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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3,388
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작성
20.05.11 10:40
조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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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11쪽

제2장.

DUMMY

꿈을 꾼다.

매일같이 그리고 느닷없이.

가슴 가득 그리운 누군가의 옆자리.

불안이나 걱정 같은 건 티끌만큼도 없다.

그녀가 내 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칼이 좋다.

사랑스러운 이 느낌.

행복하다.

향기로운 이 냄새.

달콤하다.

그녀의 귀에 속삭인다.

사랑해.


이럴 때면 여지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너무도 익숙한 이 소리 피아노다.

이 아름다운 선율에 오늘도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한 여자를 그리워한다.


"또 꿈이었나."


잠에서 깨어난 레이먼드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침대 맡에 놓인 생수를 들이키곤 창가의 커튼부터 열어 젖혔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


비록 금세 잊혀질 꿈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을 부여잡는다. 하지만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내일도 꾸게 될 테니까.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사를 마친 그녀가 식당으로 안내하려 하자 레이먼드는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치워! 네 도움 없어도 갈 수 있으니 다시는 날 부축하려 들지 마."

"데이터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

"왜 내가 다리가 불편하니 길을 안내하라고 하던가? 그럴 거면 안내견을 분양 받지 비싼 로봇은 쓰지 않겠지."


본래 그의 성격이 이리 괴팍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을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왔기 때문인지 상당히 신경질적이고 매섭게 변해 있었다. 이는 자존심이 강한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남에게 동정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서 오는 과민 반응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과거의 영광을 지닌 늙고 쓸모없는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그는 더더욱 디지털 기계 문명을 배척해왔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이 집에 자네를 들인 것은 가사를 돌보기 위함이니 앞으로 주제넘은 짓은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레이먼드님."


갈수록 힘들어지는 다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안드로이드였지만 거부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차라리 첨단 의료 기술로 신체 능력을 복원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었지만 현대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는 그의 고집은 기본적인 의료처방 정도만 허락했다.


#


잔잔한 클래식 음악 사이로 달그락 거리는 은식기 소리가 꽤나 잘 어울린다. 이곳 저택 1층의 레스토랑에는 홀로 식사중인 레이먼드와 곁을 지키는 안드로이드가 있다.


"식사는 어떠십니까. 입맛에 맞으신지요."

"오전에는 간단히 먹는 게 좋아. 내일부턴 토스트나 굽게."


마스터를 위한 아침 메뉴로 브라질산 농어 요리를 준비했다. 앙티부아즈소스를 올린 스테이크와 함께 푸아그라 속을 넣은 야채를 곁들였으며 호주산 최고급 와인도 디캔트했다. 모두 레이먼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식사 때마다 와인을 함께하는 취향까지 겨냥한 이런 메뉴는 사전에 입력된 데이터대로의 식단이었다.


"생각보다 요리는 제법 하는군."

"일류 셰프의 레시피가 모두 입력되어 있습니다."

"흥 그놈의 데이터. 세상 참 편해서 좋군. 음악도 그렇지. 입력만 하면 멜로디부터 모든 악보가 완성되어 오케스트라까지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시대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며 음악 또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개개인의 취향에 맞게 다양한 코드로 작곡이 가능한 신 개념 디지털 시퀀서 프로그램 큐베이스2120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아날로그 감성을 담은 음악들은 갈수록 그 자리를 잃게 되었다.


피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피아니스트는 점차 잊혀져가는 과거의 인물로 남게 되었으며 그 자리를 안드로이드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결국 2142년 현재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음악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레이먼드님의 곡은 정말 좋았습니다."


레이먼드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입력되어 있는 그녀는 영상을 통해 그가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시절의 모습을 확인한 바 있다. 20대 시절의 그는 젊고 우아하며 패기 넘치는 피아니스트로 외모뿐 아니라 마인드에서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로봇 따위가 감히 내 곡을 판단해? 내 연주의 깊이를 알기나 하고 내뱉은 말인가."

"많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지만 저희 안드로이드들도 좋다 싫다는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대입시켜 최소한의 감정 표현을 가능하게끔 만들었지만 결국 데이터에 의해 느끼는 감정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녀가 좋다고 하는 것은 피아니스트 레이먼드를 평가한 자료들을 토대로 내린 확률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가서 정원이나 손보게."


디지털 문명에 대한 레이먼드의 태도는 증오에 가까웠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드로이드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약혼녀였던 마리안느 때문이다.


#


ㅡ콰광!


거실을 흔드는 둔탁한 소리. 식사를 마치고 오전 내내 피아노를 치던 레이먼드는 양손으로 건반을 내리쳤다.


"젠장!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모든 게 다 쇼팽의 그늘이야."


레이먼드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지만 뛰어난 작곡가는 아니었다. 아날로그 음악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새로운 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양한 시도로 악보를 채워보지만 생각만큼 퀄리티 있는 곡은 나오지 않았다.


"마리안느.. 네가 좋아하던 피아노는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구나."


답답한 마음에 레이먼드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안느는 그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곁에 있었다. 처음 나갔던 어린이 피아노 콩쿨에서 고배를 마시자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주었고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전공까지 클래식으로 바꿀 정도로 모든 걸 함께하려 했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도 첫 독주회를 열었을 때도 항상 응원해주고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레이먼드와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진속의 여성분이 마리안느인가요?"


어느새 다가온 JN-7.

놀란 레이먼드는 큰소리로 역정을 낸다.


"사진이라니! 내 액자를. 서랍을 뒤진 건가?"

"테이블 청소 중에 발견했습니다."


작은 액자 속에는 젊은 시절의 레이먼드와 마리안느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50년이 다 되어가는 사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빛바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허락도 없이 내 물건에 손을 대다니! 죽고 싶은가?"

"죄송합니다. 인테리어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구식 가구와 집기들로 가득한 저택 내부는 수작업으로 세공한 각종 생활용품부터 직접 채널을 돌리는 TV까지. 골동품 박물관이라 해도 될 만큼 레트로 감성이 짙은 물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어느 집에서나 흔히 있을법한 사진 한장 없다는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는! 내 물건에 손대지 말아.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너를 정말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겠다."


마리안느.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던 시절. 그녀는 레이먼드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비록 만날 수 없지만 그녀의 모습과 향기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이 생생할수록 그리움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녀를 되새긴다는 건 결국 레이먼드에게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고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더욱 견고해질 뿐이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현재 겪고 있는 슬럼프의 원인은 그녀를 잃고 난 뒤 생긴 트라우마 때문이란 걸. 닫힌 마음으로 피아노를 친다는건 악보대로만 움직이는 건반과 다름없었다. 더 크고 넓게 하늘높이 감정을 끌어올려야만 볼 수 있는 세계이거늘. 악상의 한계와 계속된 실패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가 떠난 지도 어언 50년. 이제 놓아줄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흔적을 없앤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립지만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사건이 이 저택에서 액자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


그날 밤 레이먼드는 JN-7의 방을 찾았다. 아무리 기계 문명을 싫어하고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고 해도 악의가 없는 그녀에게 너무 과하게 대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감정 없는 인형에 불과하고 겉모습일 뿐이지만 손녀뻘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화를 냈으니. 게다가 매일 마주해야 하는 그녀의 얼굴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선 오해는 풀어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에 있는가."


똑똑 방문을 두드리자 그녀는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레이먼드님."

"충전중인 모양이군.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그녀는 목 뒤에 연결된 퓨즈 케이블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고 있던 중이었다. 안드로이드의 유지 및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력은 일렉트로닉 에너지. 두 시간 충전으로 2.64메가와트의 전력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낮에는 내가 조금 과했네. 요새 신경이 예민하니 이해하게."


레이먼드는 자신이 예민한 상태라는 걸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자 한동안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빙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한다. 비록 로봇이지만 이렇게 교류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던 레이먼드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헌데 이전 내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레이먼드님의 비밀스러운 모습까지 모두 데이터로 저장되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밀스러운 모습이라니 무슨.."

"예를 들면 잠자리 모습을 담은 영상이라던지 남들이 모르는 독특한 취향까지 말이죠."


도심 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만개의 소형 드론이 범죄의 예방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자료는 고스란히 사이버트로닉스 본사에 이송되어 최적화 안드로이드 생산을 위한 자료로 쓰이고 있었다.


사생활이 감시당하는데 불만을 품은 시민 단체에서 강력한 반발이 있었지만 결국 범죄 발생률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현상과 맞물려 드론 감시 체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친환경으로 둘러싸인 레이먼드의 저택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라 그런지 감시형 드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걸 대체 어떻게 구한거지. 다 소용없는 데이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레이먼드님을 케어하는데 충분히 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다 늙은 노인의 잠자리 취향은 알아서 뭐하겠나. 그리고 그건 자네가 할 일이 아니야. 반려자 안드로이드가 따로 있는데 어찌.."

"죄송하지만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쾌적한 수면을 위해 필요한 뇌파 값과 바이오리듬을 측정하는건 불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순간 자신이 이해한 것과 다른 내용에 민망해진 레이먼드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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