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플레이아데스 - 각자의 길 3
으으~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숨소리, 맥없이 풀려버린 눈동자.
윌리엄은 기진맥진(氣盡脈盡) 한 채로 신음만 내며 철에 침대에 누워있었다.
“ 뭐~ 이 정도면 아쉬운 대로 실험체로 사용할 수 있겠군. “
“ 이제 난 너에게 많은 실험을 할 거야. “
“ 믿는 신이 있다면 간절히 기도해야 될 거야. “
“ 너의 자가치료능력이 내 실험을 견뎌내길 말이야.”
노인은 윌리엄의 눈앞에서 정체불명의 검은색 물약이 든 유리병을 흔들었다.
“ 이건 말이야. “
“ 메가사스 산맥에 사는 태초의 뱀 베놈의 독이야. “
“ 아직 해독제를 만들지 못한 몇 안 되는 독 중에 하나지. “
“ 이놈에게 중독되어 살아남았다는 기록은 없어. “
“ 만약 네놈이 이걸 견디어낸다면 아마 최초가 될 테지. 난 그 데이터와 네놈 몸에 형성된 항체를 가지고 새로운 치료 약을 만들 거고. “
“ 이제껏 양아치로 살아왔으니 이번 기회에 인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 보자고··· “
음흉한 미소를 짓던 노인은 순간 표정을 바꾸어 짐짓 근엄하게 윌리엄을 향해 말을 이었다.
“ 자네의 희생으로 인류에 도움이 된다면 이 얼마나 거룩한 행위인가! “
“ 안 그런가? “
그는 윌리엄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 그래. 그렇지. 자네도 좋다고? “
“ 그럴 줄 알았네. 이 얼마나 고귀한 희생이란 말인가? 크크크 “
“ 자네의 그 거룩한 희생정신을 생각해서 특별한 것들을 많이 준비해 놓았다네. 기대하라고 베놈의 독을 2만 배 농축한 엑기스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노인의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가 흘러나오고 눈에는 독한 광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윌리엄의 입에 베놈의 독액을 흘려 넣었다.
치이익~!!
강력한 산성을 지닌 베놈의 독은 윌리엄의 입술에 닿자마자 입술과 치아 그리고 목구멍을 녹이며 몸속으로 침투하였다.
부들부들···
윌리엄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온몸에 핏줄이 돋아나고 눈과 코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덜컹덜컹..
철제 침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대가 타버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윌리엄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는 사이 베놈의 독은 차근차근 윌리엄의 살을 녹이며 몸속 장기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러자 강화된 윌리엄의 자가치유 능력은 베놈의 독에 맞서 녹아버린 몸을 재생시키며 새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륵···그르륵···
덜컹덜컹···
입안에서 피 끓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그에 맞서 새살이 돋아나는 지독한 간지러움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극한의 고통을 주었다.
이미 정신은 무너질 때로 무너진 상태지만, 윌리엄의 육신은 끔찍한 고통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요동쳤다.
인간의 면역체계를 붕괴시키고 살과 뼈를 녹이는 베놈의 독에 맞서 윌리엄의 자가 치유 능력 또한 맹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현상은 온몸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고, 본의 아니게 숙주 상태가 되어버린 윌리엄의 얼굴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또다시 고통을 이기지 못한 윌리엄이 의식을 놓으려고 하자, 노인은 그의 얼굴에 기이하게 생긴 가면을 씌웠다. 얼굴 전면을 가린 검은색 가면은 고통에 일그러진 윌리엄의 얼굴과는 달리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 안되지, 안돼. “
“ 젊은 사람이 이렇게 나약해서야 원~ “
그것은 의지의 여신 보른체나의 축복을 받은 가면으로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에도 정신을 잃지 않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아티팩트이었다.
누구나 탐내는 진귀한 아티팩트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이 순간 윌리엄에게 보른체나의 가면은 악독한 고문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극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노인의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윌리엄은 이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하는 실험체로 전락해 버렸다.
*******
우르릉
꽈꽝 !
시끄럽다.
머리가 울린다.
귓속에서 이명이 신경질적으로 울려대고 있다.
나는 졌다.
그리고 적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어디지?
사람들이 말하는 지옥인가?
주위가 너무나 시끄럽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날카로운 대도가 심장을 꿰뚫었을 때, 나의 의식마저 깜깜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었고, 나는 어딘가로 흘러갔다.
한 줌 소음도 없는 완벽한 고요 속에서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랬었는데..
너무 시끄럽다.
이제 영원한 안식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우르릉~
하늘에서 또다시 천둥이 친다.
이명이 더욱 심해진다.
찌를듯한 두통이 찾아온다.
양손을 들어 보았다.
나의 두 손이 보인다.
머리를 만져 보았다.
깨어졌던 머리가 온전히 붙어 있다.
두 손을 심장으로 가지고 간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의 맥동이 느껴진다.
다시 살아난 것인가?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망자의 신 하데스의 목걸이.
착용자에게 여분의 생명을 부여해 주는 최상급 아티팩트.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된 그 목걸이 때문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또 한 번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 또 한 번의 기회를 잡은 것인가? ‘
‘ 그냥 쉬고 싶은데.. ‘
이제, 뭘 해야하나..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까?
아니면.....
하아.. 영웅의 삶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 따갑다.
사람들의 혀가 너무나 무섭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뭉개지고, 그들의 말에 심장이 찔리는 고통을 받으며 살았었다. 그게 소위 말하는 영웅 삶이라고 일반화하면서.
벨레로폰.
죽기 전에 나의 이름이었다.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아 악의 화신 오리온을 처단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지만, 나는 비참하게 죽임을 맞았다.
후~
‘ 어쩌면 그것도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떠밀리듯이 떠난 여행의 끝은 죽음이었다.
이제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천마 페가수스는 오리온의 화살에 죽어버렸고, 그의 곁을 지켜주던 든든한 동료도 모두 떠나갔다.
‘ 이제, 무얼.. 하지? ‘
계속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는 앞으로 뭘 할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진다.
굵은 빗줄기가 다시 살아난 벨레로폰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아프다. 그리고 시원하다.
모순된 감각이 아이러니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슬픔이 폭발한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줄기가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그래. 버리자. ‘
‘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
‘ 내 이름까지도. “
벨레로폰은 그렇게 결심했다.
“ 난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
그는 하늘에 향해 맹세했다.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깊은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옷이 찢어지고 엉망인 된 모습을 보니 길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산을 올라갔다. 한참 동안 산을 오르던 남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저 멀리 화전민들의 마을이 그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서둘러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돈이나 값이 나가는 물건이 없는, 부랑자 신세였던 남자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마을을 배회했다.
“ 거기 뉘시오? “
“ 이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
산에서 약초를 캐고 마을로 돌아오던 늙은 노인이 남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 여행 중에 길을 잃어서.. “
“ 젊은 사람이 안됐구먼. “
“ 아무리 길을 잃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험지로 들어와. ”
억센 표정의 노인이 남자를 향해 혀를 차며 안쓰러워했다.
“ 행색을 보아하니 아직 밥도 못 먹은 얼굴인데··· “
“ 따라오게. “
“ 사람이 배는 채워야지.. “
노인은 남루한 행색의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굴참나무껍질을 끝 부분이 겹쳐지도록 올려 지붕을 만들고 큰 통나무와 진흙으로 외벽을 세운 노인의 집은 궁색한 화전민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노인은 남루한 남자를 향해 들어오라며 손짓하며 미소 지었다. 거칠고 새까맣게 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자 깊은 주름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 어서 들어오게. “
“ 집이 누추하지만 뭐 어떤가? “
“ 배만 채우면 되지. 안 그런가? 허허. “
처음 인상과는 다르게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에 남자도 긴장을 풀고 노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 어머~ 영감. “
“ 언제 오셨어요? 이분은 누구세요? “
인기척에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던 후덕한 인상의 할머니가 마당으로 나와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 젊은 친구가 길을 잃고 이곳까지 왔다지 뭔가? “
“ 빨리 밥상 좀 내어오시게. “
“ 며칠을 굶은 모양이야! “
노인의 말에 할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밥상을 내어 왔다.
어설픈 솜씨로 나무를 잘라 만든 밥상에 감자와 물 한 사발이 다였지만, 배고픈 남자에게는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 그럼, 염치없지만.. “
남자는 감자를 입에 쑤셔 넣었다.
콜록~콜록~!
“ 누가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들게. “
“ 물도 좀 마시고. “
배고픔에 허겁지겁 감자를 먹다가 목에 걸려 버린 남자는 옆에 놓여 있는 물을 마시고, 다시 감자를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상 위에 있던 감자를 해치운 남자는 그제야 노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감사합니다. “
“ 그럴 필요 없네. “
“ 산골이라 물자가 풍요하진 않지만, 배는 곯지 않으니 부담 가지지 말게.. “
노인은 편안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남자에게 말했다.
“ 자네, 이름은 뭔가? “
“ 젊은 사람이 무슨 일로 혼자 여행을 하게 되었나? “
배를 채우자 노인은 그동안 참고 있던 질문을 쏟아 내었다. 노인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남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다.
“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
“ 왜 이름이 없어.. 혹시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
“ 아닙니다. 정확히는 예전 이름을 버렸습니다. “
남자의 담담한 말에 노인은 살짝 놀란듯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 이름을 버렸다라··· “
“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모진 삶을 살았던 게로군. ”
한참을 남자의 눈을 쳐다보며 안타까워하던 노인은 다시 남자에게 질문했다.
“ 그래, 이제 어떻게 할 텐가? “
남자는 노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살아난 삶, 언제나 입안에 맴돌고 있던 말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 데로 흘러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 그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미래와 계획, 희망 따위였다.
“ 그래. 그런가? “
노인은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 그럼 이곳에서 우리와 같이 사는 것은 어떤가? “
노인이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
“ 여기도 젊은 남자들이 부족하다네. “
“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은원은 잊어버리고 우리랑 같이 살면 어떻겠나? “
영웅의 삶을 살았던 남자.
한때 영웅 벨레로폰이라 불린 남자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린 그였지만 이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마저 잊은 것은 아니었다.
“ 저를 어떻게 믿고, 외지인을 들이려고 하십니까? “
남자 말의 뜻을 깨달은 것일까?
노인은 깊은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했다.
“ 우리 노부부에게도 장성했다면 자네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었네. “
“ 이곳이 싫다고 산밑에서 살고 싶다고 어린 나이에 산을 떠나 버렸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먼 산을 지긋이 응시하던 노인은 다시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아들놈은 돌아왔지. ”
“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말이야. “
“ 우리 같은 산골 무지렁이들에겐 산 밑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그놈은 몰랐던 게지··· “
노인과 옆에 있는 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집에 온 지 3개월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갔네. “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도 하지 않았어. “
“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겠지만··· ”
슬픈 눈으로 자조 섞인 말을 내뱉는 두 노부부의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노인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경계하듯 노인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 고맙습니다. “
남자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노부부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노부부도 눈가에 맺혀 있는 이슬을 닦아내며 엎드려 있는 남자를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