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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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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8,691

작성
23.06.0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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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1쪽

바보와 멍청이는 언제나 큰 쪽을 선호한다. (14)

DUMMY

"이봐 리버!"


카운터에서 멀뚱하게 서 있던 리버는 토비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몸을 한번 움찔거렸다.

토비가 다시 외쳤다.


"그 상자 그냥 줘 버려라! 루나라고 했나?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 상자가 정말 네 것이었다면... 그래, 기꺼이 사과하지. 하지만 과정이 어찌 됐든 너도 상자를 돌려 받기만 하면 그 외엔 아무런 불만이 없겠지? 그럼 가져가라."


모로 보나 명쾌한 해결책이었다.

리버는 그 해결책에 감탄하며 얼른 상자를 루나에게 건넸다.

토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리버 역시 이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이제 끝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버의 손에 들린 상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루나는 상자를 홱 쳐버렸다.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는 것과 비슷한 손놀림이었다.

손에서 떨어진 상자가 탁-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토비와 리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멍청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표정을 짓고 있었을 때 루나가 불쾌하다는 투로 말했다.


"처음엔 필요했지만 이젠 필요 없어. 저건 이제 빈 껍데기니까."


원만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토비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봐 인간 여자! 루나라고 했나?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그것을 훔친 모양이 돼버렸다는 걸 인정했기에 여태껏 보인 네 무례한 태도도 전부 눈감아주고 있었단 말이다. 만약 끝까지 해 볼 생각이라면 나도 더 이상은..."


"너희들은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해버렸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어."


루나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어서 즉시 대꾸하려던 토비는 어떤 사실을 떠올리곤 입을 다물었다.

토비는 질색하곤 하지만 어쨌든 아돌프들 사이에서도 토론은 존재했다.

그리고 토론에선 보통 침착한 쪽의 말이 옳은 경우가 많다.

토비가 보기에 루나는 시종일관 무덤덤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자신은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적잖이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토비는 이어질 루나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정말로 만약의 경우지만, 어쩌면 루나의 말대로 자신이 뭔가 턱없는 바보짓을 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더불어 토비는 언제든 루나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판단은 루나의 말을 듣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토비는 다시 팔짱을 꼈고, 곧 토비와 루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때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리버가 황급히 토비를 대신해서 질문했다.


"무슨 얘기인지 설명해줘.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리버라고 했나?"


"맞아."


"너와 저 털북숭이가 이 물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건 알겠어. 그러니 더 추궁하지 않도록 하지. 좋아, 그럼 잘 생각해봐 저 상자를 입수한 후에 너에게 아마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거야."


굳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리버는 곧장 대답했다.


"방금 전이랑 똑같은 일이 있었어. 방금처럼 빛무리가 튀어 나와서는... 마지막에는 내 몸 속으로 빨려 드는 것처럼 들어왔어."


그 당시를 생각하며 리버는 자신의 가슴 부근을 쓰다듬었다.

루나는 인상을 쓰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세대의 전이는 그런 방식이군.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리버는 루나의 화법이 답답했다.

그녀는 대명사와 고유 명사를 너무 남발하고 있었다.

리버는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봤을 때, 가게에 있는 세 사람 중 오직 루나만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리버는 다시 질문했다.


"이 상자는 혹시 아티팩트야?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그 단검처럼?"


대답 대신 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상자를 응시했다.

그 상태로 루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리버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질문을 던진 것인지 의아해졌다.

리버는 자신의 의구심을 해결해주길 바라며 토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비는 여전히 가게 문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귀를 쫑긋 세운 채로, 꼬리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어 대고 있었다.

아주 심각하고, 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토비의 모습을 관찰한 후에 리버는 자신이 자문할 상대를 한참 잘못 골랐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했다.

하긴 토비는 아돌프다.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결국 리버는 다시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루나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꽤 긴 정적이 흘렀다.

더는 침묵을 참을 수 없었던 리버는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반복하려 입을 열었다.

그때 루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루나는 가게 안을 한번 훑어본 뒤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선 리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연민이나 동정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오랜 침묵을 지켰던 루나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너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게 될 거야."


"내가 죽게 될 거라고?"


리버는 어이없는 심정으로 루나를 쳐다봤다. 사망 선고를 받은 인간이 보일만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반면 루나는 덤덤했다. 사망 선고를 내린 인간치고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무관심함이었다.

루나가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거야. 아마 아주 처참하고, 시시한 죽음이 되겠지."


물론 모든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시간이라는 지독하게 느릿한 살인마에게 쫒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리버는 눈 앞의 소녀가 그런 현학적인 장난을 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토비가 더 이상 답답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 쳤다.


"젠장할,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군. 리버가 왜 죽게 된다는 건지 설명을 해라! 만약 네가 죽이겠다는 말이라면 그전에 네가 나에게 죽게 될 거다!"


토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리버는 비슷한 내용을, 그러나 훨씬 차분하게 전달했다.


"제대로 설명해줘. 네가 죽이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내가 죽는다는 거지?"


루나는 왠지 모를 동정이 담긴 눈빛으로 리버를 쳐다보았다.


"돼지를 설득하고 싶지는 않아."


"응?"


"도축 당할 돼지에게 그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득하고 싶지는 않아. 사람에게 네 살점이 얼마나 맛있고, 영양학적으로 얼마나 훌륭한지 설득한 뒤에, 돼지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도축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지 않아. 의미도 없는 행동이고, 또 그건 일종의 기만에 가까울 테니까."


리버는 루나의 말하는 방식이 강단에 선 학자들의 강연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타인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설명하는 기막힌 재주가 있었다는 말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리버는 그럼에도 그 시점에서 토비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토비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고, 또 여전히 세계의 심원한 진리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토비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한 리버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다.

리버는 다시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확실하게 이해했다곤 못하겠지만... 루나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렴풋이는 알겠어. 하지만 만약 돼지와 대화가 통했다면 나는 설득했을 거야. 가능하다면 그 돼지에게 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줬을 테고. 어쩌면 직접 울타리에서 꺼내 숲에 풀어줬을지도 모르지."


루나는 깊게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김 새는군. 이봐 털북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토비는 이내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깨닫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설마 날 말하는 거냐?"


"그래. 난 이 녀석을 죽이지 않기로 했어. 어차피 금방 죽을 녀석에게 편안한 죽음을 베풀어 주고 싶지 않으니까. 리버 너는 네 행동을 후회하면서 죽어가도록 해. 그럼 이제 여기선 더 볼일이 없어졌어. 난 지금부터 이 더러운 가게에서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도중에 날 방해하지 마. 애초에 잘못은 너희 둘에게 있었으니 날 붙잡고 있을 이유도 없겠지."


"끄응..."


토비는 신음을 흘렸다.

사실 처음에 전투를 대비해 잔뜩 고양 시켜두었던 감정은 어느 순간 전부 차게 식어있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억지로 다시 전의를 끌어올릴 수야 있다.

그러나 확실히 루나의 말대로 잘못한 것은 자신 쪽이었으므로 전투를 치를 만한 대의도 없었다.

오히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루나의 말은 신사적인 태도에 가까웠다.

토비는 결국 루나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토비에겐 아직 루나를 여기서 내보낼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네 말대로 내 잘못이니 가는 길을 방해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 전에 내 몸에 걸어둔 이 몹쓸..."


현재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 상태를 표현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토비는 우물쭈물거렸다.

루나는 마치 토비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저주."


"그래 저주! 이 저주부터 풀고... 아니, 잠깐만. 저주라고?"


토비의 질문에 루나는 리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네 친구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는 법이 없군."


토비는 격분했다.

물론 자신에게 악담을 쏟아 낸 루나에게 격분한 것은 아니었다.

토비의 분노 대부분은 루나의 옆에서 공감한다는 듯이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리버에게 향하고 있었다.

토비는 왠지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외쳤다.


"아무튼 내 몸에 걸린 이 저주부터 풀어라 그게 먼저다!"


"그건 안되겠는데."


"뭐야?"


"네 몸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마음을 바꿔 먹고 날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러니 저주를 푸는 건 내가 가게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난 뒤야."


리버가 듣기에 그건 루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의 협상 같았다.

리버는 토비가 곧장 제안을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간 토비의 표정을 관찰한 리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아챘다.

토비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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