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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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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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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17쪽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0)

DUMMY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잡화점에서 리버는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뱃살이 신경 쓰였다거나, 혹은 있지도 않았던 자기애가 갑자기 무럭무럭 솟아난 것은 아니었다.

리버는 방금 전 일어난 상황을 되새겼다. 상자에서 튀어나온 빛무리는 가게 안을 어지럽히다가 마지막엔 분명 자신의 몸으로 빨려 들듯 들어왔었다. 몸의 변화를 확인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몸을 더듬던 리버는 이내 손을 멈췄다.

당연히 어제까지 나와있던 뱃살이 쑥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려하던 일이, 그러니까 눈이 하나 더 생기거나 등에 날개가 솟는 등의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리버는 멀뚱히 가게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는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놓쳐버린 상자가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리버는 두려움과 함께 모종의 기대감을 품고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야 당연하다. 다만 기대감을 동시에 느낀 이유는 리버의 직업과 연관이 있었다.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고대인들이 남겨 놓은 아티팩트는 아직도 대륙 곳곳에 엄연히 존재하며, 리버의 가게에도 몇 번 그런 물건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따라서 리버는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상자가 일종의 아티팩트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었다.


리버는 상자를 가지고 카운터로 돌아와 앉았다.

리버는 상자를 꼼꼼히 관찰했다. 자신의 정신 쪽에 지대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평범한 상자는 아니었다.

아무튼 평범한 상자란 제 멋대로 흔들리거나 그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거나 하지는 않는 법이다. 토비가 주고 간 상자는 비범한 상자가 분명했다.

잠시 후 리버는 상자를 내려놓았다. 한참 동안 관찰했음에도 리버는 상자에서 어떤 특기할만한 사항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리버는 스스로의 감식안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관찰은 일종의 요식행위였을 뿐이다. 애초에 자신은 마법사가 아니었고, 때문에 상자가 실제로 아티팩트라 하더라도 알아볼 방도는 없었다.


"뭐, 내일 푸조씨에게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리버는 자신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올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더불어 상인이라는 직업은 무엇보다 실용적인 생각에 몰두해야 하는 직업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실용적인 자세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간단한 일이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라면, 그냥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 그 편이 더 효율적이다.

고민 끝에 리버는 방금 전 일어났던 그 해괴한 현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상인으로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리버는 탁자 밑에서 값비싼 천을 꺼내 상자를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감정을 맡기자면 아무래도 겉모습이 그럴듯해 보이는 편이 좋다.

매듭의 끝 마무리를 짓던 시점에 리버는 불현듯 푸조를 만나겠다는 계획이 생각보다 지난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일반적인 시민이 마법사를 만나는 일은 대개 어렵다. 행정적으로 보자면 마법사들은 귀족 계급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 실력에 따라 어떤 작위에 준하는지 나뉘기는 하지만, 아무리 일천한 마법사라도 남작의 작위에 준하는 권력 정도는 가지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직위를 받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보통 마법사들은 자산이 넉넉한 귀족들의 식객으로 들어가는 것을 더 선호하며, 폴 저택의 푸조 역시 그런 식으로 식객에 머무르며 연구에 몰두하는 마법사였다.


리버가 알기로 푸조에게 공식적인 작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작위가 없다는 것에 그리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당장 가지고 있는 권력과 언제든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사실 어떤 차이점도 없을 테니까.

뭐가 됐든 푸조는 일개 상인에 불과한 리버의 요구를 대번에 거절해버릴 수 있다. 감정을 맡기기는 커녕 문전박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리버는 그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무릇 마법사라는 인간들은 전부 호기심에 미쳐있게 마련이고, 푸조로 말하자면 누가 뭐래도 명백한 마법사였다.

만나기만 한다면, 상자를 보여주며 이것이 고대의 아티팩트일 수도 있다는 한마디로 충분할 것이다.

거기에 비밀스러운 표정까지 곁들인다면, 오히려 푸조 쪽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리버가 염려하는 일이란 오히려 그 뒤의 일이었다. 리버는 상자가 실제로 아티팩트임에도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 책정될지도 모를 경우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리버는 곧 그 고민도 집어 치워버렸다.

상인이라는 직업의 한계는 명확했고 리버는 그 사실을 겸허히 인정했다.

대신 리버는 해묵은 격언을 위안 삼기로 했다.

그것은 한 분야의 달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 적어도 중간쯤은 될 수 있다는 격언이었다.

예컨대 판매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상인은 물건을 구매할 때 지나칠 정도의 바가지를 당하지는 않는 법이다.


리버는 낙천적인 상상을 하며 포장을 끝냈다. 잠시 리버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게 내부는 기묘할 정도로 잠잠했다.

정면의 유리창 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토비가 나갔을 때보다 훨씬 붉어져 있었다.

그제서야 리버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버는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뒷골목은 평소와 달리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스산한 기운이 골목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가게를 닫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리버는 문 앞에 서서 양 팔을 쑥 들어 올렸다. 잡화점 간판 바로 밑에 둘둘 말려 있던 싸구려 차양막이 손에 잡혔다. 리버는 차양막을 풀었다.


마감 작업에 한창 열을 올리던 리버는 문득 자신의 다리 쪽에 느껴지는 감각에 흠칫 놀라며 시선을 내렸다.

바닥을 쳐다보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카니쿨라 한 마리가 있었다.

카니쿨라는 리버의 무릎 부근에서 살갑게 얼굴을 부비며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등뼈와 긴 주둥이는 여느 카니쿨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나칠 만큼 갈비뼈가 앙상한 녀석이었다.

리버는 무릎을 구부리고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카니쿨라는 목에 인식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기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뒷골목이나 시장 구석에서 홀로 살아가는 녀석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버는 시험 삼아 카니쿨라에게 명령해 보았다.


"앉아."


리버의 다리에 얼굴을 부벼대던 카니쿨라는 리버의 명령에 곧장 행동을 멈췄다.

카니쿨라는 뒷다리를 접어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이어서 혀를 쭉 빼고 헥헥대며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카니쿨라를 기르는 주인은 없어 보였지만 녀석은 인간들의 도시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배를 곪지 않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종적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리버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리버의 손에는 어포(魚脯) 몇 개가 들려 있었다. 후각이 예민한 카니쿨라가 어포의 냄새를 맡았는지 곧바로 일어나려 했다. 리버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짐짓 엄하게 명령했다.


"기다려."


인간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겠지만 카니쿨라는 역시 뒷골목의 생리에 대해서는 더없이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녀석이 얼른 다시 바닥에 앉았다. 어포의 냄새가 어지간히 자극적이었는지 카니쿨라의 긴 주둥이 양 옆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카니쿨라는 리버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겠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곧 리버는 어포를 전부 바닥에 뿌렸다.


"잘했어. 먹어."


카니쿨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코를 박았다. 카니쿨라는 곧바로 어포 몇 개를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급한 허기를 해결한 뒤에 카니쿨라는 갑자기 리버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눈을 위로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버의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남은 어포를 입에 물고 살금살금 뒷걸음질쳤다. 아마 다음 날 굶주릴 것을 미리 대비하려는 것 같았다.

조금씩 물러나던 카니쿨라는 마침내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리버는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불현듯 리버는 야생의 카니쿨라와 도심지의 카니쿨라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자유롭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야생의 삶과, 굶어 죽을 일이야 없겠지만 그 대가로 인간에게 끊임없이 재롱을 부려야 하는 도시의 삶.

꽤 오랫동안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리버는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인지 결론 내릴 수 없었다.

고개를 한 번 내저은 리버는 다시 처음의 목적을 상기해냈다.

리버는 차양막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이미 시간을 꽤 지체해버렸고 내일은 평소보다 바쁜 하루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서둘러 가게를 닫은 뒤, 창고에 있는 미지근한 맥주라도 한 잔 걸치고서 푹 자는 게 좋을 것이다. 아주 근사하고 실용적인 계획이었다.


잠시 뒤에 싸구려지만 두꺼운 차양막이 리버의 가게를 완전히 덮었다. 그 덕에 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리버는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하지만 가게 안 쪽으로 한 발자국 밀어 넣은 그 순간, 리버는 알 수 없는 섬찟한 기분을 느끼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가게와 바깥의 경계에 선 리버는 골목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으슥한 뒷골목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가게 주변은 평소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리버는 토비를 살짝 원망했다. 그야 만이 타오르는 날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미신일 뿐이며, 따라서 헤어질 때 토비가 건넨 말은 만의 날에 주고받는 인사말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얘기만 듣지 않았다면 이런 바보 같은 불안감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그 양반은 괜한 소리를 해 가지고선..."


다시 가게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 리버의 시선에 한 형체가 포착됐다. 리버는 다시 우뚝 멈췄다. 리버는 그 형체를 관찰했다. 조금 전 골목을 훑어봤을 때는 발견할 수 없었던 형체였다.

리버는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떴다. 곧 리버는 그 형체가 작은 인간 소녀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소녀는 고작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리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리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그녀는 자신보다 약간 키가 작아 보였다. 그때 아무말없이 서 있던 소녀의 시선과 리버의 시선이 불쑥 얽혀 들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녀 쪽에서 불쑥 리버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리버는 약간 움찔거렸다.

소녀는 점점 리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리버는 상인다운 눈썰미로 재빨리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까만 머리와 까만 눈. 여행자들이 주로 입는 널널한 후드는 그녀가 입기엔 지나치게 커 보였다.

후드 아래에는 뱀 같은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래 폭이 컸을 그 원피스는 긴 천으로 졸라 맨 탓에 허리 부분만 잘록하게 들어가 있었다.


짧은 관찰을 끝마친 리버는 더욱 의문스러워졌다. 물론 한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복장이라는 점이 가장 먼저 의문을 자아냈다.

하지만 사실 리버는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세상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옷을 입은 사람이야 넘칠 테고, 또 수도 콜텐에서는 지금 그녀의 차림과 비슷한 데콜테 드레스와 코르셋이 유행하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리버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녀가 맨 다리를 허벅지까지 노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심지에서 저렇게 다리를 많이 드러내는 것은 어지간한 술집 여자들도 꺼려하는 일이다.


'여행자?'


그것은 당연한 추측이었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것들은 전부 여행자들이 쓸 법한 배낭이나 장비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리버는 그 가설을 파기했다.

여행자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장비와 겉옷이야 여행자의 것이지만 그녀가 후드 밑에 입은 것들은 도저히 여행자의 복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녀의 피부는 햇빛을 거의 받지 못한 것처럼 하얬다. 그 흔한 생채기 하나 없는 깨끗하고 맨들거리는 피부였다.

여행자라면 그럴 리가 없다. 모름지기 여행자라면 대개 태양에 그을린 거친 피부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보자면, 그녀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외양을 하고 있었다.


리버가 고민에 빠진 순간에도 소녀는 리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리버에게서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 시점까지 리버는 소녀의 겉모습에서 어떤 것도 유추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마지막에 리버는 그녀가 어지간히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가씨거나, 혹은 정신이 약간 나가버린 여자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이 타오르는 날 오후에 , 심지어 으슥한 뒷골목에서 저런 차림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때 소녀 쪽에서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딛었다. 소녀는 리버의 바로 앞에 섰다. 리버는 시릴 정도로 하얀 허벅지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찾고 있는 거라도 있어?"


리버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차림은 괴상했지만 리버는 그녀가 손님일 가능성에 대해서 아예 배제하지는 않았다. 손님의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고 해서 구매력까지 없다고 유추하는 것은 상인으로써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리버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점점 더 리버에게 바짝 다가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의 거리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다.

소녀는 불쑥 리버의 얼굴에 옆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리버가 그 몸짓에 적잖이 부담감을 느낄 시점에, 소녀 쪽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들어가. ...말고"


소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고 있던 탓에 처음에 리버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리버는 어리둥절한 투로 되물었다.


"미안해 제대로 못 들었어. 방금 뭐라고 했지?"


리버의 말에 소녀는 리버의 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만이 내뿜는 붉은 빛을 등지고 있었고, 때문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은 일견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음산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멍한 기분으로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던 리버는 어느 순간 소녀가 자신의 뒤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틈에 뒤 쪽으로 이동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리버의 뒤에서 리버를 덥석 껴안았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리버의 목에 감겼다. 리버가 당황하고 있자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듣길 바란다는 듯 처음보다 훨씬 선명하고 높은 목소리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허튼 짓 할 생각은 하지 말고."


순간 리버는 혹시 그녀가 상대방이 해야 할 말과,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끔찍하게 착각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억측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무튼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방금 소녀가 꺼낸 말은 뒷골목에서 처음 만난 잡화점 주인에게 꺼낼 말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리버는 소녀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 쪽임을 깨달았다.

목 부근에 서늘한 감촉을 느낀 리버는 서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깔았다.

자신의 목에는 소녀의 창백한 팔과 손이 둘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창백한 손에는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모를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물론 쥐고 있는 선에서 그쳤더라면 리버는 그 사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리버는 타인의 취미에 꽤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리버는 늦은 오후에, 또 으슥한 골목길에서 단검을 감상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해줄 만한 아량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만의 빛을 받아 붉게 물든, 그리고 동시에 지나치게 예리한 단검의 끝은 현재 자신의 목 앞에 겨누어져 있었다.

그 사실은 취미로 치부해버리기엔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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