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농장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8)

길버트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에는 수 많은 소리가 있었지만 그중 타닥- 타다닥- 하는 부딪히는 소리가 길버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그 소리는 농번기에 무르익은 소맥을 지나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우박의 소리를 닮아있었다.

꼭 닮은 소리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 소리의 근원지는 우박은 아니었다.

그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주체는 우박이 아닌 베르미였고, 그것이 부딪히는 것 또한 바닥이 아닌 성문과 성벽이었다.

물론 전혀 다른 성질의 소리였지만 길버트는 그 두 가지 사이에 괄목할만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것들은 끊임없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있다는 점이 닮아있었고, 또 투철한 신앙심 외엔 도저히 멈출 방법이 없다는 점이 닮아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길버트는 이내 난간 쪽으로 움직였다. 계속 이어지는 소리에 질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길버트는 성벽 밖을 내려다 보았다.

베르미들은 무너질 리도 없는 성벽에 끊임없이 머리를 처박아 대고 있었다. 길버트는 어쩌면 저것들이 저렇게 매일 같이 머리를 박는 탓에 약간 돌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길버트는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돌아버리기 위해선 그 전에 우선 정상적인 머리가 필요하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베르미라니. 그것은 우스운 농담이 분명했다.

길버트는 다시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

성벽의 어느 한켠에서 밀러는 어떤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밀러는 어쩌면 어젯밤 호르체를 너무 마셔버린 탓에 길버트가 약간 돌아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바쁜 와중에도 밀러는 전장을 한번 둘러보았다. 물론 어느 곳으로 고개를 돌려도 상황은 비슷했다. 성벽 전체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밀러는 오늘이 정신없고 끔찍한 하루라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몇 달 간 평화로운 오후를 보낸 적은 없었고, 사실 이제 평화롭다는 수식조차 듀라트 영지에 있어선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다만 밀러는 자신이 견뎌온 수 많은 날들 중, 오늘 만큼 난잡하고 힘겨웠던 날은 없었을 거라 장담했다.

"흩어지지 마라 이 녀석들아! 다섯 명을 유지하고 서로 등을 붙여!"

"본대는 발을 멈추지 마! 멈추는 순간 끝이다!"

십인장들은 평소처럼 병사들에게 고함치고 있었지만, 이전 날들에 비하면 명령와 윽박의 빈도 수는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밀러는 그것이 십인장들의 근무태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현재 십인장들은 그들 스스로가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베르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통솔을 기대하기란 당연히 어렵다.

십인장들과 마찬가지로 밀러 역시 어이없는 숫자의 베르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들을 힘겹게 베어 넘기면서 밀러는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최악으로 치달았는지 생각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길버트의 머리가 돌아버린 탓이다.

밀러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속으로 각종 욕설을 내뱉었다. 그 다음 어젯밤 자신의 방에서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

"그게 무슨 소린가 길? 자네 방금 방패병을 없애자고 했나?"

"그렇게 말했습니다."

밀러가 따지듯 되물었지만 길버트는 태연했다.

이미 저녁을 끝마친 늦은 시각이어서 밀러의 방안은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방을 밝히고 있는 것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기름 램프 하나가 전부였다. 램프에서 매캐한 연기와 빛이 뭉게뭉게 솟아나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램프의 희미한 빛이, 또 창 밖에선 만의 빛이 새어 들어와 길버트의 얼굴을 비췄다. 그 바람에 길버트의 얼굴은 명암이 이리저리 뒤섞였고, 결과적으로 보자면 꽤 음산하게 보였다.

밀러는 길버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호르체가 든 잔을 집어 들고서 혼잣말하듯 말했다.

"확실히 호르체가 독하긴 했던 모양이지?"

길버트는 슬그머니 웃었다. 밀러는 길버트의 제안을 주정뱅이의 사설 정도로 취급해버렸다. 길버트는 약간 자조 섞인 투로 대답했다.

"독하긴 합니다. 그 탓에 평소보다 취하긴 했지만... 아직 사리분별이 힘들 정도는 아닙니다."

"흐음 그렇군. 그럼 방패병을 치워버리자는 그 발언은 멀쩡한 정신에서 건넨, 이를 테면 하나의 전략이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이건 전략입니다."

밀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밀러는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똑바로 세운 뒤 길버트에게 가까이 기울였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방패병을 왜 치우자는 말인가? 방패병을 세우지 않으면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 게야. 자네도 그 방패가 성벽의 일부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나. 그들이 사라지면... 대충 생각해봐도 몇 배는 더 많은 베르미들이 침입할 것 같네만."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자네는 의도적으로 더 많은 수의 베르미들이 침입하도록 하겠다는 말인가?"

길버트는 대답 대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밀러는 대화를 진행하면 할수록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밀러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물론 밀러는 스스로를 훌륭한 참모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쓰는 일은 그렇다 쳐도, 밀러는 자신이 일생 치러왔던 전투에서 익힌 경험과 감각들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밀러는 들고 있던 잔을 기울여 호르체를 들이켰다. 이어서 조금 전보다 투미해진 눈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만약 제안을 들먹인 것이 어중간한 놈들이었다면 밀러는 대번에 미친놈 취급을 해준 뒤 그 제안을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길버트는 어중간한 놈이 아니었다. 밀러는 재차 질문했다.

"설명해주게. 방패병을 없애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베르미들이 성벽에 나앉게 되는 일을... 어떻게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겐가?"

길버트는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원래 투명했을 잔 속은 만의 일부가 투영돼 묽은 피처럼 붉어져 있었다. 길버트는 잔의 절반까지 차오른 호르체를 벌컥 들이켰다. 밀러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저는 베르미들의 수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수를?"

"예. 근본적으로 저희들이 고전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수의 차이입니다. 저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면 애초에 습격 같은 것을 당하지도 않았겠지요."

"그야 당연히 그렇네만... 놈들의 수를 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먼."

"물론 베르미들의 수를 일일이 세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것 들은 어림잡아도 수십 만 마리니까요. 제가 센 것은 성벽 위에 내려 앉은 놈들의 수입니다."

길버트는 비어버린 술잔에 거듭 호르체를 따랐다. 밀러는 말릴까 하다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 두었다.

"영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는 하루에 많은 베르미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방패병을 뛰어넘는 베르미들의 수는 엇비슷합니다."

"듣고 보니 그렇군. 거기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구만."

"요컨대 그것들의 생장 속도가 문제입니다. 놈들의 생장은 터무니없이 빠릅니다. 성벽에 내려 앉는 것들은 어찌됐건 성체들입니다. 작은 놈들은 성벽을 탈 만큼 도약하지 못하니까요. 다만 생장이 너무 빠른 탓에, 저희들이 그날 죽이는 성체만큼의 다른 성체가 생겨납니다. 한마디로 비성체들이 성체로 자라는 속도가 저희들이 성체를 죽이는 속도보다 빠른 겁니다."

"그렇군. 그래서?"

"바로 그런 이유로 방패병을 치워버려야 합니다."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밀러는 이제 답답함을 넘어 약간의 분노마저 엿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길버트는 밀러의 반응에 작게 싱긋 웃었다. 길버트는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제가 창안한 전략은 아주 단순한 산수에서 기인했습니다. 먼저 영감님께 묻겠습니다. 예컨대 현재 상황에서 방패병을 전부 보병으로 전환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처음에도 말했잖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몇 배는 더 많은 베르미들을 성벽 위에서 마주하게 될 테지. 방패병이 사라지면, 방패를 뛰어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성체들까지 성벽을 넘어올 테니까. 뭐 그것들을 어찌저찌 정리한다면야..."

거기서 갑자기 밀러가 말을 멈췄다. 밀러는 눈썹을 모으며 묘한 표정으로 술잔을 응시했다.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밀러는 어느 시점에 고개를 쳐들었다. 맞은 편에서 밀러의 변화를 관찰하던 길버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밀러는 다소 자신감 없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시간을 미리 당겨서 쓰자는 말인가?"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방패병을 치우게 되면 영감님의 말처럼 비성체인 녀석들도 전부 성벽 위로 올라올 겁니다. 전체적인 수가 많아질 테니 당장 며칠은 몇 배로 힘들어질 겁니다. 하지만 비성체인 녀석들이 전부 올라오면 생기는 이점이 있습니다."

"잠깐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는데 다시 애매해지는군. 우선 쭉 정리해 보겠네. 우리는 매일 성벽 위의 베르미들을 죽이고 있지. 하지만 다음 날에도 우리가 상대하는 수는 비슷하네. 자네 말처럼 전날 비성체였던 놈들이 다음 날에는 성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 여기서 방패병이 없다면... 응? 같은 것 아닌가. 어차피 성벽 위에 방패병이 있건 없건 비성체가 성체가 되는 수는 똑같을 테니까."

길버트는 빙그레 웃으며 밀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밀러는 항복했다.

"미욱한 제자라 미안하네. 역시 자네 설명을 듣는 편이 낫겠군."

"영감님이 말하신 것처럼 우리가 상대해야 할 베르미의 수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하는 베르미의 질과 우리 쪽의 숫자가 바뀝니다. 정리하자면 전략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단순하게 수치로 보자면 지금 성벽은 방패의 높이만큼 더 높아져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지."

"내일을 기준으로 삼아 보겠습니다. 내일 방패병 위까지 뛰어오를 성체의 수를 천 마리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상대해야 할 수지요. 그리고 방패는 넘지 못하지만 성벽은 오를 수 있는 베르미를 천 마리, 또 매일 성체가 되는 베르미를 천 마리 정도로 잡아 보겠습니다."

"내 계산이 맞는지 모르겠구만. 그 상태에서 방패병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총 삼 천 마리를 상대하는 꼴이 되네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올라온 성체들을 전부 처리하고 난 후에는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우리는 방패병을 보병으로 전환했으므로 전력은 두 배가 됩니다. 그리고 성체가 전부 사라지고 나면, 결국 우리들이 상대해야 할 베르미의 숫자는 그날 그날 성체가 되는 천 마리겠지요. 바로 여기서 이점 하나가 더 생깁니다."

밀러는 이제 고민하지도 않았다. 밀러는 가만히 길버트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렇게 성체가 된 천 마리의 베르미는 이전에 우리가 상대하던 놈들보다 훨씬 약할 겁니다. 그것들은 이제 막 성체가 되어 간신히 성벽을 뛰어오를 정도의 미숙한 놈들이잖습니까."

밀러는 탄복한 표정으로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밀러는 그제서야 길버트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렇군! 이제 확실히 알겠네. 그러니까 자네 말대로 할 경우, 우리 쪽의 가용병력은 두 배가 되고, 상대의 전투력은 훨씬 약해지는 것이로군! 지금 상황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단순히 계산해봐도 두 세 배의 효율 차이가 날 테고..!"

길버트는 밀러를 향해 훌륭한 제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선 말없이 사과주를 들어 잔에 섞었다. 길버트가 잔을 들었고 밀러는 기쁜 마음으로 잔을 부딪혔다.

그 전략에 관한 세부적인 얘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몇 번 술잔을 나누었다. 그리고 도중에 밀러는 문득 길버트의 표정이 어둡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밀러는 그렇게 멋진 전략을 창안했음에도 우중중하게 있는 길버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유심히 길버트를 관찰하던 밀러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길버트는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타인을 이해 시킬 이유가 없다. 그는 듀라트 영지의 총 지휘관이었고, 유일한 백인장이었다. 길버트는 그저 명령하면 그만이며, 밀러와 병사들은 그 명령을 수행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군대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길버트는 이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 밀러에게 설명했고, 또 설득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밀러는 비로소 길버트가 왜 오늘 따라 유독 많은 술을 들이켜고 있는지 이해했다.

길버트의 작전은 그 본인이 말한 것처럼 단순한 계산에 불과했다. 하지만 계산에 실수했을 때, 단순히 교사의 꾸중 몇 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아마 이 경우에는, 계산에서 어긋난 수치만큼의 희생자들이 생길 것이다.

밀러가 보기에 길버트는 그 사실을 감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순간 밀러는 길버트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지 의아해졌다. 비록 총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지만, 영지의 누구도 길버트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길버트는 자신이 관두고 싶을 때 언제든 그 역할을 떠나버릴 수 있다.

밀러는 그렇게 괴로워할 바엔 영지를 떠나버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밀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네. 어차피 그보다 더 나은 방법도 없지 않나."

밀러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눈 앞의 고독한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말없이 자신의 술잔을 홀짝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