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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릎

노예검투사는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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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릎
작품등록일 :
2022.05.11 11:54
최근연재일 :
2022.06.08 20:20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6,189
추천수 :
461
글자수 :
138,314

작성
22.06.02 20:20
조회
164
추천
14
글자
10쪽

5편 후원자(3)

DUMMY

5편 후원자(3)




수상쩍은 느낌에 금발머리 하녀를 곁눈질할 때였다. 세미어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뭣 하느냐? 손님들 잔이 비었지 않으냐.”

“네, 세미어 님.”

“얼빠진 것 같으니.”


하녀는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포도주를 따라주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숙련된 하녀의 모습이었다.


“아랫것의 실수를 너그러이 봐주었으면 좋겠군. 아직 교육이 덜 된 것이라 그렇소.”

“하하,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이해해주어 고맙소.”


세미어는 그러면서 하녀를 흘끗 노려보았다.


‘내 착각이었나?’


세미어의 태도는 노예를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기에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나는 못내 찜찜함을 느꼈다. 근거는 있었다.

귀족들 중에 괴짜 아닌 자가 없다는 것.

게임의 경험이긴 하나, 현실이라고 다르란 법은 없었다.

사만, 테일러, 그리고 카일록의 잔을 채운 그녀는 이윽고 내게로 다가왔다.


‘···확인해볼까?’


나는 깁스를 한 발로 반대쪽 신발 끈을 풀어버렸다. 지난번에 칼을 쫓아 창문 밖으로 떨어진 탓에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뭉특한 석고 때문에 쉽지 않았으나 끈은 금방 풀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들어 금발 하녀를 불렀다.


“이보시오.”

“네, 손님.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미안한데, 신발 끈을 좀 묶어 주시겠소? 내가 손이 이래서.”


그러면서 부러진 오른팔을 흔들어보였다.

움직이지 못하게 석고를 감아놓은 팔로 혼자 끈을 묶는 것은 무리한 일. 제법 자연스러운 핑계였다.

귀족들은 옷 입는 것마저도 스스로 하지 않는 자들이다. 만약 진짜 하녀가 맞다면 신발 끈 정도는 묶을 수 있겠지.

하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신발 끈을 묶기 시작했다.


‘의심이 너무 과했나···.’


아무래도 그간 겪은 일이 있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나갔던 하인들이 줄지어 돌아왔다. 테이블 위로 하인들이 가져온 음식들이 차례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 한 하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소년이었는데, 높이 쌓인 음식의 무게에 걸음걸이가 영 불안해보였다.


“아앗!”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접시가 깨어지며, 음식들이 바닥을 더럽혔다. 위태위태하던 소년이 발을 헛디딘 것이다.

소년은 허둥지둥 앞섶으로 바닥을 훔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만과 카일록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잘 풀려가고 있는데 하인 하나가 초를 친 것이다. 주인들이 세미어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뻔히 보였다.

세미어는 그들의 시선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허허, 우리 작은 친구가 손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군.”

“아니, 아닙니다. 그저 아이가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되어 그러지요.”

“이것 참, 사려 깊은 분들이라 다행이오.”


금발 하녀가 세미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금 바로 치우겠습니다. 기분이 더러우실 테니.”

“음? 아아, 그래야겠지.”


그러면서 세미어는 당황한 소년을 향해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손님들의 얼굴을 보아 자비를 베풀겠다. 이 좋은 날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여봐라, ‘이것들’을 치워버려라!”


세미어의 부름에 병사의 칼이 빛을 뿜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목 잃은 몸뚱이가 비어버린 어깨 위를 더듬는가 싶더니, 음식물 위로 엎어졌다.

피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주인들의 턱이 떨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미치광이 세미어’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의 머릿속을 스쳤다.

세미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사업 얘기를 좀 해볼까 하오.”


세미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발 하녀가 옮겨 담은 닭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세미어의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는 하녀, 그녀는 익숙한 몸짓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인들과 다르게.

다시금 피어오르는 위화감. 문득, 내 시선이 하녀가 묶어준 신발로 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짜 세미어는, 하녀···!’


테이블 아래 신발 끈이 엉망으로 묶여있었다.


*


일련의 소동이 있은 뒤, 응접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게 치워졌다. 테이블 가득 보기 힘든 산해진미가 차려져있었으나, 누구 하나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서 식욕이 돋을 리가 없었다.


“음식이 식겠군. 빨리들 드시오.”


가짜 세미어의 말에도, 수저를 드는 이는 없었다.

그러자 금발 하녀, 아니 진짜 세미어는 정말 하녀라도 된 것처럼 우리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그리고는 손님 접대를 맡겠다는 듯, 우리의 뒤편에 섰다. 하녀로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나는 그 의미를 알았다.


‘시야 밖에서 우리를 관찰하겠다는 뜻···.’


이것은 시험이었다. 귀족의 비틀린 취향이 듬뿍 들어간 시험. 단순히 후원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답여하에 따라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자리라는 말이다.


“사업, 사업 얘기라 하심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치광이 세미어의 손에 머리를 잃은 망령은 신분 구분이 없었다. 뒤늦게 이 자리의 위험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대들의 수완은 뛰어난 편이네. 그러나 나는 통제되지 않는 것을 극도로 혐오해.”

“······.”

“내 손을 타게 된 이상, 내 통제를 벗어난 운영은 두고 볼 수 없다네. 어찌 생각하는가?”


양성소의 운영권을 강탈하겠다는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으나, 세미어에게는 지위와 권력이 있었다. 그 뜻을 이해한 카일록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양성소를 소유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가짜 세미어는 손에 깍지를 끼며 웃었다.


“받아들이기 나름 아니겠나? 겉보기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걸세. 자네들은 수익과 지위를 유지한 채, 가끔 내 명령만 따르면 되는 게야.”


두 주인이 고민에 빠졌다. 양성소는 그들의 전 재산과 같다. 그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부담가지지 말게. 싫다면 후원을 취소하면 그만이니까.”

“그, 그렇다면 저희 사만 양성소는 후원을···.”

“그 전에 치울 것은 치워야겠군. 이런 얘기가 돌아서 좋을 게 없으니.”


사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치운다’는 말이 나온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떠오른 것이다.

거절하면, 죽는다.

응접실에 무거운 적막이 깔렸다. 두 주인이 혼란에 빠진 사이, 내 신경은 오직 등 뒤에 숨어있는 ‘진짜 세미어’에게 쏠려있었다. 가짜가 하는 말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진짜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녀의 반응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려면 등 뒤를 볼 수단이 필요하다.


“말씀 중에 미안하오만.”


나는 침착함을 가장하며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긴장감에 손이 떨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식사 좀 해도 되겠소?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은 몸이라.”

“······!”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테이블 아래로 카일록이 발길질을 해왔다.


“이 버러지 자식이! 지금이 무슨 상황인 줄 알고···!”

“굶은 건 사실이지 않소?”


속삭이는 카일록에게 눈치 없는 채를 하며 반문했다. 그러나 내 눈은 오직 나이프에 향해있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나이프는 어찌나 정성스레 손질되었는지 거울처럼 반짝거렸다. 이걸 자연스럽게 사용하려면 꼭 필요한 행동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식사를 하라는 가짜의 말을 번복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진짜 세미어의 취향을 맞춰주지 못하면 죽는다.

모두가 긴장하며 가짜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진짜 세미어의 얼굴을 살폈다. 나이프에 비친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가짜가 스푼을 들며 말했다.


“허허, 내가 너무 부담을 준 모양이군. 편히들 들라니까.”

“대,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의외의 대답이었기에, 주인들과 테일러는 주춤거리며 수저를 들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닭다리를 잘라 한 입 먹은 뒤, 포도주가 가득 채워진 잔을 들었다. 잔에 비친 세미어가 가짜를 향해 눈짓했다.

시험이다.


“그런데, 심히 불쾌하군···.”


가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굳혔다.


“언제부터 노예 따위가 주인과 겸상을 하게 되었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만은 그의 노예 테일러를 향해 윽박질렀다.


“당장 내려가라! 당장!”

“아, 알겠습니다.”

“하, 하하···. 세미어 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가축과 같은 것들이 어찌 세미어 님과 겸상을 하겠습니까?”


황급히 접시를 챙겨 바닥에 앉는 테일러. 사만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가짜에게 굽실거렸다.

테이블 아래에서 발길질이 날아왔다.


‘뭣 하는 거냐. 빨리 내려가지 않고!!’


카일록이 그리 눈치를 주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잔에 비친 세미어가 한심하다는 듯이 테일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싫소. 무엇하러 그런단 말이오? 내가 개새끼요?”


카일록의 얼굴이 까맣게 죽었다. 목이 날아가는 상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사만 역시 나를 보는 눈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의 대답으로 확신했다. 이게 정답이다.

진짜 세미어가 쿡쿡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이 자식이 주제를 모르고···! 빨리 내려가지 못해?”


이 새끼가 지금 살려주는 것도 모르고.

거센 발길질이 연신 날아왔으나 상관없었다. 응 거기 깁스한 쪽이야. 때려봐야 니 발만 아파.


그때, 세미어가 또다시 신호를 보냈다.

분노한 듯 일그러지는 가짜의 얼굴. 그와 함께 카일록의 얼굴에서 미친 듯이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금발 적안 미녀, 그런데 살인에 미친...


추천글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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