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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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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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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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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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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6장.

DUMMY

그렇게 약속된 피아노 레슨은 시작되었다. 레이먼드와 제이앤. 오래된 클래식 피아노 앞의 둘은 얼핏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70세가 넘은 노인과 20대의 여성. 더군다나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듀오 포지션에 전에 없던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피아노를 배우기에 앞서 가장 우선적으로 갖춰야할건 마음가짐이다. 관심을 갖고 재미를 찾고 마지막으로 미쳐야 하지."


레이먼드의 말에 제이앤이 의아한 듯 물었다.


"미친다. 라는 단어는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진짜 미치란 소리는 아니고 그만큼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라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열정과 미치다가 동일시되는 것인가요."

"일종의 언어유희라고나 할까. 같은 말이라도 의미나 표현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지."


2142년 디지털 글로벌 시대가 열리며 각국의 언어는 영어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따로 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알약 한개만 먹게 되면 몸속에 내장된 마이크로 나노 센서가 대상의 언어를 분석해 뇌로 전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미치다 라는 말의 혼용. 다른 여러 나라의 언어를 단일화 시킨다는 건 지금과 같은 문제점이 종종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서까지 계산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렵네요. 우선 입력시켜 두겠습니다."

"정서까지 다 배우기란 쉽지 않지. 피아노도 그렇다. 그저 보이는 대로 입력하는게 전부가 아니야. 사전 지식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게 바로 음악인 것이지."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첨단 디지털 문명이 보편화되고 있는 현재 아날로그 감성을 대표하는 많은 것들은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고 음악 또한 그랬다. 개개인의 취향에 맞게 모든 악보가 만들어지는 지금 굳이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음악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피아니스트 안드로이드가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음악 채널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네가 단순히 피아노를 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되는 방법도 있네. 데이터에 악보만 입력하면 못 치는 곡은 없을거야."


틀린 소리는 아니다. 현재 모든 피아니스트가 그렇게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이먼드는 지금 그녀를 시험해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던 제이엔이 말끝을 흐린다.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만이 가능한 안드로이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명확한 목적어가 없이 망설이는 모습은 누가봐도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연주는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뭐가 다른지 말해줄 수 있겠나?"


레이먼드는 궁금했다. 피아노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그 감성을 과연 그녀가 알아챌 수 있을지.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예상외로 제이엔의 묘사는 적절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레이먼드가 추구하는 음악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놀라웠다 로봇일 뿐인 그녀가 자신의 피아노를 이해하고 있었다니. 확실히 그녀는 더 이상 평범한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 대충 비슷한 맥락이긴 하지만 정확한 답변은 아니야. 굳이 분류하자면 디지털 음악과 아날로그 음악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


완벽을 추구하는 디지털 음악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점. 그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성 표현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치 설정과 개연성이 미비한 소설처럼 단지 순간의 유희를 위한 킬링타임용으로 찍어낸 작품이 디지털 음악이라면 직접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기승전결 짜임새 있게 엮어낸 작품이 아날로그 음악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디지털 음악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각기 다른 장점이 존재하고 정답이란 없는 것이 음악 예술 분야였으니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날로그 음악의 우수성을 망각하고 있는 지금 한낱 기계일 뿐인 안드로이드가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디지털 음악의 우수성을 인정하되 아날로그 감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군요. 입력 시켜 두겠습니다."


순간 의욕이 충만해진 레이먼드는 한껏 격양된 톤으로 소리쳤다.


"자 그럼! 어디 네가 느꼈던 그 감정을 고스란히 실어서 건반을 두드려 보게. 잔잔함 속에 고조된 기억을 떠올려서 두 손으로 표현해 내는 거야!"


평소와는 전혀 다른 레이먼드의 모습. 그토록 갈망하던 아날로그 피아노의 위대함을 그녀가 알아봐주었기 때문일까. 열정 가득한 오버텐션에 의해 레이먼드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내 피아노의 우월함을 알아챌 정도라면 말이야."


계속된 권유에 제이앤은 서서히 건반위로 손을 가져갔다. 긴장된 순간 레이먼드는 그녀가 어떤 피아노를 보여줄지 기대로 가득한 눈빛이었고 제이앤 역시 잠재된 자신의 재능에 눈뜨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첫 번째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만 그만!"


그러나 건반을 두드린지 5초 만에 레이먼드는 연주를 중지시켰다. 음악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는 별개로 기본적인 손가락 번호조차 모르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내가 너무 과대평가를 했나보군."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니 죄송할 것 까진 없네. 처음엔 다 그런거지."


모든 건 기본이 우선이거늘. 곡을 해석하고 음악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초가 무너지면 어느 순간부터 더는 발전할 수가 없게 된다. 제이앤의 피아노는 아직 걸음도 못 뗀 어린아이 수준으로 하농을 통해 손 연습부터 시키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 손가락부터 풀도록 할까. 붓점 연습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군."

"제가 칠 곡명이 붓점인가요?"


그러자 레이먼드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런 이름의 곡은 없다. 기본 연습법이야. 소리를 하나하나 길게 내거나 짧게하는 것을 반복해 손가락 독립을 도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지."


하지만 제이앤은 철없는 아이처럼 보챈다.


"저는 어서 빨리 노래를 연주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겠지. 내가 처음 피아노를 시작할때도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저는 언제쯤 선생님처럼 아름다운 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요."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그만 두어도 좋다. 자꾸 그렇게 조바심 낼꺼면 당장 때려치고 가서 정원이나 돌보던지."


피아노 레슨은 본래 선생들마다 가르치는 스타일과 요구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보통 전체적인 음악성을 중시하는 경우 하루빨리 다양한 곡들을 접하게 하는 반면 기초적인 테크닉을 우선시하는 레이먼드는 미스 터치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붓점과 스타카토, 레가토 등의 부분 연습부터 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들떠 있었군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바이엘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칫 빠지는 음이 생긴다던가 듣기 힘들 정도로 소리가 뭉개지고 지저분해질 수도 있다. 그런 피아노를 치고 싶은 것이야?"

"왜 그런일이 발생하는 건가요."

"이유야 분명하지. 손가락이 불안정하면 건반을 칠때 팔과 손이 굳어가기 때문이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무작정 곡을 연주하는건 아무 의미없는 일이야."


결국 레이먼드의 방식대로 손가락 연습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한 제이앤은 더이상 아무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하나 착실하게 피아노의 기초부터 밟아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흐음 생각보다 손가락은 유연하구나."


제이엔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본래 모든 걸 데이터에 의존하는 안드로이드에게 학습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걸 방지하기 위해 규제하는 시스템으로 철저하게 금지된 법규 속에서 엄격히 감시되고 있는 절대로 있어선 안되는 일이었다. 아니 어찌보면 로봇이 학습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실현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의식을 갖게 된 제이앤은 자신의 의지로 점차 피아노를 배워나갔다.


#


며칠이 지났다. 제이앤이 오고 난 뒤 가장 많이 바뀐 건 레이먼드의 생활 패턴이었다. 본래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필요한 가사 도우미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주된 일과가 그녀의 피아노 레슨이 되어버렸다.


"그게 아니잖아! 딴따 딴따 딴이 아니고 따딴 따딴 따 이런 식으로 붙점을 해야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되는 양 열정적으로 레슨을 이끌던 레이먼드는 입에 침을 튀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더 빨리 더 빠르게! 그게 아니야 다시!"


열을 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를 느끼는 중이다. 누군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 그래 이 느낌은 마리안느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건 예상외로 그녀가 레슨을 잘 따라 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하농을 처음 접해본 아이들은 같은 패턴만 주구중창 치는 것에 불만을 갖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바이엘부터 배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작부터 멜로디가 있는 완곡을 치게 되면 자칫 잘못된 습관이 몸에 익을수도 있었다. 지루할 수도 있는 반복 연습임에도 군말 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가 기특해보이는건 당연했다.


"음! 지금 좋았어. 그 느낌 잊지 마."


레이먼드의 칭찬 한마디에 제이엔의 얼굴에는 바로 화색이 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하고 학습 의지가 충만한 안드로이드라니. 만약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그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레슨이었지만 레이먼드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법률이 지정한 사항에 위배되는 존재였고 제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자신이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하는 의무나 책임은 없었으니까.


레이먼드에게 그녀는 이 저택의 가사도우미였고 닫힌 마음을 녹여준 나비였으며 70년 만에 처음 가져본 제자일 뿐이다.


"이제 적당히 하고 식사 준비를.."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제이앤이 아닌 레이먼드였다.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몇 가지 데이터가 소실되었다. 아마도 베드 섹터 메모리가 1번 섹터로 업로드 되면서 가사일에 관련된 메뉴얼과 각종 요리 레시피가 삭제되어 버린 듯 했다. 이후 집안 꼴이 엉망이 되는 건 필연적이었고 토스트와 오믈렛 커리등의 간단한 음식 말고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던 레이먼드는 곤혹을 치루는 중이다.


부득이하게 안드로이드의 데이터가 삭제될 경우 본사 AS를 통해 재설정이 가능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만약 제이앤에게 일어난 변화를 사이버트로닉스가 알게 된다면 그 즉시 폐기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지낼 수는 없다. 언제까지 자신이 직접 식사를 준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결국 아침에 먹다 남은 커리로 저녁을 때우던 레이먼드는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후우.. 도저히 이래서는 안되겠군. 가사 도우미를 하나 더 들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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