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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릎

노예검투사는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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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릎
작품등록일 :
2022.05.11 11:54
최근연재일 :
2022.06.08 20:2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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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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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글자수 :
138,314

작성
22.05.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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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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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편 노예 검투사(1)

DUMMY

1편 노예 검투사(1)



멀리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셋이 이번 신입인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작년처럼 죄다 죽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꼴을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신입 셋, 분명 나를 포함해 우리 테이블을 말하는 것이다.

넓은 식당에는 사내들이 가득했으나, 세 명이 앉아있는 건 이곳뿐이었다.

가장 안쪽, 가장 넓은 테이블에 앉은 화려한 복장의 남자들이 품평하듯이 우리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저들은 베테랑 검투사들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인가? 나를 비롯한 우리 셋은 신입 검투사였다.


“내기나 할 텐가? 누가 살아남을지.”

“그래도 한 놈은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덩치 큰 친구에게 걸지.”


그 말에 나는 슬그머니 왼쪽을 돌아보았다. 가슴팍에 ‘893’이라는 숫자가 적힌 남자가 바쁘게 음식을 우겨넣고 있었다.

큰 덩치의 남자였다.


“그럼 난 저기 깨작거리는 녀석으로 하지.”

“제정신인가? 저렇게 비실거리는 놈을?”

“전투는 덩치로 하는 게 아니라네. 눈빛을 보라고.”


내 오른쪽에 앉은 남자가 흠칫거렸다. 베테랑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 같았다. 비쩍 마른 체격을 가진 그의 가슴에는 ‘899’라는 숫자가 달려있었다.


“눈빛은 무슨, 쪽 찢어져서 보이지도 않는데. 겁에 질려서 제대로 싸우기나 하면 다행이겠군.”

“저런 놈이 무서운 거야. 속에 뭘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거든.”


호탕하게 웃는 두 남자를 향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그럼 하나밖에 안 남는군. 중간에 있는 놈은 어떻다던가?”


중간에 있는 놈. 즉, 나를 향해 시선들이 쏟아졌다.


“쯧···.”


누군가가 혀를 찼다.


“자네 사람 보는 눈은 알아줘야겠구만. 하필 골라도 900번을 고르나?”

“···왜지?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사내의 질문에 동석한 베테랑들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못들을 농담을 들은 듯한 태도였다.


“저놈, 이거야.”


의아해하는 사내에게 덩치를 고른 남자가 말했다.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빙빙 돌리면서.


“미친놈이라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투기장에 오자마자 기절했다더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듣자하니 집에 보내 달라느니, 경찰인지 뭔지를 부른다던데.”

“경찰이 뭔가?”

“그걸 알면 나도 미친놈이지.”


나는 고갤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자, 베테랑 검사들이 코웃음을 비쳤다.


“식사를 내겠습니다.”


베테랑 검투사들이 앉은 안쪽 테이블에는 그들이 다 먹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음식이 산처럼 쌓였다. 차갑게 식혀진 맥주와 바삭하게 구워진 오리 통구이가 특히 먹음직스러웠다.

그에 반해 우리 테이블의 처지는 허접했다. 가장 말석인 내 앞에는 빵도, 고기도 없이 멀건 스프 한 그릇이 덩그러니 놓였다. 작은 양배추 쪼가리 하나가 둥둥 떠 있는 스프는 끔찍한 맛이었다. 배가 등가죽에 붙은 기분이었음에도.

전이었다면 손도 대지 않았을 스프지만, 먹을 수밖에 없다. 식사시간이 끝나면 무슨 끔찍한 일이 있을지 알기 때문이다.


“······.”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양배추 국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우욱.


.

.

.


임인하. 30살. 9급 공무원.

그것이 사회에서 내 타이틀이었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스스로를 노예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농담 삼아 하던 말이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그런 소리를 하면 친구들은 언제나 타박 섞인 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공무원이 무슨 노예냐고, 일도 적고 신선놀음이나 하는 직업 아니냐고.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박봉이라는 걸로 우는 소리할 생각은 아니다. 그건 알고 들어간 거니까.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누가 했던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 대로면, 난 노예가 맞았다.

9급 중에서도 말단, 짬은 있음, 남직원.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업무량은 살인적으로 늘어난다. 모두가 일을 떠넘기기 시작하거든.

덕분에 정시 퇴근이란 걸 경험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그것을 일컬어 감히 ‘노예’라 하면 안 될 일이었다.

빡!

누군가의 손이 밥을 깨작거리던 비실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야! 누구야? ······주, 주인님?”

“언제까지 처먹고 있을 생각이냐? 얼른 일어서!”


우리 1년차 검투노예들의 주인, 카일록이었다.

밥 먹을 땐 개도 건들지 않는다고 하건만, 우리에게 반항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일록의 뒤로 우르르 정렬해있는 콜로세움의 군인들 때문이었다.

밍기적거리는 우리를 향해 카일록이 채찍을 들이밀었다.


“젠장맞을 놈들, 또 채찍 맛이 보고 싶나? 빨리 안 움직여?”


그 직후. 나를 비롯한 신참 검투사 셋은 곧장 대기실로 끌려왔다.

갑작스럽게 덥고 무거워지는 공기. 복도에는 다쳐서 피 흘리는 노예 검투사들이 보였다.

대기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밖에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 와아아아아아아!


짧은 준비시간이 끝나면,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창살 너머, 눈앞에 투기장이 펼쳐져있다. 모래가 덮인 바닥에서 피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검과 방패의 감촉이 현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몸 풀어둬라!”


주인, 카일록이 외쳤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제기랄. 챔피언 전까지 갔었다고 해도 그건 게임 속이었다. 그런 내 손에 칼 한 자루가 쥐여진 것이다.

나보고 사람을 죽이라고?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 플레이어 보정 : 노예검사 No.900에게 [평정심]이 부여됩니다. >


이윽고 떨리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게임 속 세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플레이어를 향한 보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진정해야 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헉, 헉······.”


그때 옆에서부터 급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899번, 비실이였다. 떨림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을 꼭 붙잡고 있었지만 서있는 게 고작인 걸로 보였다.


“어이, 심호흡 좀 해라. 숨소리가 너무 커.”

“제, 제기랄. 나, 나 너무 긴장돼요······.”

“여기서부터 긴장하면 올라가서 어떻게 싸우려고.”

“주, 죽을 거예요. 죽을 거라고요.”


놈은 패닉 상태였다.

반면 893번, 덩치는 두려움 따위를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게 분명한데도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펄럭거리는 옷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문신이 위협적이었다.

주어진 무기를 손에 익히던 덩치가 씩 웃으며 우리를 돌아봤다.


“이제부터 자주 볼 텐데, 우리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때? 나는 바렌에서 온 비요크다.”

“토, 통성명이라니, 죽을 지도 모르는데 이름은 알아서 뭐합니까···.”


비실이가 여전히 새파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렇게 굳어있으면 이길 싸움도 지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형씨?”


덩치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통에 당황했지만, 나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고.


“상대도 똑같은 1년차다. 우리나 저쪽이나 데뷔전인 건 마찬가지인 마당에 긴장할 이유가 없어.”

“하하, 역시 말이 통할 줄 알았어.”

“그, 그래요?”


우리 둘의 말에 비실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목소리도 어느 정도 진정된 모습이었다.


“저는 호저 윌슨입니다. 호저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당당하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다들 오늘만 이겨내자고. 여기도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덩치, 비요크는 관중석을 향해 고갯짓했다.


“인기만 얻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곳! 그게 콜로세움 아니겠나? 언젠가는 자유인이 될 지도 모르지! 하하핫!”

“자유인···.”


꿈같은 단어였다. 비실이의 표정에 각오가 깃들었다.

살얼음 같던 대기실의 분위기가 덩치 덕에 조금 편안해졌다.

자유라···.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여정이 펼쳐져있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그저 침묵했다.

그래도, 적어도, 이기면 살 수 있다. 그 점은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형씨는 이름이 뭐야?”

“나는···.”


대답하려는 순간, 창살 너머로 커다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 와아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대기실 뒤편에서 검투노예들의 주인, 카일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록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선봉은 899번. 네놈이 나간다.”


자신을 호명하는 목소리에 비실이, 호저가 화들짝 놀랐다. 당황도 잠시, 이내 그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팍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채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호저는 목이 잘렸다.


- 으와아아아아!

- 으하하하하! 죽어버렸어!


5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목이 잘린 채 서 있던 호저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바닥에 처박혔다.


“제기랄! 이 돈값 못하는 좀도둑 새끼!!”


카일록이 왈칵 소리쳤다. 죽어버린 호저를 향해 연신 욕설을 뱉어댔다.


“······.”


나 또한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철렁했다. 방금까지 내 옆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 지금은 저 곳에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죽었다. 사람이.

죽은 사람에 대해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듯했다. 승자는 쏟아지는 야유에 고개를 숙이며 퇴장했다.

경기가 바로 이어졌다.


“다음은 너다. 893번! 네놈 사느라 쓴 돈이 한두 푼이 아니야. 나가서 스스로 네 가치를 증명해라!”

“······.”


비요크는 주인을 한번 노려보고는 투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카일록 양성소에서 에이스를 내보낸 모양입니다! 저 몸집 좀 보십시오!]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상대와 비요크의 체구 차이는 상당했다. 마치 거인과 난쟁이가 나란히 서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상대는 비요크의 덩치에 주눅이 들었는지, 잔뜩 움츠린 모습이었다.

경기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비요크는 시종일관 상대를 압박하며 몰아붙였다. 장대한 체격에서 오는 압도적인 힘에 상대는 그저 막는데 급급했다.

상대를 몇 번이고 다운시킨 비요크는 그때마다 관중석을 향해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커다란 대검이 하늘 높이 치켜오를 때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투기장에서는 인기만 얻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비요크는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쇼를 원한다. 비요크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비요크가 또다시 상대를 다운시켰을 때였다. 승리에 도취된 비요크가 상대를 뒤로하고 관중석을 향해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관중석의 환호가 투기장을 뒤흔들었다. 상대의 발소리를 묻어버릴만큼 굉장한 소리였다. 방심을 틈타 비요크의 뒤로 다가간 상대는 그의 옆구리를 크게 베었다.

중상을 입은 비요크는 더 이상 장기였던 괴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만큼 그는 약해져갔다. 비요크의 허벅지가 찔리고, 어깨가 갈라지고, 마침내 힘을 다한 그는 무릎을 꿇었다.

짜릿한 역전승에 관중들은 열광했다.


““건방진 덩치를 죽여라!!””

““마무리를 지어라!!””


높게 치켜든 칼이 비요크의 목으로 떨어졌다. 연약한 살갗이 갈라지고, 굵은 근육이 드러났다. 동맥이 끊어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쇠붙이가 뼈를 긁는 소리가 들리고, 비요크의 목이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비요크마저.


“야―!! 이런 빌어먹을 개대가리 자식이――!!”


카일록이 노발대발 발작을 했다. 그것으로 허무하게 두 명의 검투노예가 목숨을 잃었다.


정신이 저만치 멀어진다.


나를 향해 소리 지르는 카일록.


사회자의 호명 소리.


거친 싸움에 흥분한 관객들.


< 플레이어 보정 : 노예검사 No.900에게 [평정심]이 부여됩니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투기장 한복판에 서있었다.

죽은 두 사람의 시체가 투기장 위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관중석의 흥분을 뚫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상대는 사만 양성소의 에이스입니다! ]


이윽고,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내 앞에 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43 소리게
    작성일
    22.06.02 14:47
    No. 1

    헐 평정심으로 어떻게 할수있는 게 아닌거같은데..
    선생님, 자극이 너무 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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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4편 희생양(3) +1 22.05.26 197 12 15쪽
14 4편 희생양(2) 22.05.25 193 13 12쪽
13 4편 희생양(1) +2 22.05.24 205 1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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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편 개인교습(4) 22.05.22 211 15 12쪽
10 3편 개인교습(3) +2 22.05.21 221 19 13쪽
9 3편 개인교습(2) +2 22.05.20 223 18 14쪽
8 3편 개인교습(1) 22.05.19 258 20 15쪽
7 2편 검투사의 삶(3) +4 22.05.18 274 27 16쪽
6 2편 검투사의 삶(2) +1 22.05.17 323 23 12쪽
5 2편 검투사의 삶(1) +2 22.05.16 312 25 17쪽
4 1편 노예 검투사(3) +1 22.05.13 342 25 13쪽
3 1편 노예 검투사(2) 22.05.12 404 25 14쪽
» 1편 노예 검투사(1) +1 22.05.11 527 37 12쪽
1 프롤로그 22.05.11 604 39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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