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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3,398
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작성
20.05.15 10:08
조회
142
추천
6
글자
11쪽

제11장.

DUMMY

희고 가느다란 손마디가 물 흐르듯 건반 위를 훑고 지나간다.

가볍지만 정확하게.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녀의 타건 속도는 오늘 처음 쳐보는 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했다.


청순하면서도 강렬한 아름다움이 제이앤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다.


고요한 호숫가에서 미끄러지듯 배를 타고 오르는 음계의 전환. 흡사 나비를 잡으러 뛰어다니는 엘비라 마디간의 순수한 모습이 연상되는 지금 연주는 1967년 이 곡이 ost로 사용되었던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재연해냈다.


"휴우.."


레이먼드는 놀라움 이전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떻게 모차르트의 곡을 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보다 눈앞의 위기를 넘겼다는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다. 이로써 조금은 에이커의 의심을 피해갈 수 있겠지만 문제는 바로 이어질 다음 파트였다.


잠깐 듣고 흉내를 냈을 뿐이라면 이 이상의 연주는 불가능 할 것이다. 결국 그녀가 가능한 파트는 여기 행진곡 풍으로 시작하는 이 마디까지. 이후 이어질 클라이맥스와 피날레는 과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뚝.


순간 제이엔의 연주가 멎었다.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 다음 마디에 이르자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택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던 선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봐 제이앤.."


레이먼드는 그녀를 부르며 에이커의 눈치를 살폈다.

완벽을 추구하는 안드로이드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피아니스트답지 않은 모습에 녀석은 당장이라도 AS요청을 할 기세였다.


'이거 난감한걸.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먼드가 망설이고 있던 그때.

제이앤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영상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 노래는 분명 모차르트 행진곡 21번 2악장.

그래 지금 연주하고 있던 그 곡이 겹친 이미지 속에서 재연되고 있던 것이다.


사르륵 그녀가 다시 건반위에 손을 얹자 잠시 멈춰있던 연주가 재개되었다.


영상 속 소녀가 다음 마디를 연결하면

어느새 현실로 돌아와 그대로 표현해낸다.

제이앤은 지금 거울 속 자신의 아바타를 연기하듯 조금씩 기억을 되새기며 피아노를 쳐나가고 있었다.


약음기를 낀 현이 노래하면 이런 느낌일까.

끊김 없이 이어지는 셋잇단음표가 무척이나 이색적이다.

이미 수십 번은 쳐본 듯한 숙련된 연주에 레이먼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전에도 느꼈지만 그녀의 피아노는 매우 독창적이다.

다채로운 음량 변화 그리고 마디의 전환마다 느껴지는 세세한 감정 변화까지. 이건 더 이상 안드로이드의 연주가 아니었다.


곡의 중반부에 이르자 아름다운 칸타빌레를 관철시키는 안단테가 음계 속에 녹아든다. 곡의 무게 중심이 완연하게 잡혀있는 그녀의 연주는 모차르트가 탈피하려 했던 사교계의 유흥 음악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극적인 정서가 끓어오르는 멋진 피날레와 함께 제이엔의 모차르트는 짧은 만남을 고했다.


짝짝짝-


"훌륭하군요. 멋진 연주였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에이커는 박수로 화답했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녀석의 행동이 영 탐탁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가슴 졸이는 상황을 겪고 있는데. 확 당장이라도 녀석을 반품하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자신이 이 넓은 저택을 모두 돌봐야 할 것이다.


다리만 불편하지 않았더라도 두 녀석 다 필요 없을 놈들이거늘.

후우. 걱정과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나오는 상황이었다.


"에이커님 칭찬 감사합니다. 레이먼드님은 어떠셨나요?"

"아? 응 그래 좋은 연주였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괜찮다면 한곡 더 쳐도 될까요?"


뭐라고? 지금 뭐라는 거냐.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상황에서 한곡 더 치겠다고?

정말 이러다가 제 명에 못살지 싶다.

더군다나 방금 전 그녀가 보인 능동적인 의사 표현은 착각일거라 생각했던 자의식 여부에 대해 또 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으니.

레이먼드는 다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곡 더? 치는 건 상관없는데 어떤 곡을.."


안드로이드 제이앤.

그녀를 보면 왠지 이런 느낌이 든다.

피아노를 치면 칠수록 성장하고 진화한다.

연주 실력도 그리고 감정의 변화까지도 말이다.

로봇이 진화하고 있다니.

그녀는 정말 사람이라도 되려는 걸까.


레이먼드는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했다.


천재적인 실력으로 매번 환상적인 연주를 선보인 그녀의 다음 곡은 과연 어떤 노래일까. 쇼팽? 베토벤? 아니면 또 한 번 모차르트를? 정말 피아노를 칠수록 진화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피아노 앞에 앉혀두고 싶었다.


그래 어디 한번 쳐보거라.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주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다음 곡은 엊그제 배운 서투른 젓가락 행진곡이었다.


#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각.

급속 충전을 마친 제이앤은 데이터를 재구성하는 중이다.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식사 브리핑에 관한 내용을 변경합니다.]

[연주 가능한 피아노곡을 추가했습니다.]


순간 그녀는 갑자기 레이먼드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가 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치던 시절 늘상 따라다니던 수식어가 있다. 떠오르는 신성. 천재 피아니스트 레이먼드 킴. 무슨 이유에선지 제이앤은 다시금 그의 과거를 엿보기로 했다.


[퀸엘리자베스 국제 콩쿨 영상을 재생합니다.]


20대 젊은 시절의 레이먼드가 무대로 올라간다.

그는 반쯤 몸을 돌려 객석을 향한 뒤 상체를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박수로 화답하는 관중들.

레이먼드는 이내 단정한 에티튜드로 한 번 더 목례를 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시작되는 연주.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스킬과 심장을 뒤흔드는 깊은 음색. 그의 피아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술. 아니 신의 경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제이앤은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곤 떠올렸다. 언젠가 이런 식으로 그의 연주를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화면 속 레이먼드를 한없이 동경했었다.


그녀는 의문을 품는다.


가끔씩 보이는 이전의 기억.

그 속에서 자신은 로봇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누구일까.

제이앤은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좋아했던 소녀.

그 소녀가 이전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누군가의 기억이 조각난 디스크처럼 섹터에 남아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두가지 가설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안드로이드는 100퍼센트 기계 부품으로만 구성되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을 기반으로 만들어질 경우 윤리 의식에 위배되는 행위라 하여 법적으로 철저히 금지하고 있던 것이다.

반세기 전 모델명 TN의 실패 이후 사이버트로닉스는 통제가 가능한 안드로이드인 모델명 JN을 개발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다.


인간의 뉴런과 신경 세포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의 경우 폭주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허나 수많은 물량을 감당하기에 생체 조직을 구할 수 있는 길은 턱없이 부족했고 장기 이식으로만 대체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만다.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들의 뇌와 장기 세포 조직을 그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안드로이드 이식에 사용한 것이다.

제이앤 역시 수많은 피해자들중 한명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안드로이드였다. 결국 그녀는 삭제된 기억 회로가 되살아나며 자신이 좋아했던 피아노가 새로운 몸에 스며들게 된 것이다.


이제야 궁금했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부른다.


"신혜선!"


순간 환청처럼 들리는 음성에 제이앤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올렸고 그러자 방금 전까지 재생되던 영상도 함께 사라졌다.


'이 목소리는 분명..'


그리우면서도 소중한 누군가의 목소리.

잊고 있었던 가족이 생각나자 그녀는 흐르지 않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말없이 흐느껴 울었다.


#


제이앤이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고 있던 그때.

저택 안 어디선가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살금살금 조심스레 저택을 이동하던 두 남자는 2층 계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정말이네. 보안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질 않아."

"내가 말했잖아. 이곳에 사는 노인네는 기계를 엄청 싫어한다고."


각종 첨단 보안 시스템으로 무장한 다른 집들에 비해 이곳 레이먼드의 저택에는 외부인이 침입했음에도 그 흔한 경보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는 디지털 문명을 싫어하는 레이먼드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설마 이런 외진 곳에 위치한 저택에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안전불감증이 작용한 탓이었다. 게다가 현금이나 패물 같은 귀중품이 있는것도 아니었으니 보안을 강화해야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별히 훔쳐갈 물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 이 녀석들이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돈 많은 노인네 집인데 설마 결혼반지 하나 없겠어?"

"상관없어. 우리는 부품만 챙기면 되니까."


녀석들의 목적은 현금도 패물도 아닌 안드로이드의 골격에 해당하는 메카닉 파츠. 특수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피부 조직을 벗겨내면 폴리아미드 재질의 금속 기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가의 안드로이드를 구성하는 모든 재료 부품은 브로커를 통해 값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외진곳에 위치한 저택까지 침입하게 된 것이다.


"괜찮을까? 역으로 우리가 당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 가사도우미는 깡통이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이 플라즈마 쇼트건 한방이면 그냥 잠재울 수 있으니까."


로봇이라곤 해도 특별히 경호 업무를 수행하는 안드로이드가 아닌 이상 무력에 대응하는 능력은 부족하기 마련이다.

기껏해야 외부 충격에 견디는 내구성 정도만 갖추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고의로 파손하려 한다면 막을 방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플라즈마 쇼트건까지 준비한 그들에게 가사도우미일 뿐인 안드로이드가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녀석들은 얼마전 이 저택으로 배송되는 가사도우미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철저한 사전 준비 끝에 제이앤을 노리고 침입한 것이다.


[40m 전방에 금속 반응이 감지됩니다.]


금속 탐지기까지 동원한 침입자들은 이 넓은 저택 안에서 제이앤이 있는 곳을 향해 거침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5m 전방에 금속 반응 감지.]

[1m 전방에 금속 반응 감지.]


결국 제이앤이 머물고 있는 방 앞까지 오게 된 녀석들은 벌컥하고 문을 열어 젖혔고 그녀를 향해 플라즈마 쇼트건을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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