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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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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1
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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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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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13장.

DUMMY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하던 제이앤은 저택 안으로 이동했다.

그녀에게 더 이상 동요하는 눈빛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안드로이드가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 했지만 냉랭한 그녀의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카지노의 전문 겜블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즐거운 식사가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레이먼드는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깊이 있는 음색. 평생 피아노만 친다면 이런 경지까지 오르게 되는 것일까. 비록 전성기 때만큼의 힘과 기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숙련된 그의 연주는 마에스트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제이앤은 자리에 선 채로 연주를 감상했다.

그래 처음 이 저택에 들어온 순간에도 그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레이먼드의 연주를 처음 접했던 그날부터 이상 징후는 시작된 것이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있나? 앞으로 피아노는 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레이먼드는 우두커니 서있는 그녀에게 빈정거리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까는 시스템이 잠시 오류를 일으킨 듯 합니다."

"이제와 시스템 탓으로 돌리시겠다? 그것 참 편리하군. 내키는 대로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좋은 변명거리야."


이유가 어찌 되었든 피아노를 포기한다는 말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레이먼드는 좀처럼 화를 풀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가서 주방 일이나 돕게. 청소 데이터까지 삭제된 것은 아니지 않나."

"알겠습니다. 레이먼드님."


마음 같아선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제이앤은 그러지 못했다.

설령 그가 자신의 억울함을 이해한다고 해도 괜한 일에 말려들게 하여 그가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모든 걸 밝히기 전까지는 아마도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주방에는 어쩐 일이시죠 제이앤님.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방에 들어서니 분주하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에이커가 보인다.

저 건장한 체격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비누거품과 싸우는 모습이라니. 왜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지 않는 걸까. 그를 가사도우미로 만든건 아무래도 사이버트로닉스의 실수가 아닐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뭘 하면 될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이앤님은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던가요."


번거롭게 자초지종 설명하자니 쉽게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제이앤은 적당히 둘러대며 마른행주를 집었다.


"잠시 레이먼드님께서 피아노를 치겠다고 하셔서.."

"그러시군요. 그럼 테이블을 좀 닦아주시겠습니까."


확실히 신규 모델이라 그런지 에이커는 이전 JN시리즈보다 더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해보였다. 물론 현재 인간의 감성 지능을 개화한 제이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질문을 던지고 부탁하는 모습은 로봇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안드로이드가 주방일이라니 드문 일이군요. 추가 옵션에 간단한 하우스워크 기능이라도 설정하신 건가요?"


역시 이런 질문까지 스스럼없이 하는걸 보면 모델명 AK는 상당히 발달된 인공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제이앤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루 종일 피아노만 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에이커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사이버트로닉스는 굳이 원하지도 않은 신규 모델을 보내준건지. 그리고 어떻게 가사도우미가 괴한들을 상대할 수 있었는지.

전투 장면을 직접 목격한건 아니었지만 무장하고 있던 두 명을 파손된 기물이나 상처 하나없이 제압했다는게 좀처럼 믿기질 않았다.


"어젯밤 저를 구해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감사의 인사를 드리네요."

"별말씀을. 저는 저택에 들어온 침입자를 처리했을 뿐입니다."

"그 전투 능력도 추가 옵션에 포함된 내용인가 보죠?"


보통 안드로이드의 추가 옵션은 전문성이 배제된 부수적인 사항만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산업용 로봇이 편의상 재고 확인까지 가능하다던지 피아니스트 안드로이드가 조율사 역할까지 겸하는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가사도우미가 전문 경호 시스템을 갖추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AK 모델에는 기본적인 가드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레이먼드님의 저택에 보안장치가 없다는 걸 알고 본사에서 특별히 신규 모델인 저를 보낸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규 안드로이드의 특수 기능이라니.

그럴싸한 답변이긴 했지만 모든 의심을 피해갈 수 있는 알리바이는 아니었다.

에이커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제이앤은 알고 있었다. 어젯밤 그가 자신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본사에 전송했던 사실을 말이다.

그것도 단순히 시스템적인 행동이었을까.


"피아노 소리가 정말 아름답네요. 언제 들어도 레이먼드님의 연주는 최고입니다."


순간 제이앤은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저택에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상당한 감정의 변화를 요구하는 곡으로 자신이 겪었던 이상 징후가 에이커에게도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순간 말이 없어진 에이커는 잠시 피아노를 감상하는 듯 했다.

레이먼드가 연주하는 이 곡은 이전에도 한번 들려준 적 있는 봄을 노래한 쇼팽의 작품으로 나비의 날갯짓을 표현한 격조 높은 선율이 인상적인 곡이었다.


꽃을 찾는 나비의 간절함을 표현한 빠른 템포가 지나고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포르테가 봄의 풍경을 연상시키자 내재된 카타르시스가 격류처럼 휘몰아친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 광범위한 음악적 표현력에 감명 받은 제이앤의 몸에는 지금도 도파민이 흘러나오고 있다.

만약 에이커를 만들 때도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사용했다면 분명 느껴지는 게 있을 것이다. 이 연주로 인해 그도 제이앤처럼 자아를 찾게 될 수 있을까.


"이전 제이앤님의 연주도 좋았지만 이 피아노는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정말 훌륭합니다."


안드로이드답지 않은 세세한 감정의 표현.

하지만 그에게 제이앤이 보였던 이질적인 반응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금은 단지 데이터에 기반을 둔 결정론적인 의사 표현이었을까.

살짝 맥이 빠진 제이앤은 짧게 답했다.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군요."

"조만간 제이엔님의 연주도 다시 듣게 되길 고대하겠습니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말투와 매너. 제이앤은 그가 가사도우미로 위장한 스파이 로봇일 경우까지 의심했었지만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듯싶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서 정원을 손봐야겠군요. 감사했습니다 제이앤님."


에이커가 빙긋 미소 지으며 나가자 제이앤은 생각했다.

그가 보여준 표정과 행동은 모두 데이터에 기반한 가짜 감성일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그에겐 아무런 이상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AK모델은 인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라는 소린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에이커가 가진 여러 가지 비밀에 대해서.


마음을 움직이는 피아노 연주에 감동을 느끼고 그로인해 뇌세포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자아를 형성한다.

하지만 레이먼드의 연주를 들었음에도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다는 것은 에이커가 100퍼센트 기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사이버트로닉스는 과거 TN의 폭주사건을 겪고도 굳이 JN시리즈를 배제한 새로운 안드로이드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에이커에 대한 의문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오전이 지나갔다.


#


"레이먼드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에이커의 대화 신청에 레이먼드가 물었다.


"음? 무슨 일인가 에이커군."


이제 곧 점심 준비를 해야 하는 에이커는 재료의 상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요리에 필요한 식재료는 대체로 온라인 주문을 통해 배송 받고 있었지만 몇가지 고급 재료들의 신선도가 갈수록 떨어지는 게 불만이었던 그는 거래처를 바꾸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송이버섯의 상태가 영 좋지 않습니다. 캐비어의 질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걸로 보아 가격차가 있더라도 알마스 캐비어로 바꾸는게 좋겠군요."


인공재배가 불가능한 송이버섯은 최근 번식하는 양이 급격히 감소하며 가격이 오르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비싼 값을 지불하고 공급받고 있었지만 교묘하게 다른 버섯을 끼워 넣어 팔고 있던 것이다.

벨루가 캐비어 또한 상등품에 속하는 경우 알이 크고 검게 빛나며 블루베리나 초콜릿을 연상시킬 정도로 탐스러운 게 특색이지만 최근 질이 너무도 저하되었다.


"그래서 거래처를 바꾸자는 말인가?"

"요리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적당한 곳으로 알아서 바꾸도록 하게."

"직접 방문하여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온라인 주문시 홀로그램을 통해 재료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지만 직접 버섯의 향기를 맡아보거나 상어의 지느러미를 만져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커는 신선도 체크를 위한 매장 방문을 원하고 있었다.


"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밖에도 여러 다른 재료들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특히 알마스 캐비어의 경우 1온스당 천만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레이먼드는 이런 에이커의 치밀한 성향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리 달갑지만도 않았다.

지금 상황을 굳이 피아노에 비유하자면 통제된 연주와 자유 연주의 차이라고나 할까.

완벽을 추구하는 콩쿨용 피아노의 경우 귀는 즐겁지만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 조금은 서툴거나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피아노 자체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거늘.

요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조율이 되지 못한 피아노는 슈타인웨이를 갖다놔도 오래된 플레옐보다 못한 법. 결국 재료의 중요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소리였다.


"뭐 직접 봐야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마침 살 것도 있고 하니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보는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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