해두고 싶었던 길버트는 계속해서 성벽 아래를 유심히 관찰했다.

풍경은 방금 전까지 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해자를 가득 메운 베르미들과 그 사이사이 굵은 아지랑이처럼 솟아 있는 스퀼라들의 꼬리가 보였다.

길버트는 시선을 더 아래로 내렸다. 해자와 마찬가지로, 성벽 밑에서도 베르미들과 스퀼라들이 한결 같은 모습으로 꼬물거리고 있었다.

베르미들은 조악한 앞발로 성벽을 긁거나 할퀴고 있었고, 스퀼라들은 앞 발에 달린 큼직한 집게로 똑같은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저들끼리 부딪히고, 깔리고, 엉키고 있던 탓에 성벽 밑은 마치 검은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다가오는 베르미들을 대충 상대하면서 길버트는 이번에는 성벽 위를 관찰했다. 그리고 오늘 정오부터 몇 번이나 시도했던 일을 한번 더 시도했다.

길버트는 가만히 베르미들의 수를 셌다.

'백. 이백. 삼백···.'

몇 번을 확인해봐도 그것들의 수는 비슷했지만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어제의 혈투가 베르미들에게 치명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감안해도 지금 성벽 위에 있는 베르미들의 수는 너무 적었다.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그 사실이 명징함에 집착하는 길버트에게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던 길버트는 불현듯 어떤 상상에 사로잡혔다. 한 점에서 시작된 그 상상은 놀라운 속도로 가지를 뻗어갔다.

다음 순간 길버트는 난간 밖으로 상체를 휙 내밀었다. 성벽 밑은 여전히 같은 풍경이었다. 성벽에 바짝 붙어 있던 베르미들은 무의미하게 성벽과 바닥을 할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던 길버트는 마침내 불안함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성벽 밑에 모여 있는 베르미들 중에는 충분히 자란 녀석들이, 한 마디로 충분히 성벽 위까지 도약 가능한 성체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물론 몸집이 베르미의 생장 전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도, 현재 성벽 위에 있는 베르미들보다 월등히 덩치가 큰 녀석들은 분명 충분하거나 혹은 더 나은 도약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벽 위로 뛰어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과 달리 지금은 아예 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성체 베르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길버트는 어느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길버트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난간을 밀치듯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길버트는 황급히 영지의 내성 쪽 난간으로 달렸다. 길버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서 바닥을 주시했다. 바닥이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길버트는 고개를 돌리고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밀러..! 밀러!"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밀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길버트에게 다가왔다. 지근거리에서 길버트의 표정을 본 밀러는 이내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듯했다. 밀러는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초조해 하는 게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저희들이 착각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제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길버트는 어떤 무시무시한 것을 보고 겁먹은 인간처럼 횡설수설했다. 밀러가 보기에 길버트는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착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길버트는 그 사이에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밀러는 길버트가 하는 말을 알아 듣기 위해 귀를 가져다 댔다. 길버트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완전히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되는..."

"착각이라니? 우리가 뭘 착각했단 말인가?"

"저것들은..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올라오지 않았던 겁니다! 저 영악한 것들은.. 일부러 올라오지 않고 있었단 말입니다..!"

"침착하게 말해주게 길!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대답 대신 길버트는 난간 밖으로 상체를 쑥 내밀었다. 옆에서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던 밀러가 이내 길버트와 똑같이 난간에서 몸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범한 땅이었다. 흙과, 자잘한 돌멩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영지의 땅.

밀러는 몸을 내민 채 길버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밀러는 명백한 의심이 섞인 눈으로 길버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길버트는 밀러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땅을 주시하고 있었다.

밀러가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기분을 받았을 때, 길버트의 입에서 신음에 가까운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아- 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밀러는 다시 내성 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야에 들어온 땅은 방금 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밀러는 곧 성벽과 맞닿은 부분의 땅이 아주 미세하게 들썩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처음에 밀러는 그것이 두더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성벽 근처가 경작지의 무른 땅이 아니라는 점과, 두더지는 절대 취미 삼아 단단한 땅을 파헤치지 않는다는 상식을 떠올렸다. 마침내 상황을 인지한 밀러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길버트가 애잔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돼!"

길버트의 외침과 동시에, 돌연 땅의 일부분이 안 쪽으로 맥없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땅의 수 많은 부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길버트와 밀러는 너무 큰 절망을 맞이했을 때, 오히려 드는 약간 어이없는 심정으로 바닥을 주시했다.

두 사람이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땅에는 이미 움푹 파인 수십 개의 어두운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결국 밀러가 나이에 맞지도 않는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그 어둡고 축축한 구멍에서 베르미와 스퀼라들이 줄지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