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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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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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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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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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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The Destroyer.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충무로에서 대본 리딩이라 칭하는 것을 할리우드에서는 read-through, table-read, 또는 table work라고 한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대본 리딩에 모든 출연자가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출연 배우들이 모두 LA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고, 배우들의 스케줄을 맞추는 것도 큰일이다.

주인공들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자리다.

조단역 배역은 table-read만 참여하는 배우를 따로 고용하기도 하지만, 주조연은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우만 모이는 것도 아니다.

스튜디오 임원과 투자자까지도 첫 table-read에 참석한다.

주인공들이 대본을 읽는 모습을 보며 투자자와 프로듀서가 지루한 부분을 들어내라고 지시할 수도 있다.

대중들이 매체에서 접하는 대본 리딩과는 실제 많이 다르다.

그런 대본 리딩에 류지호는 대사 한 줄 없는 단역 출연자도 참석시켰다.

일부 단역 출연자들은 잠재력이 매우 큰, 10년 안에 유명해질 배우들이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그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다.

따라서 table-read를 핑계로 안면을 익혀둘 생각이다.


시끌시끌.


table-read장 주변이 일찍 온 배우와 스태프들로 북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피터 웰스 사장이 우려를 드러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톱스타가 없는 것이 불안해.....”


류지호가 툭 말을 던졌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다소 뜬금없는 말이다.

앨런 포스터가 피터 웰스 대신 대답했다.


“막대한 제작비, 캐스팅, 화제성, 감독 모두 중요한 요소지만 관객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보는 것은 역시 주인공이지. 누가 출연하느냐. 믿고 본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거든.“


피터 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신뢰를 주는 배우.”


류지호가 반론을 폈다.


“그 부분은 외모만으로 설명할 수 없어. 외모가 그리 뛰어나지 않은 드니로나 파치노가 먹히는 것 보면 알잖아?”

“그들이 들으면 자존심이 무척 상하겠는데?”


할리우드에서 톱스타를 캐스팅하는 전략은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

포스터의 주연배우만 보고 어떤 영화인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된 지 오래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스타 배우가 흥행의 보증 수표나 마찬가지다.

감독은 못 믿어도 배우는 믿는 풍조가 있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스타 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

스타들의 출연료를 맞춰주기 위해 다른 스태프의 인건비를 서슴없이 깎으면서까지.


“시리즈가 오래가려면 고정관념을 깨야한다고 봐.”

“톱스타를 기용하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검증된 전략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피터 웰스는 할리우드 출신이 아닌 전문경영인이다.

회계 관리 및 조직 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해 영입한 인물이다.

따라서 할리우드만의 독특한 비즈니스 문화에 약한 편이다.

JHO Pictures가 류지호 소유지만, 영화 기획개발과 생산은 앨런 포스터가 책임지고, 경영 부분은 피터 웰스가 책임지는 구조다.

피터 웰스로서는 매출과 이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한 편의 영화로 끝내고 싶다면 그 방법이 맞아요. 하지만 트릴로지라면 그리고 장대한 시리즈의 원작이 있는 경우라면 인지도가 낮은 배우를 기용하는 편이 좋아요.”

“어째서 그렇지요?”

“원작의 팬들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그린 이미지라는 것이 있어요. 만약 케이아누 립스가 레모 윌리엄스 역할을 맡았다면, 그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캐릭터가 관객에게 선입관을 주게 되죠. 그렇게 되면 관객은 원작의 캐릭터보다 배우 자체에 집중하게 되죠. 캐릭터가 배우에 의해 끌려가게 된다고 할까.”

“특정 이미지가 덧 씌워진 배우를 피하겠다는 뜻이군요?”

“그런 셈이죠. 내가 전에 설명했듯이 삼부작의 기본 플롯은 탄생-각성-성장이에요.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관객들은 무명배우의 성장을 지켜보게 되죠. 그가 점점 캐릭터와 일치해가고, 스타로 성장하는 걸 지켜보며 응원하는 마음도 갖게 되고.”


이런 전략은 로비 잭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보여주게 된다.

TCU의 캐스팅 전략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밥 일리아스 주니어를 보면 ‘아이언맨’을, 밥 에번스를 보면서 ‘캡틴 아메리카’부터 떠오르게 해 준 것은 그 같은 전략이 성공적으로 먹혔기 때문이다.

이전 삶에서 연예인 2세 문제아였던 밥 알리아스 주니어는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토니 스타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런데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백팔십도 바뀌었다.

그보다 더 어울릴 배우는 없다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결국 할리우드 최고 몸값 배우로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다만 이 같은 캐스팅 전략은 리스크도 크다.

너무 인상 깊은 캐릭터 연기를 심어줘서 한동안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출하지 못할 수 있다.

배우가 극복해야 할 숙제다.


“그런 과감한 캐스팅의 이면엔 필연적으로 영화의 무게감 부족이 따라올 수 있어. 그걸 간과해서는 안 돼.”


앨런 포스터의 충고에 류지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조연에 인지도 높은 거물급 배우를 배치해 해결하려고 하잖아.”


<Remo : The Destroyer>에서는 샘 잭슨과 크리스 워컨 같은 중량감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앞으로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빌런 혹은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야 할 배역에는 할리우드 중량급 배우들을 캐스팅할 계획이다.

당연히 TCU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전략이다.


“주인공이 적은 돈을 받고, 조연이 돈을 더 많이 가져가는 상황이 벌어지겠어.”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주인공 계약금을 절약할 수 있기도 하죠.”


이전 삶에서 <아이언맨> 첫 편에 레옹 브리지스라는 배우가 출연했고, 케이트 펠트로가 토니 스타크의 비서로 출연했다.

피터 웰스 사장 말대로 주인공인 밥 알리아스 주니어보다 분량이 적었음에도 그 두 사람이 훨씬 많은 돈을 가져갔다.

히어로를 연기할 주인공급 배우는 저렴한 출연료로 장기 계약으로 묶어놓고, 단발로 출연하는 중량급 배우에게는 거액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물론 첫 계약 이후로 주연급의 출연료를 인상해주긴 하지만.


“그나저나 카메라가 정말 많이도 왔군. 쯧.”


잭 워든이 리딩장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미래의 관찰 예능 촬영장 같았다.

곳곳에 비디오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IVE의 다큐멘터리팀의 의욕이 넘치네.“

“여기로 다 오면 다른 영화팀은 어떻게 해?”

“내가 알기로 IVE DVD 프로덕션에 3개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있어. 대작의 메이킹 무비는 IVE 다큐팀이 직접 촬영하고, 규모가 작은 영화는 외주를 주고 있다고 알고 있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모습이 모두 카메라에 담기고 있다.

물론 배우와 스태프들의 동의를 얻어 촬영되고 있다.


“DVD라는 새로운 부가시장이 유망하다는 건 알겠는데, 꼭 제작과정 다큐멘터리에 큰돈을 써야 해?”

“한국 속담에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어.”

“......?”

“<타이타닉>의 제작과정 다큐멘터리만 따로 전 세계에 판매하고 거둔 매출이 얼만 줄 알면 깜짝 놀랄걸?”

“얼마나 벌었는데?”

“메이킹 필름 판매로만 1,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뒀어.”


국가별로 판매 가격이 다 다르긴 하지만, 총매출이 그렇다.

아시아 금융위기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할리우드 영화들의 글로벌 매출이 감소한 상황이다.

<타이타닉>만큼은 예외다.

박스오피스 외에도 다양한 부가시장 수익이 쏟아졌다.


“<타이타닉> DVD 타이틀은 언제 출시되는 거야?”

“수익이 빠질 때 즈음.”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 모두 자신의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예정된 시간이 됐다.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던 출연진들이 제자리에 착석했다.

류지호가 조감독 터커 툴리에게 물었다.


“빠진 사람 있어? 다 모인 거지?”

“개인 대기실까지 돌면서 확인했어.”

“좋았어. 시작해 볼까?”


류지호가 U자로 만들어진 테이블의 중앙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좌우엔 션 블랙과 공동 프로듀서 둘이 나란히 앉았다.

U자 테이블 1선은 주조연 배우들의 차지다.

2선은 조단역급 연기자들이 자리했다.


“......!”


류지호가 만면에 웃음기를 띠고 장내에 모인 배우들을 눈으로 훑었다.

오늘 이 자리가 있기 전에는 LA 지역에 살고 있는 배우들과 식사자리를 갖거나, 홈파티를 열어 배우들과 캐릭터에 관한 대화를 여러 차례 나눴다.

그렇다고 배우들에게 압박을 주진 않았다.

영화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사교적인 만남으로 규정했다.

먼 곳에 거주하는 배우들은 틈틈이 전화통화로 준비 상황을 체크했다.

윌리와 크리스 두 사람은 아역배우 출신이다.

연예계 생활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스트레스를 공감하는 바가 컸다.

윌리 워커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다.

거친 면이 많았다.

류지호는 그런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날 것 그대로를 원했다.

윌리 워커가 미리 꼼꼼하게 준비한다면 작위적인 캐릭터가 나올까봐 일부러 연기보다는 운동을 빡세게 시켰다.

투박한 말투와 행동, 정제되지 않은 좌충우돌의 마초 남자.

<Remo : The Destroyer>에서 그가 보여줘야 할 모습이다.

그러는 한 편, 여성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섹시함과 낭만적인 모습도 보여주어야 한다.

유치하지만 조각 같은 근육과 근사한 몸매도 보여줘야 하고.

할리우드 영화에서 남녀배우의 노출은 기본적인 요소다.

한때 스튜디오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배우의 노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놓기까지 했다.

지금에 와서는 각본가와 감독이 배우들의 매력적인 몸매를 뽐낼 수 있는 장면을 알아서 넣는다.

십대 아역배우에게까지 섹스어필을 강조한다.

당연히 학부모 단체와 기독교 단체, 인권단체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할리우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성의 상품화, 폭력의 미화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기본적인 전략이니까.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흥행에 도움이 된다고 굳게 믿으니까.

여배우의 노출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스튜디오와 제작진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여배우 스스로 벗지 않아도 섹시해 보일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여배우가 민소매 차림이라면 거의 90%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핫팬츠 차림으로 등장한다.

리얼리티와 성의 상품화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다.

할리우드의 이중적인 면도 엿보인다.

여배우의 가슴 노출과 남자배우의 엉덩이 노출 가운데 후자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풍토가 있다.

기독교, 백인, 마초, 남성 중심의 할리우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류지호가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감독 터커 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하겠습니다!”


실내의 모든 등이 꺼졌다.

프로젝터에서 스크린으로 영상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프리비주얼(Pre-Visualization).

우리말로 옮기면 사전 시각화다.

스토리보드의 만화처럼 그림을 통해 ​카메라 앵글과 인물의 위치 등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 3D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실제 촬영할 쇼트를 미리 구성한 영상이다.

지금 상영되는 영상은 <Remo : The Destroyer>의 주요 액션 시퀀스와 극적 장면을 Hues & Rhythm Studios가 3D 영상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3D 그래픽 제작에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어간다.

영화 전체를 모두 프리비주얼 작업을 할 수는 없다.

스케일이 큰 장면이나 촬영 난이도가 높은 장면 위주로 작업 했다.

당연히 컴퓨터 그래픽이 들어갈 장면 역시 프리비주얼이 만들어졌다.


“뭐지?”

“레모가 총알 피하는 장면 아니야?”


배우들에게 프리비주얼을 보여주는 이유는 단순했다.

각각의 장면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여줄 것인지 감독의 연출 의도를 직접적으로 알려주고, 카메라 앵글 구성과 무빙 등을 배우들에게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다.


쿵 따라란. 딩디리... 띠리리링!


일부 씬에는 음악도 들어가 있다.

다소 심심할 수도 있는 프리비주얼을 조금은 볼 맛나게 만들었다.

​ 프리비주얼은 일반적인 스토리 보드와 달리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대규모 군중의 움직임, 앵글 안에 잡히는 배경의 디테일 등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촬영·미술·스턴트·특수효과 등 각기 다른 스태프들이 원활하게 협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합성 장면의 대략적인 결과물을 배우가 미리 알 수 있다면,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

전쟁 시퀀스라든지 폭파 장면, 카 체이스 등 회차 당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고 여러 번 반복해서 찍기 어려운 장면을 동영상으로 만들면,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함으로써 촬영장에서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물론 제작비가 없으면 할 수 없다.

류지호는 예산을 쪼개고 아끼고 조정해서 프리비주얼 예산을 만들어냈다.


“....이거 참.”


피터 웰스 사장은 못마땅한 태가 역력했다.

프리비주얼이 다 돈이다.

그로서는 전형적인 보여주기 작업처럼 보였다.

블록버스터를 처음으로 경험해서 그렇다.

반면에 류지호와 레이먼드 쿤디는 프리비주얼을 보며 쑥덕거렸다.

막상 다시 보니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사실 슬로바키아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염두에 두고, 류지호와 헤드 스태프들이 수없이 머리 맞댔다.

격렬한 토론 끝에 콘티를 만들어냈다.

​ 그 과정에서 촬영감독 레이먼드 쿤디가 신선하고 새로운 카메라 무빙을 많이 제안했다.

기존에 시도되지 않았던 어려운 카메라워크다.

프리비주얼을 통해 미리 점검해볼 수 있었다.

​ 실제 촬영에 사용될 특수장비 운용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무엇보다 류지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사전 시각화 작업이 류지호가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그림을 말이 아닌 영상으로 배우 및 스태프와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영화 제작은 개인 작업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공동창작이다.

모두가 한 가지 그림을 공유하고,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촬영에 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7분짜리 프리 비주얼 상영이 끝났다.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영상 중간에는 마이크 리바의 미술팀이 재현해 놓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 폐허 마을과 오스트리아의 로케이션 예정지 영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이지 3부터 시작해 봅시다!”


할리우드 표준 스크립트 양식의 한 페이지는 대략 1분이다.

<Remo : The Destroyer>의 스크립트는 모두 128페이지다.

막상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면 늘면 늘지 줄어들진 않는다.

암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table-read가 시작됐다.

각자 앞에는 생수, 다과, 음료수들이 풀코스로 놓여있다.

심지어 피자와 햄버거, 샐러드도 한편에 놓여있다.

거만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대고 다이얼로그를 읽는 배우도 있고, 일어서서 대본을 읽는 배우도 있다.

장르 특성상 <Remo : The Destroyer>에는 대사가 많지 않다.

빠른 속도로 페이지가 넘어갔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내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암암리에 지원하는 극단주의 민족주의자 역할을 수행하는 크리스 워컨.

그는 댄서 출신이라서 연기를 일종의 안무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영어와 세르비아어 둘을 동시에 사용해야 했다.

당연히 현지인에 비해 어색할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어를 읽을 때는 묘한 리듬감과 호흡으로 느낌을 전달했다.

여러모로 클래식한 대배우의 풍모가 느껴졌다.

샘 잭슨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워낙 다작을 하다 보니 설렁설렁할 것 같은 선입관이 있었다.

말 그대로 선입관이었다.

연기에 대한 애착이 대단한 배우다.

대본은 물론 노트를 보면 여백이 없을 정도로 메모가 되어 있고, 포스트잇까지 군데군데 붙어 있다.

쿠엔 태런티노는 그런 모습을 질색했다.

너무나 계산적이어서.

반면에 류지호는 그런 모습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할리우드든 충무로든.

천재는 아주 극소수다.

따라서 스타들은 자신의 유명세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배우들은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성실하다.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별 태를 안 낸다.

연기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는 배우는 대체로 삼류다.

배우는 남들이 자신의 대본을 함부로 들추는 걸 싫어한다.

자신의 메모가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배우의 대본은 일기장 같은 거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들어있다.


‘진짜 발견은 리보비치 마시코프야.’


세르비아 민병대 저격수로 출연하는 리보비치 마시코프는 매력적인 배우였다.

89년부터 주로 무대공연을 해 오고 있는데, 연기와 연극연출을 병행하는 지적인 남자였다.

이전 삶에서의 악당 캐릭터 잔상이 워낙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직접 만나서 작업을 하게 되니 번듯하고 품위 있는 정통 러시아 배우의 풍모를 보였다.

한껏 목소리를 깔고 다이얼로그를 읽고 있는 리보비치 마시코프를 보며 류지호가 내심 웃었다.


‘깨는 것은 자학개그지. 킥킥.’


러시아 출신답게 술도 잘 마셨다.

말술이 따로 없다.

여배우 가운데 눈에 띠는 여성은 제시 맥티어(Jessie McTeer)다.

185Cm의 신장을 자랑하는 영국 출신의 배우다.

이제 30대 후반에 접어들었는데,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다.

<Remo : The Destroyer>에서는 모국어인 영어보다 세르비아어를 더 많이 구사해야 했다.


“베라, 제시의 세르비아어는 어때요?”


류지호가 묻자 언어 코디네이터가 즉각 대답했다.


“괜찮은 편이네요. 준비를 잘 해 왔어요.”


류지호는 제시 맥티어의 프로다운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주요 배역들 외에도 인상적인 단역들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 수잔 베일리의 추천 덕분이다.

충무로와 비교해 수십 배의 배우 풀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다.

미국은 물론 영어권 국가를 모두 아우르고 심지어 제3세계 출신 배우들도 넘쳐난다.

필요하다면 어떤 나라에서도 배우를 불러올 수 있다.

류지호가 러시아와 체코에서 배우를 캐스팅한 것처럼.

워낙 배우풀이 크고 넓어서 캐스팅 디렉터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자식... 예뻐졌네.’


<Collapse>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호주 출신의 앨리나 와츠(Alina Watts)를 영국의 정보기관 MI6 요원으로 캐스팅했다.

간만에 보는 그녀는 카메라 마사지를 받아서 그런지 전보다 더 예뻐져 있었다.

발랄하고 통통 튀는 느낌에서 침착한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Collapse> 출연 후로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다보니 그녀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신인 특유의 과장도, 나쁜 버릇도 없이 아주 매끄러웠다.

정확한 발음.

예전보다 더 풍부해진 성량.

굳이 표정을 보지 않아도 대사만으로 감정을 전달했다.


‘한국에도 New York The Actors' Studio 같은 전문적인 연기학원을 만들어야 하려나....’


류지호의 눈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것도 있지만,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대학은 물론 사설 연기학원의 연기 수업 수준도 선진국에 한참 모자랐다.

스스로 연기론도 정립하지 못한 이들이 교수랍시고 학생에게 어설픈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의 현실이다.

좋은 배우가 넘쳐났던 시기를 경험하고 과거로 와서 그런지, 이 당시 충무로의 현실이 너무나 답답한 류지호다.

<Remo : The Destroyer>는 조단역 캐릭터에게까지 복잡한 심리묘사를 요구하는 영화는 아니다.

주인공들과 부딪치는 장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드라마와 서스펜스가 살아나는 법.

누구나 납득할 만한 연기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은 배우의 기본이다.

그러니 말 한마디 주고받고 빠지는 배우라고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들어야 한다.

암튼 앨리나 와츠는 나날이 쓸만한 배우로 성장하고 있다.

본인이 키운 것도 아닌데 류지호는 괜히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Collapse>에 기용한 것은 즈웍 감독이다.

발굴한 것은 류지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키운 것에 일조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하하하.

호호호.


힘 빼고 가볍게 읽어나가면서 서로 맞춰보는 수준이지만, 수시로 웃음이 터졌다.


‘윌리와 오 선배 티키타카가 좋아서 빵빵 터지네.’


물론 table-read에서의 반응을 믿고 낙관하면 큰일 난다.

류지호가 바나나 껍질만 까도 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건 그거고. 분위기가 예상보다 좋네.’


류지호는 지금의 분위기가 몹시 기꺼웠다.

앞으로 진행될 촬영에서 그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떤 연기가 최상인지는 누구도 쉽게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기 중에서 틀린 연기도 분명 존재한다.

잘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본의 맥락, 캐릭터, 상황, 감정 등을 잘 못 분석해서 펼치는 연기가 틀린 연기다.

그래서 어떤 감독은 너무 뛰어난 배우나 지적인 배우를 선호하지 않는다.

배우의 자신감과 지성으로 엉뚱한 영화 해석을 내놓기 때문이다.

배우의 연기가 영화를 망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첫째가 감독의 무능 때문이다.

그 다음이 배우의 독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 내 영화에서 그런 배우를 만나지 않은 건 다행이야.’


지금까지 배우 부분에 있어서는 운이 좋은 편이다.

뜨기 전 밴틀리 애플렉을 저예산 영화에 특별출연 시킬 수 있었고, 예민하게 행동하기 전의 해리슨 노튼과 작업할 수 있었다.

샘 잭슨은 전부터 친분이 있어서 악감정이 없었다.

크리스 워컨 정도가 처음 작업하는데, 그 정도 경력의 배우가 까다롭지 않다는 것도 이상했다.

충분히 감당 가능하고 맞춰 갈 수 있는 수준이다.

table-read는 별다른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파티 타임!”


table-read를 무사히 마친 모든 인원이 선셋가의 클럽으로 몰려갔다.

하루를 통째로 빌린 클럽에서 신나게 놀았다.

류지호가 빌린 것이 아니다.

제작사인 JHO Pictures가 제공한 뒤풀이다.

크리스 워컨이 춤실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류지호는 러시아 출신 리보비치 마시코프에게 한국식 폭탄주를 말아 주었다.

나이가 적고 많음은 중요치 않았다.

다들 잘 놀고 잘 마셨다.

술기운이 올라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돌아 온 류지호에게 앨런 포스터가 다가왔다.

앨런 포스터가 여배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윌리 워커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적당한 시점에 스캔들이 하나 터져주면 좋은데.”


류지호가 물에 젖은 손수건을 탁탁 털며 물었다.


“누구?”

“누구긴. 윌리지.”

“무명이라서?”

“아무래도 그렇지.”


할리우드 제작자의 못된 전통 중에 하나가 열애설 관리다.

영화제작사 홍보부서는 영화흥행을 위해 뭐든지 다 한다.

출연배우의 외부 일정을 대중이 알 수 있도록 은근슬쩍 알려 파파라치 컷을 유도 하고, 적당한 수준의 열애설도 터트려 왔다.

치밀한 계산과 각본, 선전과 조작을 통해 스타들을 관리하고 있다.

할리우드 홍보전문가들은 예외없이 노이즈 마케팅 전문가들이다.

열애설 마케팅이 그 약발을 다 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 홍보에 있어서 자주 써먹는 마케팅 수법이다.


“여자 친구 있을 걸?”

“배우야?”

“아니. 일반인으로 알고 있어.”

“아쉽네.”


피식.


류지호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앨런 포스터를 보며 웃었다.

할리우드에서 선비질 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미국 연예계에서는 마약이나 범죄 스캔들 빼고 연애 스캔들은 큰 문제도 아니다.

유부남을 파경에 이르게 하고 자신이 독차지한 여배우가 버젓이 활동을 하는 곳이 미국의 연예계다.

대중들의 비난까지 관심이라고 생각해 돈벌이로 활용하는 비상식적이 사람이 널렸다.

끝나지 않는 파티는 없다.

신나게 뒤풀이를 즐긴 배우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일을 하기 위해 휴식을 취해야 했으니까.

류지호는 할리우드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고 있다.

억만장자라서가 아니다.

메이저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그가 영화를 통해 만들어가고 있는 경력 때문이다.

단편영화부터 독립영화, 그리고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D-Cinema의 성공까지.

더해 각종 영화제 수상 경력들.

블록버스터를 찍는 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스태프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처음으로 함께 하는 배우들까지도.

적어도 함께 하는 이들에게 류지호는 영화적 재능을 인정받고 있다.


작가의말

시나리오를 스크립트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한국영화에서는 대본리딩으로 할리우드에서는 table-read로 통일하겠습니다. 미국에서의 대본리딩과 한국의 대본리딩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즐겁고 헹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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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The Destroyer. (13) +7 22.12.10 4,149 145 26쪽
362 The Destroyer. (12) +9 22.12.10 3,783 127 26쪽
361 The Destroyer. (11) +9 22.12.09 3,926 146 28쪽
360 The Destroyer. (10) +9 22.12.09 3,758 124 27쪽
359 The Destroyer. (9) +9 22.12.08 3,932 143 28쪽
358 The Destroyer. (8) +14 22.12.08 3,769 132 26쪽
357 The Destroyer. (7) +9 22.12.07 3,945 144 25쪽
» The Destroyer. (6) +10 22.12.07 3,831 131 25쪽
355 The Destroyer. (5) +9 22.12.06 4,094 141 26쪽
354 The Destroyer. (4) +8 22.12.06 3,904 132 27쪽
353 The Destroyer. (3) +8 22.12.05 4,006 142 21쪽
352 The Destroyer. (2) +7 22.12.05 4,025 121 25쪽
351 The Destroyer. (1) +12 22.12.03 4,349 146 26쪽
350 위험으로 내몰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마.... +8 22.12.02 4,311 137 26쪽
349 WaW는 아주 살판났네! +8 22.12.01 4,429 14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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