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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릎

노예검투사는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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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릎
작품등록일 :
2022.05.11 11:54
최근연재일 :
2022.06.08 20:2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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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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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글자수 :
138,314

작성
22.05.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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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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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편 검투사의 삶(2)

DUMMY

2편 검투사의 삶(2)




“잘 치료됐군. 다음에도 여길 와야겠어.”


나는 카일록을 노려봤다.

회복이고 스탯이고, 그딴 거 염병 다 필요 없다. 방금 나 진짜 그대로 뒈질 뻔했다고!


“두 번 다시, 두 번 다시! 여기는 안 올 거요. 알겠소!?”


그래서 나는 대들었다. 카일록의 허리춤에 채찍이 있음에도 이번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도리어 그가 당황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또 왔다간 다음엔 진짜 쇼크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카일록이 당황한 채로 소리쳤다.


“이, 이 자식이 미쳤나? 비싼 돈 주고 데려와줬더니!”

“이딴 곳에 올 바에야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거요!”

“그래, 다음번엔 뒤지든 말든 네놈 마음대로 해라!”


나는 절규했다.


“절대! 절대! 오지 않겠소. 두 번 다시는!!”


*


“에잉, 뭐가 이렇게 써? 가게를 바꿔야하나······.”


노예검투사 900번이 떠난 뒤, 딕슨은 다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 이미 들어간 설탕이 세 스푼은 될 텐데, 차는 오히려 써지기만 했다.

차가 문제인 건지 설탕이 문제인 건지.

설탕을 더 넣으려고 뻗은 팔이 우뚝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눈앞이 흔들렸다. 동시에 몸이 기우뚱 무너지며 땅이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얼레? 나, 어째서······?”


바닥에 얼굴을 부딪친 채, 딕슨은 뒤늦게 깨달았다. 설탕이라고 넣은 병에 마취제라고 적혀있음을. 병이 비슷하게 생겨서 실수한 것이다.

엇? 그렇다면 방금 전에 마취제라고 뿌린 건······.


“······설탕이었군? 하핫, 딕슨 이 재간둥이 녀석.”


그러다 문득 딕슨은 생각을 멈추었다.

그렇다는 건, 방금 있었던 900번 노예놈. 그 자식 설마 마취제도 없이 통증을 견뎠다는 건가?

정신이 몽롱해지는 와중에도, 딕슨은 눈을 번쩍 떴다.

정신력이 강하다 생각했었다. 보통은 마취약을 써도 기절하거나 재수 없으면 죽기도 하니까. 그런데 900번은 그의 치료를 약의 도움 없이 이겨냈다는 소리 아닌가.


“호오···.”


딕슨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물건이네, 그거······.”


그리곤 마취약에 빠져들었다.


“···zZZ.”



* * *



이튿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

카일록 양성소의 검투사들이 공터에 정렬해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자그마한 소각터가 설치되어 있다.

경기에서 죽은 노예에 대한 장례식. 한 차례의 경기를 마친 노예들이 맞는 첫 번째 일정이다.

장례식이라고는 하나 간소하기 그지없다. 향을 피우거나 사제의 추도식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시체를 한데 모아 궤짝에 넣고 태우는 것이 전부.

모여 있던 검투사들은 저마다 묵념하거나, 관심 없는 듯이 동료와 떠들거나 하다가 잠시 후 흩어졌다. 장례식이라면 으레 보이는 엄숙함이라곤 온데간데없다.

이걸 장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인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하나둘 사라지는 선임들처럼 걸음을 옮겼다. 죽은 이들에게 연연하기에는 할 일이 많았다.


.

.

.


아침 식사 시간. 소란스러운 식당에서도 시체 타는 연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온다. 역겨운 냄새가 꿉꿉한 음식냄새와 섞인 채로 식당을 채우고 있음에도 선임 검투사들은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동기들과 함께 셋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는 이제 나 혼자뿐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그러니, 이러한 감정 또한 적응해야겠지.

두렵기도 하다. 언젠간 이런 감정에 적응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


노예검투사의 하루는 군인과 비슷하다.

이른 시각 일어나 식사 후 훈련이며 일과를 거친 후, 저녁을 먹을 무렵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야간 근무 따위가 없는 건 군인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첫 결투까지는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도 모른 채로 멱살 잡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면, 이제는 정신이 들었다. 그럼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스프를 뜨고 있으니, 누군가가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일전의 베테랑 선임 제타였다.


“애송이. 적응은 되나?”

“적응이랄 게 뭐 있어. 그냥 지내는 거지.”

“하핫, 그래 투기장이라는 게 원래 그런 곳이지. 옆에 있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고 그에 잡아먹히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며 제타는 자기 몫의 스프를 마셨다. 그의 앞에는 나와 똑같은 콩 스프와 보리빵이 놓여있었다.


“신기하진 않나? 양성소 생활이 생각보다 널널한 게?”

“솔직히 말해 그런 거 같다. 노예라기에 노역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다들 처음엔 그 부분에 놀라지. 검투노예가 할 일이란 건 단순해. 강해지고, 싸우고, 살아남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된단 말이야.”


제타는 스프를 퍼먹던 스푼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머리 긴 놈. 그리고 저 옆에 피부 까만 놈. 둘 다 이 바닥에서 5년 정도 버틴 놈들이지. 저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


아는 체는 하지 않았으나,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제타는 항상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그도 딱히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는지, 왼손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들 꿈이 있단 거야. 여기서 나가면 할 일이 있는 놈들이지.”

“꿈.”

“그래. 꿈. 인간이 사는 이유.”


이걸 현실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투기장에서 나오기엔 너무 말랑말랑한 이야기 아닌가? 지금에 들어서는 그런 감상이 떠오른다. 서로 죽이려고 눈이 벌게진 놈들뿐인 세상에서 꿈이라니.

그때쯤 다른 베테랑들이 신참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보게, 제타. 또 신참 상대로 연설 중이신가?”

“자네가 말을 걸면 신참들이 오히려 불편해한다고. 같은 얘기를 분기마다 하고 있으면 질리지도 않나?”

“900번이랬던가? 너무 귀담아듣지 말게. 이 친구 레퍼토리 중 하나니까 말이야.”


제타의 동료들은 그의 생각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농담처럼 놀리는 말에도 제타는 꿋꿋하게 물었다.


“네 꿈은 무엇이냐. 애송이.”


글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한국에 있을 적부터 그저 입에 풀칠하는데 바빴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된 것도 그 때문이고.


“글쎄, 잘 모르겠군. 당장 살아남는 것도 버거워서.”

“크하핫,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시합만 아니면 남는 게 시간이니까.”

“알았다. 고민해볼게.”

“음! 다음에는 내게 네 꿈이 뭔지 말하고.”


꿈이라···. 한국으로 돌아가서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것? 아니면 이 거지같은 곳에서 벗어나는 것 정도가 아닐까.

무엇이 됐건 간에 일단은 살아남아야 말이 되는 법이다.

그래, 일주일. 아니 이제 엿새 후면 새로운 싸움이 벌어진다. 몸은 부서질 듯 아프고, 쉬고 싶지만 투기장에 떨어진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돌아다니며 배식 중인 노예를 불러 세웠다.


“한 그릇 더.”


일단 먹어야 산다. 끈적한 콩 스프를 한 숟갈 떴다.


“우욱.”



* * *



검투노예들에게 주어지는 개인수련시간.

내 방에서 상처를 점검 중이다.

온몸이 아작 난지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몸 상태는 제법 괜찮았다. 딕슨의 치료는 거지같아도 그 효과 덕에 생각보다 회복이 빨랐다.


‘이 정도면 이제 괜찮을 것 같네.’


이제 미뤄뒀던 오브를 흡수할 생각이다.

나는 품안에 모셔두었던 황금 오브를 꺼냈다.


< 인물 ‘하쿤 자벨 lv.20’의 오브를 흡수합니다. >


화려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찬란한 금빛이 구체를 한번 휘감고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 스킬 [근력폭발]을 획득했습니다. >

< 근력폭발 lv.1 : 찰나의 시간 동안 국소적 신체의 근 활성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평소에 낼 수 없는 힘을 내도록 한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근육에 타격을 주기도 한다. 레벨에 따라 캐릭터의 체형과 기본 근력이 보정된다. >


가슴을 중심으로 빛이 퍼져나갔다. 빛이 퍼져나감에 따라, 내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평범한 성인 남성 수준이었던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팔뚝이 두꺼워지고, 핏줄이 불거졌다. 느껴졌다.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은 이전과 출력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을.


“허······.”


불끈거리는 근육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단 1초 만에 벌어진 일임에도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확실히 스킬이 좋다. 앞으로 내가 찾아야할 오브도 이런 것들이겠고.


<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합니다. >

< 플레이어 : No.900 >

나이: 30세

스킬: [근력폭발 lv.1]

능력치: [근력 lv.3(UP!)], [체력 lv.1], [정신 lv.??(가변)], [민첩 lv.1], [마력 lv.1]

(* 세부 스탯 확인)


튜토리얼 직후 플레이어 능력치는 올 lv.1이다. 그러나 현재 내 능력치는 근력과 정신에 변동이 있는 상태였다. 근력은 스킬 [근력폭발]의 보정으로 등급이 두 단계나 올라있는 것이고, 치료로 얻은 스탯 또한 세부 스탯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정신은 왜 물음표지?


‘[평정심]인가하는 특전 때문인가?’


현시점에서는 그게 가장 유력해 보인다.

그나저나 벌써부터 근력 레벨이 3이라, 시작이 좋다. 레벨3이라는 수치가 게임 말고 실제로는 어느 정도인지 감은 안 온다만.

나는 잠시 방을 살폈다. 달라진 힘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윽고 적당한 물건을 찾았다. 이 방의 전임자가 썼던 것으로 보이는 물병이었다. 군대 수통처럼 쇠로 만들어진 게, 딱 봐도 튼튼해 보인다. 내 원래 악력으로는 도저히 구부릴 수 없을 만큼.

시험 삼아 힘을 줘보았다.


“······.”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을 주어봐야 별 변화는 없다. 혹시나 해서 두 손으로 힘을 주니 그제야 약간 휘기 시작하는 수통.


“와, 안 된다. 이거.”


나는 더운 숨을 내뱉고서 고개를 저었다. 스탯이 3개나 올랐음에도 금속을 구부리는 일은 쉽지 않다. 아마 평소의 나였으면 이러한 출력도 내지 못했겠지.

그렇다면, 스킬을 써본다면 어떠할까?


[근력폭발]


가슴 속에서부터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진다. 심장에서부터 비롯된 힘이 혈관을 따라 내 오른손으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전완이 희미하게 부풀어 오른다. 근육이 드러나며 야트막하게나마 갈라진다.

――!

그 직후, 원통형의 금속 물병이 허무하게 구겨져버렸다.

그러나 힘은 순식간에 풀렸다. 과하게 힘을 준 근육이 탁, 풀렸으며 나는 물병을 손에서 놓쳤다. 딸그랑-

나는 손목을 돌리며 떨어진 물병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낑낑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병은 마구잡이로 구겨져 있었다.

저건 설마 내 엄지손가락 자국인가? ······미친.

게임에서 공격력과 잡기 확률 상승, 캐릭터 움직임이 잠깐 올랐던 효과와는 달랐다. 현실이 된 ‘스킬’이라는 것은, 마치 마법 같은 물건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여기 카일록 양성소에는 단련실이 있다. [근력폭발]은 온 몸에 적용할 수 있으니, 게임과 달리 점프나 무기를 휘두르는 데에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내 수용실을 나왔을 때였다.


문 앞에서, 웬 남자 세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지. 이 놈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만 양성소에 패배하고서도 살아 있다던, 그 선임 검투사들이었다.

나는 아까 저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900번.”

“······.”

“잠깐 얼굴 좀 보지. 따라와라.”


셋 중 대장처럼 보이는 놈이 내게 말한다. 명백한 명령조였다. 그러나 나는 이 게임 속 검투사들의 훤히 생리를 알고 있다. 얕보이면 표적이 된다는 사실 또한.


“할 말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해라.”


놈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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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5편 후원자(4) +4 22.06.04 168 16 11쪽
21 5편 후원자(3) +2 22.06.02 164 14 10쪽
20 5편 후원자(2) +2 22.06.01 168 13 13쪽
19 5편 후원자(1) +2 22.05.31 189 15 15쪽
18 4편 희생양(6) +3 22.05.30 220 18 12쪽
17 4편 희생양(5) +2 22.05.29 220 18 12쪽
16 4편 희생양(4) 22.05.27 190 16 14쪽
15 4편 희생양(3) +1 22.05.26 198 12 15쪽
14 4편 희생양(2) 22.05.25 194 13 12쪽
13 4편 희생양(1) +2 22.05.24 206 15 12쪽
12 3편 개인교습(5) +2 22.05.23 205 16 13쪽
11 3편 개인교습(4) 22.05.22 212 15 12쪽
10 3편 개인교습(3) +2 22.05.21 222 19 13쪽
9 3편 개인교습(2) +2 22.05.20 224 18 14쪽
8 3편 개인교습(1) 22.05.19 259 20 15쪽
7 2편 검투사의 삶(3) +4 22.05.18 275 27 16쪽
» 2편 검투사의 삶(2) +1 22.05.17 324 23 12쪽
5 2편 검투사의 삶(1) +2 22.05.16 313 25 17쪽
4 1편 노예 검투사(3) +1 22.05.13 343 25 13쪽
3 1편 노예 검투사(2) 22.05.12 405 25 14쪽
2 1편 노예 검투사(1) +1 22.05.11 527 37 12쪽
1 프롤로그 22.05.11 605 39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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