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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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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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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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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9)

DUMMY

『카니쿨라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 대해선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오직 인간과 오랜 시간을 보낸 카니쿨라만이 눈물을 흘린다는 점이다. 다른 종족이 재미 삼아 기르는 개체가 눈물을 보인 경우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룰러의 요괴 대백과 중-



*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예컨대 완고한 어른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던 청년들은 세월이 얼마 흐르지도 않아서 어느새 자신이 연만한 늙은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던 늙은이들의 행동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첫 출산을 경험할 당시, 산모는 자신의 밑구멍에서 나온 작은 것을 보고 놀라움과 감동과 모종의 황당함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윽고 그것이 지나치게 관심을 보채는 시기가 오면 기어코 짜증스러워지고 만다.

인간이란 대개 그렇다. 어떤 상황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인간은 결국 무심하게 변해버린다.

그리고 듀라트 영지의 성벽 위에서 길버트는 바로 그런 종류의 무심함으로 창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길버트는 자신의 발치에서 치르륵대고 있는 베르미 세 마리를 거의 한꺼번에 베어 넘겼다.

그 일련의 동작은 일반적인 전장에서 살육을 목적으로 타인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과는 묘하게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길버트의 동작은 마치 미장이가 흙손을 다루거나, 혹은 정원사들이 조경수에 가위질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적어도 길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려 의식적으로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길버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짓거리를 무참한 살육이 아니라 그저 지지부진한 노동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일종의 정신적 자위였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그저 성벽 위를 좀 더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노동 행위에 불과하다는 식의 자위.

물론 길버트는 그것이 정신적 자위에 가깝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길버트는 자위를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길버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살육이 아닌 조경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편이 그 지난한 작업에 대한 효율도 높을 뿐더러, 더불어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다.


그러나 베르미를 베어내면 베어낼수록 길버트는 그런 정신적 도피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꿈틀거리고, 비치적거리고, 절룩거리고, 어물대며 팔딱팔딱 뛰는 무정물은 없다.

비록 차가운 피를 가진 요괴지만 베르미는 엄연한 생명체였다.

길버트는 그것들을 조금 큰 먼지쯤으로 여기고 싶었지만, 실상 그럴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지난 몇 달 간 수천, 수만의 생명을 앗았다. 그것이 전부였고 담담한 사실이었다.


돌연 베르미 한 마리가 길버트의 얼굴 쪽으로 튀어 올랐다. 이미 도약을 허용해버려서 창을 휘두르기엔 늦을 것 같았다. 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길버트는 망설임 없이 창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리고 창을 대신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도약한 베르미가 길버트의 가슴팍에 붙었다. 베르미는 여섯 개의 가느다란 다리로 몸을 고정 시키고선 앞발을 박아 넣기 위해 다리를 뒤로 젖혔다.

베르미의 의도가 뻔했기에 길버트는 얼른 왼손으로 베르미의 몸통을 잡아 채고는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길버트는 충격에 버둥거리는 베르미의 몸통을 군홧발로 있는 힘껏 짓밟았다.

갈색의 통통한 배 부분이 흉측하게 일그러졌고, 다음 순간 퍼석-하는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옅은 초록색의 피가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압력이 너무 강했던 탓에 그 초록의 피는 길버트의 하관까지 튀어올라 수염을 적셨다. 길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염을 쓸어 내렸다.

피는 묘하게 기분 나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본래 베르미들의 피는 차갑다. 그러나 지금은 정오의 태양과 또 거기에 달궈진 지열로 인해 뜨뜻미지근해져 있었다.

길버트는 초록색의 뜨뜻한 액체가 묻은 손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길버트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르미의 더운 피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결코 조경 작업이나 해충 구제 작업이 아님을 여지없이 체감시켜주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한 전쟁이었고 베어 넘기고 있는 것은 적병이었다.

인간 적병과의 차이점이라곤 고작해야 몸집이 지나치게 작다는 정도일까.


길버트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베르미 몇 마리가 길버트를 포위하듯 둘러쌌다.

치르르-하는 날개 스치는 소리가 사위에서 울렸다.

길버트는 어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 녀석들과의 전투는 도무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몇 놈을 해치웠다 싶으면 어느샌가 그 자리를 다른 놈이 메꿔버린다. 길버트는 베어도 베어도 유령처럼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 베르미들에게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무뚝뚝한 얼굴로 길버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포위되어 있기는 했지만 길버트는 이전처럼 허둥대지는 않았다.

얼마 전이었다면, 그러니까 저택의 도서관에서 나와 처음으로 칼을 쥐었을 때였다면 포위되자마자 곧장 흥분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길버트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사실,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이란 익숙한 것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법이다. 몇 달 동안 계속된 베르미들의 침략 행위는 길버트에게 더없이 익숙한 것이 되어 있었다.


길버트는 빠르게 발치를 훑어보았다. 총 일곱 마리의 베르미가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그 작고 징그러운 요괴들이 이 다음 어떤 순서로 공격해올지 알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덩치가 가장 큰 놈이 저놈이 먼저 도약할 게 분명했다. 다음으로는 날개를 반쯤 펼치고 있는 저 녀석. 혹은 한 쪽 다리가 없는 저 놈.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 여겨 보고 있던 큰 놈이 길버트를 향해 뛰어들었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길버트는 당황하지 않고 이미 그려 놓은 궤도로 칼을 휘둘렀다.

녀석은 공중에서 즉사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무도가나, 혹은 전쟁에서 뼈가 굵은 병사들이 습득하게 되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길버트의 경우에는 본능이라기보다는 학습에 가까웠다. 길버트는 요괴들의 습관과 행동을 치밀하게 분석한 후, 그에 대한 대처를 미리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그 정확한 궤도는 학자 같은 태도의 발로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 마리를 가볍게 해치운 길버트는 장갑을 끼고 있는 왼손으로 차분하게 목덜미를 가렸다.

변변한 방어구를 갖추지 못한 병사들과 달리 길버트는 경화처리된 레더 아머를 입고 있었다. 그 덕에 취할 수 있는 전투 자세였다. 베르미들은 무슨 수를 써도 방어구를 뚫을 수 없다. 결국 치명상을 입을 부위만 가려 놓으면 목 밑으로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베르미들의 포위망은 갈수록 촘촘해졌다.

길버트는 일단 현재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조심스레 뒷걸음질 쳤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야 굳이 숙련된 병사가 아니더라도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베르미들은 길버트를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녀석들은 길버트가 포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사방에서 일제히 뛰어들었다.

정면은 문제가 없었지만 길버트는 목 뒤에서 덤벼드는 놈까지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차라리 앞을 뚫음으로써 뒤의 베르미들에게 벗어나기로 했다.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길버트는 앞을 가로막는 베르미들을 칼로 베고, 찌르고, 옆면으로 후려쳤으며 동시에 밟고, 차고, 짓뭉개며 전진했다.


"하아. 하아..."


순식간에 베르미 몇 마리를 베어버리고 나자 주체할 수 없이 숨이 차올랐다. 길버트는 적잖이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제 자리에 멈춰 섰다.

휴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길버트는 절망감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시점에 여전히 열댓 마리의 베르미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을 인지한 길버트는 어이없는 심정과 함께 헛웃음을 터뜨렸다.

베르미들은 적병이었고, 동시에 말이 통하지 않는 요괴였지만, 그럼에도 길버트는 그것들에게 화를 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일말의 의미도 없는 짓이며 숨이 아까웠기에 길버트는 실제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사실 화를 내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범람하는 해일을 상대로 그들의 폭력성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틀림없다. 길버트는 상대를 비난하는 대신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길버트가 다시 한번 포위망을 뚫고 나갈 준비를 했을 때, 전장 한 편에서 어떤 십인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놈들이 도망친다!"


최초의 외침 이후에 병사들의 작은 함성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몸을 잔뜩 긴장 시키고 있던 길버트는 그제야 사방을 살펴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정오의 찌를 듯했던 햇살과 생명의 분주함은 어느샌가 착 가라앉아 있었고, 마치 자연이 잠시 숨을 꾹 참고 있는 것처럼 기묘한 고요함이 성벽 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점점 퇴색하기 시작한 하늘의 노란빛은 화가의 섬세한 획처럼 성벽의 우둘투둘한 화강암에 두서없이 내려앉았다.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까지 길버트를 둘러싸고 있던 베르미들이 잽싸게 포위를 풀고서 일제히 성벽 밖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온 몸을 휘감고 있던 긴장과 고양감이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치열했던 전투는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일순간에 끝났다.

그렇게 전투는 끝났지만 십인장들의 외침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도망치는 놈들을 최대한 죽여! 성벽을 내려가게 하지 마!"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다만 그런 명령은 어쩌면 그닥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병사들은 베르미들에게 복수심을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 복수가 가능한 시간이었다.

베르미들은 영지를 벗어나려 등을 보이고 있었고, 병사들은 따라가서 그저 칼을 휘두르거나 발로 짓밟으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항상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생하는 의례적인 시간이었다.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적들을 향해 병사들은 무참히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포로로 잡을 마음도 없고, 하다 못해 죽어가는 적병에 대한 애도조차 느낄 수 없는, 그런 평온하고 잔잔한 살육의 시간이었다.


길버트는 약간 멀뚱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버트는 병사들이 하고 있는 일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각자 찢겨져버린 친구들이나 혹은 가족들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너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길버트는 국소적인 학살이나 복수를 자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서 집으로 돌아가 체력을 조금이라도 더 회복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학살을 구태여 말리지는 않았다.

일견 복수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저 행위에도 나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는 하다.

가령 오늘 최대한 많은 수의 성체 베르미들을 죽여 놓으면, 내일 성벽 위에서 맞이할 베르미의 수가 줄어든다거나 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실용성이.

해가 조금 더 지상으로 내려왔을 무렵, 마침내 성벽 위에서 베르미가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화강암이 아득히 짙고 진득한 초록으로 물들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승리의 함성이 모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우리가 이겼다!"


십인장들은 일부러 병사들을 자극하기 위해 환호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병사들에게서 시작된 환호성이 마침내 밀러와 길버트를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인간에게 번져 나갔다.

그것은 몇 주 동안 지겹도록 반복된 승전보였다.

그러나 길버트는 그 함성에서 전투에서 이겼다는 동물적인 희열이나, 혹은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감상적인 안도감 따위를 느낄 수는 없었다.

인간들과의 전쟁이었다면 저들 틈에 섞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적병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승전보는 꽤나 효과가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독한 피해를 입고 도망치는 적병들은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승전보에 사기가 적잖이 꺾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숲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 작은 요괴들이 인간들의 승전보를 들으며 지금쯤 잔뜩 풀이 죽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너무 인간적인 관점이었다.


게다가 베르미들을 물리친 결정적인 요인은 병사들의 창을 휘두르는 솜씨나 여타 지휘관들의 탁월한 전술 때문도 아니었다.

베르미들을 물리친 것은 순전히 날씨였다.

피가 차가운 요괴들은 기온이 떨어지면 활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부분 해가 지기 전에는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베르미들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그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 잠시 제 집으로 돌아간 것 뿐이다.

승전보를 울릴 이유가 없다.

달이 떠오를 때 해안가의 물이 빠지는 것과 그리 다른 점도 없기 때문이다.

내일의 해가 떠오르고, 그 뜨거운 빛으로 땅이 덥혀질 때쯤이면 저들은 어김없이 다시 영지를 향해 밀물처럼 밀려올 것이다.

그리고 길버트는 그 안에서 다시금 발버둥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치르르-


불현듯 들려온 작은 날개 소리에 길버트는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소리는 바닥에서 들려왔다. 길버트는 얼른 검을 겨누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잠시 뒤 바닥에 있는 것을 확인한 길버트가 이내 천천히 칼을 집어넣었다.

발치에 있던 것은 미처 도주하지 못한 한 패잔병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겪었는지 녀석은 머리 부분이 거의 짓이겨진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다른 놈보다 한참 작은 그 녀석은 필사적으로 앞발을 휘저으며 바닥을 긁어 대고 있었다. 기온이 내려가기 전 땅 속에 둥지를 만들기 위한 본능이 발현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성벽은 무른 흙이 아닌 단단한 돌로 이루어져 있기에 무위한 움직임이었다.

길버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미 반쯤 허물어진 그것의 머리를 짓밟아 터트렸다. 그러고선 더러워진 군홧발을 성벽에 비볐다. 그때 문득 곁으로 밀러가 다가왔다.

밀러는 길버트의 발치와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밀러는 염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상당히 지쳐 보이는구만. 어떻게,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는 중노동이군요."


태연한 대답이었지만 밀러는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이 길버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길버트는 그 시선을 마주 응시했다.

어느 시점에 길버트는 눈 앞의 노인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생채기나 혹은 체력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길버트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 인간성 쪽을 의심하는 거라면 그 쪽도 아직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카니쿨라를 잡아먹고 싶다거나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길버트의 농담에 밀러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북부인들을 향한 악의 섞인 농담이었다. 북부인들이 가장 추운 계절이 왔을 때 자신이 기르던 카니쿨라마저 잡아먹는다는 농담.

물론 실제로는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고상하게 돌려 말하는 데에는 꽤 적절한 표현이었다.


"확실히 아직까지는 괜찮은 모양이군."


그 후 잠시 침묵을 고수하던 밀러는 이내 노인들 특유의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길, 이건 늙은이의 노파심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죽이고, 죽이고, 죽여대다가 결국 죽인다는 행위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 젊은이들을 너무 많이 봐 왔네. 차라리 벌벌 떠는 쪽이 훨씬 나은 편이지. 그건 적어도 죽인다는 행위가 자신의 죽음 또한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오는 행동일 테니까."


길버트는 밀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알 수 있었기에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리던 길버트는 문득 평소보다 사위가 붉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만이 타오르는 시기가 왔군요."


길버트의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에 밀러 역시 그제서야 알아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채 다 지기도 전에 떠오르기 시작한 만이 붉은 빛을 뿌려 대고 있었고, 그 붉은 빛이 성벽 위 곳곳에 천착해 있는 초록색 액체에 닿고 있었다.

초록색 액체는 빛에 닿아 희끄무레하고 지저분한 노란색으로 아주 천천히 변모해 갔다.


"그렇군, 만이로군. 허- 이것 참, 벌써 만이 떠오르는 시기가 되었나? 그래, 오늘 밤 저주를 받지 않게 조심하게 길."


길버트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길버트는 저주를 조심하라는 말로 되받아쳤다. 잠시 서로 잔잔한 웃음이 오갔다. 밀러는 묘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붉은 달을 바라보고 있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돌프라도 한 명 나타나주면 좋겠구먼."


밀러의 말은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다소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옆에 있던 길버트는 어째서 밀러가 만을 바라보며 그 종족을 연상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만이 불길한 취급을 받는 것은 달이 뿜어내는 붉은 빛이 피를 연상시킨다는 이유가 지배적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신뢰할만한 해석도 몇 가지 있다.

만의 날에 요괴들이 난폭해지는 것과 더불어 몇몇 아돌프가 이성을 잃고 흉폭해진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물론 길버트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

길버트는 수도에서 생활할 때 수 많은 아돌프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만이 타오르는 밤에 만났던 아돌프도 많았다.

그들은 미쳐있지 않았다.

하지만 밀러의 바람이 사실과 무관하건 어쨌건 길버트는 그 말에 공감할 수는 있었다.

길버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 듀라트 영지에 아돌프가 등장하는 것은 호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만의 빛을 받아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버린 아돌프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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