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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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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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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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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Big Shot.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낙원호텔 연회장에 마련된 행사장.

곳곳에 ‘21세기 영화정책 간담회’라 쓰인 안내판이 붙어 있다.

류지호가 박건호 대표, 나용근 사장과 함께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는 영화계에서 마련한 자리라고 표방했다.

실상은 야당 선거캠프에서 기획한 행사나 마찬가지다.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유력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선거유세와 다름없다.

'한국영화산업의 비전'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소개된 뒤 후보들의 영화정책 발표에 이어졌다.


- 영상산업은 단순히 시장규모로 표현되는 경제계산만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상산업이 21세기 국가경제를 좌우할 미래의 핵심 산업으로 부각되는 것은 문화상품으로서 가진 독특한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산업은 중복사용과 대량복제를 통해 제품의 수명을 반영구적으로 늘릴 수 있습니다. 35년 전에 만든 영화 <벤허>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상영되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사용가치가 한 번에 소멸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또 영화가 성공하면 비디오, 방송, 애니메이션, 게임 등 서로 다른 미디어를 통해 중복 사용함으로써 연쇄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이 산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라는 표현으로 그 파급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1 야당 대선 후보는 준비가 잘 된 것처럼 보였다.

여당 후보 역시 나름 영화산업의 비전과 귀가 솔깃한 정책들을 내놓긴 했다.

그런데 영화산업 더 나아가 문화산업에 대해 이해가 부족해 보였다.

그에 반해 제1 야당 후보는 기본적으로 대중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 영화산업은 특정 사회의 이념이나 정신적 가치를 전파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작용해 제작수출국의 가치나 생활방식을 우월한 것으로 선전, 보급시킨다는 점도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람보류의 직설법이 아니더라도 미국적 가치관과 미국혼이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제1 야당후보가 말을 하며 슬쩍 류지호 테이블을 쳐다봤다.


- 일본의 만화영화를 보는 청소년들이 일본에 대해 품는 호의적인 감정이나 할리우드영화가 키워주는 미국에 대한 동경심은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인 것입니다.


할리우드 산업의 이면에는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 몫하고 있다.

전 세계 관객들은 할리우드 영화에 심취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영화의 화면 속에 은근슬쩍 들어간 햄버거, 콜라, 청바지 브랜드 등 미국의 대표적인 상품에 알게 모르게 노출된다.

PPL로 등장하는 자동차, 오토바이, 휴대폰, 맥주 등을 통해 그 나라의 상품을 암암리에 광고한다.

영화는 문화를 전파하는 것과 더불어 자국 상품을 광고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 소프트 파워(soft power)란 개념이 있습니다. 설득의 수단으로서 돈이나 권력 등의 강요가 아닌 매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는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것과 동시에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소프트 파워인 것입니다.


다른 후보들과의 차별성이다.

대부분의 후보들은 <쥬라기공원>이 경일자동차 몇 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다느니.

대중문화 산업은 한국의 미래지만 개인 능력으로 발전시키는데 한계가 있다느니.

현재 구조로는 산업을 발전시키기 힘들어 국가가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느니.

세계무대를 누빌 준비가 된 대한민국 대중문화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둥.

뻔한 말들만 늘어놓았다.

특히 영화계의 현안인 스크린쿼터 문제에 있어서는 모두 원론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다만 제1 야당후보 혼자서.


- 현재를 유지할 것입니다.


영화인들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유력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대선 후보가 공식석상에서 약속을 해준 것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둘 뿐이다.

바로 약속을 한 유력 야권 후보자와 류지호다.

야권 대선 후보자는 차기 정부가 미국 경제협상단으로부터 영화산업에 대한 다양한 압력을 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미 통상협의체회의에서 스크린 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대중문화산업에 관심이 많은 후보자로서 모를 수가 없다.

오래전부터 미국 통상단은 한국영화를 일정기간 의무상영하도록 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의 내국민대우 규정에 위반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내년 한국영화는 스크린쿼터 축소 위협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국민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탈출을 위해 미국과의 경제협상에 안간힘을 쓰게 되고, 스크린쿼터 축소는 대미협상 타결을 위한 미끼로 매번 테이블 위에 오른다.

심지어 한-미 투자협정을 진두지휘하던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쪽 입장을 대변하다 영화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얻어맞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영화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목소리로 갈린다.

서울시극장협회가 스크린쿼터를 현행 146일에서 86일로 줄여달라는 공문을 문화관광부에 보냄에 따라 영화계 안에서도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가 전면에 나서고, 국회의원 148명이 스크린쿼터 현행유지 지지 서명을 하면서 급한 불은 끈다.

그런데 전국 극장의 42%가 스크린쿼터를 위반하는 관행은 계속되고,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투쟁은 몇 년 간 계속되게 된다.

대한민국은 스크린쿼터제를 채용한 국가들 가운데 최전선에 서있다.

특히 유럽영화계가 한국의 결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반할리우드 진영입장에서는 한국이 스크린쿼터의 모범사례이니까.’


어쨌든 후보자들의 정책설명이 끝이 났다.

곧이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역시나 모든 질문은 스크린 쿼터와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관한 것으로 모아졌다.

스크린쿼터 감시단에 속한 영화인들이 진보적 정치성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스크린 쿼터제를 지키는 것은 문화주권을 지키는 행동입니다. 경제논리나 통상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기득권 영화관련단체장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의견을 펼쳤다.


“이미 1986년에 개방조치가 이뤄졌는데, 영화시장 개방의 논리는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단체라는 걸 만들어서 영화계 단결을 헤치는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인협회와 젊은 영화인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참고로 스크린쿼터 감시단은 몇 년 후 ‘스크린쿼터 문화연대’라는 법인단체로 확대되고, 기존 한국영화인협회와 성향을 달리하는 영화인회의가 등장하는 토대가 된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와 영화인회의는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거나 독립적으로 영화계의 각종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의견을 낸다.

한미 FTA 체결, 미국산 쇠고기수입반대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보수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빨갱이‘로 낙인찍어 탄압하는 영화인 모임 가운데 하나다.


- 류 감독은 극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스크린 쿼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류지호는 특별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후보자가 다시 한 번 요청했다.


- 말 그대로 간담회이니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들려줬으면 좋겠군요.


진행요원이 재빨리 류지호에게 마이크를 가지고 왔다.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받아든 류지호는 감정이 담기지 않는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88년 UPI의 <위험한 정사>로 시작된 직배는 89년 12편, 90년 38편으로 쭉쭉 늘어나 올해 53편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한국은 세계 10대 영화수입국으로 꼽히고 있고, 작년 국내 영화시장은 직배영화가 거의 절반 가까운 46.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직배를 제외한 외국영화가 30.4%, 한국영화는 고작 23.1%에 불과합니다. 영화 1편당 관객수에 있어서는 한국영화는 17만7천여 명에 불과한데 비해 직배영화는 37만1천여 명으로 압도적입니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미국 본사에 송금하는 로열티도 해마다 30% 가까이 늘어나 88년부터 96년까지 5개 직배사의 송금액은 무려 1,367억 원입니다. 한국 영화시장의 무역적자, 다시 말해 문화역조현상은 매우 심각합니다. 한국은 작년 연간 4,000여 편 이상 제작되고 있는 전 세계 영화 중 483편의 외국영화를 수입했습니다. 이중 할리우드 영화가 272편으로 절반이 넘는 56.3%를 차지합니다. 반면 한국영화의 외국 수출은 91년 18편, 92년 17편, 93년 14편, 94년 16편, 95년 18편 등 연간 20편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편당 평균 수출가도 91년 2만7천9백만 달러, 94년 4만4천3백49달러, 95년 7만3천9백12달러 등 외국영화의 편당 수입가에 비하면 10분의 1 혹은 1백분의 1 밖에 안 되는 미미한 액수입니다. 또 극장용 영화만 역조현상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작년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중 국산 비디오물은 802편인데 비해, 외국 비디오물은 1,653편으로 67%나 됩니다. 이상입니다.”


류지호는 개인적인 의견은 배제한 채 팩트만 말했다.

사견을 늘어놓지 않았다.

대선 후보자들과 영화인들에게 현실을 명확하게 일깨워줬다.

통계 데이터를 동원해서.


“류 감독은 이번에도 스크린쿼터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지 않는 겁니까?”


스크린 쿼터감시단 단장이 물었다.

단상에 앉아있는 대선 후보자들도 궁금한 표정으로 류지호를 주시했다.


“어떤 친구가 제게 하소연하더군요. 초창기 스크린쿼터 반대집회 때 선배님들이 전화해서 스크린 쿼터 사수 집회에 안 나오면 영화사에서 캐스팅 하지 않기로 했다고. 그 선배님이 제 친구에게 한 말이 협박으로 들렸습니다. 그 친구가 뭘 잘못했나 싶더군요. 한창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어 집회에 나가지 못했고, 그 친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 친구는 집회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의사표현을 할 자유과 권리가 있습니다. 뭐든 행동이 자발적이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한국영화를 위한 선의가 이념투쟁으로 변절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할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다시피 G.O.M은 스크린 쿼터의 유무와 상관없이 1년 365일 한국영화만 상영하는 스크린을 열어두고 있고, 관객들이 많이 찾는 한국영화는 객석이 가장 많은 상영관에 할당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류지호가 말을 마치고 마이크를 돌려주려고 했다.

이번에는 여당 대선 후보자가 물었다.


- 그렇다는 말은 스크린 쿼터 문제는 극장의 판단에 맡기자는 말인가요?

“올해 중국 CCTV에서 <사랑이 뭐길래>가 방영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3월에 방영된 <별은 내 가슴에>도 중국에 수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내년에는 ‘십대의 승리’라는 아이돌 그룹의 앨범이 중국에서 발매될 거라고 합니다. <은행나무 침대>는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 여러 나라에 판매되어 꽤 좋은 흥행성적을 거둔바가 있습니다. WaW가 제작 중인 <퇴마기록>은 칸 필름마켓에서 선판매로 이미 제작비의 절반을 회수했습니다.”


대부분 수입국은 아시아다.

디멘션필름 역시 가계약을 체결했다.

사실은 대단한 성과는 아니다.

최종 영화에 대해 계약이 완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북미지역의 파트너 배급사인 ParaMax에서 1년에 많아야 2~3편을 배급하던 기조에서 최대 5편까지 늘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한국영화의 최소한의 보호장치 유지를 위해 싸워야 하고, 누군가는 세계 시장에 팔릴 만한 영화를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계적 중립인 듯 교묘한 말장난인 듯.

류지호는 누군가가 기대하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공연윤리위원회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독재정권의 잔재인 검열을 반대합니다.”


류지호의 폭탄발언에 간담회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공윤의 존립근거를 모르겠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사전검열이 위헌판결이 났음에도 여전히 검열이 자행되는 현실이 매우 유감입니다. 민주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우리 정부는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관습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사전검열 같은 우회적인 검열이 존재하는 한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한국영화의 성장 동력은 위축될 겁니다. 표현의 자유 같은 헌법이 명시하는 권리에 대해서는 저보다 법조인 출신이거나 입법기관을 역임하셨던 분들이 더 잘 아실 테니까 따로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류지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마이크를 진행자에게 넘겨버렸다.

폭탄발언에 화들짝 놀란 보수정치성향의 영화인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대기업의 극장업 진출에 대해 법적 장치를 마련해달라는 요구들이 이어졌다.

류지호는 영화감독으로써는 애송이다.

그런데 기업가 또는 투자자로서는 리틀 버펫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인사다.

류지호가 별 볼일 없는 기업을 놓고 전도유망하다고 하면 수백만 달러를 싸들고 올 사람들도 많다.

류지호의 즉흥적인 한 마디라도 이제 더 이상 이십 대 청년의 한 마디가 아니다.

투자계의 거물의 한 마디가 되는 셈이다.

류지호는 자신의 발언이 가진 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때론 그것을 적극 활용할 정도로.

게다가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차기 정부는 제1 야당후보가 이끌게 된다.

여당 후보라면 모를까.

류지호가 주장한 바에서 역행할 리가 없다.


“멀티플렉스가 시장을 교란하면서 토착극장의 존립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가지고 있으신지 후보자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 시장논리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최대한 극장업주들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하겠습니다.

“대기업이나 금융자본이나 돈 안 되면 언제든지 떠날 사람입니다. 좋은 메이저가 나오려면 아무래도 영화인 중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은석 감독이 은근히 WaW 픽처스 쪽을 의식했다.


“할리우드에서 메이저 스튜디오에 버금가는 영화사를 소유한 류지호 감독의 의견이 후보님들께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들어보심이 어떻습니까?”


누군가 류지호를 다시 한 번 소환했다.

후보자들 캠프 입장에서 자꾸 초점이 류지호 쪽으로 향하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다.

그래서 간담회를 후보자 중심으로 돌려놓으려는데.


“류 감독, 현재 세계적인 추세에 대해서 들려줄 수 있습니까?”


제1 야당 후보가 류지호의 의견을 구했다.

일부 영화계 원로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류지호와 강은석 같은 젊은 영화인들이 충무로를 대변하는 것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

진행요원이 류지호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하는 수 없이 류지호가 다시 한 번 마이크를 잡았다.


“현재 미국의 극장업계를 보면 90년대 초반 짓기만 하면 밥그릇을 키우고 황금알을 낳는다고 믿던 시기를 지나 본격적인 메가플렉스 체제로 들어서면서 다국적 극장체인들의 세 확장과 무한경쟁 시대로 진입했습니다. 멀티플렉스 자체가 하나의 상품처럼 브랜드화 되고 영화배급시장을 좌우하게 되자 영화 관련 기업들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에서도 투자대상으로 눈독을 들이는 추세입니다. Rock of Gibraltar 보험회사가 출자한 영국의 ROG AMT극장이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이들 메이저 극장체인들의 전 세계 체인망 확대는 영토 확장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흡사 식민지 전쟁을 떠올립니다. 극장시설이 낙후된 제3세계, 특히 아시아가 중요한 잠재시장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이 이미 외국계 극장체인과 합작으로 극장업에 뛰어들었습니다. 21세기형 문화 식민전략의 멀티플렉스 전쟁에서 식민지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토착 극장업계가 얼마만큼 주도권을 쥐고 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그들 메이저 극장체인들은 진출한 국가의 관람문화에 대한 이해와 현지 국산영화에 대한 기여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밥그릇 키우기 이외에 진출 국가 영화발전에 엄청난 규모만큼의 영향을 행사했다는 선례는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압니다.”


류지호는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단어들을 섞었다.

영토전쟁, 식민전략 같은.

최근 극장을 대기업에 넘긴 원로 영화인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렇다고 한국의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력으로 밀고 들어오면 답이 없어요, 답이!”

“단관극장의 존립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자면, 미국은 차이니스 극장 같은 진짜배기 단관 극장들이 여전히 스타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premiere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화면은 차별성이 특별히 없다고 하더라도 음향과 극장의 분위기 자체가 멀티플렉스와 다르기 때문에 최고의 조건으로 영화 관람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경쟁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대기업에 한 말씀 드리자면, 이윤추구와 함께 정말 영화를 영화답게 감상하도록 최고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최고의 서비스입니다. 극장은 한 번 체험하면 끝인 테마파크의 라이드시설이나 공포의 집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극장에 머무는 시간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때론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극장은 영화를 트는 곳이 아니라 대중문화를 공유하는 공간이며 고객가치를 창출하고 충족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부디 멀티플렉스가 영화 진열대나 분식점으로 전락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이상입니다.”


다소 감상주의적 의견이다.

차이니즈 극장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멀티플렉스는 한번 지어놓으면 고정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알짜배기 캐시카우다.

영화진열대와 분식점이 멀티플렉스의 기본전략이다.

류지호가 눈이 마주친 박건호 대표를 향해 얼버무렸다.


“앞에서 너무 삐딱선을 탄 것 같아서.... 감정에 호소 좀 해 봤어요....”


허허 웃은 박건호 대표가 다시 간담회에 집중했다.

이후로는 웃을 수만 없는 상황들이 펼쳐졌다.

대권 후보들에게 아부하는 영화인.

한국영화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영화인.

영화인으로 위장한 정치 예술가들의 폭주.

지겨운 행사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아무 생각 없는 영화인.

영화인 내부에서도 저마다 사정이란 게 있다.

이미 충무로의 속살을 꿰고 있는 류지호 입장에서는 입맛이 상당히 썼다.

어쨌든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대통령 후보자들 가운데, 야당 후보가 가장 큰 이득을 챙겼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영화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정치적 간섭은 영화산업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이다.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다.

시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치가 그 같은 영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계 3대 영화제인 프랑스의 칸, 이탈리아의 베니스, 독일의 베를린 영화제는 자국의 영화산업의 쇠퇴와 상관없이 매해 치러지고 있다.

이 세 나라의 영화시장은 할리우드 영화에 잠식 된지 오래다.

자국의 영화는 예술의 영역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니 세 국가의 영화인들은 국제영화제에 절박하다.

그것마저 할리우드에 넘겨주면 파국만 있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오랜 전통에 따라 관의 간섭이 배제되어 운영되고 있다.

한국영화도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한가하게 대선 주자들 입만 바라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향후 한국영화 30년의 기반이 닦이는 시기였으니까.

한 언론은 대선후보와 영화인들의 간담회를 평가하며 기사 말미에 류지호를 언급했다.


[대선 후보의 영화산업 관련 간담회는 대선 역사상 처음 있는 뜻 깊은 행사다. 대선 후보에게 직접 영화산업과 관련된 공약을 듣고 영화인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권을 넘어 세계적인 영화제로 명성을 얻고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세계 4대 영화제로 발 돋음 할 수 있도록 후보자들 모두가 지원하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분명한 만큼, 영화인들도 그 의지를 믿고 적극 협조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대선 후보자들은 입을 모아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원하겠다는 말과 함께 철저하게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함을 강조했다. (중략) 할리우드 리포터가 선정한 '미국 연예산업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지도자 35인'의 주인공이자, 이어서 ‘할리우드를 이끄는 지도자 100인’에 이름을 올릴 예정인 거물 영화인. 바로 류지호 감독이다. 매년 한국의 영화전문지가 선정하는 충무로 파워랭킹에서는 1위를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는 자타공인 한국영화계 거물이기도 하다. 대종상 같은 국내 시상식에서도 볼 수 없던 그를 대선후보들의 정책 간담회에서 보게 된다는 것은 영화팬들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대단한 위치에 있는 영화인조차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가 있으니까. 그나마 유력 대선 주자들 앞에서도 직언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까. 그 조차 감상주의적인 자기자랑으로 들렸지만.(후략)]

- 제일신문 정치부 칼럼 김명균.


한 분야의 거물이라고 해서 공인은 아니다.

공인이 아니지만 공인적 성격을 띠고 있는 직업 종사자.

일각에서는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 일부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은 사회에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큼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때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말과 행동이 멋대로 왜곡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작가의말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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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The Destroyer. (6) +10 22.12.07 3,830 131 25쪽
355 The Destroyer. (5) +9 22.12.06 4,094 141 26쪽
354 The Destroyer. (4) +8 22.12.06 3,904 132 27쪽
353 The Destroyer. (3) +8 22.12.05 4,006 142 21쪽
352 The Destroyer. (2) +7 22.12.05 4,024 121 25쪽
351 The Destroyer. (1) +12 22.12.03 4,349 146 26쪽
350 위험으로 내몰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마.... +8 22.12.02 4,311 137 26쪽
349 WaW는 아주 살판났네! +8 22.12.01 4,428 141 28쪽
348 나는 세계의 왕이다! (3) +8 22.11.30 4,229 145 22쪽
347 나는 세계의 왕이다! (2) +11 22.11.29 4,230 160 24쪽
346 나는 세계의 왕이다! (1) +13 22.11.28 4,323 153 24쪽
345 구차하지 맙시다. (3) +12 22.11.26 4,344 141 30쪽
344 구차하지 맙시다. (2) +10 22.11.25 4,274 132 26쪽
343 구차하지 맙시다. (1) +8 22.11.24 4,272 135 25쪽
342 아리랑 겨레. (3) +11 22.11.23 4,255 131 24쪽
341 아리랑 겨레. (2) +4 22.11.22 4,165 149 22쪽
340 아리랑 겨레. (1) +11 22.11.21 4,291 151 25쪽
339 일단 눈앞에 닥친 것부터..... +14 22.11.19 4,421 145 33쪽
338 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 +6 22.11.18 4,271 147 26쪽
337 페가수스는 계속해서 날아오를 겁니다! (2) +6 22.11.17 4,258 147 28쪽
336 페가수스는 계속해서 날아오를 겁니다! (1) +13 22.11.16 4,331 150 24쪽
335 스파이영화의 전통을 망치지 않기를..... +11 22.11.15 4,338 15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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