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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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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9
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작성
20.05.1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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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제10장.

DUMMY

"제이앤. 잠깐 나 좀 보지."


다음 날 레이먼드는 따로 제이앤을 찾았다. 정원 손질을 위해 에이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에게 몇 가지 당부할 사항이 있어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먼드님."


여전히 커다란 눈망울에 생기 있는 얼굴.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인지 로봇인지 구분이 안가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안드로이드였다.


"몇 가지 자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아니 그 전에 데이터를 삭제할 수 있을까?"

"가능한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삭제하실 사항을 말씀해주십시요."

"앞으로 가사일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배제시킬 수 있겠는가? 가사도우미 라는걸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지 알고 싶군."


그렇게만 된다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에이커가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앞서 말했다시피 의심이 지속되면 결국 그녀의 이상 징후가 밝혀질 테고 최악의 경우 폐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레이먼드의 애간장은 갈수록 타들어갔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 요청하신 사항은 1번 섹터에 저장된 내용이라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혹시나 했지만 메인 데이터의 삭제나 억제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자아를 갖고 있다면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레이먼드는 그녀를 설득해보기로 했다.


"제이앤. 자네가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어떻게 배우지도 않은 피아노를 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네. 하지만 평범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해."


그녀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곤 해도 완전한 자의식을 가졌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오류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었고 일반적인 표현을 착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간혹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진심이 묻어나는 얼굴이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평범하다는 건 어떤 것인가요. 저는 왜 평범하지 않은 거죠?"

"글쎄 평범한 안드로이드는 아마도 에이커처럼 행동하겠지. 자네는 감정 표현이 다양하고 학습 의지까지 있으니 당연히 평범하지 않을 수밖에."

"그렇다면 저는 고장난건가요? 수리를 원하시면 바로 본사에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지."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안드로이드인데 정말 그녀는 자아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는 단지 사람과 같은 표정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말해 간혹 보았던 그녀의 감정 표현은 무의식적인 반응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역시 피아노 때문인가."


그래 대충 피아노가 원인일거라고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확신을 굳히기엔 너무 많은 의문점과 다양한 경우의 수가 꼬리를 물고 있다.

단순히 음계에 따른 소리의 파장 때문일 수도 있었고 연주를 들을때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가 원인일 수도 있었으며 곡의 종류에 따라 반응을 보일 수도 있던 것이다.

레이먼드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몇 가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제이앤. 혹시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그녀가 보여준 감정 표현 그리고 학습 의지는 로봇이라 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모습들이다. 과연 그녀는 그러한 점들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을까.


하지만 제이앤은 아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모델명 JN-7. 버터플라이 사이버트로닉스에서 생산된 안드로이드입니다."


결국 그녀의 아이덴티티는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였다.

레이먼드는 그녀가 자의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착각. 정말 착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진심이 느껴지는 표정과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드러낸 확고한 의지. 그리고 난데없이 고난이도의 장송곡을 연주할 수 있었던 건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 내가 잠시 이상한 질문을 했군."


레이먼드는 조금 아쉬웠다.

그녀가 정말 자의식을 갖고 있다면 세계 최초로 인간과 대등한 로봇이 탄생될 뻔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는 로봇 생명공학의 신기원을 이뤄내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잡음과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계산된 생각은 아니었으니. 한마디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서투른 바램이었다.


"그럼 하실 말씀은 모두 끝나신 겁니까?"

"그러고 보니 딴소리만 주구장창 했군.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요."

"제발 메뉴 브리핑좀 삼가해주면 안되겠나? 내가 아주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

"브리핑 내용을 삭제할 순 없지만 변경은 가능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그런 방법이 있었군! 괜찮고말고 어서 변경하게나."


이전에도 말했지만 1번 섹터에 저장된 데이터의 삭제 및 추가는 본사를 거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하지만 말과 행동의 지연 및 반복 그리고 내용의 변경은 임의대로 설정할 수가 있었다. 레이먼드는 진작 바꿔 놓을 걸 하고 탄식했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변경할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요."

"굳이 내용이랄 게 있겠나. 그냥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까 메뉴에 대한 이야기만 안 해줬으면 좋겠네. 마치 자신이 준비한 식사처럼 거짓 연기하지 말란 소리야."

"따로 지정하시지 않는다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날씨를 이야기하든 노래를 하든 상관없으니까. 아무 말이나 하게."

"알겠습니다 레이먼드님."


이로써 중복된 메뉴 브리핑으로 어제와 같은 의심을 사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이다. 가사도우미는 에이커 제이엔은 피아니스트로서 이 저택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될때까지 더 신경쓸 부분이 있을 테니까.


"두 분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그때 열린 문으로 에이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정원 손질을 마치고 돌아왔을 뿐이지만 레이먼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뭐 무슨 일인가. 에이커군!"

"방금 정원 손질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놀라십니까. 레이먼드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나쁜 짓을 한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숨겨야 한다는 상황이 가져온 긴장감은 레이먼드의 말을 더듬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놀라긴 무슨. 하하."


레이먼드는 애써 태연한 척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른다는 건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응? 식은땀이라고?"


그제야 자신이 땀을 쏟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레이먼드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냈다. 무슨 이 정도 일에 땀까지 흘리고 있는지. 마치 서스펜스 스릴러 게임이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다.


"잠시 레이먼드님의 건강 상태 이상 유무를 체크하겠습니다."

"뭐? 아니 갑자기 무슨.."


스크린 메디컬 CT스캐너. 잠시 뒤 에이커가 만들어낸 레이져 불빛이 레이먼드의 몸 전체를 쓸고 지나가자 검진 리스트에 따른 결과가 발표되었다.


"혈압, 혈당, 콜레스트롤, 중성지방, 간수치, 요산,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헤모글로빈, 체질량지수 등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기껏해야 2초 남짓의 시간이었지만 최첨단 나노 입자 레이져는 몸 속 깊숙한 곳의 침투하여 지병과 앞으로 발병할 위험이 있는 요소까지 모두 파악하여 수치화시켰다.


"그 그런가.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군."

"단 평소보다 맥박이 빠른 편입니다.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음악이 필요하겠군요."


신규 모델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제이엔이 케어를 담당했을 때와는 여러 가지가 달랐다. 그런데 가사도우미가 이런 것까지 가능한게 맞는 건가?

원치도 않았던 건강 검진까지 받고나니 모든 게 얼떨떨했던 레이먼드는 에이커의 다음 행동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잠시 세팅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세팅이라고? 무슨.."


스윽 부드로운 동작으로 양손을 펼쳐 보이는 에이커. 그러자 손바닥 위에 놓인 초소형 드론들이 푸른빛을 점등하며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흩뿌린 작은 친구들의 정체는 AI스피커 MF36w.

마치 꽃을 찾는 벌꿀처럼 위잉거리며 자리를 찾던 드론들은 곳곳에 위치하기 시작했고 이내 저택 내부에는 우아하고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운드, 스테레오, 우퍼, 딜레이, 에이징, 모든 오디오 믹서를 클래식 최적화로 설정.]

[곡명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 안단테.]

[메인 볼륨을 조정. 음악을 재생합니다.]


최신 안드로이드 AK모델은 대상의 바이오리듬과 심리 상태를 파악하여 원하는 곡을 들려줄 수 있는 기능까지 겸비했다. 이제 레이먼드는 마치 웨어러블 스피커처럼 언제 어느 때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음악을 최고의 음질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그러고 보니 제가 잠시 잊고 있었군요."


순간 무언가가 생각난 듯 에이커는 음악을 중지시켰다.


"피아니스트 안드로이드가 따로 있는데 굳이 녹음된 연주를 들을 필요는 없겠죠."


그리곤 제이엔 쪽으로 정중히 손을 뻗어 연주를 권했다.


"레이먼드님의 마음을 진정시켜 드릴 수 있는 곡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난감했다. 보통 피아니스트 안드로이드의 경우 저장된 수백 수천 곡의 악보를 상황에 맞게 선택하여 완벽히 연주하도록 만들어진다. 따라서 에이커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피아노 앞에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현재 제이엔이 칠 수 있는 곡은 기껏해야 젓가락 행진곡 정도. 엊그제 그녀가 보여준 리스트의 장송곡을 또 다시 칠 수 있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 그런 음울한 곡을 연주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저보고 피아노를 치라는 말씀인가요?"


곤란한건 레이먼드만이 아니었다. 제이엔 역시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망설이고 있었다.


"물론이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니까요."


그 어떤 답변도 변명도 떠오르지 않는 상황. 하지만 언제까지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 종일 젓가락 행진곡만 치게하고 싼값에 구매한 안드로이드라고 둘러대면 속아줄려나.

지켜보던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래 제이엔 한곡 쳐주게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젓가락 행진곡이 듣고 싶군."


명망 있는 천재 피아니스트 레이먼드 킴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듣는 곡이 젓가락 행진곡이었고 그걸 듣기위해 안드로이드까지 구매했다니. 별난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주길 바란다는 건 무리였을까.


"알겠습니다. 레이먼드님."


서서히 피아노 앞에 자리한 제이엔.

하지만 그때 에이커가 곡 변경을 요청했다.


"지금 선택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곡으로 적절치 않습니다. 레이먼드님의 맥박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선 빠른 템포의 연주보다 잔잔하게 여운을 주는 곡이 좋겠군요."


주저리주저리 안드로이드가 참 말도 많다고 생각했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레이먼드는 애써 괜찮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아니네. 나는 지금 젓가락 행진곡이 꼭 듣고 싶네만."


그러자 무슨 생각인지 제이엔까지 에이커의 말에 동조하는 게 아닌가.


"제 생각에도 템포가 빠른 곡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먼드님."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안드로이드라서 거짓말을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레이먼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쩔 생각인지.

설마 장송곡이라도 연주할 셈인건가.


"아니 난 괜찮대도. 대체 어쩌려고.."


하지만 이런 우려 속에서 제이엔은 자신 있게 피아노 커버를 올렸고, 그러자 도무지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레이먼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망했군."


이제 곧 그녀의 오류가 탄로 나게 될테지.

본사에 보고가 되는 것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에이커를 반품하고 모든 걸 리셋시켜야만 한다.

특별한 하자 없이 안드로이드의 환불이나 교환은 불가능했으니 금전적인 손해가 상당하겠지만 제이엔을 지키기 위해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녀가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어찌된.."


부드럽고 감미로운 건반 소리.

가르쳐 준 적도 악보를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설마 조금 전 잠깐 들렸던 그 곡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흉내라고 하기엔 너무도 완벽한 곡조와 악센트였다.

이것 또한 장송곡과 마찬가지로 그녀 내면에 잠재된 의식이 각성되어 벌어진 일이라고 추측해보지만 폭주처럼 보였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 그녀는 너무도 평온하고 능숙해 보였다. 마치 같은 곡을 수십 번 쳐본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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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11장. 20.05.15 142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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