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마계 - 절망의 군주 1
찬희는 멀리 보이는 오래된 성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것뿐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얻을 것은 다 얻은 것 같고 아이도 구했으니, 찬희 입장에서 어둡고 탁한 느낌의 마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마음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엉터리 백작이 살고 있는 성은 찬희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성의 위세를 부각시켰다.
드넓은 황무지에 태산처럼 서 있는 백작의 성은 보는 사람들에게 경외감까지 불러일으켰다.
‘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엄청 크네. ‘
‘ 백작이란 지위가 높긴 높은가보다. “
순간, 이 정도 성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면 엄청나게 센 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찬희는 간단히 머리를 털며 부정했다.
“ 같은 귀족이라는
카루소 남작 놈의 수준을 봐도 그렇고,
마계 병사들의 수준을 봐도 그렇고, “
“ 마족이란 놈들이 사실보다는
과장된 면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
찬희는 이곳 마계로 소환되어 상대해 온 마족들을 생각하며, 곧 만나게 될 백작 또한 어렵지 않은 상대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귀족 계급 중 남작은 가장 하위 귀족으로 백작과의 수준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고, 그리고 찬희가 곧 조우할 마족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백작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콰강.
주인이 열어주지 않은 문을 손수 부숴버리고, 백작의 성으로 들어간 찬희는 찌릿찌릿한 불쾌한 느낌이 자신을 옥죄는 것을 느꼈다.
등불 하나 밝히지 않은 성내는 어두웠고, 생기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버린 망자의 무덤처럼 느껴졌다.
기분 나쁜 첫 느낌을 뒤로하고, 찬희는 시선을 들어 성의 내부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성의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나무의자에 앉아서 우울한 기운을 풍기는, 그렇지만 한눈에 보아도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마족이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 백작인가? ‘
백작이 앉아 있는 곳에는 양옆으로 두 개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어 그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볼 수가 있었다.
그는 머리 위에는 금빛 왕관을 쓰고, 호화스러운 비단 옷 위로 검은색 털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앉아서 거친 숨을 토하고 있었다.
후아 후아..
한 번의 숨을 토할 때마다 그의 주변에는 담을 수 없는 절망과 좌절이 흘러넘쳐 안 그래도 우울한 마계의 공간을 힌층 깊은 심연의 어둠으로 침식시키고 있었다.
찬희는 백작이라 불리는 마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기품과 그에 대비되는 지독한 절망의 기운을 동시에 뿜어내는 백작은 금빛 왕관도, 호화스러운 비단 옷도, 모두 낡아서 헤어져 있었고, 손에 쥐고 있는 대검은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아 거뭇거뭇한 녹이 군데군데 슬어있었다.
크아···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독한 절망에 사로잡힌 백작이 눈을 들어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작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대검을 지팡이 삼아 나무의자에서 일어났다.
“ 네놈들이 기어이 이곳까지...
감히, 짐의 처소에게 쳐들어오다니..! “
“ 내 오늘은 기필코
네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지난 치욕을 씻어 버리겠다. “
백작은 멍한 눈으로 웅얼거렸다.
찬희 일행을 향하여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다른 존재로 착각하여 내뱉는 말인지, 아리송한 말이었다.
둥실둥실..
그의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빛이 둥실 떠 있었다.
마치 성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희롱하듯, 둥실거리는 검은빛은 백작의 귓전에 무언가를 계속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백작의 눈빛은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무언가에 홀린 것인지 초점이 없어진 눈동자와 살짝 벌려진 입, 어눌한 말투,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쓰윽.
의자에서 일어선 이름 모를 백작은 대검을 높이 치켜들고 찬희 일행이 서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내리그었다.
볼품없는 몸짓으로 힘없이 그어진 대검에서 초승달 형태의 검은 기운이 뻗어 나와,
쾅..!
찬희 일행이 서있던 곳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 뭐지? ‘
볼품없는 한 번의 몸짓에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만들어진 성의 내벽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공격보다 더 놀란 것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공격이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그은 대검에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은 정확하게 찬희 일행이 서 있는 곳을 직격했고, 단단한 성의 내벽을 파괴했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가 힘없이 내뻗은 공격에 찬희와 김예지 그리고 라이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놈들, 짐의 공격을 잘도 피하는구나.. “
“ 크흐흐흐~
그래, 그때도 그랬지.. 그때도.. “
멍한 얼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백작을 바라보는 찬희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 뭔지 모르겠지만, 정상은 아닌 것 같군.. ‘
‘ 시간 끌지 않고 바로 친다. ‘
생각을 정한 찬희는 뇌영보를 시전하여 백작의 옆으로 이동한 후, 드래곤 본 폴액스로 백작의 옆구리를 찔러들어갔다.
기습의 정수, 아니 얍삽함의 극의가 담긴 한수였다.
챙.
하지만 기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각에서 기습적으로 행한 공격이, 허우적거리며 몸을 돌려 내려친 대검에 막혀버렸다.
콰강.
그리고 이어지는 반격에 찬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우적거리며 찬희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보낸 백작은 찬희의 심장을 향해 대검을 찔러왔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당황한 찬희는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려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다가오는 대검을 피했다.
정말 어설픈 동작으로 이어지는 백작의 연계기는 상상외로 날카로웠다.
다급하게 대검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찬희의 몸에서 황금빛 정광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창날에 30cm 가량의 강기가 솟아났다.
파지직.
창강을 덧씌운 채로 또다시 백작에게 접근했다.
백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등 뒤에 나타난 찬희는 사선으로 창을 휘둘렀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양단할 기세로 휘둘러진 공격은
채챙..
또다시 어느 틈엔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작과 그의 손에 들려있는 이가 빠진 녹슨 대검에 의해 막혀버렸다.
고오오오···
군데군데 녹이 슨 대검에서 묵빛 기운이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백작의 초점 없는 두 눈에서 탁한 마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기세가 변했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좀 전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순수한 악의로 뭉쳐진 검은 기운이 백작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녹이 슨 대검에도 검은 기운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찬희의 공격 수준에 맞게 백작의 반응도 변하는 것 같았다.
이후 몇 차례의 합을 교환한 찬희는 백작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선수필승이라는 격언도 있지만, 찬희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찬희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김예지가 앞으로 나섰다.
민첩한 움직임과 강력한 발차기 공격이 위력적인, 태권도를 베이스로 한 무투가 김예지는 벼락같은 속도로 백작에게 접근했다.
이름 모를 백작 근처까지 접근한 김예지는 발을 굴러 허공으로 도약한 뒤, 몸을 최대한 비틀었다.
그리고 비틀려진 허리의 탄력을 이용하여 허공에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이이..
몸이 회전하는 상태로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김예지는 원심력을 이용하여 백작의 정수리에 내려찍기를 꽂아 넣었다.
요기에 신성력까지 더해진 그녀의 공격은 마계의 공간마저 베어버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 들어갔다! ‘
비틀거리며 서 있는 마족에게 치명타를 선사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퍽..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들려오는 소리가 이상했다.
분명 공격은 백작의 머리 위로 제대로 들어갔는데, 기대했던 소리가 아니라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김예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백작의 정수리를 향해 꽂은 왼발이 가죽과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손에 잡혀 있었다.
콰강..
김예지의 왼발을 잡은 백작은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 쳐 버렸다.
엄청난 힘에 의해 바닥에 처박힌 김예지의 몸이 기괴한 모습으로 꺾여 있었다.
꺾인 팔과 다리에는 삐죽하게 조각난 뼈가 튀어나와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백작은 한 번의 공격으로 김예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태가 심각한 것을 인지한 찬희는 급하게 그녀를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기대할 것은 오직 인벤토리에 귀속되어 있는 재생 마법과 보존 마법뿐이었다.
김예지가 빠져나간 전장은 이제 찬희와 라이밖에 남지 않았다.
콰가가가···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본 라이는 섣불리 백작에게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번개 공격을 가했다.
하늘에서 황금빛 뇌격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가 뇌격의 창이 되어 백작의 몸을 꿰뚫고 파괴했다.
우우우웅.
찬희의 양손 위에 황금빛으로 가득한 빛 덩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빛 덩이를 하늘에서 떨어지는 뇌격에 얻어맞고 있는 백작의 머리 위로 날려보냈다.
콰가가강..
엄청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두 번의 폭발은 백작을 통째로 삼켜버리고도 힘을 잃지 않고 주변의 성까지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찬희와 라이는 서둘러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 밖으로 몸을 피했다.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던 고성은 성 중앙에서 일어난 황금색 폭발에 의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마계의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폭발은 고성을 잡아먹고도 여전히 위력을 잃지 않은 채 새로운 희생양을 찾는 듯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황금빛의 격류 한 중앙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쿠과과과..
두 기운이 서로 반발하며 경계선에서 화염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또다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조금 전의 폭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강력한 폭발이었다.
마계의 하늘이 찢어지고 대지가 뒤틀렸다.
“ 라이. “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에 찬희는 라이를 불러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저 폭발의 후폭풍이 얼마나 강할지 찬희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를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찬희는 질주와 뇌영보를 번갈아 시전하며 후폭풍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후폭풍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도중에도 신체의 면역력과 재생력 그리고 회복력을 높여주는 오행신공을 끌어올리고, 신성력이 담긴 기운을 피부 위로 퍼뜨렸다.
쿠르르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짜내고 짜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도망치는 찬희의 등 뒤로 섬뜩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태초의 괴물같이 느껴졌다.
심지어 점점 더 가까이 들리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을 쳤지만,
콰아아앙···
세상을 파괴하려는 절망적인 괴물의 아가리는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찬희마저 집어삼켜버렸다.
후폭풍에 휩쓸린 찬희는 오행신공은 물론 신성력까지 최대로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다행히 폭발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후폭풍의 위력은 상당수 줄어들어 있었다.
잠시 후, 괴물같이 세상을 삼키던 후폭풍이 가라앉고 찬희는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 크게 다친 곳이 없다. ‘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한 찬희는 다시 백작의 성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만 존재할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고오오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줄 알았던 곳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검은 기운은 이내 횃불처럼 타오르더니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에 싸여 있는 자는 이름 모를 백작이었다.
화산처럼 타오르는 검은 기운을 품은 백작은 성큼성큼 찬희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빛이 함께하고 있었다.
찬희는 검은빛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 빛의 정체는 찬희에게서 곡옥을 회수하려 했던 '나태의 좌'였다.
마계의 하늘에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마신 중 하나.
그리고 그 옆에 검은 기운을 활화산처럼 뿜어내고 있는 자는 전대 마왕의 자리를 차지했던, 지금은 현재의 마왕에게 모든 것을 잃고 유폐되어 이 조그마한 성에 갇혀버린 암흑성, 에스카르네였다.
마계에는 72위의 군주가 존재했고, 그 72위의 군주 중에 가장 강한 자가 마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마계.
그런 마계에서 도태된 전대 마왕, 한때 암흑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에스카르네는 모든 권력을 잃고,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능력을 봉인당한 채 유폐되어 있었다.
나태의 좌가 이곳을 지배하는 백작을 엉터리라고 이야기한 것도, 애초에 에스카르네가 백작이 아니었다는 은연중의 표현이었다.
한낱 백작 따위가 아닌 이미 한 세상을 지배했었던 전대의 마왕.
벌레 같은 인간이 상대하게 될 존재는 아무리 일신의 능력이 봉인되어 있지만, 전대의 마왕인 에스카르네라는 조롱의 의미였다.
물론, 천계의 지낭인 하얀 빛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태의 좌의 제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전대의 마왕이든 현재의 마왕이든 그들은 신격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었기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에스카르네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기운에 마계가 비명을 지르며 떨기 시작했다.
검붉은 하늘은 천둥과 번개가 치고, 대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전대 마왕 에스카르네가 가지고 있는 일신의 무력은 마계의 하늘과 땅을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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