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보급품 털기 1
아침 일찍 일어난 찬희는 일일행사로 늘 하는 ‘찬희! 새롭게 태어나기’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아침밥을 먹고 임무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 자~ 우울한 하루는 지나가고,
새로운 하루가 도래했으니..! “
“ 새 마음, 새 뜻으로
희망찬 미래를 설계해 볼까나? “
찬희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밝은 얼굴로 또 다른 하루를 맞이했다.
“ 근데 이 양반은 또 어딜 간 거야??
왜 또 코빼기도 안 보여? “
찬희의 머릿속에 전날 투덜거리던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 애새끼를 맡겼으면
좀 내버려 두기라도 하든가..
뭐가 이렇게 시키는 게 많아?? ]
테리토리에 있으면서도 차원 동맹에서 따로 시키는 업무가 많은지 척준경은 연신 투덜거리며 무언가를 부산하게 하고 있었다.
보고서도 작성하고, 어딘가와 분주하게 교신도 하고···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썩어 들어갔다.
“ 뭐, 나름 사정이 있겠지?? “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없이 사라진 척준경은 놔두고 혼자 던전을 향해 출발했다.
흐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두 눈에 보이는 것은 우울한 잿빛 하늘과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늪지대였다.
“ 뭐가 이렇게 우중충하냐?? “
“ 이런 곳엔 도대체 어떤 종족이 사는 걸까? “
자신이라면 일분 일 초도 살고 싶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
컹컹..
함께 입장한 라이도 찬희의 말에 동조하듯 주둥이를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구로부터 690만 광년 떨어진
NGC300이라는 행성에 입장했습니다. ]
[ 저번 임무에서
드라큘라를 쓰러뜨림으로 인해서
고찬희님의 보유 능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습니다. ]
[ 그래서 차원 동맹에서는
좀 더 중요도가 높은 임무에
고찬희님을 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 중요도가 높은??? ‘
‘ 그럼,
이전보다 난이도도 높아진다는 말 같은데.. ‘
[ 이곳은
마왕군의 주요 보급기지가 있는 행성입니다. ]
[ 단신으로 적의 보급기지를 파괴하십시오. ]
메시지를 들은 찬희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먼저 임무의 난이도가 엄청나게 상승했다.
적의 주요 보급기지라면 그곳을 지키는 방어 병력 또한 잘 갖추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곳을 단신으로 파괴하라니???
‘ 슈퍼컴퓨터, 바이러스라도 먹은 건가? ‘
‘ 이런 중요한 임무에,
꼴랑 나 하나만 보낸다고?? ‘
찬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막말로, 성공하면 좋고 아님 그냥 여기서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 아무리 그래도 이런 중요한 임무에
나 하나만 투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요? “
[ 믿으세요.. ]
[ 우리 슈퍼컴퓨터님께서는
우주의 법칙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
[ 슈퍼컴퓨터님께서
고찬희님을 이곳에 보냈다면
응당 이유가 있을 겁니다. ]
또 나왔다.
저 맹목적인 믿음이···
어딘가 모르게 사이비 냄새를 풀풀 풍기는 테이아의 멘트를 곱씹었다.
‘ 믿으라고?? ‘
‘ 뭘?? ‘
‘ 꼴랑, 기계 덩어리를?? ‘
‘ 진짜 미쳤거나 아님
정말 뭔가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
‘ 그래도 이제까지 쟤들 말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한 번 더 믿어 볼까? ‘
어느 정도 테이아에게 신뢰를 갖고 있던 찬희는 이번에도 믿어보는 쪽을 선택했다.
‘ 그래, 한 번 믿어보자. ‘
‘ 무려 차원 동맹 내에서 애지중지하는
슈퍼컴퓨터인데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겠지··· ‘
그렇게 생각한 찬희는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보급기지는
앞에 보이는 언덕 너머에 있습니다. ]
[ 이번 임무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
테이아의 간략한 설명이 끝이 나고, 멀지 않아 보이는 곳에 거뭇거뭇 한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 그리 멀지는 않아 보이네.. “
찬희는 눈앞에 보이는 언덕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퀴퀴하고 꼬릿꼬릿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늪지대가 찬희의 발을 잡아끌었지만, 이것도 체력 훈련의 일종이다 생각하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갔다.
언덕을 향해 이동한 지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눈앞에 보이는 언덕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 생각보다 가깝진 않나 보네?? “
살짝 짜증이 묻어있는 말투에서 찬희의 현재 심정이 드러났다.
짙은 먹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NGC300 행성은 대낮인데도 시야는 어둡고 탁했다.
심지어 좀 전까지는 없었던 안개마저 스멀스멀 피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저놈의 언덕에 도착할 수 있는 거야? “
“ 이놈의 늪은 또 왜 이리 질척거리는지! “
찬희는 살짝 옆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걷고 있는 라이도 늪지대에서 움직이는 것이 불편했는지 주둥이가 일그러진 채로 연신 그르렁 소리를 내고 있었다.
스르륵..
막 피어오르는 안개 사이로, 늪 표면에 찬희와 라이를 향해 다가오는 물결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으르릉..
무언가를 느낀 라이가 먼저 전방을 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 응? 뭐지? “
변화를 눈치챈 찬희도 방어자세를 갖추며 앞으로 일어날 변화에 대응했다.
찬희를 향해 다가오는 물결은 점점 더 많아지고 빨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차아~
엄청난 크기의 괴물 지네가 솟구쳐 올랐다.
늪 안에서 튀어나온 괴물 지네로 인해 더럽고 냄새나는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고, 가만히 서 있던 찬희도 진흙 세례를 받아 온몸이 더러워졌다.
라이의 몸에도 검은 진흙이 묻어 탐스러운 은색 털이 지저분해졌다.
“ 아씨, 더러워..
진짜, 짜증 나는 곳이네.. “
“ 야, 이, 씨~!! 이거 귀한 거야..!
돈 주고도 못 산다구!!! “
애지중지하는 은신 망토와 재생 의복에 더러운 흙이 튀자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짜증이 한 번에 들불처럼 터져 나왔다.
찬희에게 괴물 지네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새로 장만한 옷이 더러워지는 것에만 온통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약자인 인간은 자신보다 큰 동물이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깊은 산속이나 울창한 숲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를 만나면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고 몸이 굳어버리고 만다.
그렇게나 약한 인간이 호랑이보다 몇 배는 더 큰 괴물 지네를 만나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일제히 자신을 덮쳐온다면 말이다.
십중팔구는 본능적인 공포에 의식은 마비되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괴물의 먹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한데, 찬희는 수십 마리의 괴물 지네가 자신을 덮치는 상황에서도 옷이 더러워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찬희는 괴물 지네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크기가 3m가 넘는 괴물 지네가 찬희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 이 새끼들, 다 죽었어.. “
이곳, 늪지대의 최상위 포식자는 괴물 지네가 아니라 바로 찬희였다.
콰아···
짜증을 넘어 분노를 느낀 찬희의 몸에서 미증유의 거력이 뿜어져 나왔다.
황금빛 신성력이 가미된 기운이 폭발하듯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모습은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샤이아인으로 변신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기운을 폭발시킨 찬희는 드래곤 본 폴액스를 꺼내들지도 않고서 빛처럼 날아올라 자신을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괴물 지네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갔다.
쾅.
그리고 단 한방의 주먹질로 가장 가까이 접근한 괴물 지네의 머리를 터뜨려 죽여버리고, 다른 괴물 지네를 향해 빛살처럼 다가갔다.
아우우우~~
은색 갈기털로 뒤덮여 있는 고대 생물 라이가 늑대 특유의 긴 하울링을 끝내고, 평소에 큰 개정도였던 몸체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괴물 지네와 비슷한 크기로 커졌다.
캬아아···
그리고 다가오는 괴물 지네를 향해 날선 적의가 가득한 포효를 내질렀다.
라이는 모든 늑대 종족의 모체로서 고대부터 존재했던 마수.
한낱 괴물 지네 따위가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가 되어 폭발했다.
라이의 포효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에겐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한다.
그런 위압감은 당연히 괴물 지네들에게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고, 한순간 찾아온 공포라는 감정은 괴물 지네들의 본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벼려진 발톱이 허공을 가르자 괴물 지네의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사나운 이빨이 괴물 지네의 목덜미를 물어 단번에 끊어버렸다.
찬희와 라이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크기가 3m가 넘는 괴물 지네 수십 마리가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
“ 그지? 라이야~ “
찬희는 옆에서 긴 혀를 빼물고 거대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라이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이게 라이의 본래 모습이구나.. ‘
찬희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라이를 올려다보았다.
“ 사랑한다. 라이야..
우리 끝까지 가자. 하하 “
든든한 동반자를 얻은 찬희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원래 친구란 그런 것이다.
옆에 있으면 든든하고 세상 두려울 것이 없는 그런 존재들···
라이는 찬희에게 그런 든든한 친구로 다가섰다.
“ 좀 많이, 아니 아주 많이 짜증 나지만,
슬슬 다시 가 볼까? “
찬희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한 발짝 움직이자, 거대한 크기로 변한 라이도 본신의 모습으로 언덕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괴물 지네 수십 마리를 쓰러뜨린 후, 찬희와 라이 앞에는 무수히 많은 괴물 지네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찬희와 라이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모두 한 줌 핏물로 변해 버렸다.
흐렸던 하늘에 어느샌가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멀리 보이는 언덕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 아~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야?? “
“ 그나저나 어두워지면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곤란한데··· “
이대로 어둠이 내려앉으면 늪지대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늪지대뿐, 밤을 지새울만한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컹컹~
그런 찬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라이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등 위에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 그래!!
내가 왜 이제까지 이 생각을 못 했을까?? “
“ 라이, 넌 천재야.. 천재 늑대, 라이.. 가자! “
라이의 등 위에 올라탄 찬희는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얻은 것처럼 득의양양(得意揚揚) 한 모습으로 라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 으아아아아~ “
곧이어 찬희의 비명소리가 온 사방에 퍼져나갔다.
라이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순식간에 등 뒤로 지나가고, 때마다 나타나는 괴물 지네들은 찬희와 라이의 합동 공격에 맥 없이 쓰러졌다.
세상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 괴물 지네들은 소원대로 해주는 게 사람 된 도리 아니겠는가?
찬희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야멸차게 몰려드는 괴물 지네들을 박살되며 약 1시간 동안 달린 결과 광활한 늪지대를 벗어나 마른 땅에 도착했다.
어둑어둑하던 하늘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찬희는 야영을 준비하기 위해 주위에 마른 나무를 모으고 불을 지폈다.
타닥, 타닥,
붉은 모닥불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어둠이 내려앉은 대지에 타오르는 모닥불은 밤바다를 홀로 밝히는 등대처럼 세상에 작은 빛을 뿌려주었다.
찬희는 라이의 배를 베고 누웠다.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일대의 괴물 지네들이 찬희의 손에 몰살당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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