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잊혀진 왕
김기찬 과장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테리토리로 돌아온 찬희는 그동안 등한시했던 용병 일을 하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지금 현재 찬희에게 남은 공헌도는 '0'이었다.
저번 레인보우 랫을 사냥한 것은 본의 아니게 채무 변제 차원에서 하게 되었던 것이므로, 보상으로 나온 공헌도는 작은 집 하나 간신히 지을 정도···
그래서 승희의 집을 지어주고 나니 또다시 개털이 되어 버렸다.
“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미리 공헌도를 땡겨 놔야지. “
그렇게 결심한 찬희는 척준경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잠시 수련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함께 게이트를 넘었다.
물론, 찬희 덕에 해방된 김예지는 환희의 눈물을 흘렸지만,
후후훗...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척준경은 아니질 않은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무게가 50kg에 이르는 쇳덩이들을 그녀의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허리에 친절하게 채워주며 자물쇠로 잠궈버렸다.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그걸 차고
자율 훈련과 일상생활을 병행하라는 것!
환희의 눈물이 절망과 비탄의 절규로 바뀌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세상이 녹아내리는 환상에 빠지고 시야가 흐릿해질 무렵.
찬희와 척준경은 암흑만이 존재하는 깊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았으나, 희미한 실루엣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화아..
찬희는 먼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엘로헨을 소환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짜 밝다.
그리고 신비로운 느낌이다.
화르륵~
자신을 향해 하얀 불꽃을 일렁이는 엘로헨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엘로헨은 기분이 좋은지 한차례 불꽃을 찌르르하고 떨고는 찬희의 어깨 위에 살포시 올라앉았다.
어깨 위에서 잠시 통통거리며 까부나 싶더니, 별안간 수줍게 입맞춤하듯 찬희의 볼에 불꽃을 살짝 가져다 대고는 신이 나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엘로헨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비로소 찬희에게도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어두운 동굴 안이었다.
그때, 테이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 그림자 병사들이 사는 '지하 세계'에
입장했습니다. ]
[ 그들은 한때,
찬란한 제국의 영웅들이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망령일 뿐입니다. ]
[ 그림자 병사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하세요. ]
임무의 내용은 간단했다.
지하 왕국에 존재하는 그림자 병사들을 모두 소멸시키는 것.
그런데 임무의 난이도는 간단치 않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안.
그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들은 어둠 속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엘로헨으로 주변을 밝히면..
그냥 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길 뿐이었다.
누군가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망령들은 오랜 세월 빛도 없는 어둠에 동화된 채,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부표처럼 어둠을 따라 표류하고 있었다.
그림자 병사들을 찾을 길이 없자 찬희는 또다시 자신의 전매특허를 꺼내들었다.
찬희는 두 눈을 감고, 오감을 차단한 채 동굴 안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늘 있던 자연의 피조물처럼, 서서히 동굴에 동화되어 갔다.
뭉게뭉게
회색의 기운들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아지랑이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기운들이 서서히 늘어지고 분화되며 가는 촉수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찬희는 더욱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의식은 점점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두족류(頭足類)의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기운들은 점점 가늘어져 가는 실처럼 변했다.
찬희가 자신의 기를 조작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척준경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 기를 다루는 능력이
한층 깊어지고 세밀해졌어! '
' 언제 이 정도로 실력이 자란 거지? '
찬희가 보유하고 있던 자연기의 질과 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세밀함은 지극히 떨어진다.
찬희를 보던 척준경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찬희는 기존에 자신이 생각해 왔던 그가 아니었다.
자신의 기를 저렇게 실처럼 쪼개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면 반죽을 기가 막히게 잘 한다고 해서 국숫발을 잘 뽑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좋은 면 반죽이 가능해질 때까지도 수많은 노력과 수련이 필요하지만, 국숫발은 또 다른 기술로 수백 번 접고 펼치기를 반복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저렇게 가느다란 잔치국수 면발이라면??
쓰읍...
척준경의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실처럼 가늘게 형성된 기운이 수백수천 가닥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실처럼 가느다란 기들은 바닥의 웅덩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벽과 그 벽을 기어 다니는 이름 모를 벌레 등, 사방의 모든 물체들에서 반사되어 다시 찬희에게로 되돌아왔다.
찬희는 반사된 실 같은 기운들로 한 땀, 한 땀, 옷을 만들듯 머릿속으로 3차원 입체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사되어 돌아오는 기운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계속해서 기운들을 발산하고 있어 지형정보들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잠시 후, 머릿속에 동굴 안의 입체지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동굴의 어두운 속에 숨어있는 그림자의 모습도 선명하게 파악되었다.
그림자.
갑자기 떨어진 이곳, 동굴 안에 존재하고 있던 의문의 존재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하였지만, 실체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어둠 속에 표류하고 있던 그림자 병사들은 무표정했지만, 어딘가 슬픔이 느껴졌다.
지박령처럼 이곳 동굴에 매여있는 존재들.
평소와 다름없이 던전에 입장해서 임무를 받고, 그림자들을 향해 창을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탐탁지가 않다.
까닭 모를 슬픔이 배어있는 무표정한 그들의 모습이 찬희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각인됐다.
푹!
찬희는 마지막 남은 그림자를 일격에 처리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어깨에 척준경이 날개를 펄럭이며 요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 사부,
여기 왠지 기분이 나빠요.
그림자들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기도 하고.. “
“ 글쎄,
이런 환경 속에서
그림자만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슬픈 일 아닐까? “
“ 괜한 생각으로 힘 빼지 말고,
집에나 가자.
또 다른 던전에도 갈 거잖아. “
척준경은 찬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다.
“ 근데, 좀 전의 기술은 대단하더구나!
많이 늘었어~ “
“ 기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변환시키며
사용하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한 것이냐? “
“ 그냥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돌고래를 보고 생각해 낸 거예요.. “
“ 돌고래가
반사되어 돌아오는 초음파로
사물을 식별한다고 해서요. 하하 “
“ 그냥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란 생각으로
시도해 본 거예요.. “
“ 실제로 될 줄은 몰랐지만요.. “
척준경은 한참 동안 똥 씹은 표정으로 찬희를 바라보았다.
“ 재수 없어. 꺼져..! “
척준경이 재수 없는 제자 놈과의 의절을 선언했을 때, 테이아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 10초 후, 히든 스테이지로 이동합니다. ]
[ 10, 9, 8, 7, 6········· ]
전신이 하얀 빛으로 둘러싸이면서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잠시 후, 눈부신 하얀 빛도 어지럼증도 사라지자 찬희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찬희는 드넓은 초원에 홀로 서 있었다.
물론 척준경도 함께 있었지만,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적 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찬희는 더 넓은 초원 위에 자신만 외로운 나그네처럼 쓸쓸하게 서 있다는 착각을 하는 중이었다.
참...
히어로 물의 폐해가 심각하다.
어쨌든 이곳은 말 그대로 숨겨진 무대.
이제 찬희는 막이 오른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아닌 악랄한 나그네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찬희는 고개를 들어 깽판을 칠 무대를 두 눈에 담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초원과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곳.
한동안 멍하니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눈이 시리도록 밝아 오히려 슬픔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 음~ 여긴 어디지..? “
찬희가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볼 때,
“ 저 언덕 뒤편에 오래된 성이 보인다.
저기로 가야 할 것 같다. “
하늘 높이 올라가 주변을 살피던 척준경이 성을 발견하고 찬희에게 방향을 알려 주었다.
푸른 언덕을 넘어 한 30분 정도 걸어가자 오래된 고성이 나타났다.
무너진 성벽과 잡초로 무성한 성내 그리고 전쟁의 잔해처럼 부서져 버린 건물들이 을씨년스러움을 자아냈다.
피이이~ 휘이~우
부서진 건물 틈 사이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갔다.
“ 우와~ 귀신 나오겠네..
진짜. 좀 치우고 살지! “
찬희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일부러 허튼소리를 하며 성내 메인 건물로 들어갔다.
석조건물 내부는 거대한 크기의 연회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부는 아무런 실내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흔한 초상화도 카펫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창도 없어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차가운 회색 벽에는 그저 노란 횃불들만이 어두운 실내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찬희는 고개를 돌려 홀 전체를 둘러보았다.
너무나도 차갑고 황량한 느낌.
생명의 기운이란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죽어있는 공간 그 자체였다.
“ 어서 와라. “
“ 그대가
잃어버린 나의 기억들을
되찾아준 자인가? “
“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
“ 애써 지워버린 기억이었거늘.. “
어두운 홀 안쪽에서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나저나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여행자인데,
대접할 것이 없구나. “
여행자.
흔히,
판타지 소설 속에서 죽여주는 비중을
차지하는 직업.
‘ 후훗~
보통, 주인공에게 그런 호칭이 붙지. ‘
찬희는 홀 안쪽에서 들려오는 호칭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연회장 맞은편, 돌로 높은 단을 쌓아 만든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왕일진대,,
초라한 왕좌에 앉아있는 자의 죽어버린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테이아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 그는 고대 왕국의 제왕이었던 자,
절대의 군주, 에티나. ]
[ 하지만, 지금은 마왕 군에 의해
가족도, 신민도, 왕국도 모두 잃고,
전장에서 도망친
망국의 군주일 뿐입니다. ]
[ 그를 죽여, 군주의 왕관을 획득하십시오.]
찬희는 알림음을 듣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세월 속에 늙어버린 한 명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화려하지만 낡아 버린 망토를 입고, 푸르스름한 녹이 슨 황금 왕관을 쓰고 있는 노인은 힘없는 눈으로 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어버린 눈..
힘없는 목소리.
이 모든 것이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힘없는 노인으로 보일 뿐, 절대자니, 망국의 왕이니 하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저 슬픔도, 분노도, 시간이라는 절대자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늙은 왕일 뿐이었다.
“ 이리 가까이 오라. “
“ 나의 백성과 같이
그대도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구나.
반갑구나.. “
그의 죽어버린 눈동자에 짧게나마 회한의 감정이 묻어 나왔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 모든 것이 귀찮구나.
하루빨리 영원한 안식을 얻고 싶도다. “
“ 여행자여.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이리 와, 어서 나의 목을 취하여 가라. “
잠시간의 적막이 흘렀다.
찬희와 척준경은 서로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 휴~ 이거, 뭔가 찝찝하네. “
“ 보아하니
저 양반을 죽여서 군주의 왕관을 획득해야
나갈 수 있는 것 같은데. “
“ 다 늙은 영감에게 칼 빵이나 놓는
양아치 같아서 영 껄끄럽네요. 사부. “
“ 너, 원래 양아치잖아.
그래서 그냥 지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영 거시기하네. “
찬희는 차라리 에티나가 반격이라도 했으면 싶었지만,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그때 에티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찬희를 향해 말했다.
“ 쉽게 가고 싶었지만,
자네의 마음이 그렇다면 대충
어울려 줄 터이니 준비하거라. “
의자에서 일어선 에티나는 찬희를 여행자라고 호칭한 자답게 몹시도 판타지스러운 시동어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 타오르지 않는 희망의 등불 “
“ 선한 영혼의 머리 위에 피어나는
저주받은 검은 꽃. “
“ 일그러진 정의는
불의의 또 다른 이름일지니... “
“ 헬레나의 어둠의 겁화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여
세상에 악의 씨를 뿌려라. “
실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시동어였다.
무슨 원한이 그리 깊은지, 세상에 대한 저주와 원망이 시리도록 깊게 배어 나왔다.
화르르르..
검은 불꽃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에티나가 두 손을 하늘 높이 올리고 주문을 외우자 찬희의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불덩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찬희 주변에 엄청난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제껏 만난 상대들 중, 가장 강했던 에스카르네보다 더 짙은 농도의 마력이 찬희를 압도하며 짓눌렀다.
“ 아놔.. 씨.. 히든이라고 할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 건데... “
시종일관 여유롭던 찬희의 얼굴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찬희였기에 또다시 자만이란 덫에 걸려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 그냥 죽여달라고 할 때 죽일걸.
괜한 짓을 했네.. “
콰가각..
불꽃들은 찬희를 향해서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찬희는 신속히 뇌영보를 시전하며 타격 범위를 벗어났다.
화르르
좀 전까지 찬희가 있던 곳에서 칠흑같이 검은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화염은 공간마저 불사르며 모든 것을 무로 만들어 버렸다.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위력.
그것을 본 찬희는 등골이 차갑게 식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 사부, 어떻게 좀 해봐요!
이러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 죽겠어요..
사부~우!!!!!!! “
하지만 믿었던 사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망할 영감.
또 지만 살자고 도망갔네··· “
“ 에라이!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찬희는 사부를 향한 존경의 말을 속사포처럼 퍼붓는 동시에 날라오는 불꽃 덩어리들을 정신없이 피해 다녔다.
호오!
에티나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자신의 마법을 어렵사리 피하고 있는 찬희를 보고 조금 놀라고 있었다.
‘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
‘ 팔 하나쯤은 빼앗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
‘ 이것도 피할 수 있을지, 한 번 볼까? ‘
나른함에 취해 있던 에티나의 눈에 티끌만 한 생기가 스쳐 지나갔다.
“ 날지 못하는 갈가마귀. “
“ 차갑게 식은 황혼의 그릇. “
“ 꺼지지 않는 망자의 불꽃은
영혼마저 살라버릴지니... “
에티나가 중2병스러운 시동어를 다시 외치자 찬희의 주위로 하나둘씩 불꽃들이 새롭게 생기기 시작하여 종래에는 수백 개의 불꽃이 생겨나서 찬희의 주위를 위협하듯이 돌기 시작했다.
“ 죽기 전 마지막 유희가 참으로 즐겁구나~“
“ 나에게
아직도 이런 치기가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군. ”
깊은 골짜기 같은 주름이 지며, 에티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죽이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
“ 하지만 이 늙은 목숨 값으로
자네 팔 하나 정도는 가지고 갈 생각이니
너무 서운해하지도 말고. “
조금 전까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자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에티나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연회장 전부를 뒤엎은 검은 불꽃이 갑자기 찬희에게로 쇄도해 들어왔다.
“ 크~ 으~! “
찬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연회장 허공을 가득 메운 검은 불꽃들이 찬희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세차게 회오리 치자 찬희가 서 있는 중심부에 가해지는 압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찬희의 신체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허물어지더니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은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오.. 온.. 몸이 쪼그라지는 것.. 가.. 같아. “
“ 크.. 헉.. 수.. 숨.. 쉬기가.. 힘.. 들어··· “
그때 회오리치던 불꽃들이 땅으로 내리꽂히며 무자비한 불꽃의 쓰나미가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찬희가 천천히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그곳은 작은 공간이었다.
찬희 옆에는 알 수 없는 회색빛이 따스하게 천희를 비추고 있었다.
회색빛 덩어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성함도, 사악함도, 정순함도, 타락한 심성도 모두 느껴졌다.
찬희는 천천히 회색빛 덩어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차갑고도 따스한 그 빛 덩어리는 기분이 좋은 양 온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강아지처럼..
찬희는 눈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가까운 곳에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색깔의 기운들이 찬희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따뜻하고, 시원하고,
단단하며, 포근하고,
친근했다.
찬희가 두 손을 펴고 앞으로 내밀자 천천히 부유하고 있던 작은 기운들이 찬희의 두 손에 내려앉았다.
손 위에 내려앉은 기운들은 기분 좋게 진동하며 찬희의 손바닥에 자신들을 비벼댔다.
갑자기 찬희가 있는 작은 공간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찬희는 눈을 들어 밖을 바라봤다.
온통 검은 불꽃이 작은 공간 주위를 에워싸며 몰려들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처음 와 본 곳이지만,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자신 주변을 돌고 있는 이 빚덩이들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모두 불타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키고 싶었다.
찬희의 그 마음에 반응하듯 작은 회색 빚덩어리가 자신의 덩치를 조금씩 조금씩 키웠다.
회색빛 덩이는 찬희 주변의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커진 빛 덩어리의 주위로 다섯 기운들이 호위하듯이 맴돌았다.
쿠구구구
덩치를 키운 회색빛 덩이와 검은 화염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화아~!
갑자기 회색빛이 사방을 잠식하듯 펼쳐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의 빛이 검은 화염을 베어 물었다.
그 빛은 세상의 법칙이 정립되기 이전의 혼돈과 무질서였다.
모든 법칙과 힘의 원류인 혼돈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에티나의 불꽃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강력한 고대 왕국의 제왕이자 마법사인 에티나의 검은 화염이 그렇게 정의되지 않는 힘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의식이 없는 찬희의 머릿속으로 테이아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 혼돈의 씨앗,
고유 특성 중 하나인
『탐욕』이 발동합니다. ]
[ 에티나의 마법,
『검은 화염』을 흡수하여
마력 능력치로 치환합니다. ]
만약 찬희가 테이아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면 놀라 까무러쳤을 거다.
찬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회색빛은 쏟아지는 불꽃의 회오리를 모조리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오행의 기운이 찬희를 호위하듯 맹렬하게 회전했다.
수의 기운이 맹렬한 화염의 기세를 눌렀다.
목, 금, 토의 기운이 찬희의 육체를 강화하며 화염에 대한 면역력을 높였다.
마침내 에티나가 펼친 검은 화염은 회색빛 혼돈의 씨앗에게 모조리 흡수되었고, 갈무리된 기운은 찬희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저것은 혼돈의 힘이 아닌가?! “
“ 그럼, 저 아이가 그 예언의..!? “
“ 정녕 당신이 말한
그 혼돈의 아이가 맞는 것인가! “
“ 혼돈이라는 힘이 실제로 가능했다니!!
크하하핫.. “
찬희 몸에서 흘러나오는 혼돈력을 보며 에티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앙천광소(仰天狂笑,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는다.)를 터뜨렸다.
“ 이럴 수가~! 으하하하핫! “
“ 수없이 많은 날들을 기다려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었구나!!
고맙다. 아이야.. 하하핫 “
이후로도 에티나의 웃음소리는 거대한 홀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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