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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SG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취룡
작품등록일 :
2012.08.20 01:36
최근연재일 :
2012.08.20 01:36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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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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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20,281

작성
12.07.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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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Chapter 11.

DUMMY

인류는 자신들의 행성에 다가오고 있는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망칠 수도 없다.

막아낼 수도 없다.

이민선단을 조직해 태양계 밖으로 도망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절망의 안개는 이미 목성을 뒤덮은 지 오래였다. 도망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인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일부는 여전히 이민선단 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인류의 역량을 쪼개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거 당했다. 설사 절망의 안개가 우리 태양계를 뒤덮고 있지 않더라도, 어차피 이민선단을 구축해 태양계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멸망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진실을 아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너무 늦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절망의 안개가 화성을 집어 삼켰다.

시간이 없었다. 계획을 수립하고 결행하기 위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진실을 아는 자는 사람들을 선별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대신해 시간을 벌고, 계획을 실행할 최후의 희망을 이 세상에 남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일곱 자루의 검이 만들어졌다.



&



일단의 방침이 수립되자 미호와 롤랑드의 24시간 격리실 라이프가 끝이 났다. 여전히 하루의 절반 정도는 안전을 위해 격리실에서 보내야만 했지만 그 외의 시간은 -시현과 함께한다는 전제 하에- 본부 내 어디에서 보내도 괜찮았다.

롤랑드는 시현과 체육관에서 서로 검격을 나누었다. 신체 능력만 놓고 보자면 특정 부분에 있어서 시현보다 앞서면 앞섰지 결코 뒤지지 않는 롤랑드였다. 순수한 검술 싸움이 되자 제법 그럴듯한 그림이 나왔다.

미호는 체육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그런 롤랑드와 시현의 비무를 구경하였다. 옆에는 마찬가지로 쪼그리고 앉은 -하지만 미호처럼 궁상맞지는 않은- 클레어가 열심히 시현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도 롤랑드 응원해야 하나.’

미호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응원을 하자니 뭔가 너무 어색했다. 그 날 그 사건 이후로, 정확히는 35시간 동안 미호와 롤랑드가 나눈 대화는 단 한 마디도 없었으니까.

‘으으… 쪼잔해!’

남자가 되어가지고! 이럴 때는 남자가 먼저 대범하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깟 옛날에 헤어진 여자 이름 한 번 말했다고 삐쳐서는!

하지만 미호는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미호도 알았다. 단순히 옛 여자 이름을 입에 담은 것뿐이라면 롤랑드도 저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미호는 직접 보았으니까. 롤랑드의 영혼에 남은 기억을 통해 롤랑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롤랑드가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모두 다 똑똑히 보았으니까.

미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발끈하긴 했다지만 왜 하필 그 때 그 이름이 튀어나온 걸까.

‘아으으 짜증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과거의 여자보다 현재의 여자가 중요한 거 아닌가?

‘아니지. 난 현재의 여자가 아니지. 정신 차려 윤미호! 합체 때문에 그, 그깟 키스 몇 번 한 것뿐이야! 괜히 알아서 코 꿰이지 마!’

도리질을 친 미호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롤랑드와 시현의 비무를 보았다.

화려했다. 현란했다.

시현은 애당초가 속도로 승부를 보는 공격형 스타일에 가까웠고, 롤랑드 또한 쾌검과 강격을 결합한 속도를 장기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둘이 비무를 펼치니 검격의 화려함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진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살벌하기 짝이 없음에도 두 사람은 이따금씩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즐거워보였다.

빤히 바라보던 미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화끈거림을 느끼자마자 시선을 돌리고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잘생기기는 했어.’

멋있기도 하고. 여자는 남자가 땀 흘리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에 약하다고 하던데 진짜였나. 아니면 인정하기 싫지만 콩깍지가 어느 정도 쓰인 건가.

미호가 혼잣말로 자기합리화를 진행할 즈음, 클레어가 시현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굴려 미호를 보았다. 피식 웃으며 옆구리를 찔렀다.

“꺅?!”

갑작스런 찌르기에 - 그것도 민감한 부위를 자극하는 - 미호가 반사적으로 작게나마 비명을 지르자 비무를 펼치던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멈추고 미호와 클레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레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고, 미호 역시 허둥거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현과 롤랑드는 다시 비무를 시작했다. 미호가 클레어를 원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그냥. 네 하는 꼴이 너무 귀여워서. 괴롭히고 싶어지더라고.”

클레어가 헤실헤실 웃으며 그리말하자 미호는 인상을 구겼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년이나 내가 무슨 동네호구로 보이나? 그리고 귀여운 거랑 괴롭히고 싶은 거랑 무슨 연관인데?

“뭐야, 무슨 고민 있어? 너 쟤랑 싸웠냐?”

클레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미호는 입술을 조금 삐쭉이더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어제 이야기 하다가 제가 저 사람 옛날 여자 친구 이름을 입에 담았어요. 그런데 그 여자랑 굉장히 아주 최악으로 헤어진 사이거든요.”

“그래서 지금 저 빛돌이가 삐친 거야?”

“…빛돌이요?”

“번쩍번쩍 빛나잖아.”

클레어가 턱짓으로 롤랑드의 듀렌달을 가리켰다. 빛돌이라. 그럴듯하군.

“아무튼 그래서 삐친 거야?”

“…네, 아마도.”

“거참 속좁네. 저런 애랑 왜 사귀냐?”

“사, 사귀는 거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미호가 얼른 자기 입을 막고 눈동자를 굴렸다. 다행히(?) 시현과롤랑드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클레어가 미호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직하게 물었다.

“사귀는 거 아냐?”

“아니에요.”

“그런데 쟤랑 합체하려고 그렇게 진한 키스를 해?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저 합체하기 위해서? 너도 여자잖아? 그런데 그게 돼? 아무 감정도 없는 상대랑 그렇게 혀를 섞는 게 된단 말이야?”

“으으….”

거침없는 스트레이트가 미호의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너네 키스하는 거 봤는데 누가 봐도 그건 감정 없는 키스가 아니었는데?”

“아, 아무튼 아니에요! 지금은 아니라고요!”

“오호, 지금은 아니구나.”

클레어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미호의 뺨을 꼬집었고 미호는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다들 자기를 못 괴롭혀서 안달들인지!

“아, 아무튼!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만 괴롭혀요. 그보다 둘 다 정말 대단하네요.”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봐야 자신에게 좋을 바가 없었다. 미호는 어거지로 화제를 전환했고, 클레어는 의외로 순순히 화제 전환을 받아들였다.

“우리 시현이야 원래 대단하지만 저기 네 낭군님도 제법인걸?”

“…낭군님 아니라니까요.”

“그럼 남친.”

“…마음대로 하세요.”

클레어는 까르르 웃었다. 다시 한 번 미호의 뺨을 꼬집어준 뒤 살갑게 말했다.

“아무튼 걱정하지 마. 야한 여자가 놈들을 찾아내면 시현이가 매처럼 날아가 다 끝내버릴 거고, 그 놈들이 겁도 없이 쳐들어와도 시현이가 다 끝장낼 테니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한숨과 함께 미호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런 미호가 위치한 지하로부터 수직으로 1800미터 위에 위치한 상공.

“지체할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빠르게.”

“별의 아이를 제압하고 윤미호를 확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지개 방벽은 무너지고 있으리라.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마검 다인슬레프, 성검 칼리번, 요정검 엑스칼리버.

세 자루의 검들이 서로를 보았다.

“내가 시온 알테미스를 제압한다.”

“나와 엑스칼리버가 별의 아이를 제압하고 윤미호를 확보한다.”

역할 분담. 다인슬레프가 다시 물었다.

“나머지 잡것들은 어떻게 할 예정이지?”

“이 세상의 존재들이 SG라 부르는 우리 친구들이 해결해 주겠지.”

칼리번은 허공에서 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조직의 대한민국 지부. 손가락을 튕겼다.

“보내줘, 발뭉.”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리 약조한 신호만은 전달되었다.

세 자루의 검의 인도. 네 자루의 검의 전송.

다인슬레프의 초인적인 청각에 비상경보음이 잡혔다. 몇몇 인간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들렸다.

“가자.”

칼리번이 선언했다. 세 자루의 검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



“지하 19층 미확인 SG 3개체 출현!”

“지하 11층 미확인 SG 6개체 출현!”

“지하 5층, 지상 2층 미확인 SG 각 2개체 출현!”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데이비드 킴이 시온 알테미스를 보았다. 시온 알테미스를 한차례 이를 악물더니 빠르게 명령했다.

“지부를 포기한다. 윤미호와 롤랑드는 지금시간부로 별의 아이와 행동을 함께한다. 지부 내 전인원은 각자 대피하라. 나와 데이비드 킴은 창천으로 이동한다.”

SG가 13개체나 출현했다. 평소라면 시온 알테미스 혼자서도 전부 처리할 수 있는 숫자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SG가 동시에 13개체나 지부내에 나타났다? 어떻게 보아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다인슬레프와 SG는 분명 연관이 있다. 당장에 다인슬레프가 한국에서 부활 할 때도 미확인 SG 3개체의 개입이 있었다.

그러니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 적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통제실 벽이 붉게 물들었다. 붉고 점성있는 액체가 벽과 바닥을 뒤덮었다.

영적영지 피 웅덩이.

“다인슬레프!”



갑자기 울린 경보음에 시현과 롤랑드는 급히 검을 거두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호와 클레어를 향해 달려갔다.

“무슨 일이오?!”

롤랑드에게 미호에게 물었다. 안젤리카 사건 이후 거의 하루 반나절 만에 처음으로 미호에게 말을 건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미호는 입술을 깨물고 스피러 쪽을 주시하였다.

“긴급지령 01호입니다! 반복합니다! 긴급지령 01호입니다!”

긴급 탈출 명령. 봉쇄명령과 달리 오로지 도주에만 집중하라는 명령.

“일단 탈출해요!”

미호가 급히 말했고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무슨 일이냐고 토를 달 정도로 상황 파악을 못하는 사람은 일행 중에 없었다.

“제가 앞장설게요!”

시현이 앞으로 나섰다. 롤랑드는 토를 다는 대신 미호의 옆에 가 섰다. 클레어는 시현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넷이 셋이 되었다. 세 사람은 달렸다. 하지만 체육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벽과 천장이 바위더미로 변했다. 바닥에는 물이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아도 정상이 아닌 상황. 그리고 미호는 이미 이런 상황을 몇 차례나 겪었다.

“칼리번!”

바위 더미는 칼리번의 영적영지였다. 그렇다면 바닥을 채우고 있는 이 물은?

“천검, 클레이르헴 모르!”

시현이 황금빛 검을 소환했다. 영혼의 힘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그것을 내지르기 직전, 물과 바위가 요동쳤다.

“미호!”

“롤랑드!”

바위와 물이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미호와 롤랑드 사이의 공간을 물과 바위가 비집고 들었다. 순식간에 둘 사이를 분리하였다.

미호가 소리를 지르려 했다. 시현이 그런 미호를 옆으로 밀쳤다. 황금빛 검을 들어올렸다.

필요한 것은 파괴의 검!

“에잇 브레이커!”

“그렇게 안 돼!”

누군가의 목소리가 시현의 목소리를 끊었다. 하지만 시현은 목소리를 무시했다. 영혼의 힘을 이끌었다.

여덟 개의 검, 여덟 개의 파괴기.

세상 일광이 낳은 가장 위대한 검사 붉은 왕 클레어 데스필드의 절기.

하지만 시현은 그 중 무엇 하나도 발휘 할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영혼의 힘이 사그라들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고통이 그 빈자리를 대신했다.

“크아아아아악!”

시현이 비명을 질렀다. 클레이르헴 모르를 손에서 놓쳤다. 이제는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위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시현 씨?! 시현 씨?!”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마치 무슨 독에라도 당한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한다.

미호는 그런 시현을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웠다. 반쯤 끌어안다시피 부축하며 여우 불을 소환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이 떠올라 있었다.

순백으로 빛나는 아홉 개의 검이 미호와 시현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짜리 원을 그리고 있었다.

“롤랑드! 롤랑드!”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미호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롤랑드와는 떨어졌고 시현은 원인 모를 이유로 죽어가고 있다.

물은 계속 차올랐다. 미호의 허리근처까지 올라왔다.

검들이 회전했다. 시현이 더욱 비명을 질렀다.

저 검이 무엇이길래! 대체 무엇이길래!

“달빛을 베는 자 MK2라고 해야 할까. 깜찍한 모조품이지만 대신 숫자가 많지. 양산형답게 말이야.”

귀에 익은 목소리에 미호는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10미터는 떨어진 곳에 도도히 선 한 쌍의 남녀. 짙은 갈색 머리와 붉은 머리. 미호는 남자를 알고 있었다,

“칼리번! 이 개새끼!”

칼리번은 웃었고 엑스칼리버는 인상을 찡그렸다.

“얼마 안 걸릴 거야. 잠시 후에 보자고, 레이디 윤.”

칼리번이 손가락을 튕겼다. 천장과 바닥에서 바위더미가 솟구쳤다. 미호와 시현을 에워쌌고, 그대로 조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바위더미와 함께 아홉 개의 검들이 점점 더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물까지 더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벌써 미호의 가슴 높이까지 올라왔다.

“시현 씨! 시현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악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시현은 끔찍한 비명만 지를 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미호는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지랄맞게 강하더니! 지가 무슨 슈퍼맨이야?! 저 검이 무슨 크립토나이트냐고!

“진짜 그런 거야?!”

시현이 슈퍼맨일리는 없지만, 만약 그에게도 크립토 나이트같은 약점이 있다면. 그리고 저 검이 그 약점이라면.

“씨발!”

미호는 참으로 오랜만에 욕지거리를 토했다. 약점이건 뭐건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속도가 그다지 빠르진 않았지만 검과 바위더미들은 이제 겨우 2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아무래도 칼리번 그 개새끼가 직접 오긴 무서워서 바위 더미로 서서히 압박해 죽이거나 봉인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미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되는대로 여우귀와 꼬리를 꺼냈지만 그래도 마땅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당장에 차오르고 있는 이 물 자체가 보통 물이 아닌지 영력이 미친듯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롤랑드! 시온!”

바위와 검은 이제 1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시현은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헉헉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마라.

그것이 전설의 사냥꾼의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 때 누군가 미호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려!”

뺨의 얼얼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미호는 눈을 크게 떴다.

“클레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클레어가 미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 역시 시현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쓰러지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며 미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움직일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시현 씨는….”

“저 망할 검 때문에 안 돼!”

소리친 클레어는 다시 비틀거렸다. 검은 이제 50cm 안쪽까지 다가왔다.

클레어가 미호의 머리를 붙잡았다. 고통을 씹어 삼키며 목소리를 토했다.

“혀… 깨물…어.”

혀를 깨물라니 갑자기 무슨-

“서, 설마?!”

“할 수 있… 나는 완전 영…체….”

“안 돼요! 영혼의 파장이 다르다고요!”

롤랑드나 시온과는 가능하다. 영혼의 파장이 같으니까. 하지만 클레어는 아니다. 그녀와 미호의 영혼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다시금 미호의 머리를 붙잡았다.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해! 할 수 있어! 오크는 혼자서 아홉이나 합친다고!”

검과 바위는 이제 등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시현은 죽어갔다. 클레어 또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했다.

클레어가 혀를 깨물었다.

미호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마라.

전설의 사냥꾼의 가르침.

미호는 혀를 깨물었다. 피를 내었다. 클레어를 보았다.

클레어가 힘겹게나마 웃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었다.

피는 영혼의 통화.

두 개의 영혼이 하나가 되었다.



칼리번과 엑스칼리버는 서로의 손을 꽉 쥐고 바위더미를 바라보았다. 바위가 처음보다 많이 작아졌다. 바위의 두께를 생각한다면 이제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공간 밖에 없으리라.

자신이 작전을 입안하긴 했지만 내심 불안해하던 칼리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엑스칼리버는 역시 오빠라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붉은 홍염이 일었다.

바위가 불탔다. 사그라들었다. 소멸하였다.

홍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불꽃이 번졌다. 바닥을 채우던 물이 증발했다. 주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던 바위들이 일시에 불타올랐다.

칼리번은 몸을 떨었다. 엑스칼리버 또한 이를 악물었다.

설마-

설마-

화염의 중심.

별의 아이를 품에 안은 상태로 도도히 선 아름다운 홍염.

붉은 여우귀와 불타오르는 아홉 개의 꼬리.

정령 합체-

클레어클레스!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선 칼리번과 엑스칼리버를 노려보았다. 그 똑똑한 오크는 이럴 때마다 뭐라고 했더라?

미호와 합체한 것은 밖으로 돌출된 붉은 왕의 영혼.

하지만 그 근원으로 이어진 것은 시현 안에 자리한 붉은 왕의 힘.

<b>“덤벼, 애송이.”</b>

클레어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홍염의 검을 그 손에 거머쥐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b>“왕의 시간이 돌아왔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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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용어 해설 #4 +31 12.07.09 5,436 82 15쪽
38 Chapter 13. #3 +18 12.07.08 5,602 95 9쪽
37 Chapter 13. #2 +38 12.07.08 5,625 94 13쪽
36 Chapter 13. +12 12.07.07 5,253 83 10쪽
35 Chapter 12. #4 +23 12.07.07 5,498 104 11쪽
34 Chapter 12. #3 +21 12.07.07 5,460 99 8쪽
33 Chapter 12. #2 +16 12.07.06 5,736 100 7쪽
32 Chapter 12. +31 12.07.05 5,810 105 10쪽
31 용어 해설 #3 +21 12.07.05 5,718 63 9쪽
30 Chapter 11. #3 +13 12.07.05 5,713 95 8쪽
29 Chapter 11. #2 +29 12.07.04 6,053 111 13쪽
» Chapter 11. +45 12.07.03 6,241 120 18쪽
27 Chapter 10. #2 +19 12.07.03 6,483 99 17쪽
26 용어 해설 #2 +9 12.07.03 6,709 80 20쪽
25 Chapter 10. +30 12.07.02 6,544 121 9쪽
24 Chapter 9. #3 +7 12.07.02 6,252 99 3쪽
23 Chapter 9. #2 +18 12.07.02 6,549 99 22쪽
22 Chapter 9. +8 12.07.02 6,479 102 16쪽
21 Chapter 8. #3 +14 12.07.02 6,787 101 17쪽
20 Chapter 8. #2 +3 12.07.02 6,394 102 15쪽
19 Chapter 8. +4 12.07.02 6,512 106 12쪽
18 Chapter 7. #2 +16 12.07.01 6,831 100 14쪽
17 Chapter 7. +7 12.07.01 6,881 94 11쪽
16 Chapter 6. #4 +11 12.07.01 7,182 107 11쪽
15 Chapter 6. #3 +4 12.07.01 7,118 98 16쪽
14 Chapter 6. #2 +13 12.07.01 7,408 96 21쪽
13 Chapter 6. +5 12.07.01 7,348 93 14쪽
12 Chapter 5. #4 +34 12.06.30 7,574 120 16쪽
11 Chapter 5. #3 +7 12.06.30 7,758 97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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