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시 미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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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반도체 전쟁을 기다림
20. 다시 미국으로
1959년 설을 쇠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원래 엄마, 아빠랑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여름방학 기간만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한국에서 할 일이 많아서 한 학기를 꿇고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국 공항에는 미국에서는 내 법적 후견인 겸 보호자인 짐 케인 교수가 자동차를 몰고 기다리고 있었다.
짐 케인이 한국에서의 일을 물었다.
“한국에서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네, 아빠의 사업을 여러 가지 도와야 했어요.”
나는 한국에서 벌인 몇 가지 사업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듣던 짐 케인이 갑자기 중간에서 말을 잘랐다.
“잠깐, 전자계산기? 그러니까 릴레이 같은 기계식 부품이 하나도 안 들어간 완전한 전전자(全電子) 계산기?”
짐 케인도 이쪽 전공자라 확실히 말이 잘 통했다.
“네, 전전자 계산기요. 연산부에 릴레이 같은 부품 하나도 없이 전부 트랜지스터로 만들었죠.”
“크기는 어느 정도지?”
“탁상에 올라가요. 타자기 정도 크기요.”
“표시는 뭘로 하고?”
“닉시관이요.”
“그럼, 세계 최초의 탁상 전전자 계산기 맞지?”
“아마 그럴 거예요.”
이때는 그런 걸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세계 최초가 맞았다.
“가격은 얼마니?”
“아마 4천 달러 조금 안 될 거예요. 한국은 환율이 약간 복잡해서 더 이상 가격을 떨어뜨리기 어려워요.”
한국 환화의 가치를 달러에 비해 너무 높게 책정해 놓으니 수출할 때는 정말 불리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1달러당 500환에서 1200환으로 바꿀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높다.
“미국에서도 볼 수 있을까?”
“이미 최소 생산품이 태평양을 건너고 있어요. 아마 지금쯤 파나마 운하를 지나고 있을 거예요. MIT에 몇 대 기증할 생각이니까 짐의 방에도 한 대 드릴게요.”
“그거 정말 고맙구나.”
욕심내는 게 바로 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안 줘. 내가 짐에게 받은 걸 생각하면 정말 소소한 거다.
MIT라고 하면 수학 천재들만 모여있어서 숫자계산용 계산기 같은 거 필요 없어 보일지 몰라도 수학 머리와 숫자계산 머리는 많이 다르다.
MIT에서 여러 가지 수속을 마치고 큐브 컴퍼니로 가서 고든 카파를 만났다.
“특별한 일은 없어?”
“한국에서 보낸 라디오가 너무 빠르게 팔려나가고 있어서 머리가 좀 아프긴 해도 특별한 문제는 없지. 계산기는 며칠 뒤에 온다고 했지?”
“4천 달러면 너무 비싸지 않을까? 미국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만든 건데 말이야.”
“아무리 한국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우리 큐브 제품이잖아. 사람들은 조립만 한국에서 한 걸로 알 테니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가격도 그 정도면 계산기 가격으로는 비싼 게 아니야. 책상 크기의 물건을 타자기 크기로 줄였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라디오는 문제가 없어?”
“한국에서의 생산 속도가 좀 느린 것 말고는 문제가 없어. 지금 동부 지역 백화점을 중심으로 팔고 있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서부 지역 백화점이나 유럽에서도 물건을 보내달라고 난리야. 이번에 만든 라디오는 정말 히트 제품이야.”
“작년에 전부 얼마나 벌었어?”
“작년 한 해에 큐브와 캐리어로 710만 달러를 벌었고 라디오로 520만 달러를 벌었지. 하지만 네가 작년에 800만 달러를 가져가서 남은 돈은 430만 달러지.”
이건 직원들의 임금이나 연구비 같은 모든 경비와 세금을 제외한 세후 순이익이었다.
“그래서 얘긴데 트랜지스터를 외부에도 파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트랜지스터 하나로도 1천만 달러 이상 벌 수 있을 거야. IC도 빨리 상품화해주면 더 좋고. 참 다른 회사에서도 IC를 개발했다는 뉴스 들었어?”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래? 어디서 개발했대?”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페어차일드에서 개발해서 특허를 요청했는데 우리가 먼저 등록해서 까였지. 다만 우리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들도 독자적인 기술이 있으니까, 특허료를 지불하는 한이 있어도 그쪽도 상품화할 거야. 그러니 그전에 우리가 먼저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몰라도 페어차일드에서 내놓은 방식은 우리가 거의 유사한 형태였어. 너도 8인의 배신자 얘기는 들어봤지? 페어차일드에서 그걸 만든 사람이 바로 8인의 배신자들의 두목인 로버트 노이스야.”
“확실히 그치들도 개발하긴 했겠지. 그래도 우리처럼 양산 가능 수준은 아닐 테니까 아직은 괜찮아. 솔직히 신생회사가 1년에 세후 순이익을 1,100만 달러를 벌었으면 엄청난 일이잖아.”
“물론 그렇긴 한데······.”
“왜 뭔가 문제가 있어?”
고든이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이건 확실한 게 아니라서 말하지 않았는데 네가 값싼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개발하고 IC를 개발한 뒤에 바로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페어차일드에서 거의 비슷한 물건들을 개발했단 말이야. 게다가 켄이랑 웨슬리와 이야기를 해봐도 이 방면, 그러니까 전자기술 분야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걸 느꼈어. 난 진짜 경영 공부를 하면서도 이렇게 하나이 업계 전체가 빠른 발전을 하는 건 한 번도 배우지 못했어. 산업혁명 이후에 섬유업계의 발전이나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내놓은 이후 자동차 업계의 발전도 이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았단 말이야.”
난 이때 고든의 경영 감각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느꼈다. 지금 이 분야 현직에 종사하는 몇몇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지만 그걸 문장으로 정확히 내뱉는 건 또 다른 얘기다.
고든이 계속 말했다.
“너 혹시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읽어봤어?”
난 이때 고든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하고 정말 경악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든이 계속 말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붉은 여왕이 체스판 위에서 ‘여기서는 계속 달려야 제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앞으로 가려면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내가 보기에는 이 업계가 딱 이 붉은 여왕의 체스판 같다는 얘기야. 너무 빨라서 잠시라도 늦추면 바로 뒤처진다는 거.”
나는 고든이 붉은 여왕 효과를 말하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 내가 정말 경영자를 잘 구했다는 생각을 했다.
고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먼저 발명한 기술력만 믿고 시간을 끌면 오히려 뒤처질 수가 있어. 그리고 회사의 돈도 마찬가지야. 네가 한국에서의 사업을 위해 돈을 가져간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제부터는 이익을 회수하지 말고 그 자금으로 기술개발비를 더 늘려야 한다고 봐.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금방 뒤처질지 몰라.”
정확한 판단이다. 내가 미래에서 보고 온 게 바로 이거 아닌가. 아직 고든 무어가 무어의 법칙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무어의 법칙의 결론이 바로 이거다. 그러고보니 고든 무어도 아직 페어차일드에 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올해의 수익은 전부 연구개발비로 돌리도록 하지. 그런데 만들라고 한 논리회로는 다 만들었어?”
“응, 네가 만들라고 한 논리회로는 다 만들었어. 그리고 레지스터로 사용할 플립플롭 칩도 4비트짜리를 만들었지.”
4비트 플립플롭이라면 16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 외에 TTL(Transistor–transistor logic) 그러니까 논리회로 IC도 만들었는데 60년대 후반부터 각광받았던 7400 시리즈 같은 수준은 아직 기술 부족으로 만들 수 없었다. 아직 우리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는 20개 수준이라 하나의 칩에 집적할 수 있는 수준도 하나의 논리식을 처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물건을 제조하는 게 가능한 회사는 지금 전 세계에서 우리 큐브 컴퍼니뿐이다.
내가 고든과 플라스틱 패키지의 실리콘 트랜지스터 상품화와 논리회로 상품화를 의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DEC의 켄 올슨과 웨슬리 클라크가 들어왔다.
켄이 소리쳤다.
“네가 온다고 했으면 우리도 불러야지.”
나는 큐브 컴퍼니에 들리며 가까운 곳에 있는 DEC에도 알리게 했는데 두 사람은 소식을 듣자마자 내게로 달려온 것이었다.
켄 올슨과 웨슬리 클라크는 당장 내 손목을 잡고 DEC로 끌고 가려고 했다.
내가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저 한국에서 방금 도착했다고요.”
켄이 말했다.
“안 돼, 지금 DEC에 들어온 주문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네가 있어야 이걸 처리할 거 아냐.”
“DEC의 경영자는 켄이고 난 최대주주일 뿐이에요. 켄이 알아서 해야죠.”
“70% 가지고 있으면 네 거나 다름없는데 무슨 소리야. 빨리 가자고.”
고든이 말렸다.
“잠깐 나도 할 얘기가 남아 있어. 그러니 여기서 이야기 해.”
“회사 기밀인데?”
“기밀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래서 나 모르게 할 거야?”
사실 이때 쯤은 큐브 컴퍼니와 DEC는 하나의 회사나 다름 없었다. 큐브 컴퍼니는 100% 내 소유고, DEC는 70%만이 내 소유였고 켄 올슨이 경영자였지만 내가 몇 번 실력을 발휘한 이후로는 켄도 DEC의 실제 주인은 나라고 인정했다.
원래 켄 올슨이 DEC를 만들 때는 내가 자본만 대고 모든 결정은 자신이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실력과 경영 능력이 자신을 압도한다고 생각한 뒤로는 DEC를 내 회사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큐브 컴퍼니에서 DEC에 여러 가지 전자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니 사실상 하나의 회사나 마찬가지였다.
켄이 말했다.
“지금 당장 주문이 너무 밀려오고 있어.”
내가 말했다.
“켄이 최고 책임자니까 생산시설을 늘리고 직원을 고용하면 되잖아요.”
“그게 물량이 웬만하면 모르겠는데 지금 주문받은 PDP-1 플러스가 천 대가 넘어.”
이번에는 나도 정말 놀랐다.
“그렇게 많아요. 그래 100대 수준이면 내가 어떻게 결정하겠지만 지금 밀린 주문만 1천 대가 넘어. 이러니 어떻게 내 마음대로 결정하겠어.”
고든이 놀라서 물었다.
“잠깐 지금 PDP-1 플러스의 가격이 얼마지?”
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웨슬리가 먼저 대답했다.
“한 대 298,000달러니까 밀린 주문이 3억 달러가 넘는다는 얘기야.”
고든이 그 엄청난 가격에 놀라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주문이 늘었어요?”
“당장 미 육군, 해군, 공군에서 사용해 보고 주문이 늘어나기도 했는데 지금 각 학교들 사이에 컴퓨터 설치 붐이 불어서 그래. 대학교만 그러면 이렇게까지 늘어나지 않았겠지만 사립 고등학교까지 여기 동참하는 바람에 주문에 폭주했지.”
미국에는 부자들 전용의 사립학교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 학교는 학생들의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당시 수준으로는 깜짝 놀랄 수준의 장비를 학교에 들이곤 했다.
100만 달러가 넘는 IBM의 본격적인 메인프레임 컴퓨터는 도입하지 못해도 DEC에서 판매하는 30만 달러짜리 컴퓨터라면 충분히 도입할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켄과 웨슬리의 말을 들어보니 뭔가 학교 간의 경쟁 비슷한 게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컴퓨터 한 대는 설치해야 다른 학교에 큰소리 칠 수 있다는 얘기군요.”
“그래, 그래서 학교장이나 이사장들 간에 미묘한 경쟁 심리에서 주문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 학교들마다 자기 동네에서는 제일 먼저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심지어는 학교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어느어느 학교보다는 반드시 먼저 설치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는 학교도 있어.”
고든과 나는 갑자기 닥친 현실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고든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러면 트랜지스터와 IC의 외부 판매는 당장은 무리겠지?”
고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쪽이 먼저지 지금 닥치고 트랜지스터 생산에 집중해야 겨우 숫자를 맞추겠는데.”
“알았어, 그럼 트랜지스터 생산을 더 늘리고 모든 역량을 DEC에 대한 부품 공급에 쏟아야겠어.”
그리고 나는 켄과 웨슬리를 보고 말했다.
“당장 사람들을 더 고용해요. 그리고 교육 서비스 강화도 필요하니까 이쪽 인력도 확충해야겠네요. 자금은 대출할 수 있겠죠?”
켄이 소리쳤다.
“물론이지. 3억 달러어치 주문이 밀려있는 회사에 대출을 망설일 은행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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