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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3,387
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작성
20.05.1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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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4장.

DUMMY

감정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 혹은 기분이다. 심리적 원인부터 생리적 신체적 그리고 사회 문화적 요인까지 발생 원인은 다양하다.


사람의 흉내를 내는 안드로이드 역시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상황에 맞게 만들어낸 가짜 감정일 뿐. 자의식이 없는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쁘다는 표현은 처음 듣는 것 같군."


의외였던 레이먼드는 잠시 식사를 멈췄다. 아직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좋다 싫다 정도의 의사만 표현했을 뿐. 희노애락에 대한 감정 묘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듣기 거북하시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싫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회로에는 다양한 시스템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조금씩 그리고 은밀하게.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는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이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상 징후는 시작되었다.


JN-7 그녀는 이미 일반적인 안드로이드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


ㅡ쏴아아


기다란 호스를 뚫고 시원하게 물줄기가 뿜어진다. 정원의 푸른 수목과 꽃나무는 흩뿌려지는 생명수에 흠뻑 취하고 있는 중이다. 이 순간만큼 그녀는 로봇이 아닌 생명의 여신이었다.


식물은 늘 성장한다. 생장 속도가 느린 나무라도 방치하면 잎이 무성해지며 덤불이 되고 만다. 육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선 꾸준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여태껏 레이먼드 혼자 이 넓은 정원을 가꾸었지만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으음.."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던 레이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동그란 안경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허리를 움직여본다. 살짝 찌뿌둥한 것이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 했다.


"벌써 봄인가."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니 완연한 봄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사계절의 시작 매년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한해를 세고 있는 그에게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이 포근함은 잊고 있었던 누군가의 품처럼 깊은 행복감을 전해준다.


"어디 잘 하고 있는지 볼까."


레이먼드는 오랫동안 정원을 돌봐오며 깨달은 게 있다. 식물과 소통하는 첫 단계는 정원을 손질하는 것이고 그건 키운다는 의미와 일맥상통 한다는 점이다.


직접 교감을 나누며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 식물의 개성과 상태를 알게 되고 어느새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비록 그녀에게 정원 손질을 맡기지만 건강이 회복되면 아마도 직접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는군. 속도도 빠르고."


능숙한 실력에 만족한 레이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일류 정원사의 노하우와 스킬이 저장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정원 손질이 끝나자 그녀는 꽃꽂이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목련과 개나리를 메인으로 소박하지만 세련된 꽃바구니를 만들었다. 생기 넘치는 봄꽃들로 가득 채운 바구니는 이내 마법 같은 화사함으로 봄의 향기를 전했다.


"꽃꽂이라.. 나쁘진 않네."


처음엔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꽃꽂이는 가히 예술작품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퀄리티를 자랑했고 덕분에 푸른 녹음만 가득하던 정원이 화사하게 바뀌었다.


그때 한동안 창밖 풍경을 감상하던 레이먼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살짝 고개를 틀었다.


"웃고 있는 건가?"


항상 무표정하던 그녀가 웃고 있다.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는 로봇이 꽃을 보며 웃고 있는 것이다. 저것 또한 가짜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만들어낸 웃음이라 하기엔 너무도 천진스러웠다.


이후 그녀는 춤을 추듯 정원을 거닐었다. 자신이 만든 꽃바구니 틈에서 노니는 모습은 머물곳을 찾은 나비처럼 한동안 떠날 줄 몰랐으니. 그래 그녀는 나비와도 같았다.


"저래서는 기껏 손질한 정원이 남아나지 않겠는걸?"


소리쳐 멈추게 하려던 그는 곧 그만 두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뭐 내버려 둘까. 토스트도 얻어 먹었으니."


#


나른한 오후가 지나고 해가 저물자 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귓가를 스친 봄바람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든 주황색 하늘이 눈에 들어왔고 그에 어울리는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이 소리. 레이먼드님의 연주구나."


쇼팽이 작곡한 17개의 가곡 중 하나 봄(spring). 이 곡은 호수가 노래하고 대지가 이슬로 빛나면 숲 속에는 가축들의 무리가 있네 라고 해석하며 봄의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피아노 소리로 향한 그녀는 이 게릴라 콘서트의 유일한 관객이 되었고,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피아노를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레이먼드는 이어 다음 연주를 시작했다.


연습곡 Op.25 9번. 일명 나비라고도 불리는 이 곡은 쇼팽의 작품 중 하나로 늦은 봄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케하는 칸타빌레가 조금 전 정원에서 보여준 JN-7의 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나비 그녀는 한 마리의 노랑 나비였다.


그러던 그때 그녀가 또 다시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 안구에 다른 사물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젯밤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의문의 흑백 영상.


마치 끊겨버린 필름처럼 군데군데 조각난 장면이 연출된다. 나무 피아노. 낡은 악보. 똑딱거리며 반복되는 메트로놈. 스치듯 흘러가던 영상은 갈수록 그 형태가 또렷해지기 시작했으며 연주가 끝나자 방금 전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이상 현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무언가 그녀의 모습이 평소 같지 않다고 생각한 레이먼드

하지만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말투로 답했다.


"시스템 과부하로 인한 오류로 판단됩니다. 빠른 시일 내에 복구하겠습니다."


왠지 모를 위화감 그리고 걱정. 하지만 레이먼드는 곧 별거 아니려니 생각했다. 그녀는 초정밀 인공지능 로봇이다. 현대 문명의 결정체답게 이상이 생기더라도 즉각 문제를 분석하고 스스로 복구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였으니 특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적당히 하고 올라가게."

"거실 청소. 카페트 세탁. 환풍구 손질.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너를 생각해서가 아니야. 그러다 고장 나면 수리비는 내 주머니에서 나가게 되니 쉬엄쉬엄 하라는 소리다."


안드로이드의 외형은 인간과 흡사하지만 결국 전자 제품과 마찬가지다. As 무상 보증기간 1년에 자가 복구를 지원한다곤 하지만 치명적인 오류 발생 시 교체되는 부품값은 따로 지불해야만 했다.


구두쇠처럼 말은 했지만 특별히 돈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간 작곡했던 곡들의 저작권료 수입으로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아날로그 음악의 위상이 현격히 낮아진 지금 올드한 코드의 구닥다리 연주곡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여태껏 이 저택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왔건만. 혹여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생기지나 않을지 살짝 우려가 됐을 뿐이다.


"이해했으면 오늘 일과는 이만 마무리 짓도록."

"괜찮습니다. 레이먼드님."

"한번만 더 같은 소리를 반복하게 하면 반품해버릴테니 알아서 하지."


결국 강제로 떠밀리다시피 자신의 방에 돌아온 JN-7.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멀거니 있던 그녀는 이내 충전 케이블을 회로에 연결했다. 그리곤 방금 전 발생했던 오류를 분석하기 위해 메디컬 소프트웨어를 가동시켰다.


[시스템 메디컬 모듈.]

[전체 시스템 검사를 시작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안드로이드에 문제가 발생했던 경우는 총 47회. 그 중 45건이 해결되며 복구 되었고 미해결된 나머지 2개의 경우는 모두 폐기되었다. 해결되지 못한 두건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안드로이드의 폭주 사건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원인 규명이 불분명했다.


그때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시스템 모듈이 문제점을 찾아냈다.


[삐비빅! 베드 섹터 메모리 발견.]

[에러코드 pY37270 치명적인 오류로 판단되어 정밀 검사를 요구합니다. 본사와의 연결을 권장합니다.]


기기의 내부 보안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말없이 소프트웨어를 종료시켰다. 이는 지금까지 보여준 안드로이드의 개념에 모순되는 현상으로 마치 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메뉴얼을 무시하고 스스로 판단해 행동한 것이었다.


그날 밤 눈을 감고 에너지를 충전하던 그녀는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마치 꿈처럼 다가온 이상 현상에 그녀의 회로는 또 한 번 오류를 일으켰다.


#


잠결에 들린 낯익은 소리에 레이먼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반. 아직 날이 밝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흐음.."


꿈이었을까. 하지만 레이먼드는 분명히 들었다.


"꿈이 아니야. 이 소리는 거실이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던 레이먼드는 기지개를 킬 새도 없이 침실을 빠져나왔다. 절룩거리는 몸을 난간에 의지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잠시 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내 피아노를 갖고 뭐하는 거지?"


거실 앞 피아노에는 말없이 건반을 누르고 있는 JN-7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힘을 주면 부서질 물건을 다루듯 한음 한음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레 터치하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레이먼드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가 아니야. 첫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 피아노엔 절대 손대지 말라고 했던 것을 잊었는가?"


버럭 다시 예민병이 도진 레이먼드는 잠긴 목으로 그녀를 추궁했다. 그에게 피아노란 자신의 삶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피아노 때문에 성공했고 피아노 때문에 살아왔으며 피아노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늙고 볼품없어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물건. 더군다나 마리안느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이 클래식 피아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건드린 거지? 내 대신 연주라도 할 셈이었나?"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뭘 모른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안드로이드의 행동은 기억 회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시각을 통해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 회로에 정보를 보낸다. 그렇게 얻게 된 정보는 다음 동작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고 데이터에 의거해 비로소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마치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군."


그 순간 확실한 오류라고 판단한 레이먼드는 즉시 사이버트로닉스에 연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나온 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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