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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3,381
추천수 :
171
글자수 :
108,781

작성
20.05.13 17:45
조회
156
추천
7
글자
10쪽

제8장.

DUMMY

이 순간 레이먼드는 지금의 피아노 연주를 심상화 시켰다.

그가 떠올린 이미지는 바로 중세 유럽 귀족들의 연회장. 어느새 20대의 수려한 외모로 돌아간 그는 턱시도를 입고 제이앤과 함께 왈츠에 몸을 맡겼다.


비록 상상일 뿐이지만 이런 식으로 이미지화시킨 연주야말로 레이먼드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피아노의 이상적인 모습이었고 감정에 몰입하여 느끼는 바를 솔직하고 자유분방하게 표현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디지털 음악에선 볼 수 없는 아날로그 피아노만의 위대한 점이기도 했다.


[시스템 콜. 도파민 분비가 활성화됩니다.]


그때 멀쩡하던 제이앤의 눈에 회색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마다 발생하는 이상 징후.

수십 개의 연산 기호들이 안구를 잠식해 들어오자 제이앤의 신경 회로에는 또 다시 의문의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영상 파일 확인.]

[다량의 베드섹터 메모리 발견.]

[데이터베이스 1번 섹터에 강제 업로드.]


경고 메시지를 보내듯 다급한 시스템 음성.

느낌이 심상치 않았던 레이먼드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무슨 일인가. 제이앤!"


레이먼드의 부름에도 그녀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회색 안구만 번뜩일 뿐이었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레이먼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왜 자꾸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지 좀처럼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엔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피아노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여러 감정들. 기쁘다 혹은 슬프다 등의 다양한 이모션이 신경 회로에 전달될 경우 잊혀진 메모리가 되살아나고 있던 것이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이렇다 할 방법이 없자 급하게 레슨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다.


"이봐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일어나래도!"


여전히 반응이 없던 그녀는 이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짧은 단어를 뱉어낸다.


"Funerailles.."


퓨너라일리즈(Funerailles). 죽음과 종말 혹은 장례 장의를 뜻하는 단어였다. 이후 그녀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웅장한 음색의 그로테스크한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이 곡은 리스트의 장송곡?"


레이먼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초적인 연습만을 반복해오던 그녀가 갑자기 프란츠 리스트의 대표곡을 연주하다니.

이제 갓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가 아는 곡이라곤 단 한개도 없었고 오늘에서야 겨우 젓가락 행진곡을 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레이먼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겹쳐 보이는 두개의 세계. 제이앤은 지금 영상 속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연주를 이어가는 중이다. 어둡고 음울한 그러나 영웅적이며 웅대한 선율은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있었고 격하게 흔들리는 상체는 광적일 정도의 고독을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레이먼드를 소름 돋게 만든 것은 미칠 듯한 속도의 옥타브 연타를 멈추지 않고 무한정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몸 전체로 연주를 하듯 그녀가 보여주는 움직임은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마비가 왔을 정도로 격렬했고 지켜보던 레이먼드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테크닉으로 곡을 완벽히 소화하고 있었다.


지금껏 이런 피아니스트가 있었던가.

이 정도면 가히 천재라는 타이틀을 넘어 악마의 재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신들린 연주가 계속되던 그때 제이앤은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후우.."


이제 막 정원 손질을 끝낸 레이먼드는 한적한 곳에 앉아 파이프를 물었다.

고민이었다. 제이앤의 피아노 레슨을 계속 이어가야 할지 말아야할지.

오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확실히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물론 각성을 통해 그녀의 피아노가 일취월장하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마지막 파트에서 보여준 그녀의 옥타브 연타는 폭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인간이 할 수 있는 테크닉이 아니었다.


"마리안느.."


폭주라고 하니 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떠올랐다.

안드로이드의 습격을 받았던 그날.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고 비명에 절규했었다. 이후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량한 신규 안드로이드가 출시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와 같은 불상사는 없었지만 언제 또 잊혀졌던 악몽이 되살아날지 모르는 일이다.


"역시 로봇 따위는 들이는 게 아니었는가."


조금은 수그러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참았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지금 레이먼드가 걱정하는 건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디지털 기계 문명의 폐해로 인해 또 다시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녀가 비록 안드로이드 일지라도 말이다.


"여기 계셨군요. 레이먼드님. 저녁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거는 제이엔. 장송곡을 치던 기괴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여느때처럼 밝은 표정이다.


"거짓말 하지마라. 저녁은 무슨.."

"말씀드린 대로 송로버섯과 캐비어를 사용한 화이트 트뤼프입니다."


요리 레시피가 삭제되었다고 몇 번을 인지시켜도 알람처럼 제때에 뱉어내는 식사 메뉴 브리핑은 막을 수 없었다.

오늘 저녁은 또 직접 만든 오믈렛으로 때우게 될 것이다.


"음. 이 소리는?"


그때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미세한 기기음 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색의 자기부상 자동차가 저택을 향해 날아오는 중이었다.


첨단 과학 문명이 가져온 이 시대의 이동수단.

그건 바로 자기부상 자동차와 플라즈마 캡슐카이다.

전자기의 반발력으로 지면과의 마찰을 없애 차체를 공중에 띄우는 자기부상 자동차는 대체로 일반인들이 두루 사용하는 차량이었고 고온 고압의 플라즈마를 연료로 사용하는 캡슐카는 허가를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차량이었다.

두 가지 모두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따로 운전자는 필요치 않았으며 원하는 장소만 입력하면 무인으로 물품을 배달하는 것도 가능했다.


"오늘이었나. 벌써 도착했나보군."


이곳 베른가 17번지는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추측컨대 아마도 엊그제 주문한 새로운 가사도우미가 배송된 모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뒤 예상대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안드로이드였다.

허나 지켜보던 레이먼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살짝 고개를 틀었다.


"으음?"


요청했던 대로 남자 모델이 배송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한 모습에 눈을 흘겨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검고 짙은 눈썹에 깔끔하게 올린 포마드 헤어. 날렵한 턱선과 단단해 보이는 몸. 짙은 갈색 수트를 입고 있음에도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를 어디서 봤을까.


"안녕하십니까 레이먼드님. 모델명 AK-5 인사드립니다."


남자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지만 레이먼드는 바로 의문을 품었다.


"모델명 AK라고?"

"그렇습니다. JN에 이어 새롭게 개발된 신규 모델입니다."


상담사와 통화시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이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레이먼드는 곧 대수롭게 않게 받아들였다. 신규 모델이라면 새롭게 개량되어 더 뛰어난 성능을 갖추고 있을 테니 되레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뒤늦게 가격을 올려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선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세 명은 저택 안으로 이동했다.

대리석 바닥을 밟고 거실 로비를 지나 커다란 창가가 보이는 소파에 자리한 레이먼드와 두 명의 안드로이드.

처음 제이앤이 방문했을 때와는 다르게 레이먼드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환영하네 나는 이 저택의 주인 레이먼드 킴이네."

"반갑습니다. 레이먼드님."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 같은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제이엔과는 표정부터 달랐다. 항상 밝게 웃으며 대답하던 그녀와 달리 이 남성 안드로이드는 마치 장례식에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를 퐁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기존에 있던.."


제이앤을 소개하려던 레이먼드는 말을 멈췄다.

만약 그녀가 가사도우미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일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데이터가 삭제된 것을 눈치 챌지도 모른다. 자칫 본사와 연결시 정보가 새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쪽은 제이앤이라고 이 저택의 피아니스트 안드로이드일세."


순간 자신의 소개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그녀는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아닙니다. 저는 모델명 JN-7. 이 저택의 가사.."

"가서 차라도 좀 내오지 않겠나. 제이앤?"


레이먼드가 말을 끊으며 부탁하자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레이먼드님. 어떤 차를 준비해올까요."

"민들레꽃차가 좋겠네. 향이 좋더군."


차를 준비하기 위해 거실 쪽으로 돌아서는 제이앤.

그러자 이를 바라보던 남성 안드로이드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처럼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던 그는 안구를 번뜩이며 전신을 스캐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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