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Born to be 각성자 3
“ 우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
가쁜 숨을 몰아쉬던 찬희는 고개를 들어 밤새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척준경을 바라보았다.
“ 사부~ 저 잘했죠?? “
“ 그래.. 장하다.. 이 새끼야··· “
칭찬에 인색한 척준경은 특유의 싸가지없는 말투로 툭 쏘듯이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모를 찬희가 아니었다.
헤헤..
사부의 칭찬인 듯 칭찬 아닌 칭찬 같은 욕지거리에 기분이 좋아진 찬희는 앉은 자리에서 헤실헤실 웃다 지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 밖에는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소식만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찬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떻게 됐어요?? “
아이의 어머니가 찬희의 두 손을 꼭 잡고는 초조한 낯빛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세월의 흔적이 남은 그녀의 자글자글한 눈가에는 밤새 흘린 눈물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을까?
순간,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아들만을 생각하던 엄마의 늙은 얼굴이 오버랩되어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울컥해진 찬희는 한동안 가슴을 진정시켰다.
“ 아이의 몸속에서 날뛰던 기운을
억제하는 데는 성공했어요.. “
“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억제일 뿐··· “
“ 이제부터는 모두 아이에게 달려 있습니다."
“ 그래도 뭐~ 오늘 이후로는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예요.. “
찬희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문밖에 모여있던 아이의 아버지, 엄마 그리고 다 큰 오빠까지 한데 어우러져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고맙네.. 진짜 고마워···. “
“ 자넨 우리 가족의 은인이네··· “
“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이승일의 가족들은 연신 찬희에게 눈물로서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뭘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기에(사실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피맛을 본 케이스지만,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다.) 계속 손사래만 쳤다.
“ 단,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
“ 이 아이는 일반인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각성자로 태어난
귀한 아이예요. "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가족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 일반학교에 진학을 하더라도
적응에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한국 각성자 협회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
찬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가족들은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
“ 아닙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
찬희는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가족들에게 연신 괜찮다는 말을 하고,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 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오늘 강의가 아침 첫 시간부터 있어서
조금 더 지체되면 늦을 것 같아요.. “
아직 이른 시간이라 여유가 있었지만, 계속되는 감사의 인사에 부담이 된 찬희는 시간을 핑계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밥은 먹고 가게..
내 금방 차릴게.. “
“ 승일이 방에서 놀다가 나와··· 알았지?? “
그런 불편한 마음을 모를 리 없는 가족들이었지만, 가족의 은인을 밥도 안 먹이고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닌 법, 이승일의 어머니는 극구 밥은 먹고 가라며 찬희를 붙잡았다.
“ 하하..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
어머니의 마음을 모른체할 수 없어 찬희도 못 이기는척하며 이승일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찬희를 포함한 이승일의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여앉아 아침식사를 했고, 간단한 세면을 한 다음 찬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원한 새벽 공기에 녹아있는 싱그런 녹음의 향기는 지친 찬희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 주었다.
“ 우왕~~ 좀 졸리네.. 크크 “
“ 이놈의 습관은 참··· “
잠을 자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는 몸이 되었지만, 20년이 넘도록 유지된 습관이 하나의 의식처럼 굳어져 버린 찬희의 몸은 여전히 달콤한 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부르르릉~
잘 닦인 2차선 도로를 카미짱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뿌연 아침 안개를 꿰뚫고 지나가는 카미짱의 폭발적인 구동음이 한적한 시골 도로를 가득 메웠다.
“ 야~ 좀 천천히 가.. 이러다가 사고 날라··· “
근본을 알 수 없는 양아치 난폭 운전에 겁을 잔뜩 먹은 이승일이 안전띠를 꽉 붙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잖아.. “
이승일의 말에 찬희는 카미짱에 내장된 고급 인테리어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침 6시 30분..
“ 아니,
아침 출근시간에 걸리면 제시간에 못 가. “
찬희는 더욱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고는 속도를 올렸다.
시골 도로를 벗어나 본격적인 출근 전쟁이 벌어지는 도심으로 들어오자 카미짱의 속도는 그제서야 천천히 줄어들었다.
정신없이 달리던(폭주 본능이 발동했던) 찬희는 여유를 가지고 보조석에 앉아 있는 이승일을 힐끔 쳐다보았다.
까맣게 타버린 얼굴에 턱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입가에는 침이 고여있고, 눈동자가 가출한 두 눈은 흰자위만 들어차 있었다.
쉽게 말해 이승일은 졸도한 상태였다.
“ 하긴.. 피곤할 만도 하지··· “
상큼하게 상황을 정리한 찬희는 전쟁 같은 등굣길을 마치고 학교 주차장에 카미짱을 주차한 뒤, 이승일 깨워 단과대 건물로 들어갔다.
“ 뭘 그렇게 곤히 자고 있어..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참나~ “
그리고 하루 종일 전공수업과 교양수업을 들은 후, 이틀 만에 그립던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마쳤다.
띠리리리링···
그리고 한국 각성자 협회의 김기찬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반갑습니다. 고찬희씨..
그동안 잘 지내셨죠?? “
밝은 톤의 김기찬 과장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찬희의 귓가에 들려왔다.
“ 네.. 과장님도 잘 지내셨죠?? “
김기찬 과장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 찬희는 어제 겪었던 일을 그에게 말했다.
“ 네???? “
“ 정말,
Born to be 각성자가 태어났다고요?? “
“ 네, 정말입니다.
제가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
폭주하는 힘을 진정시키기 위해
엄청 고생했습니다.
뭐,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테지만,
앞으로 아이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때인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 잘 아시다시피
아이가 일반학교로 진학하면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해서,
이런 경우에
각성자 협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나 해서요."
“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제가 찬희님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
“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구요..
문자로 주소 찍어드릴 테니,
오전 9시에 그쪽에서 만나기로 하죠.. “
두 사람은 그렇게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이승일하고도 약속을 잡은 후 찬희는 최신 영화 한 편을 VOD로 본 후 잠자리에 들었다.
어둑했던 하늘에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새벽녘에 일어나 아침 운동까지 마친 찬희는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밥을 먹고, 카미짱을 타고 이승일의 집으로 향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풋풋한 풀 향기 물씬 풍기는 시골길을 달리자, 오랜만에 마음속까지 여유가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차 안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90년 발라드 노래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이런 게 사는 거지··· “
“ 아! 냄새 좋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이 풋풋한 스멜~ “
한껏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30분을 더 달려 찬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김기찬 과장이 먼저 도착해서 찬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일찍 오셨네요.. “
“ 아니요..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
깔끔한 양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둘러맨 모습이 영락없는 샐러리맨으로 보였다.
서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터벅터벅 잘 가꾸어진 전원주택을 향해 걸어갔다.
띵동~
벨 소리가 울리자, 이승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 뒤로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도, 오늘은 휴가를 냈는지 편한 복장을 하고 그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께서는 오늘 휴가 내셨나 봐요? “
식사도 같이하고 하룻밤 새 많이 친해진 찬희와 이승일의 가족들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말끔한 양장 차림의 김기찬 과장이 뒤따랐다.
“ 이쪽은 제가 말씀드린
한국 각성자 협회의 김기찬 과장입니다.
나름 실세로 알고 있습니다. “
찬희의 소개를 받고, 김기찬 과장이 명함을 꺼내 아버지에게 전하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한국 각성자 협회 김기찬입니다. “
" 불꽃 남자, 고찬희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짝 뜸을 들이며 가족들을 살피던 김기찬 과장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실례지만, 절차상
먼저 제가 아이를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가족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승일의 아버지는 김기찬 과장과 고찬희를 이끌고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안에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창백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고, 아기 특유의 복숭아같이 봉긋한 두 뺨은 기분 좋은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행여나 아이가 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아버지를 따라 두 사람도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김기찬 과장은 서류 가방에서 각성자 주파수 측정기를 꺼내 들었다.
삑~ 11.05Hz
일반인이 발산하는 7.83Hz의 고유주파수보다 훨씬 높은 11Hz의 주파수가 측정되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Born to be 각성자라는 소리, 찬희가 일러 준 그대로였다.
주파수를 확인한, 김기찬 과장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 감사합니다. 절차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라,
확인을 해봐야 했습니다. “
조사를 마친 김기찬 과장이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하자, 이해한다는 반응이 들려왔다.
“ 뭐~ 나랏일을 허투루 할 수는 없지요..
이해합니다. “
괜찮다는 대답이 들려오자 김기찬 과장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 따님은 각성자가 분명합니다.
“ 아직 각성자로 태어난 사례는
제가 알기로는 보고된 바가 없어서
협회에서도 따로 규정이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해서 현재로서는 협회에서도
마땅히 지원을 해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
김기찬 과장의 입에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가족들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 하지만 각성자로 태어난 것이 분명한 이상,
이제, 규정을 새로이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따님이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겠습니다. “
김기찬 과장의 확답이 이어지자, 그제서야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
“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지요..
아이는 인류의 큰 희망이 될 겁니다. “
김기찬 과장은 그 길로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며···.
찬희는 김기찬 과장과 헤어지기 전에 아이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수시로 알려달라는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찬희도 잠시 동안 아이를 살펴보곤,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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