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오염된 호구속으로 2
휙휙..
찬희는 황량한 폐허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던 순간부터 찬희는 질주 스킬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레벨 8에 이른 질주는 시전자의 이동속도를 40% 상승시켜 주었다.
근력과 민첩, 체력 수치가 거의 500에 육박하는 찬희에게 이동속도 40%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거기에 더해 착용자의 이동속도를 30% 상승시켜주는 드라큘라의 신속의 부츠까지 신고 있는 찬희의 달리기 속도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빠르게 도쿄를 향해 달려가던 찬희의 감각에 위험 신호가 포착되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느낌이 사방에서 밀려들어왔다.
찬희는 달리던 속도를 늦추며 사방으로 기감을 확장시켰다.
생물들이 살 수 없는 땅은 인간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때로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라도 터를 잡고 살아가는 괴생명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찬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발달한 오감을 극대화하며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크르르..
지진으로 땅이 뒤집어져 생성된 굴곡진 지형 뒤에 숨어 있던 괴생명체들이 찬희를 포위하며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 외형은 오크를 연상시키는데 군데군데 피부가 녹아내려 꼭 오크 좀비를 보는듯했다.
어떤 놈은 얼굴의 반이 녹아내렸고, 또 어떤 놈은 팔과 몸뚱이가 한데 붙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뚱거렸고, 또 어떤 놈은 가슴이 녹아내려 갈비뼈와 신체 내장이 그대로 노출된 놈도 있었다.
대격변으로 차원 결합이 일어나고, 이곳으로 소환된 몬스터들은 방사선에 피폭까지 당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버리고는 죽지도 못하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 하아... 내가 이제껏 몬스터 사냥하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진짜~ “
찬희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오크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 야, 이 모지리들아..
내가 못 본척해 줄 테니까, 그냥 가라. “
“ 진짜 불쌍해서 이번만은 봐줄 테니까! “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손을 앞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좀비로 변해버린 오크들은 이지마저 상실한 듯 그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찬희를 향해 어기적 어기적 다가오고 있었다.
후~
“ 내 살아생전에 자비란 걸
한번 베풀어 보려고 했는데··· “
“ 역시 그것도 하던 놈이나 하는 거지..
그렇지? “
찬희는 다가오는 좀비 한 마리에게 친근하게 질문을 던진 후 번개처럼 다가가 목을 베어버렸다.
“ 어쩌면 이게
니들한테는 자비일 수도 있겠다.. “
찬희의 눈에 황금빛 정광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온몸에 황금빛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찬희의 모습이 사라졌다.
파지직..
찬희가 가문의 비전보법인 뇌영보를 시전했다.
번개처럼 사라졌다가 오크 좀비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찬희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목을 베어버렸다.
눈 깜짝할 동안 수십 마리의 오크 좀비를 쓰러뜨린 찬희는 오크 좀비들의 심장 부근에 있던 마석만 챙긴 후 서둘러 도쿄를 향해 이동했다.
“ 니들은 또 뭔데?? “
도쿄를 향해 가는 길은 험난했다.
조금만 이동하면 방사선에 오염된 새로운 좀비 몬스터들이 나타나 찬희의 길을 막아섰다.
벌써 10번째 좀비 몬스터들과 조우한 찬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 야아~! 시간 없다고, 이 새끼들아!!! “
“ 하! 진짜, 나중에 놀아줄 테니까,
집착 좀 하지 마라!
이 스토커 새끼들아.. “
그럴 때마다 찬희는 온갖 짜증을 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 마지막에는 사정도 해 봤지만 이지를 상실한 좀비들에게는 통할 리가 만무한 일.
“ 아, 진짜! 발목 좀, 잡지 말라고!! “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찬희를 향해 늑대를 닮은 좀비 몬스터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순간, 짜증이 폭발하여···
“ 야! 이 새끼들아!! 말 좀 들어엇!!!!! “
달려드는 늑대 좀비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찬희를 향해 달려들던 늑대 좀비가 공포에 질려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다른 늑대 좀비들 또한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떤 놈들은 공포에 질렸고, 또 어떤 놈들은 스턴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입고 있는 사슬 경장 갑옷에 귀속되어 있는 드래곤 로어가 생각이 났다.
“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
찬희는 앓던 이가 빠진 얼굴로 상태 이상에 걸려있는 늑대 좀비들을 스쳐지나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 후로도 수십 번 좀비 몬스터들과 조우했지만 그때마다 드래곤 로어를 시전해 몬스터들을 상태이상에 빠트린 후 좀비들을 쓰러뜨렸다.
물론 마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찬희는 드래곤 로어 덕분에 빠른 속도로 도쿄 시내를 향해 이동했고 달리고 또 달려, 석양이 질 무렵 도쿄 도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휴~ 삭막하네.. 진짜.. “
보이는 것은 오로지 무너진 건물의 잔해뿐, 사방을 둘러보아도 멀쩡하게 서 있는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폐허가 된 도시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은 황량한 쓰레기 더미뿐이었다.
찬희는 아무런 잘못 없이 죽음을 당한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짧은 묵념을 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고개를 숙이고 짧은 기도를 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은 불어오는 바람마저 찝찝하고 불쾌하며 짜증이 났다.
찬희는 복잡한 심정을 애써 달래며 인벤토리에서 드라큘라의 은신 망토와 김예지가 주고 간 헬멧을 꺼내 들었다.
“ 휴~ 어쩔 수 없지??
놈들의 본거지가 어딘 줄도 모르고,
도쿄 시내 길도 모르니··· “
찬희는 황민회의 본거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방사능 오염지역 내에 숨어있는 단체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 각성자 협회가 정부의 협조를 받아 일본 궤도를 돌고 있는 관측 위성까지 사용했지만 일본 황민회는 쉽사리 꼬리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 하지만 갈 데가 없는 것도 아니지.
오라는 곳은 없지만,
확인해 봐야 할 곳은 한군데 있거든.. “
도쿄로 오기 전 찬희는 김기찬 과장과 미팅을 가졌었다.
‘ 한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합니다. ‘
‘ 왕가의 칼이 되고 싶은 일본 황민회가
성지로 여기고 있는 곳,
바로 일본어로 고쿄라고 불리는
일본 왕이 살던 궁이죠. ‘
‘ 그놈들에게 일본 왕의 거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죠.
분명 그곳에
놈들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겁니다.‘
찬희는 김기찬 과장이 했던 말을 되뇌며, 우거지상을 한 채로 손에 들고 있던 방탄 헬멧을 썼다.
김예지의 지적처럼 도쿄 시내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찬희로서는 일본 왕의 거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드라큘라의 은신 망토도 착용했다.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인 만큼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무리 찬희의 무력이 뛰어나도 놈들이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 찬희의 머릿속에 번쩍이는 생각이···!
“ 잠깐만!? 나 이거 초반부터 착용했으면,
좀비들에게 그 고생 안~! “
찬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뒷말을 삼켰다.
옛날부터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했었는데, 오늘 찬희는 안 해도 될 고생을 참 무진장했다.
“ 씨...X··· “
흘러나오는 한 줄기 눈물을 훔치며 모든 장비를 착용한 찬희의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언밸런스의 끝판왕, 최종 보스.
검은 헬멧을 쓰고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망토와 사슬 갑옷을 착용하고 가죽부츠를 신은 모습은 거리의 행위 예술가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살짝 부끄러웠지만···
“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쩝.. “
또다시 씁쓸하게 뒷말을 삼킨 찬희는 드라큘라의 망토에 귀속되어 있는 은신 스킬을 사용하여 서서히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앞으로 100m 더 가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세요.. ]
[ 지금입니다. 우측 골목으로 꺾으세요. ]
[ 그리고 계속해서 달리다 보면
돌다리가 나옵니다. ]
‘ 나 참, 여기 골목이 어딨다고? ‘
헬멧에서 들려오는 길 안내 서비스는 찬희가 마주하는 현실과는 아주 작은 괴리가 있었다.
대격변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를 기반으로 한 길 안내 서비스는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현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에도 골목으로 들어가라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무너진 고층건물들의 잔해뿐이었다.
찬희는 길 안내 서비스가 알려주는 대로 방향을 꺾은 후 무너진 잔해를 타고 넘으면서 앞으로 이동했다.
은신 망토를 착용하고 있어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현재 그는 높은 민첩과 근력 수치를 바탕으로 마치 무림의 고수처럼 건물의 잔해와 잔해를 뛰어넘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한 번의 도약으로 수십 미터를 이동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본다면 엄청난 인기인이 될 것이지만 불행히도 이곳에는 사람은커녕 똥개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철저히 고립된 곳이었다.
한참을 이동하다보니 물이 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나 있는 넓은 수로가 보였고 이중으로 된 아치형 하단을 가진 돌다리도 보였다.
지진 이전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것 같은 돌다리는 애석하게도 중간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돌다리 뒤로 흉측한 모습으로 비틀어진 철교가 보이고, 수로 앞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반쯤 무너져 내린 2층 구조의 건물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부러지고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얼기설기 뒤엉켜서 스산함을 더욱 가중시켰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흉물스러운 폐허를 두 눈에 담고 있던 찬희의 귓가에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 돌다리 보이시죠? ]
[ 지금 보이는 돌다리가
메가네바시라는 다리입니다. ]
[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철교가
니주바시란 철교고요. ]
[ 일본 왕의 거처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는 곳이죠. ]
[ 그리고 언덕 위에
2층 구조물이 보이실 거예요. ]
[ 그건 망을 보던 성루인데
이름은 후시미야구라라고 합니다. ]
[ 아마 사진으로 많이 보셨을 거예요. ]
[ 나름 유명한 건물이거든요. ]
[ 아차 지금은 남아 있지 않겠구나··· ]
오~ 친절한 설명 감사해요.. 가이드 언니..
이참에 이쪽으로 전직하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 봄이 좋을듯하네요..
[ 뭐, 어쨌거나
제가 말씀드린 것들이 보인다면
일본 왕궁에 도착한 겁니다. ]
[ 일본 황민회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내원 쪽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
[ 다리를 건너 쭉 가시다가 ···. ]
찬희는 길 안내 겸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고 도중에 통신을 종료했다.
“ 아이고야~ 이제 좀 살 것 같네..
어찌나 쫑알대는지.. 고막 나가는 줄··· “
통신을 해제한 후, 헬멧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일본 궁 안으로 진입했다.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석양은 밀려오는 짙은 어둠에 자리를 내어주고 서산으로 넘어갔다.
사위가 어둠에 물들은 늦은 저녁 시간, 찬희는 여전히 은신을 유지한 채로 궁안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모두 폐허의 잔해뿐, 수상한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아~ 진짜,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궁궐 내부를 최대한 기척을 숨긴 상태로 새벽이 될 때까지 수색했지만, 작은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찬희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각도 후각도 모두 차단한 채 오로지 청각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분산되었던 오감이 하나로 통일되자 그동안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하나둘씩 들려왔다.
휘이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찬희의 귓전을 간지럽히고,
덜그덕..
바람에 날린 쓰레기 뭉치들이 덜그덕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작은 소리들이 들리는 것에 고무된 찬희는 오행신공을 시전하여 청각의 범위를 좀 더 넓게 벌렸다.
그러자 더 넓은 범위에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더미들 소리뿐이었지만, 찬희는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오행신공의 도움을 받아 청각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길 수시간, 최대치로 끌어올린 오행신공과 더불어 찬희의 집중력도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중 인공적인 것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엄청난 집중력 탓인지 찬희의 얼굴은 활화산처럼 붉게 물들었고,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소리에만 집중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찬희는 옆에서 누구 발길질하고 침을 뱉는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바람이 잦아든 폐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는 풀벌레 소리도,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들고양이 소리도, 그 어떤 생명의 소리도 죽음의 땅에선 들리지 않았다.
위이잉~~
바람이 물러간 자리에 희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잡았다!
찬희는 지체하지 않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폐허로 변한 건물 앞에 이르렀다.
빠각.
무언가가 찬희의 발에 밟히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식 한자가 쓰여있는 낡은 현판이었다.
무심코 현판을 바라본 찬희는 낯이 익은 글자를 발견했다.
한자를 잘 알지 못하는 찬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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