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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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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9.0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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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4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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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7)

DUMMY


"선생님. 저는 도무지 여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화났는가 하면 어느새 웃고 있고, 즐거운가 하면 어느새 다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조화로운 피오 신의 섭리가 오로지 여자들의 마음에만 부재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륙에서 가장 저명하신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그 복잡한 것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랑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온통 눈으로 덮인 대지를 한참 동안 감상하던 랑그는 잠시 후 다시 자신의 제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랑그는 단언하듯 말했다.


"스퀼라의 독."


-랑그와 제자의 대화 중 일부-


*


일 년에 네 번 찾아오는 만 중, 가장 뒤늦은 놈이 폴 영지의 상공에서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리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예컨대 평소라면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이나, 밀회를 즐기려는 연인들, 혹은 뒷골목의 다소 불량한 인간들이 아직 활개를 치고 다닐 시각이었다.

하지만 현재 폴 영지의 지상에선 그 중 어떤 부류의 인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불량배들이 유독 오늘만 선해졌다거나, 혹은 언제나 서로에게 열렬했던 연인들이 유독 이 날만 차갑게 식어버렸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다만 만의 빛으로 영지의 사위가 붉었다.

그것은 시민들이 밖으로 쏘다니지 않고 집에 틀어박힐 만한 충분한 이유였다.


만이 타오르는 날에 돌아다니는 인간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미신이자 요설이다.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물론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적어도 그 미신을 모르고 있는 인간은 없다.

이제는 어른이 된 인간들은 전부 어린 시절 이불 맡에서 그 신비한 달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잠들었고, 또 어린 아이들은 지금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비극과 참상이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머리가 아무리 굵어지고, 몸이 아무리 커져도 무의식을 제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대륙의 인간들이 만에 대해 께름칙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영지의 시민들이 붉은 달에 한껏 으스스함과 스산함을 느끼고 있었을 때, 지하의 두 사람 역시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은 영지의 시민들처럼 만에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곳은 지하였고, 만의 빛은 조금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불안함을 느낀 이유는 하늘이 아닌 지하에 있었다.

토비와 루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맞은 편에는 한 무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물끄러미 둘을 마주보는 무스는 불길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루나와 토비는 조심스레 에이튜를 관찰했다.

에이튜는 지독하게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무스였다.

짧고 뻣뻣한 털에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있었고, 그 부위의 털이 엉켜있었다.

주둥이 역시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다른 무스보다 거의 두 배는 커 보이는 앞니는 손질한지 한참이 지난 듯 끝이 우둘투둘했다. 마지막으로 에이튜의 세모난 귀는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고 가장자리가 조금 찢겨 있었다.

전체적으로 무참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토비와 루나 그리고 에이튜 사이에 긴장감이 만연한 가운데, 이번에도 리버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리버는 토비와 루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 이 쪽은 에이튜에요. 보시다시피 무스죠. 그리고..."


토비와 루나를 소개하려던 리버는 말을 멈췄다. 리버는 그제서야 에이튜의 처참한 외관을 확인했다. 그것이 리버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리버는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밤을 떠올렸다. 지금 에이튜는 그때와 꼭 닮아 있었다. 리버가 말을 멈추자 에이튜 쪽에서 입을 열었다. 훈육하는 듯한 엄한 어조였다.


"긴 말 않겠다 리버.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 테지."


에이튜는 그 작고 붉은 눈으로 세 사람을 고루 돌아보았다. 마치 멋대로 집에 쳐들어온 불청객을 보는 것 같은 눈초리였다. 잠시 네 사람은 멀거니 서로 눈치를 주고 받았다.

갑자기 토비가 리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리버가 돌아보자 토비가 속삭이듯 말했다.


"어색해 죽겠군. 듣자 하니 너와 저 무스는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말 좀 잘 해봐라."


토비는 리버가 어서 상황을 해결해주길 바랐지만, 리버는 토비의 기대를 가뿐히 배반했다. 리버는 오랫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한번 더 옆구리를 찌를까 고민하던 토비는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가볍게 행동하기엔 리버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다. 속으로 몇 마디 욕설을 내뱉은 토비는 리버가 나설 때까지 하수도 풍경이나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참 뒤 토비가 썩 볼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루나가 정적을 배제하고 나섰다. 그녀는 리버와 에이튜를 번갈아 본 뒤에 단검을 들었다.


"시답잖은 짓은 그만해. 너희 둘 사이에 무슨 해묵은 앙금이 있는지, 아니면 감동적인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관심없어. 간략하게 말하지. 에이튜. 네가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는 짐작이 가. 그래, 지하는 무스들의 영역이니 우리는 불청객이겠지. 하지만 이쪽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단 말이지. 그러니 선택해. 네가 사라지면 우리는 조용히 지하 수로를 빠져나갈 거야. 하지만 방해한다면 베고 가겠어."


에이튜는 조소했고 리버는 경악했다. 리버는 어처구니 없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이 멍청아! 여기서 에이튜와 싸우겠다는 말이야?"


"안될 것도 없어. 우린 지하를 탐사하러 온 게 아냐. 네가 저 무스와 어울리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는 당장 이 영지를 벗어나야겠어."


루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에이튜가 말했다.


"싸우겠다면 상대해주지 못할 것은 없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이 주변엔 내 가족들이 많거든. 고깃덩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무기를 내리는 편이 나아."


"그럼 길을 비켜. 나는 갈 길이 멀고 네게 볼 일은 없으니까."


"잠깐! 내가 말할게. 내가 말할 테니 루나 넌 일단 뒤로 물러나 있어."


리버는 반강제적으로 루나를 뒤로 떠밀었다. 리버는 의도적으로 루나와 에이튜 사이에 서서 두 사람의 시선을 차단했다. 소란이 약간이나마 진정됐다.

한숨 돌리고 나서 리버는 두 사람에게 에이튜와 자신의 관계를 전부 설명하는 것은 어떨지 고민했다.

처음 에이튜가 건넸던 경고는 아마 두 사람에겐 일종의 선전포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리버는 그것이 사실 투정에 가까운 말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전부 설명하면 두 사람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고민하던 리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나의 말처럼 한가하게 옛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리버는 자신과 에이튜의 관계를 타인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얘기를 하다 보면 이제는 완전히 문드러지고 풍화된 과거를 다시 현실의 뭍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리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리버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즉 근거 없는 설득을 시도하기로 했다. 물론 설득의 대상은 에이튜였다. 아무래도 두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리버는 에이튜를 바라보았다. 늙은 무스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부에서 그리움 같은 감정이 급격히 부상했다. 리버는 치밀어 오르려는 여러 감정들을 억지로 수면 아래로 밀어 넣었다. 리버는 무스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튜."


에이튜는 허리를 앞으로 굽히고 있었고, 그 탓에 에이튜의 머리는 리버의 가슴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에이튜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고 리버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 잘 보이지 않았는지 작대기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작대기 끝에 달린 램프가 대롱거리며 흔들렸다. 에이튜는 그 상태로 리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리버는 약간 초조해졌다. 무심결에 에이튜를 부르긴 했지만 다음에 꺼낼 말을 생각해 놓지 않았다. 리버는 다소 어색한 투로 운을 뗐다.


"그게... 그러니까... 음.. 아! 맞아요. 우리 참 오랜만이죠?"


이번에는 대답이 나왔다. 에이튜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주 오랜만이구나 리버. 너는 몰라볼 정도로 몸집이 커졌구나."


처음과 달리 에이튜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조금 온화하게, 얼핏 듣기엔 자상할 정도로 누그러져 있었다. 리버는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요즘 지하 경기는 어때요?"


말을 뱉고 나서 리버는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그것은 별다를 것도 없는 흔한 인사치레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심지어 리버는 에이튜의 몸 상태를 본 직후였다. 그의 제멋대로 자란 수염. 정돈되지 않은 털과 앞니. 무참하게 찢긴 귀와 몸 곳곳에 묻은 피.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했다.

몇 년 전이었다면, 이런 식의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년 전이었다면 에이튜를 보자마자 지하의 상황을 정확하게 유추해 냈을 테고, 그럼 지하 경기가 어쩌구 하는 멍청한 질문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영지의 인간들이 잘 살고 있으니 우리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리고 몇 년 전이었다면, 에이튜는 저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버가 속으로 자책하고 있었을 때 토비가 재차 옆구리를 찔러왔다. 토비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리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버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등 뒤에서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궁 무스들은 영지의 인간들이 버린 것들을 주워다 쓰고 있어. 시민들이 부유하다면 당연히 이곳도 풍족하다는 뜻이겠지."


"음- 과연. 그런 의미였군."


토비는 납득했다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홱 고개를 들어 에이튜를 바라보았다. 토비는 약간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잠깐만. 혹시 너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그, 뭐랄까... 내 말은..."


"무례가 아니냐는 말이군."


토비가 민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에이튜가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무례랄 것도 없겠지. 그보다 대화가 엇나가는군. 리버. 너는 왜 이곳에 다시 내려왔지?"


리버는 헛기침을 하며 토비를 밀어냈다.


"으음 그게, 조금... 아니 상당히 복잡한 사정이 생겼어요. 전부 설명하자면 너무 길고... 그래서 말인데요 에이튜.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우릴 좀 도와주면 안될까요?"


"어떤 도움을 말하는 거지?"


"우린 이 지하수로를 통해 영지 밖으로 나가고 싶어요. 최대한 빨리 말이에요. 하지만 이 수로는 어두운데다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수로 밖까지만 안내해주면 안될까요?"


토비와 루나는 그것이 가당찮은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험악했던 분위기를 생각해 봤을 때 에이튜가 부탁을 들어줄 리 없어 보였다. 그러나 에이튜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튜는 붉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리버를 바라보았다. 얼마간 말없이 있던 에이튜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투로 말했다.


"이제 완연히 인간이 되었구나."


에이튜는 자상한 눈빛이었지만 리버는 그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리버는 시선을 회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뭐.. 인간은 어떤 것에도 빨리 적응하니까요. 그렇지만 당신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니에요. 그냥, 먹고 살기 바빴던 것 뿐이죠."


"그래 인간들은 그렇지. 언제나 가장 먼저 변화하곤 하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에이튜는 잠깐 리버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토비와 루나를 바라보던 에이튜는 다시 리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저 두 사람은 네 가족이냐?"


에이튜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비가 헛바람을 내뱉었다. 토비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듣겠군. 이봐, 이 두 녀석은 인간이고 나는 아돌프잖냐."


그것은 지당한 지적이었다. 토비의 말처럼 그들이 실제 가족이었다면 퍽이나 괴상한 조합이었을 것이다. 리버는 토비의 오해를 알아채고 웃었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무스들이 말하는 가족은 우리들 식으로 말하자면 동료에 가까운 개념이죠. 우리들도 함께 살거나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동료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거였냐."


토비의 오해를 정정한 뒤 리버는 에이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대답은요? 우리를 도와줄 수 있어요?"


에이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튜가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였다. 에이튜는 지하수로의 어둠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뒤의 세 사람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따라와라."


**


"그래서 결국 전부 놓쳤다는 말입니까?"


폴 남작의 질문에 푸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푸조는 세 사람을 놓쳤고, 여태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남작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방금 남작이 던진 질문은 질문이 아닌 추궁이나 책망에 가까웠다.

푸조는 고개를 들어 폴 남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작의 표정에서는 아주 미세한 즐거움 같은 것이 엿보였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푸조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평소였다면 남작은 결코 저런 식으로 자신을 능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폴 남작은 누구나 인정하는 범부였고 푸조는 마법사였다. 아무리 일천한 마법사라 해도 시골 남작에게 푸대접을 받는 일은 없다.

속이 끓었지만 푸조는 역정을 내지는 않았다.

폴 남작이 지금 저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작의 말처럼 푸조는 임무에 실패했다. 푸조는 그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가서는 고작해야 일반인 세 사람을 놓쳐버렸다. 내키지 않았지만 푸조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인정했다.


"당신 말대로요. 전부 놓쳤소."


푸조는 부연했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소. 이 좁아터진 영지에서, 그들이 도망가봐야 얼마나 멀리 가겠소? 게다가 마녀사냥 같은 것은 언제든 있는 싱거운 일이잖소. 뭘 그리 채근하고 난리요?"


그 뻔뻔한 대답에 이번에는 폴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폴 남작은 쟁쟁한 권력자들과 정치적 투쟁을 벌일 만큼의 야심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남작은 푸조가 의도적으로 붙였음이 분명한 좁아터졌다는 형용사가 비위에 거슬렸다.

문득 남작은 눈 앞에 있는 늙은 마법사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고민하던 남작은 이내 그렇게 해서 안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조의 말처럼 마녀사냥은 싱거운 사건이다. 하지만 오늘 벌였던 마녀사냥은 특별했다. 그것은 황제의 칙령이었다. 정확히는 자드 공작의 명이었겠지만, 이 경우 그런 세부적인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황제의 칙령을 수행하던 도중, 푸조가 치안대원들 앞에서 보기 좋게 기절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남작은 다분히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것이 싱겁고 하찮은 일이었다면 굳이 칙령으로 내려오지는 않았겠지요. 더군다나 칙령서에는 경험 많은 기사나 마법사를 대동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중요한 임무였다는 방증이 아니겠습니까?"


푸조의 인상이 구겨졌다. 애써 뻔뻔한 척 굴고 있었지만 남작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런 시골 영지에 칙령이 직접 하달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더없이 중요한 임무였을 것이다.

푸조가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하고 있자 남작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단 한번 만족한 후에 남작은 곧 눈 앞의 마법사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남작은 자신이 늙은 마법사를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작은 그쯤에서 마법사의 남은 체면 정도는 지켜주기로 했다. 남작은 작위적인 한숨을 내쉰 뒤에, 마치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한다는 투로 말했다.


"됐습니다. 이미 실패한 이상 어쩔 수 없겠지요. 비록 칙령이었지만 당신 말처럼 그 내용은 흔하디 흔한 마녀사냥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콜텐에서도 그리 심하게 책망하지는..."


남작이 도중에 말을 멈췄다. 남작은 푸조를 바라보았다. 푸조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남작은 흠칫했다. 남작은 미쳐버린 마법사들에 관한 소문 몇 개를 떠올렸다. 남작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했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한 투로 푸조의 정신 상태를 확인했다.


"푸조 마법사? 괜찮습니까?"


"...이건 마녀사냥이 아니오. 그녀 역시 마녀 따위가 아니고."


"저..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녀가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칙령이 내려왔겠습니까. 게다가 현장에 있던 치안대원들의 보고에 따르자면, 그녀는 스스로 마녀임을 자백했다고 하던데요."


푸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조는 여태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사나운 얼굴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푸조의 반응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남작이 밖에 있던 근위병에게 소리치려는 순간, 푸조가 몸을 홱 돌렸다. 푸조는 남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문을 향해 걸었다. 남작은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을 채 숨기지도 못한 채 물었다.


"어..어디 가십니까? 아직 논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콜텐의 마법사 길드로 가야겠소."


"콜텐이라니요? 수도로 간단 말입니까? 이보십쇼 푸조 마법사.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처음에 당신이 말했잖습니까. 이건 기껏해야 마녀사냥입니다. 책임은 제가 질 테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오."


푸조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푸조는 약간 한심한 눈빛으로 남작을 쳐다본 뒤 이어 말했다.


"전부 설명하자면 지난한 일이 될 테고, 설령 전부 설명한다 해도 당신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거요."


남작은 그 무례한 발언에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푸조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푸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남작을 바라보다가 꾸벅 목례했다. 푸조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으니 지금 말하겠소. 그동안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지원해준 점에 감사하오. 영지가 번영하길 바라오. 그럼 잘 지내시오.


그 말을 끝으로 푸조는 남작의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남작은 그토록 고고하게 굴었던 마법사의 진심 어린 사의에 당황한 나머지 적당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었다. 남작은 집무실을 나서는 푸조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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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7) 23.06.14 132 7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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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3) 23.06.11 142 6 12쪽
17 기우뚱하게 바라보기. (2) 23.06.10 140 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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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5) +1 23.06.07 153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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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3) 23.06.04 154 9 14쪽
12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2) 23.06.02 150 10 13쪽
11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1) +2 23.06.01 165 1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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