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775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3.05.28 09:29
조회
252
추천
14
글자
19쪽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5)

DUMMY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길버트는 밀러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밀러는 병사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연설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평소 길버트와 농담을 주고 받을 때의 가벼운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밀러는 전쟁 전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훌륭한 상관의 전형이었다.

연설 장면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길버트는 그러나 작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인간들의 전투였다면 노인의 연설은 어쩌면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격렬한 전투 직전의 연설이란 어쨌든 병사들의 감정을 적잖이 고양시켜 주기는 할 것이다.

그렇게 감정을 억지로 부풀게 만들면, 병사들은 타인을 죽이는 데에서 오는 어찌할 도리 없는 죄책감과, 일말의 망설임 같은 것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사기진작은 창으로 찔러 죽일 상대가 인간일 경우에나 어울린다. 애초에 잠시 후면 성벽을 향해 쇄도해 올 그것들을 죽이는 데 있어서, 망설임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낄 병사가 있을 리 없었다.


밀러는 끊임없이 병사들에게 작전을 하달하고, 가끔 농담을 건네고, 또 몇 명을 가볍게 질책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마치 숙련된 목수가 조공들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거나, 작업 방향을 제시하는 것 정도로 느껴졌다.

길버트는 사실 그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벌어질 일 역시 격렬한 전투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제설 작업이나 혹은 제초 작업에 더 가까울 것이다.

어느 쪽이건 병사들의 실질적인 행동에는 별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 병사들은 바닥을 향해 날붙이를 휘두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정이 비슷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결과는 전혀 다를 게 분명했다.

제설작업이나 제초 작업은 실패했을 경우 마당이 조금 지저분해지는 선에서 끝나지만, 조금 후에 있을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에는 영지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괄목할만한 차이점이 분명하다.


오랜 시간 십인장들에게 떠들어대던 밀러가 마침내 말을 멈췄다. 자신의 역할을 끝낸 밀러는 십인장들을 대동하고서 길버트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선 길버트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 동작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여느 전설 속의 기사가 공주에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공손한 몸놀림이었다.

다음 순간 밀러의 맞은 편에서 있던 길버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길버트는 검의 옆 면을 밀러의 머리 위에 얹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피오 신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하길 바랍니다."


길버트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몇 번이나 반복된 의례적인 행사가 끝났다. 십인장들은 자신들이 담당한 병사들의 곁으로 각자 흩어졌다.

멀뚱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길버트의 곁으로 밀러가 다가왔다. 어느새 밀러는 평소처럼 가볍고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뎅그러니 둘만 남은 상황에서 밀러는 동정 섞인 투로 말했다.


"자네는 여전히 어색해 보이는구먼. 이제 이런 일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병사들 앞에서 무뚝뚝한 표정을 연기하던 길버트는 그러나 밀러에게 침중한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이 짓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입니다만 저는 제가 이 우스꽝스러운 의식을 거행해야 하는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영지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영감님이잖습니까. 게다가 전투 자체도 저보다 영지의 청년들이 더 익숙합니다. 저라는 허수아비가 꼭 필요합니까?"


밀러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이보게 길.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 허수아비라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만약 종교전쟁 때 피오 대주교라는 허수아비가 매번 최전선에 서 있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전쟁은 아마 몇 년은 더 길어졌을 테지."


길버트는 그 가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식의 가정은 종교 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며, 대륙에 발 붙인 사람들 중 종교전쟁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결국 모두가 아는 얘기였다.

다만 길버트는 그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대주교의 참전에는 밀러가 말한 것 말고도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빠른 종식을 원했다면, 애초에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면 될 일입니다. 더불어 교단에서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것은 다분히 역설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와 조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것은 파괴 그 자체입니다.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긴 덕에 지금은 종교전쟁에 대한 평가가 후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후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부정적인 의견을 묵살하는 세태에..."


설명을 이어가려던 길버트는 그러나 맞은 편에서 벙찐 얼굴로 경청하고 있는 밀러를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밀러는 얼마든지 더 얘기하라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고 있었다.

주요한 몇 가지 해석에 대해 더 얘기를 꺼내려던 길버트는 맥이 빠져버렸다.

그래서 길버트는 이런 시골 영지에서 꺼내기에는 너무 지난하고 정치적인 얘기 대신에 좀 더 현실적인 불만을 토로해 보기로 했다.


"허수아비의 필요성에 대해서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 허수아비가 굳이 저일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의식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 시킬 목적이라면 영감님이나 하멜 집사님 쪽이 더 나을 겁니다. 이 영지에서 두 분보다 인망이 두터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병사들도 그 편을 더 좋아할 겁니다."


밀러는 길버트가 하고 싶은 말을 금방 눈치챈 듯했다.


"글쎄. 뭐, 자네 말처럼 나와 하멜이 이 의식을 주도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네. 하지만 우리는 길 자네처럼 영웅이 아니잖나."


"영웅이라니요?"


길버트는 어리둥절함을 느끼며 하멜을 바라보았다. 하멜은 능청스럽게 얘기를 이었다.


"몰랐나? 이 영지에서 자네는 그런 식의 취급을 받고 있네. 몇 년 간 은거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될 때가 있지.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인간들은 대개 영웅담을 좋아하는 법이잖나. 위험한 상황에서는 더욱더 말일세. 요약하자면 병사들은 자네가 의식을 주도하는 것을 바라고 있네. 이 순박한 녀석들은 '몇 년 동안 듀라트 저택의 도서관에서 은거하던 세기의 현자가, 영지의 위기에 맞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어처구니 없는 얘기군요."


"글쎄 내가 보기에는 꽤 그럴듯한 영웅담일세."


길버트는 참지 못하고 조소했다.

길버트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영웅담이 되기 위해선 약간 복잡한 선제 조건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우선 그 영웅담의 주인공이 고작 자신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몰라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칼을 휘두르는 실력이란 고작해야 영지에서 전쟁 놀이를 일삼는 소년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 역시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다.

마지막으로 그 영웅이라는 작자가 사실 속으로는 언제나 자신의 서재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알려져선 안될 것이다.

그런 수 많은 조건을 온전히 충족해야만 그 영웅담은 그나마 후세에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길버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밀러가 달래는 듯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밀러는 길버트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전부 읽은 듯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네. 게다가 길 자네는 적응이 꽤 빠른 편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첫날 이후로 자네가 성벽 위로 올라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허수아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인정한다고 쳐도, 연설 때마다 들고 있어야 하는 이 무식하게 큰 검 정도는 바꿔주면 좋겠군요."


길버트가 푸념하듯 대꾸하자 밀러가 크게 웃었다.


"확실히 그 큰 검은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는구만. 그래, 그러고 보니 수잠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지. 늙으니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 분명 바보들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바보와 멍청이들은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는 것 말입니까."


"그래 그 말이었지. 수잠의 말대로라면 길 자네에겐 가장 작은 검을 쥐어주고 싶네만, 그 창 또한 몇 세기가 지나면 영웅담의 일부가 될 테니 적당히 감내하게나. 쓸모야 어찌됐든 사실 생김새는 꽤 그럴듯하잖나?"


누구나 알고 있는 수잠의 그 발언에 대해서도 길버트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해석을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살아간다는 말보다 살아낸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지금의 듀라트 영지에서는 지독하게 쓸모 없는 얘기가 분명했다.

길버트는 먼 훗날에 밀러와 자신이 살아 있다면, 그때 하멜 집사가 꽁꽁 숨겨 놓은 포도주 한 병을 따며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치르르--


숲 쪽에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 들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숲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벽 위에 발을 딛고 선 모든 인간들 또한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성벽과 마주 보고 있는 이름 없는 숲.

몇 달 전까지 초록의 잎사귀가 무성했던 숲은 그러나 지금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초목은 마치 하늘을 할퀴려고 안달 난 앙상한 손가락 같은 모습이었다. 숲의 바닥에는 아직 필 시기가 아닌 겨울 꽃과 낙엽들, 여름철에 말라버린 관목 따위가 엉켜 뒹굴고 있었고, 그것은 그 부근에만 온전히 한 계절이 지나가버린 듯한 묘한 풍경이었다.

모순이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것 같은 그 숲에서 불쑥 검은 점 몇 개가 튀어나왔다.


캭- 캭- 하는 소리를 내는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여치를 닮아있었다.

거의 바닥에 붙어있는 통통하고 마디마디가 주름진 배.

연신 좌우로 까닥이는 흉측한 머리와 주둥이. 그 주둥이엔 인간의 중지와 엄지가 맞닿은 모습의 작은 갈고리를 닮은 집게가 달려있다.

사마귀의 앞발과 비슷한 접혀 있는 앞 다리가 있었다. 앞 다리엔 갈퀴라는 말이 적당할, 톱의 이빨처럼 작고 날카로운 돌기들이 솟아 있다.

검은색의 등껍질 밑에는 매미와 잠자리의 날개를 섞은 것 같은 투명한 날개가 있었고, 앙상한 앞다리에 비하면 뒷다리는 훨씬 굵직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숲에서 하나 둘 계속해서 튀어 나오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벽 위에 있던 인간들은 그것들의 외양을 세세하게 살필 수는 없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것들은 고작해야 작은 카니쿨라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의 외양은 영지 시민들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마 그것들이 훨씬 더 흉측하게 생겼더라도 영지의 시민들은 그 사실에는 어떤 불만도 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 시커먼 것들의 목적이었다.



*



숲과 성벽 사이에서 검은 점들이 나타나자마자 가장 먼저 밀러가 도열한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베르미들이 일어났다! 창을 쥘 시간이다!"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밀러의 외침에는 모종의 힘이 담겨 있었다.

단순하게 성량만 놓고 보자면 청년들 쪽이 더 크게 소리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청년들의 목소리에는 밀러와 같은 권위가 깃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밀러의 목소리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여지껏 살아남은 자만이 낼 수 있는, 그런 권위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십인장들이 밀러를 따라 휘하의 병사들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명백히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위치와,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한편 길버트는 난간 앞에 쭉 늘어선 병사들과 한참 떨어진 성벽의 뒤 편에 서 있었다.

멀거니 떨어진 그곳에서 길버트는 창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분을 받고 있었다.

길버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영지민들은 농사와 궂은 일로 단련된 탓에 전부 거칠고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오랫동안 베르미들에게 시달린 그들의 눈빛은 잘 훈련된 제국군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도 않아 보였다.

길버트는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얼마 있지도 않았던 자신감마저 증발해버릴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창을 쥔 자신의 손은 밀러의 비유대로 물케꽃처럼 새하얬다. 영지민들에 비하자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손이었다.

그대로 성벽에서 뛰어내려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망상을 떠올리고 있던 길버트는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길버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은 서재에서 처음 성벽 위로 나왔던 날처럼 손을 벌벌 떨고 있지는 않았다. 적잖이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길버트는 바깥 광경에 집중하기로 마음먹고서 성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버트는 다른 영지민들과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숲에서 튀어나온 베르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무튼 숲에서 튀어나온 저 더러운 것들보다 적어도 자신 쪽이 더 인간적일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



맨 처음 숲에서 튀어나왔던 베르미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몇몇은 네 발을 쫙 펴고 바닥에 엎드렸고, 몇몇은 아예 배를 까뒤집고 거꾸로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배를 뒤집은 녀석들의 주름지고 통통한 갈색 배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베르미들은 숲의 초입부에서 그렇게 서로 장난치는 것처럼 한참을 뛰고 구르며 까불거리고 있었다.


문득 한 녀석이 베르미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든 베르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비정상적으로 덩치가 큰 그 녀석은 모든 베르들의 선두에서 바닥에 주둥이를 깊게 처박았다. 그러고선 투명한 날개를 양쪽으로 쫙 펼쳐 부르르 떨었다.

바닥에 주둥이를 처 박은 녀석은 그 상태로 지열을 느꼈고, 동시에 축축한 숲에서 젖어 있던 날개를 태양에 바짝 말렸다.

그 자세를 유지하던 덩치 큰 베르미는 이내 만족한 것인지 날개를 완전히 접었다. 덩치 큰 베르미는 숲을 향해 몸을 돌렸다. 녀석의 작고 볼품없는 주둥이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키에엑- 캭- 하고 덩치 큰 녀석이 소리를 내지르자 숲에서 베르미들이 몇 십, 몇 백 마리씩 무리 지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당연하다는 듯 덩치 큰 베르미 주위로 몰려들었다.

숲을 향해 소리 지르던 덩치 큰 베르미는 다음 순간 영지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덩치 큰 베르미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고, 다른 녀석들은 명령을 기다리듯 날개를 접고서 가만히 대기했다.


어느 순간 덩치 큰 녀석이 움직였다.

녀석은 팔과 다리를 구부린 채로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이고 웅크렸다.

숲 부근에 묘한 침묵에 내려 앉았다. 그 주변에선 베르미들이 숲에서 뛰쳐나올 때 들리는 공기를 가르는 희미한 소리, 또 베르미들의 몸체가 수풀에 스치는 쉭쉭-하는 소리만이 작고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거의 모든 베르미들이 웅크린 녀석을 주목하고 있었을 때, 불현듯 덩치 큰 녀석이 하늘을 바라보며 날개를 쫙- 펼쳤다.

녀석이 나는 듯이 도약했다.

덩치 큰 녀석이 뛰어오르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의 베르미들도 덩달아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작게 울려대던 치르르- 하는 소리가 곧 수십, 수백, 수천 배로 증폭되어 대지를 울렸다.

영지의 선량한 시민들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그것들의 도약 방향은 명백히 듀라트 영지를 향하고 있었다.



*



성벽 위의 십인장들은 거의 부하들을 잡아 먹을 것처럼 독촉해 대고 있었다.


"자 오늘도 빌어먹을 하루의 시작이다! 핸슨 개자식아! 그딴 식으로 창을 잡지 마! 글룽거! 성벽에 더 바짝 붙어! 네 돼지 같은 몸을 이용해서라도 틀어 막으란 말이다!"


물론 십인장은 핸슨에게 어떤 식으로 창을 잡는 것이 올바른지 알려주지 않았고, 글룽거는 '어차피 성벽의 난간이 자신의 가슴께에 있으므로 더 붙어봐야 의미가 없다'고 항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분노하고, 어설픈 농담을 억지로 건네고 있었다. 영지를 향해 다가오는 그것들에 대한 공포를 억누르자면 그런 짓이 필요했다.

병사들의 가장 뒤 편에서 길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길버트는 성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성벽을 향해 베르미 떼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숲의 토사물처럼 튀어나온 수십 만 마리의 베르미들은 마치 양피지에 커다란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빠르게 번져가며 땅을 물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그것은 장엄한 장면이었지만, 그것들의 돌진은 군대의 행렬과는 다른 종류의 장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베르미들의 진격에는 순서도, 질서도, 흥분도 없었다. 베르미들은 그저 무질서하게 제각각 뛰어오르며 착실하게 성벽과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질서한 장면은 질서에서 받는 장엄함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압도감을 주고 있었다.


길버트는 숲에서부터 몰려오는 베르미들의 모양새가 꼭 파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베르미들의 검고 딱딱한 외피는 햇빛이 가장 밝게 빛나는 시점과 맞물려 어지럽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모양새는 어두운 밤바다의 물결에 달빛이 반사되어 번뜩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꿈틀대는 베르미들의 몸통은 그 자체로 파도였고,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치륵치륵- 하는 날개 스치는 소리는 해안가의 무수히 많은 자갈들이 파도에 스러지는 소리였다.


가장 선두에 있던 베르미들이 이백 큐빗 정도에 이른 시점에서 병사들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딱딱해졌다. 병사들의 뒤에 서 있던 한 십인장은 겁에 질린 젊은 병사의 등을 거의 죽일 듯이 창으로 찔러 대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서 길버트는 계속해서 파도를 응시했다.

확실히 그것은 파도였다. 듀라트 영지를 향해 몰아치는, 까맣고 살의 가득한,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그런 빌어먹을 파도.


'그렇다면 이 영지는 방파제겠군.'


길버트는 그 생각에 더없이 우울해졌다. 저 빌어먹을 것들이 파도고, 영지가 방파제라면 아마 자신은 방파제의 수 많은 암석들 중 하나가 분명했다. 길버트는 있는 힘껏 창을 그러쥐었다. 동시에 정오가 되면 거의 매일 같이 하는 기도를 올렸다. 길버트는 오늘 안온한 오후를 맞이할 수 있길 기도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1 23.06.07 138 8 15쪽
15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5) +1 23.06.07 144 8 11쪽
14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4) +1 23.06.05 161 7 11쪽
13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3) 23.06.04 146 9 13쪽
12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2) 23.06.02 141 10 12쪽
11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1) +2 23.06.01 156 11 15쪽
10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0) 23.05.31 153 10 17쪽
9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9) 23.05.30 169 13 18쪽
8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8) 23.05.29 163 11 16쪽
7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7) 23.05.29 173 13 16쪽
6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6) +1 23.05.28 212 14 17쪽
»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5) +4 23.05.28 253 14 19쪽
4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4) +1 23.05.27 255 15 12쪽
3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3) 23.05.27 318 17 15쪽
2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2) +4 23.05.26 1,066 24 15쪽
1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2 23.05.26 1,855 33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