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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룡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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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취룡
작품등록일 :
2012.08.20 01:36
최근연재일 :
2012.08.20 01:36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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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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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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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2.07.0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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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글자
21쪽

Chapter 6. #2

DUMMY

꼴깍.

유리병 안의 피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한 모금에 다 마시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튼 둘 다 꼴깍.

그리고 1초.

그리고 2초.

그리고 3초.

“아, 안되나?!”

미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롤랑드는 피 맛이 비린지 인상을 살짝 썼다.

시온 알테미스는 혀를 찼다.

“쳇, 역시 채혈해둔 피로는 안 되나.”

요 며칠간 미호클레스의 메카니즘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를 해본 시온 알테미스였다. 피를 마시는 것은 영혼을 섞는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더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의식이었다.

“좋아, 그럼 다음 실험으로 넘어간다. 아기 고양이, 단추 몇 개 풀어.”

“…네?”

시온 알테미스의 발언에 흰색 셔츠에 검은 정장이라는 무척이나 요원스런 복장을 하고 있던 미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시온 알테미스가 마저 설명했다.

“키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피를 섭취해 본다. 이번에는 나와 해보지. 단추 풀어서 목 내밀고 이빨 세워.”

시온 알테미스는 평소에 입던 본디지 슈트와는 다소 다른- 그러니까 가슴 윗부분이 훤히 드러나는 차림이었기에 딱히 벗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겉옷을 벗고 단추를 적어도 2~3개는 풀어야 하는 미호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빨을 세우라니?

“잠깐만요, 설마….”

“그래, 뱀파이어처럼 해본다.”

시온 알테미스는 그대로 손을 뻗어 미호의 겉옷을 벗긴 뒤 빠른 속도로 미호의 단추를 풀어 목을 드러나게 했다. 얼핏 봐도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옆에 롤랑드도 있다보니 강제로 속살을 드러내는 꼴이 된 미호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지만 잠깐 뿐이었다. 연이어 보인 시온 알테미스의 모습에 수치심이고 뭐고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시온 알테미스의 송곳니가 무슨 공포영화에 나오는 흡혈귀마냥 길고 날카롭게 변한 탓이었다.

“아기 고양이, 너도 요호잖아. 해라.”

“으으….”

물론 미호도 하려면 할 수 있다. 요호는 본래 여우에서 기인한 요괴였으니까. 반인반요라 해도 선조회귀의 영향으로 천호 이랑의 피를 진하게 이은 미호에게 야성을 일깨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호는 마지못해 시온처럼 송곳니를 세웠다. 시온 알테미스가 그런 미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럼 문다. 너도 물어라.”

“…네.”

대답하면서도 진짜 기묘한 기분이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람.

“악!”

시온 알테미스가 기습적으로 미호의 목덜미를 물었다. 생살이 뚫리는 고통에 미호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시온 알테미스가 그런 미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미호에게 정신파를 보냈다.

‘빨리 물어!’

너무 아파서 눈물까지 찔끔했던 미호는 시온 알테미스의 하얀 목덜미를 물었다. 이내 송곳니를 따라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섞여들었다.

피는 영혼의 통화.

서로의 혈관 안에서 섞이는 피.

하지만.

“쳇, 이것도 안 되나.”

피를 못해도 반 컵 분량은 빨았건만 합체가 되지 않았다. 시온 알테미스가 송곳니를 거두자 미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제대로 서지 못해 시온 알테미스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한 상태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괜찮나, 아기 고양이?”

시온 알테미스가 재빨리 치유의 룬을 발현해 자신과 미호의 목에 난 상처를 막았다. 미호는 두어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 네. 이 정도 피야 자주 흘리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빈혈기가 아니었다.

채혈한 피를 마셔도, 아예 대놓고 서로를 물어도, 합체가 되지 않는다.

“역시 의식적인게 가장 크군. 아기 고양이…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밝히는군.”

시온 알테미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리 말하자 미호가 눈썹을 꺾었다.

“바, 밝힌다니요!”

“이 합체 기술은 서로 ‘하나가 된다’라는 인식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기 고양이는 키스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과 내가 하나가 된다’라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

흔히들 연인들끼리 키스를 할 때 느끼는 고양감.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

시온 알테미스는 얼굴이 붉어진 미호를 보며 계속 말했다.

“아마 섹스로도 합체가 가능하겠지. 어쩌면 효율이 더 높을지도 모르고.”

미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새빨개졌다. 얼굴뿐만 아니라 귀에 목덜미에 온 몸이 빨갛다.

“한 번 실험해 볼까, 아기 고양이?”

“지, 직장 성희롱이에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선 미호가 양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온 알테미스는 그런 미호가 귀엽다는 듯 유들유들 웃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곧 표정을 지우고 침묵하고 있던 롤랑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군. 최대한 사심은 거두도록 해라.”

“…그쪽이나 그러시지.”

다시 시온과 롤랑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다행히 시온 알테미스가 먼저 물러섰다.

“흥, 아무튼 그럼 둘 다 일단은 나가봐라. 좀 더 연구를 해보도록 하지.”

시온 알테미스가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미호는 얼른 단추를 다시 채우고 겉옷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아, 맞다. 아기 고양이.”

“…네?”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시온 알테미스가 헛기침을 말했다.

“흠, 그… 호두파이는 너 혼자 먹도록. 저 놈팽이 주지 말고. 널 생각하며 만든 거니.”

“……네.”

으아아 소름 돋아. 미호는 무어라 표현 못할 얼굴로 대답한 뒤 재빨리 방을 나섰다. 멀뚱히 서 있던 롤랑드도 이내 그런 미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복도. 승강기 앞. 이제는 미호와 롤랑드 뿐. 그런데 어째 모르게 평소보다 몇 배는 어색하다.

롤랑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무튼 레이디 윤, 금일부로 나도 조직의 요원이 되었소. 앞으로는 격리실이 아닌 요원기숙사에서 록허트라는 남자와 동거할 것이오.”

말이 요원기숙사지 결국엔 또 다른 격리실이었지만. 하지만 미호는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롤랑드가 얼마나 격리실을 벗어나고 싶어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축하해요. 록허트 오빠라면 성격도 무척 좋으니까.”

“감사하오. 듣자하니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요원 동행 하에 외출도 가능할 듯 싶소.”

승강기 문이 열렸다. 롤랑드는 일단은 짐을 꾸리러 지하 10층으로 돌아가야 했고, 미호는 데이비드 킴에게 보고하기 위해 지하 12층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말인데, 레이디 윤.”

승강기에 타서 버튼을 누르자 마자 롤랑드가 미호를 돌아보았다. 미호 역시 버튼을 누른 뒤 그런 롤랑드를 올려다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에 나와 함께 외출해 주시겠소?”

표정은 평소와 다름 없었지만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었다. 하기야 몇 달이나 감금 생활을 당했으니까. 미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선심 한 번 쓰죠. 어디 가고 싶은데요?”

외출 허가가 떨어졌다지만 그다지 먼 곳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기껏해야 기지 주변의 시내겠지.

아무튼 미호가 허락하자 롤랑드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롤랑드는 급히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곱게 접어두었던 종이를 활짝 펼쳤다.

미호가 보니 영화 포스터다.

“나이트… 사가?”

제목 참 성의 없고 뻔하네. 차라리 나이트테일이라고 하지. 아무튼 제목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롤랑드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며칠 전에 데이비드 킴이 가져다 준 영화 잡지와 팜플렛 중에 하나요. 예고편을 보아하니 그야말로 굉장한 결투를 볼 수 있을 것 같소.”

롤랑드는 영상물에 꽤나 관심이 많았다. 미호가 전에 슬쩍 보아하니 압도적인 CG를 처바른 SF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것들을 특히 좋아하는 듯 했다.

미호가 다시 팜플렛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독은 한국인이고 한국영화라는 설명이 붙어있었지만 어째 주인공 빼고는 죄다 서양인이다. 그것도 엄청난 미남미녀들 뿐. 아무튼 남자는 다 커도 애라더니. 싸우는 영화가 보고 싶은 건가?

“뭐… 좋아요. 그럼 이거 보러 가죠.”

“감사하오. 일요일을 기대하고 있겠소.”

승강기가 지하 10층에서 멈췄다. 롤랑드가 내렸고, 미호는 그런 롤랑드와 인사한 뒤 지하 12층으로 향했다.



“데이트네.”


“에?”

직원 휴게실. 사바스가 건넨 한 마디에 미호는 무슨 소리하냐는 듯 입을 벌렸지만 사바스는 답해주는 대신 천장 쪽에 설치 된 스피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데이트지?”

“데이트죠.”

스피커에서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영롱한 대답이 돌아왔다.

데, 데이트라니! 미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데 어쩐지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 그런게 아…”

“젊은 남녀가!”

사바스가 미호의 말허리를 잘랐다. 단번에 기선을 제압하고 다시 스피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스피커에서 화답했다.

“단 둘이 만나서!”

“시내에 나가서!”

“영화를 보고!”

“둘이서만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앞과 뒤. 사바스와 스피커 속의 목소리가 동시에 미호를 압박했다. 움츠러드는 미호에게 사바스는 얼굴을 가까이했다.

“제 말이 틀린가요, 고객님?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나요? 네?”

부정하고 싶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말 할 수가 없다.

“이이….”

미호가 뭐라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자 사바스는 까르르 웃으며 미호의 볼을 꼬집어 주었다.

“뭐, 아무튼 이왕지사 재미있게 놀다와. 그렇다고 너무 많이 허락하지는 말고.”

“…응? 허락하다니?”

미호가 꼬집힌 볼을 어루만지며 되묻자 사바스는 혀를 끌끌끌 찼다.

“앨리스, 내 장담하는데 밥 다먹고 돌아오는 길에 으슥한 곳에서 둘이 키스한다.”

“사바스!”

미호가 벼락처럼 외쳤다. 하지만 그런 미호를 무시하듯 스피커에서도 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지난번에 SG-012사건 때문에 윤미호 요원과 SG-365 롤랑드가 함께 같은 방에서….”

“야!”

귓불까지 빨개진 미호가 스피커 쪽을 노려보았지만 적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그거. 그거라면 나도….”

사바스가 슬쩍 말 끝을 흐리며 눈을 가늘게 뜬다. 미호는 두 손을 급히 내저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롤랑드가 잠결에 날 끌어안은 게 다라고! 침대가 좁아서 어, 어쩔 수 없었어!”

미호의 외침에 사바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쩍 찔러봤는데 답변이 예상이상이다.

“헐? 널 끝어 안았다고? 그리고 한 방에서, 그것도 한 침대에서 잤어? 허, 그거 그렇게 안 봤는데 고단수네. 아니, 이건 우리 미호가 멍청한 건가?”

자폭이었나?!

사바스와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적의 약점을 파악한 복서처럼 맹공을 날리기 시작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쑥덕쑥덕.”

“왱알왱알.”

“화낸다!”

마지막엔 미호.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에 눈가엔 물기까지 어려있다. 낄낄낄 웃은 사바스는 그런 미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사랑하는 요원님, 이건 어떻게 봐도 데이트인데요?”

젊은 남녀가 단 둘이 만나서 놀러나간다. 이걸 데이트라고 안 하면 무어라 한단 말인가?

미호의 건너편에 앉아있던 사바스가 아예 미호의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허리를 살짝살짝 찌르며 물었다.

“그거 진짜로 너 좋아하는 거 아냐? 넌 어때?”

“아! 몰라! 그 고자새끼! 자꾸 그 얘기만 하면 이거 가져가버린다?”

참다 못한 미호가 성질을 부리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반쯤 먹은 호두 파이를 가리켰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런 협박이었지만 사바스는 윽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살짝 물렸다.

“쳇, 그나저나 진짜 맛있네. 이게 그 마녀가 만든 거라고?”

분하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는 맛이었으니까. 겨우 롤랑드와 관련된 화제에서 벗어난 미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요리를 정말 잘하는 것 같아.”

솔직히 잘한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야말로 천상의 맛. 여러 세상을 돌아다닌 사바스도 이 정도의 호두파이는 처음 맛보았다.

“흐음, 우리 미호 어떻게 보면 마성의 여자일세.”

4대 아크메이지 가운데 하나가 직접 요리를 공수하게 만들다니.

“…그거 무슨 의미지.”

미호가 다시 협박하듯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사바스는 입술을 한 번 삐쭉이더니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미호의 등을 탁 소리가 나게 쳤다.

“아무튼 꽃단장하고 나가! 격리실에만 처박혀 살던 촌놈 기를 팍 죽여 버려! 알았지?”



“기를 죽이라고 해도….”


어느새 일요일 정오. 속옷 차림으로 전신 거울 앞에 선 미호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슬쩍 몸에 대보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으아아아!”

예쁜 옷은 많았다. 미호라는 옷걸이도 무척이나 고급(?)이었기에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달까.

침대 위에는 이미 미호가 꺼내놓은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옷 고르기만 1시간이 넘은 기분이었다.

너무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자니 진짜 무슨 데이트하러 가는 거 같아서 미묘했고, 그렇다고 평소처럼 입고나가자니 사바스의 ‘기를 죽여!’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으으….”

발을 동동 구르던 미호는 벽걸이 시계를 보았다. 약속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옷을 골라 입어야만 했다.

“아, 몰라! 그냥 입어!”

기껏해야 영화 한 번 보고 오는 건데 뭐 그리 신경 쓸 거 있담?! 스스로를 다그친 미호는 약간은 고급스런 느낌이 나는 하얀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라고 하긴 뭐하지만 짧은 게 분명한 검은 치마, 그리고 베이지색 외투를 걸쳤다. 바지 대신 치마를 입었다는 것 외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옷을 다 입고 화장을 조금 고친 미호는 그대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왔소?”

본부 지하 4층, 직원 기숙사 로비.

대형 TV와 각종 놀이기구, 소파 등이 비치된 장소에 앉아있던 롤랑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얀 환자복틱한 격리수용복 외에는 옷 한 벌 없는 롤랑드였지만 이번에 새로 구입을 했는지, 아니면 빌려 입었는지 청바지에 짙은 붉은 빛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복장이었지만 뭐랄까, 얼굴도 되고 몸도 되다보니 그럴듯하다. 일전에 잡지에서 본 대충 차려입는 헐리우드 스타 스타일이랄까. -무슨 기사를 이 따위로 쓰냐고 악평을 하긴 했지만 -

미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촌놈은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왔는데 예쁘다거나 귀엽다거나 뭐 그런 칭찬 한마디 할 줄을 모른다.

미호는 소파에 앉아 비디오 게임에 열중 중인 록허트에게 물었다.

“오빠도 딱히 할 일 없으면 같이 가지 그래요?”

미호의 부름에 록허트는 여전히 텔레비전에 시선을 둔 상태로 말했다.

“아서라, 나 그렇게 눈치 없는 놈 아니다.”

그리고 손을 등 뒤로 휘휘 내젓는다.

그나저나 눈치 없는 놈이라니. 록허트도 지금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미호는 항의하고 싶었지만 항의하자니 뭔가 또 그 꼴이 이상하다. 결국 또 꽉 쥔 주먹만 부들부들 떠는데 롤랑드가 그런 미호에게 다가섰다.

“그럼 갑시다.”

하더니 대뜸 손을 잡고 이끈다. 갑자기 손을 붙잡힌 미호는 어어어 하며 로비 밖으로 끌려나갔다.

“…좋은 때구만.”

낮게 중얼거린 록허트는 다시 비디오 게임에 몰두했다.



미호는 자신의 애차인 미니쿠퍼에 롤랑드를 태우고 시내로 나갔다. 처음에는 적응도 시켜줄 겸 대중교통을 이용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러자니 본부가 너무 외지에 처박혀 있는지라 시내까지 나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뭐, 대중교통이야 나중에 천천히 익히면 되지.

일요일 오후인지라 극장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미호는 롤랑드가 돌출행동을 할까봐 걱정했지만 어디까지나 기우에 불과했다. 롤랑드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동 발급기를 조작해 미리 예매해둔 영화표를 출력했다. 아니 이건 뭐 놀라거나 당황하는 맛이 하나도 없다.

“왜 그러시오?”

“…아뇨.”

댁이 너무 능숙해서 재미가 없소-라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미호는 팝콘과 음료를 산 뒤 롤랑드와 함께 대기석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변에 쌍쌍이 온 커플들이 참 많은데 어째 시선들이 따갑다.

“음음.”

미호는 슬쩍 곁눈질로 롤랑드를 훔쳐보았다. 확실히 고자에 능글맞고 미워 죽겠지만 생긴 것 하나는 잘생겼다. 거기다 키도 크고 하니 여자들이 흘끔흘끔 돌아보는 것도 이해는 갔다. 등에는 듀렌달이 들어있는 기타 케이스를 매고 있으니 무슨 가수같은 느낌도 났다.

미호는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남자들도 미호 일행을 돌아보는 것은 롤랑드가 아닌 미호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아도 아리따운 미녀가 웬 외국놈 옆에 앉아 있으니 자국의 우수한 자원을 빼앗긴 기분에 휩싸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무튼 입장이 시작되었고, 미호는 롤랑드와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트사가는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참으로 평이한 영화였다.

동방에서 온 졸라 짱센 주인공이 서방의 동료들과 함께 악의 세력을 무찌른다는- 그야말로 B급 영화의 진수. 딱히 흠잡을 구석이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극적 반전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영상이 미쳤다. 거의 모든 전투씬이 한 번에 찍은 롱테이크였는데 그게 정말 미쳤다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더욱이 영상. 이건 무슨 통째로 CG로 만든 영화인가? CG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데 현실에선 절대로 불가능한 영상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더욱이 배우들도 하나같이 미남미녀니 무난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 관객들의 입장이고- 미호는 다른 의미로 경악하고 있었다.

‘검은 불꽃?!’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방의 용사는 아무리 봐도 SG-013 검은 불꽃이었다. S랭크 미만 요원들에게는 얼굴 사진 한 장과 ‘절대로 관여하지 말 것’이라는 명령 한 줄만 알려진 위험도 SS랭크의 SG!

‘잠깐만, 그럼 저거 설마 다 CG가 아니라 아예 다른 세상에서 찍어온 거 아냐?’

한 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뭔가 끔찍했다. 그럼 저 미치도록 현란한 검투라든가 마법구현이 전부 진짜란 말인가?

미호가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든 말든 영화는 끝났다. 스텝 롤까지 다 보고 나가야 한다는 롤랑드의 주장 아닌 주장에 자리를 지키게 된 미호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라는 심정으로 스텝 롤을 아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주연배우들 이름이 태반이 한국식이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 외국인처럼 생겼구만! 요주의 대상인 SG-013의 경우에는 ‘진’이라는 한 글자만 올라왔다. 저게 본명인가? 아니면 가명?

“후, 정말 잘 봤소. 이제 나갑시다.”

스텝롤이 모두 끝나자 롤랑드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얼굴이 훤한 것이 정말 재미있게 본모양이었다.

나오는 길에 웬 아저씨 하나가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을 못 해!’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미호는 슬쩍 뒤만 한 번 돌아본 뒤 그대로 상영관을 나섰다.

“그럼 이제 커피 마시고, 식사하러 갑시다.”

롤랑드가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미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록허트 오빠가 그렇게 하래요?”

“…그렇소만, 식사는 꼭… 그 전망 좋고 무드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며 예약까지 시켜주었소.”

록허트까지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쓰게 웃은 미호는 일단 롤랑드를 데리고 같은 건물 윗층에 자리한 할리스 커피로 향했다.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미호는 늘 이곳에서 핫초코 혹은 아이스초코를 시켜먹곤 했다.

자리를 잡고, 각자 마실 것을 마신다.

‘그리고 이대로 담소를 나누다 무드 있는 저녁 식사를 하러 간다?’

정해진 수순이다. 그리고 이건 누가 뭐라 해도 데이트다. 미호의 머릿속으로 사바스와 앨리스의 음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내 장담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으슥한 곳에서 키스한다.’

‘안 해! 안 한다고! 키스하면 내가 미친년이다!’

미호는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안 한다, 절대로 안 한다. 아니, 애당초 미호 자신과 롤랑드가 키스할 이유가 없다. 암, 그렇고 말고!

아이스초코를 단숨에 쪼르륵 빨아들인 미호는 굳은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혼자서 도리질 치고 난리를 치며 생쇼를 하는데 롤랑드가 아무 말이 없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미호가 정신을 차리고 롤랑드를 보았다. 롤랑드는 미호가 아닌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롤랑드?”

“저쪽, 건물 옥상을 보시오.”

롤랑드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미호는 요력을 눈에 집중해 창 밖, 롤랑드가 가리킨 옥상을 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누가 보아도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옥상에 서 있었다.

롤랑드가 미호를 보았다.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합체합시다.”

미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울기 직전의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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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Chapter 12. #2 +16 12.07.06 5,736 100 7쪽
32 Chapter 12. +31 12.07.05 5,810 105 10쪽
31 용어 해설 #3 +21 12.07.05 5,718 63 9쪽
30 Chapter 11. #3 +13 12.07.05 5,713 95 8쪽
29 Chapter 11. #2 +29 12.07.04 6,053 111 13쪽
28 Chapter 11. +45 12.07.03 6,241 120 18쪽
27 Chapter 10. #2 +19 12.07.03 6,483 99 17쪽
26 용어 해설 #2 +9 12.07.03 6,710 80 20쪽
25 Chapter 10. +30 12.07.02 6,545 121 9쪽
24 Chapter 9. #3 +7 12.07.02 6,253 99 3쪽
23 Chapter 9. #2 +18 12.07.02 6,549 99 22쪽
22 Chapter 9. +8 12.07.02 6,479 102 16쪽
21 Chapter 8. #3 +14 12.07.02 6,787 101 17쪽
20 Chapter 8. #2 +3 12.07.02 6,395 102 15쪽
19 Chapter 8. +4 12.07.02 6,512 106 12쪽
18 Chapter 7. #2 +16 12.07.01 6,832 100 14쪽
17 Chapter 7. +7 12.07.01 6,881 94 11쪽
16 Chapter 6. #4 +11 12.07.01 7,182 107 11쪽
15 Chapter 6. #3 +4 12.07.01 7,118 98 16쪽
» Chapter 6. #2 +13 12.07.01 7,409 96 21쪽
13 Chapter 6. +5 12.07.01 7,348 93 14쪽
12 Chapter 5. #4 +34 12.06.30 7,575 120 16쪽
11 Chapter 5. #3 +7 12.06.30 7,759 97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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