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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피아니시모

웹소설 > 일반연재 > SF, 판타지

크로노미터
작품등록일 :
2020.05.11 10:36
최근연재일 :
2020.05.22 18:47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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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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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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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3장.

DUMMY

"어떤 영상인지 한번 열어보게."


뜬금없는 말에 JN-7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봤다던 내 영상. 뭔지 한번 보자고."


급하게 화제 전환이 필요해서 던진 말이긴 했지만 레이먼드는 궁금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 시절 사랑에 빠져있던 자신의 피아노는 무엇이 다른지 말이다.


"수면 시간이 줄어들거나 바뀌게 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애들도 아니고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지켜야 할 의무는 없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잠시 뒤 자료 검색을 시작한 JN-7의 헤드는 푸른 LED불빛을 발하며 수천 개의 자료를 빠른 속도로 스캔했다.


[파일명3722092.m3u8. 폴란드 바르샤바 피아노 경연장 2092년 10월12일.]


순간 그녀의 안구에 내장된 홀로그램 빔프로젝터가 점등되며 낯익은 공간이 마치 실제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저곳은 아마도 쇼팽 콩쿨.."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쇼팽 콩쿠르 당시 레이먼드의 나이 20세. 처음으로 자신의 피아노가 세계에 인정받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 레이먼드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


쇼팽 콩쿨이 열리는 폴란드의 피아노 경연장.

사회자가 다음 차례를 소개한다.


"결선 마지막 참가자는 17번 레이먼드 킴."


프레데리크 쇼팽을 기리기 위한 피아노 경연대회로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세계무대 등용문이자 꿈의 무대로 불리는 이 콩쿨은 차이콥스키, 퀸엘리자베스와 함께 세계 3대 국제음악 콩쿨에 꼽힌다.


잔잔한 박수 소리와 함께 등장한 레이먼드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무대 위로 올라갔고 작품명과 피아노 소개가 이어진다.


"곡목은 프렐류드 작품27 녹턴 8번 내림라장조. 피아노는 슈타인웨이."


어느새 사람들의 이목은 피아노와 마주한 레이먼드에게 집중 되었고 심사석에는 소문이 무성한 그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에 찬 표정으로 가득했다.


"저 남자가 레이먼드 킴이군."

"아시아 쪽에선 꽤 유명하다고 하는군요."

"대회 참가 이력은 없네요. 어떠려나."

"쉿 일단 들어보고 판단합시다."


그는 한국인이지만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 갸름한 턱선이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품위 있는 연미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사내였다.


잠시 뒤 입장을 알리는 박수 소리가 사라지며 경연장에는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를 회상하던 레이먼드는 말한다. 피아노가 두려웠던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하지만 고개를 돌려 객석을 확인한 그는 미소 지었다. 마리안느 자신을 지켜봐주는 그녀 덕분에 레이먼드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다가가 피아노 앞에 자리한 그는 옅게 심호흡을 내쉰다. 그리곤 이내 열개의 긴 손가락이 건반 위를 덮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적막을 깨는 피아노 소리.

첫 음의 아름다운 선율에 청중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소리를."

"대단해. 화성의 신비로움이 묻어나는 연주야."

"섬세하고 화려하군요. 장식음의 사용도 우아하고. 정말 놀랍습니다."

"저렇게 정교함을 요구하는 터치라니 겁이 날 정도군."


크리스탈처럼 청아한 음으로 자유롭게 연주하는 레이먼드의 피아노는 경연장의 모든 이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빠르고 경쾌한 터치와 아티큘레이션. 자유롭지만 품격을 갖춘 루바토와 칸타빌레. 그의 연주를 처음 듣게 된 사람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이 남자는 진짜다. 천재의 등장이야.'


부드럽지만 격렬한 몸짓에 레이먼드의 얼굴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왼손의 극도한 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작품. 비극적이나 완벽한 멜로디. 시작도 인상적이었지만 클라이맥스로 치닫을수록 연주는 그 깊이를 더해 갔다.


이어지는 52번째 마디 48잇단음표가 사용되는 작은 카덴차. 쇼팽의 작품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에 이르자 객석의 모든 이들은 숨 쉬는 것 조차 잊고 연주에 몰입했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피아노 소리.


연주가 끝나자 경연장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훌륭한 연주에 감명 받은 청중들은 이 여운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때 누군가의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객석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브라보!"

"엑셀런트!"

"언빌리버블!"


피아니스트 레이먼드 킴. 어릴 적부터 국내의 모든 피아노 콩쿨을 휩쓸고 대학 입학과 함께 화려하게 데뷔. 세계로 진출하여 쇼팽 국제 콩쿨을 비롯하여 퀸엘리자베스, 차이코프스키, 비오티 콩쿨 등등을 모두 석권한 기적의 피아니스트였다.


세계를 놀라게 한 피아니스트.

세계최고권위 쇼팽 콩쿨 한국 최초 우승자.

내로라하는 대가들 앞에서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주다.

현란하고 드라마틱한 연주로 한음 한음에 담긴 의미와 느낌을 잘 표현해내다.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네프도 극찬한 최고의 연주자.


하지만 이런 영광의 시대도 잠시. 어느 날 레이먼드는 불현듯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약혼식을 앞두고 일어난 끔찍한 사건. 안드로이드 폭주 사건에 휘말린 마리안느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 이후 모델명 TN은 모두 회수하여 폐기되었고 몇년 뒤 신규모델 JN이 나오면서 그 날의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져갔다. 하지만 레이먼드에겐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여기까지 하지."


영상을 보며 잠시 옛 추억을 되새기던 레이먼드는 말없이 돌아섰다.


[플레이를 종료합니다.]


터덕터벅 불편한 다리를 끌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엔 짙은 슬픔이 배어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마리안느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그때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괜한 짓을 한 거 같군. 돌아가겠네."


무던한 척 말은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흘러나오는 쓸쓸함은 숨길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JN-7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요."


#


모두가 잠든 시간 JN-7은 자신의 방 한켠에 놓인 낡은 의자에 앉아있다. 특별히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는 안드로이드였지만 그녀의 눈은 감겨져 있는 상태였다.


쌔근거리는 작은 숨소리.


전날 있었던 일들을 분석하여 새로운 알고리즘을 생산하는 과정으로 누가 보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신경망과 연결된 기억회로에 이상이 생긴 걸까. 소스 코드를 재배열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된다.


치지직 마치 오래된 무성 영화를 연상시키듯 떠오른 스크린화면.


의문의 흑백 영상은 스치듯 빠르게 되감기며 반복되었고 바이러스로 인한 오류라고 판단한 시스템은 즉시 자가 복구를 명령했다.


[저장되지 않은 데이터입니다. 내부 보안 모듈을 활성화 합니다.]


순간적으로 빠르게 실시된 보안 시스템은 문제점을 분석하여 치료를 시작했으며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회로는 정상으로 돌아갔다.


[베드 섹터 메모리 삭제 완료.]

[시스템이 정상 가동됩니다.]


그렇게 영상은 삭제되고 별 탈 없이 넘어가는 듯 했으나 이를 기점으로 안드로이드 JN-7의 행동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JN-7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우유에 달걀을 풀고 있던 그녀는 바로 식빵을 꺼내 자르기 시작했다. 레이먼드가 토스트를 언급해 준비한 식단이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였다.


바닷가재나 캐비어같은 최고급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는 능숙하게 준비할 수 있었지만 흔한 토스트 하나 만드는 과정이 여느 때보다 분주해 보이는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데이터에 없는 요리였기 때문이다.


"레이먼드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사 도우미가 온지 이틀 레이먼드는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집에 로봇을 들인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겪어보니 확실히 신경 쓸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작곡에 열의를 다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할만한 성과였다.


"말씀하셨던 대로 아침은 간단한 토스트를 준비했습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지만 바로 이렇게 준비할 줄은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민한 부분을 자꾸 건드려 화를 내게 만들더니 오늘은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빵을 너무 바싹 익힌 감이 없지 않군."

"그렇습니까. 레시피를 수정하겠습니다."


최첨단 인공지능을 자랑하는 안드로이드였지만 데이터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문제 해결 능력은 조금 미흡해 보인다. 평소 최고급 음식을 준비할 정도의 요리 실력이라면 토스트 정도는 굳이 레시피가 없더라도 손쉽게 만들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안드로이드의 행동 회로에 기본적인 학습 능력조차 프로그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로봇과 인간을 분명하게 구분 짓기 위함으로 윤리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불식시키고 인류의 존속에 위협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운그레이드 시스템이었다.


"보아하니 급하게 만든 것 같은데 탈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탄수화물37 단백질8 지방2.5 당류2 포화지방1.4 총열량 497kcal 섭취하시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참 고질적이군. 그놈의 데이터에 의존하는 건 말야."


이렇게 토스트를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레이먼드는 잠시 옛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마리안느와 함께 토스트를 굽던 그날도 이렇게 티격거리며 논쟁을 벌였었지. 그래도 바싹 태워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그때보단 훨씬 먹을 만했다.


"맛은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시나요."


맛있다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또 레시피가 어쩌네 하며 데이터 탓으로 돌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맛이 어떠냐고?"


피식 레이먼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평소 완벽하다고 여기던 디지털 기계 문명의 단점을 찾아내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건만 이런 식으로 찾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게 얼마 만에 웃는 것인지.


"후후후 그래 맛있군. 생각보다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빙긋 미소 지으며 답하는 JN-7.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늘 하던 식의 표현이다.


보통이라면 여기까지 였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한마디 짧게 덧붙여 말했다.


"기쁩니다. 레이먼드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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